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_퍼포먼스, 혹은 전시에 대한 (비)웃음

 

《00min00sec vol.2》 2019, 전시 전경, 사진: 강신대

퍼포먼스의 형식에 대해 생각한다. 미술에서 퍼포먼스는 1950-60년대를 기점으로, 극장 기반의 전통적 개념인 공연과 달리 미술의 형식적 제한을 넘어서고자 하는 미적 실천으로 등장했다. 퍼포먼스는 작품의 결과와 완성에 대한 엄격한 태도에서 벗어나 작업의 과정에서 감지되는 시간과 행위에 방점을 두면서 시작된 형식이다. 그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체의 출현과 ‘지금’, ‘여기’의 경험에 값을 매기는 실황의 성격으로, 보는 사람이 작품과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점. 그러나 신촌극장에서 올라간 이 퍼포먼스(혹은 전시)는 0분 0초, 사실상 없을 시점을 제시하며 없는 상태로 있는 시간을 표방한다.

퍼포먼스, 전시 두 카테고리를 모두 끌어안고 있는 이 움직임들은 상정하기 어려운 시제만큼이나 불안전한 서사를 가진다. ‘극장’이라는 건축적 장치를 배경으로 한 움직임들이 그리는 서사의 구조를 살펴봐야겠다. 이는 1) 언어화되지 않는 감각을 회화의 형식으로 이어오던 김겨울의 퍼포먼스, 2) 이미지의 유통 방식과 조건을 영상의 문법으로 풀어온 안광휘의 퍼포먼스, 3) 그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간 전시, 그리고 4) QR코드로 접근 가능한 웹 전시1)로 총 네 가지 구성을 갖춘다. 네 가지 움직임은 표면상 퍼포먼스 또는 전시로 표명되지만, 이 구분을 뒤집어볼 수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주장해보면 김겨울과 안광휘의 퍼포먼스는 하나의 전시가, 이들 사이에 놓인 전시와 웹 공간의 만남이 일종의 퍼포먼스가 된다. 그리고 이 주장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문장이 그 의미를 정하지 않듯, 개별적인 네 움직임이 하나의 자장 안에서 논의될 때 타당할 것이다. 그럼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분리된 무대와 전시를 개별적으로 묘사하고 종합해보자.

Part.1 김겨울 공연 장면, 안무: 임은정, 출연: 김지민, 김채은, 이시현, 사진: 강신대

#1. (시간이 감춰진) 무대

신촌에 위치한 한 극장. 극장으로 들어서면 엎드린 사람 위에 엎드린 사람, 그리고 그 위에 물구나무의 자세를 취한 사람 총 3인이 뭉쳐있다. 극장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객석이 따로 마련되지 않은 이곳에서 보는 이들은 각자에게 편안한 자리를 찾아 정방형 공간의 모서리로 등을 진다. 꾸덕하게 뭉친 신체들은 물구나무선 부동의 상태를 유지하고, 보는 이들은 퍼포먼스가 시작된 것인지 두리번거린다. 낮은 천장에서 비추는 뜨거운 조명, 그 아래 정지된 신체의 무대는 마치 소리를 금지한 것처럼 고요하다. 멍하니 정지된 신체를 바라보다 지루함을 감지할 즈음 물구나무선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한 듯 바닥으로 아주 천천히, 야금야금 무너진다. 김겨울은 회화를 주요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며 ‘이미지의 사이, 혹은 그 뒷면’을 탐구해왔다. 이번 무대는 안무가 임은정이 김겨울의 회화를 코레오그래피로 번역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번역의 과정은 단순한 형식상의 이동이 아니라 김겨울이 갖춘 회화적 태도, 또는 조건에 대한 신체적 전환으로 보인다. 이는 퍼포머들의 신체 사이, 움직임과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떨림과 진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회화가 운동하는 풍경으로부터 그 시간과 대상을 캔버스에 정지시키는 매체라면, ‘행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상이 동작할 때 부여되는 단어다. 하지만 협소한 무대 위에 퍼포머와 관(람)객이 나란히 오른 탓일지, 그 좁은 간격은 부들대는, 혹은 버벅대는 신체의 떨림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신체의 부자연스러운 진동은 마치 동영상에서 프레임 장수가 부족해 행위가 끊어지고 늘어지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말하자면 신체는 어색한 움직임으로 하여금 정지와 재생을 반복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정지한 순간에 출현한 이미지가 신체의 운동을 삭제하는 듯 회화의 시간을 상기시킨다. 일순간 느린 움직임은 멈추고, 몸이 벌떡 일어나 빠르게 공간을 배회한다. 두 가지의 속도를 가진 하나의 몸은 행위를 최소화하며 시간의 흐름을 멈추거나, 또는 그 정지로부터 속도를 추동하면서 시간을 재생한다. 무대는 이 속도의 차이로 제시간을 감춘다. 뜨거운 조명 아래 관(람)객의 상기된 얼굴만이 행위가 끝났음을 알린다.

Part.1 김겨울 공연 장면, 사진: 강신대

#2. (시간을 늘리는) 무대

블랙아웃 된 스크린. 그 위에 0.1초 단위의 시간이 무대 위 신체를 바쁘게 쫓아내며 흐른다. 스크린 위에 적힌 ‘Intermission’이라는 단어가 중지의 시간을 표지하며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사이를 가로지르는 무대를 마련한다. 약 10분. 관(람)객은 자유롭게 일어나 10분간 퍼포먼스의 경험을 휴지한다. 휴식 시간이 10초가 남았을 즈음 카운트다운 목소리가 울린다. “텐, 나인, 에잇, 세븐….” 관(람)객은 서둘러 제자리를 찾아 시작을 기다린다. ‘00:00:00.00초’가 되었을 때, 스크린은 다시 마이너스로서 시간을 셈한다. ‘-0.01, 1.01….’ 인터미션이 가리키는 휴지 된 시간은 그렇게 늘어진다. 그들이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파트 2에 해당하는 안광휘의 퍼포먼스가 이미 시작된 것.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작업은 신체의 등장을 기대하게 하지만, 몸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전 무대에서 김겨울이 조용한 ‘몸’을 보여줬다면, 안광휘는 아주 수다스러운 ‘몸짓’을 무대 위에 올린다. 이 몸짓은 벽면의 스크린과 극장 중앙 모니터, 그리고 그 앞에 소품처럼 놓인 지구본 총 세 가지 겹을 가진 무대 위에서 드러난다.

우선, 퍼포먼스의 이름으로 재생되는 영상에서 출처를 알기 힘든 소스 주소가 스타워즈 오프닝 장면을 따라 장엄하게 올라간다. 안광휘는 이 소스를 배경 삼아 스크린 앞에 놓인 모니터 속에서 독백한다. 독백이 끝나면 애니메이션 ‘라이온킹’의 한 신(Scene)이 편집되어 스크린에 투사된다. 공연의 문법을 빌어 영상을 제작한 그는 스크린과 모니터를 오가는 이 이미지들을 일종의 무대 장치로 삼는다. 텍스트, 내래이션, 영화 푸티지가 몇 가지의 층위로 분산되어 나열된 후 응당 퍼포먼스에서 기대하는 ‘신체’가 등장한다. 허술하게 펼쳐진 그린스크린 위로 한 인물이 윗몸일으키기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고, 관(람)객은 영상에 기재된 초 시간으로 운동의 지속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움직임은 어떤 흐트러짐도 없이 약 5분간 유지된다. 보통 체격의 성인 남성이라면 1분도 지속하기 힘든 운동을 5분가량 안정되게 보여주는 장면은 영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관(람)객을 속이려 한다. 영상에서의 신체, 이미지 안에서의 몸을 제시하는 그의 방식은 신체의 한계와 지속을 시험하고, 그 몸짓을 시끄럽게 전시한다.

Part.2 안광휘 공연 장면, 사진: 강신대

#3. (무대에 올라오거나 숨겨진) 전시

 <00min00sec vol.2>는 퍼포먼스 ‘전시’다. 여타 퍼포먼스 형식을 다루는 전시와 조금 다른 것은, 퍼포먼스 행사를 전시의 우선으로 내세운다는 점. 시간을 약속하고 한데 모여 관람하는 퍼포먼스는 열흘 정도의 기간 동안 오프닝 당일 5시, 그다음 이틀 동안 5시와 7시 총 다섯 번 진행된다. 전시와 퍼포먼스가 한 장소에서 이뤄진다고 할 때 보통의 전시가 전시 일정 사이에 행사의 형식으로 그것을 끼워 넣는 반면, 본 전시는 퍼포먼스 사이에 전시를 배치한다. 그러니까, 관(람)객은 퍼포먼스가 있는 날이면 전시 오픈 시간인 2시부터 5시까지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철수된 전시는 그날의 퍼포먼스가 모두 끝난 뒤 다시 설치된다. 이는 작품이 놓인 풍경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다른 퍼포먼스 전시들과 차별되는 또 다른 지점이다. 여러 번 진행되는 설치 탓인지, 두 번 이상 전시장을 방문한다면 작품의 자리와 방향이 묘하게 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모든 작품이 무대 조명에 의해 개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미세한 변화가 두드러진다. (설사 위치와 각도, 방향에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았을지라도) 같은 장소에서 여러 번 움직이는 전시는 자체로 어떤 움직임을 상상하게 한다.

한편, 높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온 관(람)객은 극장의 무대 위에 올라온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에 또 다른 전시를 지나친다. 그들이 입구에서 지나간 것은 QR코드로 접속할 수 있는 웹 전시다. QR코드로 인해 신촌극장의 장소는 2018년에 개설된 <Hand-Bridge: 00min00sec> 웹 공간과 연동된다. 이 전시는 웹의 특징상 쉬운 접근성에도 불구하고 URL 주소로 공유되지 않으며, 오직 QR코드로만 접근 가능하다. 이 때문에 관(람)객은 기획자가 마련한 ‘오픈 장소’로 몸을 이동해야 전시를 볼 수 있다. 움직이는 작품을 선보이는 ‘물리적인’ 전시와 작품을 묶어두고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상적인’ 전시의 만남이 극장의 무대 위에서 만난다.

김겨울, <inhale>, 2019, 캔버스에 유채, 40x20cm, 사진: 강신대

이 모든 것에 대한 (비)웃음

전시는 김겨울과 안광휘의 행위를 퍼포먼스라고 칭한다. 행위는 자체로 아무 의미도 획득하지 못한다. 묘사와 언어가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김겨울과 안광휘의 움직임을 어떻게 명명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할 것이다. 이때 앞서 주장한 것처럼 이들의 행위를 묶어 하나의 전시,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전시를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00min00sec vol.2>는 없을 시간에 대한 전시다. 혹은 하나의 전시 안에 여러 무대를 교차시키면서 정박하지 않을 장소를 찾는 전시다. 전시와 전시 사이의 시차, 무대와 무대 사이의 움직임을 전면화하는 본 전시는 계속해서 비껴가는 무언가를 제시한다. 이는 전시의 형식에서뿐만 아니라 무대의 분위기에서도 살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웃음’을 말해보자. 김겨울과 안광휘의 움직임은 (각기 다른 의미에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먼저 김겨울 파트의 퍼포먼스를 다시 떠올려보면, 김겨울의 작업에서 희극성은 행위와 관(람)객 사이에 흐르는 경직성에서 출발한다. 마치 멸균실에 들어온 것처럼 정제된 분위기가 감돌고 관(람)객에게는 작은 소음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 것만 같다. 특히 극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무대에서 몰입감을 고조시키려는 듯이 ‘소리 없는 소리’를 송출하고 있다. 그러나 주택을 개조한 극장의 특징 탓, 방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공간에 침입하는 소음은 경직된 신체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사뭇 진지한 퍼포머들, 그들의 버벅대는 움직임, 이와 의도치 않은 소격 효과를 입은 관(람)객 사이에는 터지지 않는 민망한 웃음이 흔적처럼 남는다. 김겨울이 웃음꺼리가 없는 신체로 웃음 아닌 웃음을 불러낸다면, 안광휘의 몸짓은 말이 많다. 이 때문일지, 김겨울 파트에서 느꼈던 묘한 웃음 포인트와 달리, 안광휘 파트에서는 웃음이 대놓고 터지며, 피식대는 소리가 영상 속 작가의 말소리와 함께 중간중간 맞물린다.

웃음은 언제나 비껴가는 것들 사이에서 성공한다. 그것은 주체가 무방비한 상태에서 출현하며 돌발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무대에선 무엇이 비껴갔나? 사실 동의하기 힘든 그 웃음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웃음과 웃음 아닌 것 사이의 이 모든 (비非)웃음은 전시가 전시로서, 퍼포먼스가 퍼포먼스로서 기능하지 않는 상황에서 출발하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퍼포먼스와 전시 사이에서, 관객과 관람객 사이에서 헤매는 이들에 대한 비웃음이 아닐까.●이민주(쓰는 사람)

 


1)  <Hand-Bridge:00min00sec>은 2018년 웹과 앱을 통해 전달받은 이미지를 재가공하고 공유했던 ‘전시’로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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