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미명(未明)과 여명(黎明)의 사이에서

홍태림(미술비평가, 크리틱-칼 발행인)

어쩌면 개인의 관념과 사회의 불일치라는 말은 사뭇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행복과 불행도 하나의 관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불일치가 언제나 나와 우리의 삶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의 관념은 어떻게 사회와 일치하거나 불일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행복과 불행을 통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주입된 혹은 스스로 정의한 행복이라는 관념을 사회 위에 올려놓곤 한다. 이때 각 개인은 자신의 관념이 사회와 일치하게 되면 행복을 느끼게 되고 불일치하게 되면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관념은 사회와 불일치할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에 결국 한 줌의 행복과 마주하기 위해서 다종다양한 불행과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많은 불행을 거쳐 거머쥐는 한 줌의 행복이 계속 쪼그라든다면 어떻게 될까. 한 줌의 행복이 계속 쪼그라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사회가 절망을 대량으로 쏟아내며 허무를 향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하는 소확행이라는 유행어도 계속 쪼그라드는 한 줌의 행복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확행은 우리의 사회가 허무를 향해 질주하고 있음에도 분노를 도려내고 허무에 종속된 절망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뒤틀려 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확행이 나와 우리의 삶을 떠받칠 수 없을 정도로 쪼그라든 행복이라고 할지라도 많은 이들에게는 그러한 행복도 여전히 소중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소확행이 만연한 사회는 허무의 수렁에 깊게 빠진 곳이라는 점에서 결국 매우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관념과 사회의 불일치에 관련된 이러한 맥락은 사실 오세경의 그림들과도 연결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도 관념과 사회의 불일치 그리고 절망을 쏟아내며 허무를 향해 내달리는 사회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세경은 이러한 측면을 어떻게 그림을 통해서 다뤄내는 것일까. 개인은 자신의 관념과 사회가 거듭 불일치할 때 분노를 느낀다. 따라서 개인과 불일치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와 연결성을 가진 오세경의 그림에도 분노가 나타날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절망만을 취했을 뿐, 절망을 경유한 분노를 취하진 않았다. 그런데 오세경이 언제나 절망만을 다룬다고 해서 그의 그림이 허무에 삼켜질 절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세경의 절망은 이 문제적 사회의 중심에서부터 퍼지고 있는 허무를 더듬기 위한 외피이기 때문이다.

오세경, <장애>, 145x112cm, 한지에 아크릴릭, 2013

오세경의 그림이 사회의 중심에서부터 들불처럼 번져가는 허무를 절망을 통해서 더듬는 것이라고 본다면 결국 절망은 그의 창작을 가로지르는 중심축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이러한 중심축을 기념비적으로 제시한 경우로는 그의 초기작인 <장애>(2013)를 꼽아볼 수 있다. 전반적인 구성이 기시로 유키토(木城ゆきと)의 『총몽』에 등장하는 공중도시 자렘과 고철마을 그리고 이케다 마나부(池田 学)의 <History of Rise and Fall>이 연상되는 <장애>는 금동대향로에 그가 마주하는 불가해한 사회를 압축 및 나열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흥미로운 점은 금동대향로를 상부와 하부로 구분한 후 각각에 꽤 상이한 요소들을 배치했음에도 본질적 측면에서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장애>의 최상층에는 달 위에 서 있는 뼈만 남은 봉황이 있으며 봉황의 바로 아래에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리우데자네이루에 위치한 구원의 예수상이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고층 빌딩, 연립주택, 케이블카, 대교, 불꽃놀이, 월드컵 경기장, 전투용 항공기 및 헬기 그리고 두개골 장식이 배치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요소들이 연결된 흐름을 통해서 <장애>의 상부가 혼란, 욕망, 화려함, 파국이 뒤섞인 절망의 공간으로 제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장애>의 하부는 봉황의 백골이 토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작가의 개인사, 천안함 침몰, 성수대교 붕괴, 동일본 대지진 당시 발생한 쓰나미 등이 뒤섞여 있다. 이런 점에서 <장애>의 하부는 상부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파국적이지만, 상부에 비해서 초라함이 더욱 강조된 절망의 공간으로 제시되었다. 이처럼 <장애>의 상부와 하부는 언뜻 보기에 대비되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혼란과 파국이 뒤섞인 절망이 가로지른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오세경, <8학년 여학생>, 162x130cm, 한지에 아크릴릭, 2013

오세경은 절망을 폭력적 상황을 통해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2014년 전후에는 유독 폭력적 상황을 극적으로 제시한 그림이 많다. 이 시기에 속하는 그림 중 가장 눈에 띄는 작업으로는 <8학년 여학생>(2014)을 꼽아볼 수 있다. 이 그림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교묘히 뒤섞여서 폭력이 그림 속 대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 바깥에 존재하는 문제적 사회에 던져진 것 같다는 점에서 허무를 강타한 절망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8학년 여학생>은 꽤 이례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오세경은 2015년 이후로 <8학년 여학생>의 경우처럼 허무와 충돌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세경은 2015년 이후에 허무와 출동하는 그림보다는 <짝궁>(2015), <백합>(2016), <주차>(2016), <이별>(2016), <동병상련>(2016), <동상이몽>(2018), <소환>(2018)의 경우처럼 허무의 경계면 위에서 유영하거나 서로를 위로하는 존재들을 주로 다뤘다. 물론, 청바지를 입은 인물이 맨발로 하반신만 모터보트 밖에 내놓고 죽은 듯이 있는 가운데 교복을 입은 소녀가 태연히 범죄를 마치고 나온 범인처럼 모터보트에서 나오는 <몰락>(2016)은 2015년 이후 작이지만 폭력이 그림의 바깥에 던져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8학년 여학생>의 경우와 다르다.

오세경, <거인>, 120x194cm, 한지에 아크릴릭, 2018
좌) 오세경, <하얀나비>, 130x162cm, 한지에 아크릴릭, 2015   우) 오세경, <Anarchist>, 143x83cm, 한지에 아크릴릭, 2014
오세경, <몰락>, 162x227cm, 한지에 아크릴릭, 2016

한편 <거인>(2018)은 2014~2015년도에 제작된 <Anarchist>(2014), <하얀나비>(2015)와 유사하게 교복을 입은 여성 1인이 부각되는 그림이다. <거인>은 한 여성이 대형 미끄럼틀의 입구에서 마치 낭떠러지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처럼 서 있어서 일면 권총 자살을 연출한 <Anarchist>만큼이나 위협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된 미끄럼틀은 결국 놀이기구이기 때문에 <거인>은 <Anarchist>만큼 위협적이거나 극적이지 않다. 또한 <거인> 속 인물은 <하얀나비>의 주인공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외부로 신호를 보내는 적극적 행위가 없으며 중경에 작게 배치되어 표정도 그리 강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세경의 근작에 속하는 <거인>은 <Anarchist>, <하얀나비>에 비해서 허무에 더 가까운 절망이라 볼 수 있다. 한편 <거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밤이 깊어 아무도 없는 공사장에 주차된 허름한 승용차의 바닥을 보고 대자로 쓰러진 교복 입은 여성이 그려진 <사생아>(2019)에서 더 깊어진다. 왜냐하면 <사생아>는 의도적으로 원인을 제거한 폭력을 제시함으로써 허무의 표면을 크게 감싸기 때문이다.

오세경, <사생아>, 130x160cm, 한지에 아크릴릭, 2019
오세경, <믿음의 선>, 97x130cm, 한지에 아크릴릭, 2019

이처럼 근래의 오세경은 절망의 외피를 두르고 개인의 관념과 불일치하는 사회에 더 깊숙이 들어가서 끈질기게 허무를 더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사회가 절망을 대량으로 쏟아내는 시대에 오세경이 절망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둘러싼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마주함은 단순히 절망을 부정하거나 제거하기 위함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마주함은 고투(苦鬪)를 위해서가 아니라 절망과 절망의 이면에 존재하는 희망까지 모두 끌어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지점이 그의 최근작 <믿음의 선>(2019)에 암시되었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선>에 등장하는 인물 3명은 깊은 어둠이 깔린 새벽 중에 체육복을 입고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노란색 중앙선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 그려진 3인 중 중앙에 엎드린 남성은 오세경 자신이다. 오세경은 <믿음의 선>에서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을 들이대고 불온한 붉은색으로 빛나는 터널과 연결된 중앙선의 한 지점을 유심히 관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만약 붉은빛 터널이 허무로 점철된 사회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회와 연결된 중앙선은 허무를 향한 질주와 허무로부터의 탈주를 구분하는 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터널과 중앙선의 관계를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다면 중앙선의 한 지점을 주시하는 오세경은 바로 허무를 향해 질주하는 사회와 허무를 탈주할 가능성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세경의 <믿음의 선>은 기약 없는 여명(黎明)을 기다리며 미명(未明)을 끈질기게 더듬고 있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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