엄제현_서울올림픽 개막식과 코스모폴리탄②

글: 엄제현

이후 성화 점화가 메인인 공식행사를 지나 삼부, <뒷풀이>가 시작된다. 아나운서 이창호는 첫 순서인 <좋은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처음 세상이 열리고,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지내던 좋은 날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늘에 신비스런 기운 받은 땅의 기쁨을 기리고 하늘의 복을 비는 춤입니다.” 고대 부족들의 제의는 자신이 속한 부족의 종말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을 감소시키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류의 시원사는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규정한 인간중심주의적 인식을 넘어 종들의 생멸을 건 지독한 상잔의 연속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최초의 시간을 좋은 날로 규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 번째는 민족적인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서이다. 태초. 신단수. 고공 낙하하는 패러슈트. 이때 천상으로부터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로 강하하였다는 단군신화를 떠올리지 않을 한국인이 있을까? 좋은 날은 민족의 신화를 현재와 잇닿게 해 세련된 연출을 선보였다. 박정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청명한 하늘 높이 100개의 파라슈트(스포츠용 낙하산)가 점점이 보이면서 마치 강신(降神)하듯 각양각색의 구도로 경기장 상공에 마치 백화처럼 날개를 펼친다. 운동장에서는 여학생 800여 명이 평상복 차림으로 환영한다. 이는 하늘/땅, 남/녀 음양의 만남이었다. 올림픽 오륜마크를 그리면서 내려오는 파라슈터들은 하늘로부터의 강복(降福)을 의미하면서 마치 천사처럼 지상에 사뿐히 내려앉았다.”(박정진, ibid, p.101.) 여기에 더해 강신표는 “아슬아슬하고 박진감 넘치는 고공낙하 시범은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TV가 이 장면을 완전히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했다. 그런데 이 현대적 묘기에 이어 화관무가 펼쳐져 관중들의 긴장감을 풀어준 진행은 특히 깊은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원래 군사 용도의 제트기와 헬리콥터 낙하산 등이 스포츠로서의 고공낙하에 사용돼 평화와 오락용으로 변모한 것은 다름 아닌 올림픽의 이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고 평한다. (강신표,『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적 민족지』, 서울:세창출판사, 2014, p.218.)

어떻게 이런 온건하고 미심쩍은 견해들만을 뇌까릴 수 있는 걸까? 당시 파라슈터는 특전사와 국제낙하산 연맹 소속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특전사들이 속한 기관은 1961년 육군 제1공수특전단 산하에서 ‘특수전교육대’란 명칭으로 발족해 특전부사관 양성, 각종 특수전 교육들을 담당하던 곳이다. 제1공수특전단(1972년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개칭)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가하였고,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여단장 박희도의 명령으로 국방부를 무력 점거하는 등 쿠데타와 군사정권 창출에 동원되었던 전력이 있는 부대로, 전두환 정권의 성립을 도왔으며 전두환 본인이 제1공수특전여단의 여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심지어 이후 등장할 <벽을 넘어서>에는 제3공수특전여단인 비호부대가 비호태권도단이란 이름으로 등장해 격파 시범을 보이기까지 한다. 3공수특전여단은 제7, 제11공수특전여단과 더불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유혈진압 한 부대이다.) 이들이 단군서사의 모티프에 맞춰 등장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화의 아우라를 둘러쳐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던 축축한 전략은 아닌가. 지금 군에 대한 시민들의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너무나도 멋지게 환영할만한 것으로 반전시키지 않았는가. 학계의 지성들조차 여기 동조하여 온갖 현란한 수사들로 상황을 미화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죄악 속에서 탄생한 정권이 신성을 찬탈하고 그 거죽을 뒤집어쓰는 교활하고 음산한 장면을 보고 만 건 아닐까. 오자은은 멀찍이서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그것이 실제로 물리적인 집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올림픽으로 가는 시간은 군부 독재 체제가 얼굴만 바꾼 채 자신의 육체를 연장시킬 수 있는 ‘전도(前途)의 시간’이었다.” “결국 독재 은폐라는 비판의 근거가 사라진 올림픽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은폐할 수 있게 되었다. 전두환 담론이 전두환만 배제된 상태에서 관철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오자은, ibid, 각각 84p, 97p)

개막식이 제1세계의 시선을 획득하기 위해 민족적 외상을 어떻게든 청산하려는 기획이었다는 전제를 상기하면 지금 기술할 두 번째 의미가 앞서 주장한 배의 인식적 전복의 서사와 맞물려 보다 일관성을 띠게 된다. <좋은 날>에 대한 명명의 첫 번째 의미가 민족주의적인 동시에 정권 친화적이었다면 두 번째 의미는 <혼돈>이 시작되며 소급적으로 생성된다. <화관무>가 상징하는 태평성대에 이어 등장하는 <혼돈>에 대한 이창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846명의 출연자들이 세계 60개국의 전통가면 198종류, 838개를 쓰고 나와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창조와 파괴, 모든 인간이 가치와 성격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대립과 분열로 흩어져 난무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념과 인종과 성별의 대립과 분열의 불협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논지가 설득력을 백배하기 시작한다. 태초의 태평성대에서 세계 각국의 탈의 등장과 함께 혼란기로 들어서는 시간이 근현대사의 시각적 재현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서구의 입장에서 제국주의는 세계의 편람을 작성하고 때론 교정하여 질서를 수립하는 시기였겠지만 동양에게 있어선 당대의 인식, 지식, 개념, 과거, 미래 전부를 송두리째 갈아엎는 재앙에 가까운 사태였다. 너희(서구)가 망가뜨린 우리(동양)의 평화롭고 화목했던 시절을 보게 만드는 것.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된 인도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물레를 대비시켰던 간디의 지략과 배다른 형제 격인 이 태도가 <좋은 날>의 두 번째 의미이다. 이후 전개되는 <혼돈>은 우리의 좋은 날을 몽땅 씹어 먹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만든 서구에 대한 보복을 이루기 위해 펼친 천라지망이다.

 

잠실 주경기장 위로 솟은 탈 사진
바바라 크루거, 무제(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1981

<혼돈>의 말미엔 잠실주경기장의 지붕 위로 열 개의 거대한 민속 탈이 갑작스레 등장한다. 이때 우리는 바바라 크루거의 <당신의 시선이 내 빰을 때린다 (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와 동형의 수법이라 할 법한 기교를 보게 된다. 그녀의 작업이 보는 자의 여유롭고 안락한 위치를 전복하고 관람객의 남성성, 여성을 객체로 규정하는 일방적인 시선을 짚어내기 위해 분투했다면 잠실주경기장 위로 우뚝 솟아 둘러쳐진 채로 객석을 바깥에서부터 포위하고 노려보는 민속 탈들은 무대/객석의 명징한 분할로 인해 획득되는 안전한 관람자로서의 보는 위치를 전복하고 관람객 또한 관찰되는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때 민속탈은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가 확립되면서 파괴당한 동양의 시각적 복수 그 자체이다. 세계에 보편적 언어를 부착하는 아담의 권한은 서구에게 있다. 따라서 이브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편은 오직 아담의 의식을 경유하는 길 뿐이다. 그때 이브에게 세계는 이미 굴절된 것이고, 이브는 스스로 세계를 인식하고 재단할 사유 전반을 도난당한 것을 넘어 세계를 빼앗긴다. 탈들은 서구로 표상하는 아담의 권위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고 보복이다. 탈들로 인해 경기장은 공간적으로 더욱 확장되며 무대/객석의 분할을 재차 갱신하고 객석의 보장된 안전을 위협한다. 이 시각적 반전이 일어나는 동안 경기장 내부의 혼란은 점차 질서로 수렴된다. 이윽고 피를 보는 일 없이 시선은 물러난다. 어쩌면 탈은 “너희가 우릴 볼 때, 우리 또한 너희를 보고 있다.” 식의 상대주의적 견해를 지나쳐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것이 새로 쓰는 역사 속에서 (또는 도래할 미래에) 우리가 차지할 위상이다.” 허나 위의 퍼포먼스가 세계를 주재하는 자의 시선은 언제나 전복될 수 있다는 야심찬 경고로 읽힐 수만은 없다. 복수극이 서구중심의 세계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전화되지 않고 역사적 수모를 되갚는 일회성의 시각적 이벤트로 끝나면서 결과적으론 서구의 의식을 역설적으로 내면화할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비서구인이 코스모폴리탄으로서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요구된다. 먼저 그는 서구적 가치를 이해하고 자신의 신체를 사용해 서구의 규범을 재생산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민족적 특색을 개성처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남한은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을 통해 전통을 정초하고 역사를 갱신하여 민족적 외상을 미학적 견지에서 봉합함으로써 비로소 서구와 동화될 수 있게 되었다. 일체의 변화는 우리가 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이라 할 만한 영역에서 달성되었다. 배에 대한 공포를 억압하여 저 밑으로 침전시켰고, 패자의 시선에서 역사를 새로 썼으며, 탈을 통해 공간상의 변혁을 이루며 기존 질서에 울분을 표출하는 광경 일체를 세계가 목도케 하였다.

제24회 서울올림픽 개회식행사에서 굴렁쇠 굴리는 88호돌이 윤태웅군, 출처: 국가기록원

<벽을 넘어서>의 격파 이후 우리는 아직까지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는 순서인 <정적>에 다다른다.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에서 유실되지 않고 여전히 생생한 효력을 갖는 이미지가 두 장 있다면 하나는 성화 봉송 도중에 타죽은 비둘기들이고, 또 하나는 굴렁쇠 소년이다. <정적>은 순서상 무척이나 타당하게 여겨지는데 동양의 순환적 교리에 따르면 파괴(격파) 이후에 올 것은 단연 창조이기에 그렇다. 산고 끝의 출산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텅 빈 경기장으로 굴렁쇠를 굴리며 등장하는 ‘소년’은 이전의 모든 소란과 대비되어 무척 귀하고 소중한, 우리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가치를 표상하는 듯 보인다. 굴렁쇠는 공터가 점차 소실되면서 자취를 감춘 민족의 놀이로, 박정진의 주장대로라면 축제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에로 도달할 수 있던 존재자들의 방편이다.14) 따라서 이 장면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가치가 세계를 쓸어버리는 동안 상실된 마지막 낭만적 이미지를 반추하고 작별하도록 한다. 굴렁쇠의 형태는 동양적인 세계관이 배출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교리를 시적으로 보여주며 (원에 대한 철학적 견해는 누천년이 넘게 기술되어 왔으므로 본지에선 생략하겠다.) 잊혀진 과거의 이미지인 동시에 퍼포먼스 내에서 새로 쓰여지고 있는 역사의 시점에선 지향해야 할 미래적 가치를 나타내는 초시간적인 이미지가 된다. 퍼포먼스와 다시 거리를 두고 현실적 관점과 결부한다면 이 이미지는 서구가 야기한 자본주의적 문제가 동양의 정서를 통해 수선되고 보완될 수 있다는 관념적인 허구의 차폐를 형성하기도 한다. 굴렁쇠 소년의 이미지가 아직도 서울올림픽의 대표적 이미지로 생생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이런 다층적인 의미를 한꺼번에 내포한 상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가며

어릴 때부터 심심치 않게 들어온 비난조의 표현 중 하나는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라는 말이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제대로 된 분별력을 가지기도 전에 그 표현은 나로 하여금 “대체 88년도가 어쨌길래?” 라는 물음을 항시적으로 지니게 했다. 쌍팔년도는 어떤 일이건 주먹구구식으로 밀어붙이던, ‘하면 된다.’는 정신이 응축된 시간이다. 누군가에겐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영광의 시기였을 때가 지금에 와선 씁쓸한 수사로만 남아 전승된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그 탁한 어법 안에 동봉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자본주의가 성장하며 만들어낸 국제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동안 피멍이 든 남한의 울혈이 톡톡 내뱉어지고 있던 것은 아닐까.

혹자에겐 오늘의 텍스트가 터무니없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올림픽과 더불어 국내에 맥도날드와 비엔나 커피 1호점이 들어섰다는 것은 무척 유의미하게 느껴진다. 서구의 대표적인 식생활이 체인점 형태로 점차 뿌리 내릴 때 감각이라는 무매개적 측면에서부터 시작해 일상의 스케치가 변하게 된다. 누구나 알겠지만 패스트푸드점과 커피숍은 단순한 음식점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빠르고 건조한 삶과 부르주아적인 공간의 향유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서구 습속의 내면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의 연속으로 간주하는 건 지나치지 않다. 다른 누군가는 위에서 수시로 비꼰 강신표와 박정진의 견해가 서울올림픽 의의를 이해하는 데에 더욱 부합하며, 따라서 근현대사의 외상에 대한 미적 청산 같은 것은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올림픽공원 내에 김중업이 설계한 평화의 문, 그 중앙에 안치된 성화를 둘러싼 기단에 음각된 서울평화선언은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격려한다. 서울평화선언은 왼쪽부터 프랑스어, 한국어, 영어로 새겨져 있는데 대체 왜 평화선언이 그 두 언어로 쓰여 있단 말인가? 그들의 문자로 쓰였다는 것은 그들을 겨냥하여 쓰였다는 것과 동음이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일으킨 두 국가를 대상으로 평화가 낭독되고 있을 때 서울올림픽과 근현대사와의 스산한 연관에 대한 물음을 그칠 수가 없다.

서구중심적 시각성을 일시적으로 교란하는 제의를 통해 남한은 한순간 충천하는 자긍심에 고취되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제까지 없던 확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변혁 없는 자긍심은 언제까지고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 남한의 욕구불만은 “두 유 노 김치?”라는 셀프디스화된 질문이 들려주는 것처럼 언제나 서구의 시선에서 자신의 위상을 줄잡으려 한다. 최근에 쏟아지는 방송들을 보면 남한의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이 유럽에서 공연을 하고, 남한의 음식을 팔고, 남한의 뷰티를 판다. 또한 외국인의 시점에서 남한의 풍경을 구석구석 둘러보게 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가치를 가졌는지 확인받고자 한다. 이는 언제까지고 유예되며 달성될 수 없기에 강박증자의 반복적 행위처럼 지속된다. 물론 더 싸늘한 불행은 이 총체적 비극에 무감각한 현실 그 자체이다.


14) “‘축제의 존재론’은 축제에 참가한 ‘축제 속의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성의 발로로 혹은 자연의 본성을 회복하여(닮아서) 종합적인 예술가 특성을 가진 무당이 되는 사건사태를 말한다.”…“‘축제적 인간=예술적 인간’이야말로 문명이 구축한 권력적 인간과 기계적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 원시적 인간, 본래적 인간으로의 가능성이다.”…“이제 철학은 새로운 화두를 던져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놀이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나는 존재한다. 고로 놀이한다”라고 말해야 한다.”(박정진, ibid, 각각 p.167. p.172. p.187) 제반의 사유는 자본주의의 선전 안에서 놀이가 얼마나 유용하게 도구화되어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처절한 실수이다. 신자유주의에 이르러 폭증하는 메가 이벤트는 모든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만들려고 작심한 듯 개시된다. 하지만 영화, 뮤지컬, 락 페스티벌 등에 막대하게 투입되는 자본은 그만큼의 수익을 보장할 흥행을 위주로 작품을 제작하고 라인업을 선별하도록 종용하며 내용상의 질보단 수익성을 위한 모색에 치중한다. 정크화한 놀이는 시민들의 보편적인 여가가 되어버리는데, 따라서 대중문화의 다양성은 초국가적으로 실종된다. 이런 비극을 사유하지 않고 놀이 안으로 침잠하는 것이 존재라면, 존재 따위는 멸절되어야 한다. 축제적 인간이 원시적 인간으로 회귀하는 자연성의 회복이라고 믿는 사유는 놀라우리만치 해맑아 보인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고대인이 성문을 열어 소리를 내는 경우는 성교와 집단노동 두 상황에만 발생하기에 노동은 성교에 상응하는 쾌락을 담보했다고 한다. 즉 놀이와 노동의 분리가 없는 일치상태가 원시성이라면 원시성이다. 반면 오늘날 축제는 즐기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형식적 난제를 제쳐두고 놀이하는 인간 모델을 그저 권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올림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비극에 대해 관심 없이 축제에 몰두하는 주체를 독려하는 것은 지배에 동조하는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들어낼 뿐이다. 이런 인간은 차라리 유아적이다. 가련하게도 박정진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기 위해 몰두한 하이데거의 유다이다. 뤼디거 자브란스키가 작성한 하이데거 평전의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자들 또한 ‘세인sein’이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거대한 구성물, 즉 그들의 가치 세계와 형이상학적 배후 세계들에서 스스로를 고정시켜 살아가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 비춰본다면 말이다.

 

* 「서울올림픽 개막식과 코스모폴리탄」에서 엄제현은 ‘화합과 전진’이라는 서울올림픽의 테마와 마찰 없이 전개된 서울올림픽 개막식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이 과정에서 엄제현은 87년 민주화와 88년 올림픽으로 이어지는 성공적인 중산층 변혁서사에 내재된 불화를 탐색하며, 남한이 세계에 상연되는 자아를 연출하는 적극적 기회로 삼아 제3세계 국가로서의 자기-이미지를 갱신하였다는 기존의 도식적인 이해를 넘어, 그와 같은 전환을 이루기 위해 선결적으로 요구되는 근현대사 시기의 민족적 외상을 미적으로 청산하는 시도를 강구했다고 주장합니다.

* 본 원고는 정강산의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1편, 2편, 3편)과 함께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된 기획입니다.

  1. 엄제현_서울올림픽 개막식과 코스모폴리탄①
  2. 엄제현_서울올림픽 개막식과 코스모폴리탄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