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산_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①

 

정강산(독립연구자)

 

“전체는 부분과 같지 않다(…)”

Aristotle, Posterior Analytics, Translated by H. Tredennick, E. S. Forster, Harvard University Press, 1960. p.634.

 

“(…)특수한 이익은 전체의 보존으로 연결된다.”

헤겔, 『법철학』, 임석진 역, 한길사, 2008, p.524.

 

“(…)모든 미적 정립에서 문제되는 존재는 언제나 인간 세계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미학 3』, 임홍배 역, 미술문화, 2002, p.49.

 

“나는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화폐는 만물의 현실적인 정신이다. 그렇다면 그 소유자가 어떻게 정신이 없는 사람이겠는가? (…)화폐는 나의 욕구를 표상의 존재로부터(…)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현존재로 전화시키며, 표상으로부터 삶으로, 표상된 존재로부터 현실적 존재로 전환시킨다. 화폐는 이러한 매체로서 진정한 창조적 힘으로 존재한다.”

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수고』, 김태경 역, 이론과 실천, 1987, pp.116-117.

 

1. 들어가며: 자유낙하 하는 주체에게 토대를 허하라

 ‘앎’과 ‘진리’, ‘참’을 판가름하는 과정에 있어, 확고한 인식론적 기초를 상정하고자 했던 토대주의의 흐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목 이후 대략 이성과 사유에 내기를 거는 데카르트적 전통을 한편으로, 경험과 감각에 내기를 거는 로크적 전통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발전해왔다. 전자가 이성에 정초하여 특정한 명제를 설명하고자 했다면, 후자는 그러한 설명을 경험에 근거 짓고자 했다. 여기서 ‘토대’란 인식론적 정당화, 즉 하나의 믿음은 어떤 방식으로 조건 지워지는가에 대한 답변에 다름 아니다. 어떤 명제의 타당성을 논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명제들을 호출하며, 결과적으로 어떤 확고한 판단의 지반도 내놓지 못한 채 끊임없는 퇴행을 거듭하는 것을 중단하기 위해 인간이 필요로 했던 것은 모종의 기초였을 것이다. 한편 판단과 믿음을 위해 절대적이고 정태적이며 위계적인 근간을 설정한 이러한 토대주의에 대항하여 정합주의는 인식론적 모델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인정하고자 했다. 어떤 믿음을 그 자체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증거의 원천으로 남겨두는 토대주의와 달리, 정합주의자들은 정당한 앎, 지식, 믿음 등은 특정한 명제들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설명체계의 배치 속에서 조건 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1) 반면 이들에 맞서 회의주의는 믿음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려는 어떤 시도도 완벽히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간주하며, 타당한 앎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이 지점에서 회의주의는 신적 존재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agnosticism)과 공명하게 된다. 회의주의를 제외하면, 한동안 이들 ‘앎’에 대한 대립된 입장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진리와 참에 도달 할 수 있는 나름의 설명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보를 다루는 능력이 평준화되어 모두가 제 나름의 ‘사실’을 전하고, 수초 단위로 새로운 ‘사실’들이 갱신되며, 비합리적인 적대감을 부추기거나 비상식적인 소식을 실어 나르는 가짜 뉴스가 일상 깊숙이 침투한 ‘탈 진실(post-truth)’의 시대에, 혹은 온갖 이미지와 기호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위와 같이 진리와 앎을 대하는 두 가지 경합하는 전통적인 입장은 본격적으로 도전받게 된다.2) 어떤 토대도 무시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어떤 정합성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이 고상한 철학적 사변들은 구조적으로 힘을 잃을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이에 조응하듯 심화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각광받으며 점차 학술 장에서 헤게모니를 쥐어가는 철학적 표현으로서 반 토대주의(anti-foundationalism)이다. 근거의 부재, 상대주의, 계보학, 다원주의, 접합이론, 우연성과 사건 등에 기대어 형이상학과 총체화하는 설명체계에 반기를 드는 니체와 푸코, 혹은 나아가 라클라우와 무페, 바디우의 반 토대주의적 경향은 (기존의)앎의 토대와 기초가 공격받는 상황의 징후이자 동시에 그러한 상황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로서 기능한다. 이들 반 토대주의 철학은 기존 담론이 뿌리내린 모종의 ‘토대’라는 관념을 공격하지만, 동시에 정합주의에 속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히토 슈타이얼은 이렇게 인지적 토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을 ‘자유낙하상태’라는 감각적 유비를 통해 주목했다.

“역설적이게도, 낙하하는 동안 우리는 마치 붕 떠 있는 듯 하다거나, 아예 움직이고 있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낙하란 상관적(relational)이다. 즉, 낙하하면서 향하게 되는 그 무엇이 없다면 낙하를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바닥(ground)이 없이는 중력의 기운이 미미할 것이고, 우리는 하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 주변의 사회 전체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낙하 중인지도 모른다. 이는 완전한 정체 상태로 느껴질 것이다. 마치 역사와 시간이 종료된 듯,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낙하 중에 사람들은 자신이 사물이라 느끼거나 사물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느낄지도 모른다. 보고 느끼는 관습적인 양식들은 와해된다. 모든 균형감각이 흐트러진다. 시점(perspective)은 비틀리고 배가된다. 시각성의 새로운 유형들이 발생한다.”3)

여기서 히토 슈타이얼이 주장하는 것은 토대, 즉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체에게 주어진 것은 낙하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이고, 이에 조응하는 동시대적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편집증적 파악을 가능케 하는 3D 전면도 · 수직성이 강조되는 조감도 · 위성사진 등이 내비치듯, 안정적인 지면에 선 단안시점의 주체를 상정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대항해시대의 측량술과 선형원근법이 만들어낸 시각성 이후의 변화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레 개입하는 위와 같은 재현 장치들은 보다 우월한 자가 아래를 향해 일방적으로 굽어보는 감시의 시선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을 작동시키며 현재의 수직화된 사회관계를 정확히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흥미로운 분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째서 그러한 (새로운 시각성과 공명하고 공모하는)토대 없는 자유낙하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을 기꺼이 긍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많은 새로운 시각성 내에서는 심연으로의 절망적 추락으로 보였던 것이 실제로 새로운 재현의 자유임이 입증된다. 이 점은 (…)우리가 처음부터 근거를 필요로 한다는 관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4)

하지만 우리는 그처럼 자유낙하를 마냥 긍정해야할까? 오늘날의 시각성과 지배적 심상의 특징으로서 ‘자유낙하’에 주목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단순히 토대가 부재하는 상태를 긍정하는 것은 우리가 합의 혹은 공통의 인지적 상태에 도달 할 수 있는 어떤 가능한 단서도 없다는 점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자유낙하’는 파악할 수 없고 규정 불가능한 세계를 마주한, 언어를 잃은 후기자본주의의 정신분열증적 주체가 갖는 심상으로서의 ‘히스테리적 숭고’의 다른 표현이지 않은가.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인지적 공황상태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진리를 위해 초월적인 근본을 전제하는 토대주의와 논리의 일시적 배치만을 강조하는 정합주의의 한계를 넘기 위해 반 토대주의에 머무르는 것은 지나친 우회일뿐더러 옳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이미 가진 공동성과 공통의 의례, 삶의 방식으로부터 앎의 근거를 확보하는 동시에, 그들의 유동성과 가변성을 인지해가며, 그러한 공통의 지반을 실체화시키지도 않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유물론은 토대주의와 정합주의 각각의 한계를 넘어서며 진리를 드러내는 가장 유력한 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5)

일찍이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토대와 상부구조의 변증법적 관계는 한 사회구성체 내부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하여 그것이 끝내 어떤 방향으로 지양되고 전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변화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속에 다른 무엇들과 함께 놓인 대상은 필연적으로 시공을 축으로 하여 서로 관계하며, 그 각각의 상태는 동적이고, 따라서 완전히 닫힌 상태로부터 벗어난다. 서로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태적이고 독자적인 대상들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에 대한 부정성으로서 작용하며, 단일한 대상 내부에도 그것을 더 이상 그것이 아니게끔 하는 절대적 한계이자 가능성이 존재한다. 역사 유물론은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는 작인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파악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로부터 우리가 기대어 사고하고 행위 할 수 있는 공동의 지반이 발생한다는 필연성은 앎의 기초가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변화하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그때그때의 성좌(constellation)로서 구성되는 것이다.6) 즉 역사유물론이 제공하는 기초에 대한 심상은 우리의 앎에 모종의 근거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러한 근거들이 역사의 각 국면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배치들로 인해 항구적으로 실체화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내가 하려는 작업은 바로 오늘날의 토대 없는 자유낙하의 상태를 전체 사회적 관계의 변동의 부분으로서 규명하고, 이를 통해 실체화되지 않는 앎의 토대를 그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그때그때의 사회적 실재의 변화를 그 자신 내부에 각인시킨 단자로서 주목될 것이며, 동시대 예술의 경향성은 금융세계화에, 보다 제한적으로는 법정화폐와 변동환율제에 기대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채택하는 관점은 역사주의적 관점, 혹은 역사유물론의 관점, 또는 정치적 무의식의 관점이다.7) 이러한 관점 하에서 예술은 자율적이지만, 그 자율의 조건을 규정하는 여타의 심급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러하며, 독자적인 실체이지만 전체 사회적인 배치 속에 놓여 있음으로서 그러하다. 예술은 사회의 여느 부문이 그러하듯 이런 저런 이데올로기들에 논리적으로 후행하며, 대체로는 그들과의 공모 속에서, 때로는 그들과 길항하며 그 속에서 스스로를 정초한다. 보다 정확히는, 예술은 그것이 하나의 발화이자 텍스트인 한, 결코 텍스트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서 촉발된 알레고리적 행위로서, 적극적인 해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언어적 유희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로 실재에 대한 능동적이고도 무의식적인 반응이자 하나의 증상적 발화로서 예술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러한 작업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술을 실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족적인 것으로서 간주하게 되는 것으로, 어떤 의미로도 정박되지 않는 주관성의 악무한의 연쇄 속에서 그것을 추상성 속에 용해시켜버리게 된다.

반면 우리의 접근에서 예술은 실재; 객체에 대한 반응이자 실재의 상황과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초월할 수 없는 형식임과 동시에, 실재의 상태 자체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는 충동을 보존하고 있다. 이때 실재란 생산양식과 그로부터 일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회구성체의 시간적 연속성을 지시하며(이러한 연속성은 변증법적이기에, 상징화되기 어렵다), 지속적으로 물질적 과정에 근거하여 재생산되길 요구하는 인간의 삶이 지닌 절대적인 한계로 인해, 마르크스라면 ‘자연과 인간의 신진대사를 매개하는 실천으로서의 노동’이라 불렀을 모종의 구조적 선차성으로 인해 역사의 각 국면마다 형성되는, 현실적인 동일성의 기제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공동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의 준거가 되는, 그럼에도 우리의 개념이 미처 파악하지 못할 지평을 향해 변화하고 있는 세계 자체가 바로 실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금융세계화,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라는 기표 하에 간신히 정박시켜 두었던 실재에 대한 최근의 상 이후, 이를 상대하는 예술은 어떤 형식으로 그 논리들에 반응하고 있는가? 본 글은 객관적인 세계의 변화가 예술 내부에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2. 흔적으로서의 바니타스(Vanitas), 흔적으로서의 헤겔

이러한 접근이 제기되는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근대적 예술의 시원으로 돌아가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상주의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가장 흔한 설명은, 사진기술의 발명에 따라 회화에 남은 공간은 그때그때 세계의 달라지는 모습을 좇는 시신경의 흐름을 기록하는 것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렇듯 1860년부터 약 30년간 지속된 인상주의의 출현은 다소 기술결정론적 맥락에서 독해되는 경향이 있으나, 실은 자율적으로 사고하며 개체로서 그 자신의 생애주기를 직접 관리하기 시작하는, ‘내면’을 갖게 된 개인(혹은 문제적 개인)이 출현하는 징후를 알린 근대소설이 봉건적 신분관계의 종식과 시민사회의 발전 속에서 나타나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8), 근대적 노동 분업이 편재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야만 했던, 모종의 분할을 자신의 내적 논리로 끌어들이며 시각적 자율을 표현한 예술의 최초의 물화 경향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인상주의가 대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적 사회관계와 모더니티의 제요소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닦였던 프랑스에서부터 퍼져나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부르주아적 감각에 기댄 채 ‘산책자’의 시선으로 도시의 풍경을 다루며, 망막에 명멸하는 빛을 주관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대상을 ‘보는 주체’의 감각과 시각을 표현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작품의 구성에서 어떤 필치도 나타나지 않게 억눌렀던 이전의 양식들에 비해, 붓놀림; 필적(brushstroke)의 흔적을 전면화 시킨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포착된다. 여기서 붓놀림은 단순히 여러 장식적 기법 중 선택 가능한 하나의 기술(technique)이 아니라, 봉건적 가치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주관적 심상을 표현하는 개인의 발생, 즉 개인 작가의 탄생을 암시하며, 그러한 주관성의 경향성 자체를 물질화한 단자로서 이해되어야 한다.9)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264x208cm

이때 인상주의는 근대적 시각성의 최초의 표현으로서, 자율적인 내면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시각을 갖게 된 주체의 시점을 나타내며10), 이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심급은 근대적 노동 분업과 이에 따라 분할 되어가는 근대적 사회관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인상주의가 결정적으로 신고전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조류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는 보다 명백해지는데, 신고전주의는 사그라드는 신분제의 귀퉁이에서 여전히 수혜를 누리던 당대의 아카데미화단의 귀족적인 하비투스를 집약한 형식으로서, 신화, 종교, 경전적인 역사적 장면들을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인상주의자들은 신고전주의적 시각에서는 사사로울 수밖에 없는 단순한 도시의 일상적 모습들을 비롯한 풍경들을 자신의 대상으로 설정했으며, 비의식적으로 시각장에서 앙시엥 레짐의 시각적 이데올로기를 청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들이 신고전주의 일색의 살롱전의 심사기준에 맞섰고, 이에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마지못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살롱 낙선전을 허가했으며, 이것이 관에 매개된 아카데미의 살롱을 벗어나 독립화가 전(Salon des Indépendants) 결성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근대적 시각성을 사회적으로 관철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당대의 구시대적 잔제에 대한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의 완전한 확립과 승리를 표지하는 것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는 그런 점에서 전환기의 새로운 계급적 헤게모니를 시각장 내부에서 관철시킨 일종의 지표인데, 여기서 인상주의는 산업자본주의 초기 단계의 문화적 단자로서 간주될 수 있다.11) 그와 동시에 유미주의와 깊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인상주의 특유의 화사함과 빚에 대한 감각적 묘사는 초기 자본주의의 ‘추한’ 배면을 덮어 가리는 동시에 그에 저항하는 시선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예컨대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되는 고흐는 비참하고 칙칙하며 소외된 세계를 사생의 대상으로 설정함에도 불구하고, 준 자율적 공간으로 분화된(혹은 물화된) 예술적 영역에 기대어 그들을 시각적으로 전치시키고 있다. 즉 제임슨의 표현대로, “반 고흐에서 그 내용, 즉 처음의 원재료들은 농사의 비참함과 황량한 시골의 궁핍이라는 전체 대상세계로서, 그리고 고된 중노동이 있는 전체 미발달된 인간세계로서, 가장 잔인하고 위협적이며, 원시적이고 소외된 상태로 전락한 세계로서 간단히 파악될 수 있”으나, “(…)사과나무와 같은 것들은 환각적인 색의 표면으로 터져 나오며, 농촌의 흔한 사물들은 갑자기 그리고 화려하게 빨강과 초록의 색조로 뒤덮이는 것(…)”이다.12)

시간을 좀 더 뒤로 돌려보면, 플랑드르 회화의 풍경화는 가장 즉자적인 수준에서 객체를 ‘미적대상’으로서 관조하기 시작한 주체의 예비적 시점을 증언한다. 이때 주관성은 아직 인상주의에서처럼 색감과 사생될 대상의 외연을 재구성하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근대의 여명기라 불리는, 무역과 상업을 통해 자본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15-17세기 네덜란드와 그 인근 지역들에서 풍경화가 나타났던 것은 보다 심화된 주관성을 표현하는 인상주의가 프랑스에서 출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이 아니다. 당시 플랑드르는 이미 13세기부터 방직공, 방적공, 축융공, 염색공 등의 노동 분업에 근거한 자본주의적 방직산업이 있었고, 여기서 생산은 상인 자본가가 원료와 생산도구를 제공함으로써 완제품을 시장에 팔고, 장인들이 임금을 받는- 원형적인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로서의 선대제를 통해 이뤄졌다. 또한 플랑드르는 직능인 및 상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유럽 교역의 중심지로서, 도시의 권한이 영주의 권한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지역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초기 자본주의적 국민국가로의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13) 요컨대,

“크기는 작았으나 중세에 이들 지역은 강력한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놓여있었고, 바다와 가까운 그들의 유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그들을 바다로 연결해주는 훌륭한 수로 시스템과 잉글랜드 왕국과의 긴밀한 교역관계를 통해, 15세기에 브뤼헤(Bruges)와 겐트(Ghent)의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번창한 양모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양으로부터 생산된 양모는 플랑드르의 방직공에 의해 직조되었고, 시장에 팔리고 다른 유럽의 도시들에 수출되었다.”14)

페테르 루벤스, <플랑드르 축제 장터>, 1635~1638, 149×16`cm, 목판에 유채

이러한 조건 위에서 플랑드르의 풍경화는 점차 발전되어온 농업에서의 생산성증가가 보다 많은 잉여를 만들어내고 농업 자체의 과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장 판매와 장거리 무역 등의 상업적 유통의 과정을 확립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삶과 신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연 자체가 미적 방식으로 관조될 수 있는 시기의 시선을 드러내며, 전원의 풍경을 고된 노역의 장소로서 보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의 시대적 시선을 표지한다. 일찍이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가 지적했듯, 풍경은 역사적 산물이며, 상상의 공간이자 완벽함의 상태에 있는 어떤 전체성에 대한 상징이다.15) 농부들은 (심미적)풍경을 모르며, 생트빅투아르 산(Sainte Victoire)을 보는 화가의 시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곳을 본다는 세잔의 통찰은 풍경화의 역사적 조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16) 요컨대 벨기에 태생의 작가 루벤스의 「플랑드르 축제장터(Flemish Kermis)」(1630), 「무지개가 있는 풍경(The Rainbow Landscape)」(1636)은 이미 땅(land)이 아니라 풍경(landscape)을 인식하게 된 시점에서의 보기의 방식을 내보인다. 자연과 문화가 분리된 조건, 즉 비로소 벗어날 수 없는 제2의 자연에 살게 된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땅’을 초과하는 무엇이다. 그러나 여기서 풍경은 그 자체로 이미 유토피아적 열망을 투사하는 장소로서 조명된다. 넓은 시야로 포착된 북적거리는 시골마을의 연회 장면은 모종의 유기적인 집단성과 공동성을 체화한 이들의 세계를 드러내며, 밝은 표정으로 농부들이 거니는 경작지와 숲 너머로 무지개가 펼쳐진 전원의 모습은 돌아갈 수 없는 대문자 자연에 대한 갈망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들이 묘사된 기법상의 지표는 어떤 집단적 삶의 세계, 자연으로의 회귀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 또한 말해준다. 플랑드르 유파는 인상주의와 마찬가지로 ‘빛’의 묘사에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였으며 색의 농담에 의해 공간감을 표현하는 대기원근법(aerial perspective)과 선 원근법 등에 근거하여 대상을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묘사했는데, 이는 각각 점차 심화되어가는 자본주의적 물화에 조응하여 자율을 확보해가는 시각적 감관과 예술, 그리고 측량술과 항해술 등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합리화 되어가는 주체의 시선에 대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17) 한편 플랑드르 회화와 비슷한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등장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 또한 어떤 생산물이 그것이 지닌 본래의 쓰임새와 무관하게 미적 방식으로 관조될 수 있는 시기의 시선을 드러낸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에 사물은 바니타스 정물화에서처럼 번뜩이는 매혹적인 형상으로, 혹은 음험한 죽음으로, 또는 생의 덧없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나타날 수가 없다. 요컨대 직접적인 소비와 관계없이 존재할 수 있는 잉여가 존재하고, 재화가 그 자체를 초과하는 의미를 갖게 된 상황에서야말로 오브제들은 바니타스 정물화와 같은 방식으로 ‘보일’ 수 있다.

피터르 클라스존, <바니타스 스틸라이프>, 1625, 29x34cm

그런 점에서 이 작업 경향은 인간이 점차 심화되어가는 상품의 세계를 마주하는 대가로서, 신의 보호와 영생에의 약속을 버리고 죽음을 직시해야하는 세계에 접어들고 있는 상황을 표지하는 흔적이자, 점차 사물에 형이상학적 시선을 투사할 수 있게 된 주체의 심상을 내보이는 역사적 지표이다.18) 또한 이는 베버적 의미에서의 탈주술화와 합리화의 미술적 흔적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태생의 작가 얀 다비즈 데 헴(Jan Davidsz de Hem)의 「디저트가 있는 책상(A Table of Desserts)」(1640)은 아마도 동방과의 무역으로부터 조달해온 온갖 종류의 과일들과 이국적인 접시들, 악기 등이 묘사된 정물화로, 그 오브제들의 표면은 신비로울 만큼 번뜩인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것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언급한 바 있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나는 ‘부(wealth)’이자, 세속성 자체이다. 즉 바니타스 정물화는 죽음에 대한 천착을 한편으로, 어떤 부족함도 없는 신비롭고도 풍족한 상품들의 (탈주술화된, 그러나 동시에 주술화된)세계의 모습에 침잠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적 계기를 담지 한다. 데 헴의 시선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이미 도래한 것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플랑드르 유파의 풍경화와 바니타스 정물화는 중상주의적 시초축적의 특수한 문화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2편에서 계속)

*본 원고는 엄제현의 「서울올림픽 개막식과 코스모폴리탄」(1편2편)과 함께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된 기획입니다.

* 연재 링크

  1.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①
  2.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②
  3.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③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전문 다운로드 링크

 


1) 예컨대 헤겔이 ‘진리는 상론되어야 하며, 상론의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고 얘기했을 때, 그는 정합주의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인식론과 신학뿐 아니라 실재론을 비롯한 과학철학 전통, 나아가 경제학에서도 토대주의와 정합주의의 대립은 중요한 지적 분기로서 추적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김광수, “현대 과학철학 및 경제철학의 흐름과 스미스의 과학 방법론에 관한 연구”, 한국경제학회, 『경제학 연구』 62집 1호, 2014. pp.133-170.

2) ‘탈진실’의 조건은 으레 SNS를 비롯한 각종 기술매체상의 발전이 지닌 위상과 관련하여 논의되나, 나는 그 이외에 냉전 이후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환경과 신자유주의의 전지구적 관철을 탈진실적 국면의 주요 작인으로 셈하고 싶다. 그것이 바람직했든, 그렇지 않든, 적대의 투명성을 가정할 수 있었던 냉전 이데올로기의 쇠퇴와 유토피아적 장소의 상실은 한편으로 냉소주의와 탈정치화의 심화를 종용했으며, 글로벌 가치사슬 자체를 재구조화시킨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적대의 언어가 상실되거나 최소한 굴절되는 계기를 열어젖혔다. 소련이 몰락한 직후 유고슬라비아에서 발생한 종교적, 인종적 대학살, 혹은 IMF의 약탈과 독재자 모부투의 실정 이후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콩고에서 벌어진 끔찍한 마녀사냥을 생각해보라. 거대서사를 불신하는 소서사의 대두라는 차원에서, 혹은 규정적 부정을 대체하는 절대적 부정의 대두라는 차원에서, 냉전의 종언과 자본주의의 승리, 규정(부정)의 불능상태로서의 탈진실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마이크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 김정아 역, 돌베개, 2007, pp.242-252.

3)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역, 김지훈 감수, 워크룸프레스, 2018. pp.15-16.

4) 위의 책, pp.36-37.

5) 한편 이러한 양자의 한계를 넘어설 대안으로 장하석은 과학철학의 전통에 충실하게 다원주의적인 진보적 정합주의를 내세운다. 그에 따르면 과학을 비롯한 일련의 믿음체계란 인간의 인식이 지닌 절대적 한계로 인해 항상적인 수정(revision)을 요청하기에 다원주의적이어야 하며, 믿음의 근거가 되는 일정한 기준은 그러한 변화요구에 조응하기 위해 정합론을 따라야하고, 실재에 대한 반복적인 파악 시도는 진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장하석, 『온도계의 철학: 측정 그리고 과학의 진보』, 오철우 역, 이상욱 감수, 동아시아, 2013. p.431, 447. 생산 개념을 중심으로 독해된 역사유물론은 토대주의와 공명하는 듯 보이나, 섹스, 젠더, 생태, 인종, 계급 등 실재의 상이한 심급들의 배치와 그 역학들을 역사의 한 국면에서 동적인 것으로서 규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정합주의와도 공명한다.

6) 이런 측면에서 벤야민의 성좌개념은 우연성을 실체화하여 이미 존재하는 체계의 규정력을 부당하게 벗어나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우연적 배치가 필연적인 준거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우연성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벤야민이 ‘각 요소들을 하나의 점으로 삼아 성립하는 이념이야말로 영원한 성좌’이며 이러한 이념은 “의미 있는 병존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총체성”으로서, 현상을 독립적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구제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이에 대한 심증을 굳힐 수 있다. 이는 성좌 개념에 대한 서동진의 독해에 빚지고 있다. 앞서 적시한 벤야민의 주장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김유동, “성좌: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원천』의 서술구조”, 『독일어문화권연구』 Vol.14, 서울대학교 독일어문화권연구소, 2005. pp.109-136.

7) 나는 여기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서 전개된 예술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 빚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프레드릭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 이경덕, 서강목 역, 민음사, 2015. 특히 1장 ‘해석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8) 봉건적 신분관계와 신의 영향이 헤게모니적으로 존재하는 한 인간은 자신을 ‘개인’으로서 정립할 필요가 없으며, 공동체 혹은 사회와의 괴리 속에서 세계로 환원 될 수 없는 고유한 ‘내면’을 반추하며 화해를 도모할 필요 또한 없다. 이때 인간은 주어진 신분이 이미 결정지어 준 삶의 경로를 따라 공동체의 습속을 준수하며 살면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면과 생애주기는 전적으로 근대의 발명품이며, 근대 소설의 핵심 테마인 개인과 사회의 갈등과 모순 또한 ‘사회’가 그 자체 국가의 관리 및 정치의 대상이 됨으로써 인간들의 의지로부터 자율적인 힘으로 전화하게 된 근대의 특정적인 테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총체성의 회복을 핵심과제로 삼은 루카치의 작업의 주요 조건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김경식 역, 문예출판사, 2007 ; 프랑코 모레티, 󰡔세상의 이치󰡕, 성은애 역, 문학동네, 2005.

9)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는 James D. Herbert, Brushstroke and Emergence: Courbet, Impressionism, Picass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Ltd, London, 2015.를 참고하라. 여기서 허버트는 고흐에서부터 쿠르베, 마네, 모네, 쇠라, 피카소 등의 작품을 검토하며, 특히 19세기 후반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에서 전면화 된 붓 터치의 흔적을, 이후의 숱한 미적 갱신들을 예고하는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간주한다. 즉 19세기 중후반을 기점으로 점차 두터워지는 붓 터치; 필치는 미적 표현의 결정적인 특이점으로서, (과거의)제도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적 작가”, “강한 주관성”, “자아의 지표”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클라크(Kenneth Clark)는 세잔의 시각적 성취로부터 큐비즘의 출현 조건을 본 바 있다. 이는 Kenneth Clark, Landscape into Art, Beacon Press, Boston, 1961. pp. 121-127.를 참고하라). 우리는 허버트에 기대어 모더니즘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스타일의 갱신’은 바로 이러한 주관성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고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적 작업들을 데카당스로 규정하고자 했던 루카치의 시도는 이해할 만한 것인데, 일부 모더니즘 작품들의 탐미적 경향은 이미 19세기에 대두된 위와 같은 부르주아적 주체 모델의 등장으로부터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동시에 ‘추한 세계’에 맞선 심미성을 통해 유토피아적 충동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 생산양식의 필연적인 규정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사유물론의 설명력을 증명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10) 우리는 대부분의 미술사가들을 따라 모더니즘 미학의 효시를 시기상으로도 인상주의에 앞선 리얼리즘에서부터 셈해야 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출발점이 리얼리즘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리얼리즘과 인상주의의 가장 심원한 차이는 ‘주관성’을 예술의 형식 자체에서 상연시켜낸 인상주의의 특징에서 연원하며, 이러한 강력한 주관성의 계기는 인상주의가 본격적인 모더니즘이자 현대미술의 효시로 여겨지는 가장 주된 근거를 제공한다. 한편 리얼리즘 역시 다른 각도에서 근대적(자본주의적) 물화의 계기를 증언하는데, 예컨대 일찍이 클라크(T.J.Clark)를 비롯한 많은 논자들이 주목했듯, 쿠르베의 작업 「돌 깨는 사람들」(1849), 「오르낭의 매장」(1850), 「시장에서 돌아오는 플라지의 농부들」(1850)등에서는 각각 교외의 육체노동의 고됨과, 하나의 종교적 제의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산만하고 분산된 이들의 시선들, 유기적인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이미 개인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시골의 모습 등이 나타난다. 이는 자본주의적 파편화와 소외에 대한 시선 자체를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한 리얼리즘 미학이, 그러한 소외를 덮어 가리고자 했던 유미주의의 거울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James R. Lehning, Peasant and French : Cultural Contact in Rural France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특히 2장 “The French nation and its peasants”를 참고.

11) 한편 히토 슈타이얼은 인상주의의 원사가 되는 터너의 그림에서 이미 토대 없음의 징후를 읽고 있다. 요컨대 터너의 「노예선」과 「비, 증기, 속도」와 같은 그림에선 단일한 소실점과 수평선 등이 의문에 부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13-14세기의 선형 원근법의 태동 과정에서 이미 근대적 주체의 모습을 발견하는 히토 슈타이얼이 제시한 이러한 설명은 자본주의의 시작을 13-14세기에서부터 소급해가는 브로델 식의 자본주의 모델과 조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필자는 봉건적 사회관계를 고용관계로 합리화 시키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그러한 부르주아적 주관성을 완성시킨 결정적인 모멘텀으로 간주하고자 하기에, 부르주아적 주체의 시점을 체화한 형식으로서 인상주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편 그러한 근대적 주체의 와해가 시각장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은 소비문화의 표현으로서의 팝아트가 등장했던 1950년대 중반으로 셈해질 수 있는데, 여기서 모더니즘적 ‘스타일’은 워홀식의 실크스크린으로 대표되는 ‘포드주의적 대량복제 기술’로 대체되기 시작하며, 이는 모더니즘 특유의 각 작가에 고유한 ‘양식’적 갱신을 가능케 했던 부르주아적 주관성조차 경제에 완전히 용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12)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ke University Press, 1991. p.7. 이와 관련하여 예술에서 초기 자본주의의 기계적 합리성에 가장 열렬히 저항했던 것은 유미주의이기도 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주체가 간직했던 유토피아적 충동이 예술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초기 모더니즘 특유의 자율의 미학을 뒷받침한 칸트 식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으로서의 미적 판단’이 어째서 필연적인지를 짐작 해볼 수 있다.

13) E.K. 헌트,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홍기빈 역, 시대의창, 2015. p.78; E.K. 헌트,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 유강은 역, 이매진, pp.39-49 참고.

14) Austin Artists Market, “What is Flemish Art?”, https://bit.ly/2MHu8hQ. 2019년 10월 14일 18시 13분 접속. 한편 플랑드르 회화가 출현한 15세기는, 영국에서 당시 높은 이윤을 남기던 목양업을 위해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며 미개간지를 사영화(privatization)했던 인클로저가 정점에 이른 시기이기도 하다. 영국과의 분업 속에서 양모 가공으로 수혜를 입은 플랑드르 지역이 유럽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거듭나며 풍경화와 정물화의 주요 생산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특정한 미학적 기획이 이미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의해 매개되어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예컨대 혹자는 여기서 네덜란드 지역의 플랑드르 회화와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 간에 인과관계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15) Kenneth Clark, Landscape into Art, Beacon Press, Boston, 1961. 1부 “The Landscape of Symbols”를 참고하라. 케네스 클락은 여기서 중세의 황혼, 근세의 여명을 체화한 인물로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에 주목함으로써 ‘풍경’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데, 그에 따르면 페트라르카는 풍경화가 나타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어떤 분리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최초의 인간이다. 한편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이해하고 그것과 닮고자하는 실천으로서의 미메시스가 불가능해진 시점을 가리키는 분리의 원형적 모티프로, 일찍이 아도르노는 세이렌의 유혹에 맞서 몸을 돛대에 묶어 욕구를 억제하고 대상과 거리를 유지해야했던 오디세우스의 신화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T. W.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역, 문학과지성사, 2001.

16) Joachim Gasquet, Cézanne, Fougères, Encre marine, 2002. pp.262–263 quoted in Augustin Berque, Thinking through Landscape, Translated by Anne-Marie Feenberg-Dibon, Routledge, 2013. p.41.

17) 15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Florence)를 중심으로 한 초기 르네상스 작업들에 플랑드르 회화가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Jeffrey Ruda, “Flemish Painting and the Early Renaissance in Florence: Questions of Influence”, Zeitschrift für Kunstgeschichte, 47. Bd., H. 2, 1984, pp. 210-236. 여기서 제프리 루다는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와 도미니코 베네치아노(Domenico Veneziano)등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두주자였던 작가들의 작업에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를 비롯한 플랑드르 작가들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작업 특유의 선형원근법과 비례법, 사실적 묘사 등은 단순히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의 경제적 중심부 중 하나였던 피렌체 또한 그 시작부터 양모 산업으로 크게 번성했으며, 수많은 교역이 이루어지는 도시이자 동시에 전 유럽 지역에 금융을 공급하는 곳이었다는 그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반추되어야 한다. 요컨대 플랑드르의 작가들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가들이 유사한 보기의 방식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양 지역이 놓여있었던 당대의 경제-문화적 조건의 유사함에서 연원한다.

18) 으레 바니타스 정물화 특유의 허무주의적 배경으로 거론되는, 유럽을 덮쳤던 흑사병과 종교전쟁 등의 음울한 사건들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지엽적인 작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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