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_겨울, 다큐멘터리 극장

백두산(연극평론가)

겨울 속의 극장: 한국 다큐멘터리/극장과 겨울

DMZ다큐멘터리영화제의 부대행사로 기획된 <겨울에는 왕을 죽여야 한다>(DMZ Docs, 2019.9.21.-27)는 201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을 다룬 다섯 편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분할, 재구성, 배치하고, 영상의 전후로 퍼포먼스를 병행하여, 오늘 다큐멘터리 극장의 정신과 존재양식을 묻는 도전적인 전시이다. ‘도전적이다’는 말은 대체로 외연이 넓은 것인데, 이 전시기획의 의도에 담겨 있는 질문의 시의성을 인정하면서, 영상 및 퍼포먼스의 배치와 전시과정에 대한 아쉬움까지 아우르는 평이라 보면 좋겠다. 전시를 맛으로 감각한다면, 배치와 기획은 음식을 담은 플레이트의 형태, 온도와 다르지 않다. <겨울에는 왕을 죽여야 한다>에서 영상과 퍼포먼스의 배치는 “겨울”의 “왕의 살해”라는 그릇 안에 담겨 있다.

문화사에서 겨울은,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봄을 향하기 위해 존재하는 유예의 시간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1890)는 겨울의 문화와 그 뒤에 도래할 봄의 구조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전시의 전체적 구조를 음미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프레이저는 먼 옛날 네미(Nemi) 구릉 일대를 지배하였던 ‘숲의 왕’의 이야기를 책의 서두에 던진다. 숲의 왕은 주술을 집전하는 사제이자 성스러운 나무를 보호하는 자인데,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왕이 교체되는 것은 성스러운 나무의 가지를 끊어내는 데 성공한 노예와 왕의 결투로부터 시작한다. 왕을 살해하는 데 성공한 노예는 새로운 ‘숲의 왕’이 되어, 불사의 존재인 숲의 여왕 디아나와 신성한 결혼을 맺는다. 그리하여 겨울의 살해는 봄의 축제를 부르고, 만물은 생명의 계절을 맞는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19년도까지, 30여년의 시간을 살아 낸 한국 다큐멘터리의 세계는 위의 인류학적 구조에 비추어 어떠한가. 뤼미에르의 황금가지를 꺾은 한국 독립영화 최초의 노예들은 “주류 매체에서 소외된 다수 민중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행동으로서의 영화”1)를 발견하며 필름을 망각을 지연시키는 매체로 삼고, 영화관을 오늘 관객들을 둘러싼 세계를 발견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진지로 쌓았다. 이는 왕을 살해하는 춤이자, 양식화의 과정을 거쳐 축제의 몸짓이 되었다.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는 <상계동 올림픽>(김동원 감독, 1988)으로부터 시작하여 초창기 정치의 격변기와 노동, 도시빈민들의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며 출발하였고, 상황을 변화시키는 활동으로서 다큐멘터리 제작의 수행적 방식은 다큐멘터리의 윤리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또한 이 춤 속에서 다큐멘터리는 어떠한 왕을 살해하고 있을까. <겨울에는 왕을 죽여야 한다>는 이같은 문제에서부터 출발하는 전시이다.

만일 이 두 가지의 질문이 전시가 던지는 화두의 전부였다면, 그것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오늘’이라는 제하의 독립 다큐멘터리 상영회로 대체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 전시를 흥미롭고, 또한 복잡하게 만드는 다른 질문은 이러하다. 오늘, ‘현장성’과 ‘수행성’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아이디어는, 불사의 존재인 ‘극장’과 결합하여 새롭게 갱신될 수 있는가. 앞서 이야기한 ‘황금가지’의 신화는 기실 후대의 인식의 틀에 맞추어 변형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오레스테스와 히폴리투스 신화로 전승되던 ‘황금가지’ 신화에서 왕의 죽음 이면, 풍요를 부르는 디아나와 새로운 왕의 ‘신성한 결혼’의 의미는 곧 은폐되었던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무엇을 은폐하고 있을까. 이 전시에서는 ‘극장’을 내세운다. 뤼미에르 신화 이후 영화와 공연예술이 서로 등 돌려 반쪽씩 계승하였던 불멸의 존재인 ‘극장’의 의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편집되고 재구성된 영상 다큐멘트(document)는 ‘여기-지금’의 테제, 눈앞에 놓인 몸이 관객의 인지를 통해 직관적으로 발견되는 충격과, 공동체의 관람을 통해 증폭되는 감정의 끓어오름과 만나 극장은 다시 봄의 춤을 출 수 있을 것인가. 퍼포먼스는 이러한 질문 속에서 다큐멘터리 영화와 만난다.

오늘, 다큐멘터리의 춤 : ‘용납할 수 없는 것’의 윤리

DMZ홀에 마련된 전시공간 안에 들어간 관람객들은 제멋대로의 자리에 놓여있는 바퀴달린 의자 여남은 개와 전시공간 곳곳에 펼쳐진 여덟 개의 스크린, 오른쪽 구석에 자리한 한 개의 구형 텔레비전, 퍼포먼스 그룹마다 조금씩 다르게 배치한 각종 오브제가 놓여 있는 어두운 직사각형 공간에 던져지게 된다. 이 전시의 관람과 관객들의 영상 및 전시를 포괄하는 전체 내러티브에 대한 해석은 영상의 순차적 상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전시는 다섯 개의 영상과 퍼포먼스의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되어,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영상과 퍼포먼스를 감상한다.

<겨울에는 왕을 죽여야 한다>에 전시되어 있는 영상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하에서 겪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현장성과 수행성의 여러 형태를 보여준다. 해석의 편의를 위하여 이 전시에 배치된 영상이 구축한 서사를 먼저 살펴볼 수밖에 없겠다. 극장은 아홉 개의 스크린을 네 개의 공간으로 구획하여 사용하였고, 스크린은 관람객이 선택하여 바라볼 수 있는 자세로 배치되어 있다. 암흑 속에서 관객은 첫 번째 영상 이강현의 <디메틸아날린·유리섬유를 흡입해도 괜찮은가·연속측정>(3채널, 2019)에서 배치한 세 가지 서로 다른 영상2)과 마주한다. 위험물질에 노출된 노동과 병치된 산업재해 규정들, 공간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인물들, 그리고 거리에 기준점을 세우기 위한 작업과 병치하여 나래이션으로 제시된 ‘기준’에 대한 대화를 통해, 상황을 관찰한다는 것, 그것을 재구성한다는 것, 나아가 관객들이 이를 해석한다는 것이 지닌 ‘기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전시의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의 배치는 다큐멘터리가 지닌 현장성과 수행성, 윤리의 문제를 던진다. 박배일의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3채널, 2019)와 이원우의 <랜덤 서울 시티 투어>(1채널, 2019)는 독립 다큐멘터리가 다루었던 현장성과 수행성의 차원을 극명히 보여준다. 박배일의 영상에서 병치된 밀양 할머니의 농사일과 송전탑 반대 투쟁의 일과에서 카메라는 조망(眺望)하지 않고 사태와 밀착해 있다. 그리하여 카메라-아이는 현장 안에서, 또는 현장을 조망하는 과정에서 흔들림을 경험한다.3) 좌우반전의 형태로 관람할 수 있게 양면으로 배치된 이원우의 영상은 백남기 농민의 사망과 시위를 바라보는 각종의 관점을 아카이빙된 여러 영상들을 감각적으로 편집한 영상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을 조망한다.

오늘 소외된 ‘목소리’는 인터뷰 형식의 화면과 만나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전달한다. 네 번째 영상인 김일란과 이혁상의 <무>(2채널, 2019)는 전면에 용산참사 당시 망루를 사수하였던 개인의 인터뷰 형식으로 들려주며, 배면으로 잡초 뒤덮인 오늘 용산참사의 현장을 근경으로부터 원경으로 조망한다. 인터뷰 영상과 목소리로 현시된 인물의 얼굴,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말을 담담히 던질 때에 표정과 침묵으로부터 참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의 행간이 들썩인다. 인터뷰어의 자살 소식을 전하는 말미의 자막으로부터 다큐멘터리의 핍진성은 비극적 의미로 환기된다. 신자유주의 이후의 박탈과 국가체제의 폭력은 전면 영상을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카메라에 의해 관찰된 폭력의 현장과 목소리, 얼굴로부터, 다시 말해 ‘현실이 직접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 필름의 디에게시스로 강력하게 제시된다. 뒷면의 영상과 나래이션으로서의 목소리를 감상하는 경험은 전면의 그것과는 다른데, 과거의 이야기이자 해석된 말로서 제시되는, 건널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상황으로부터 분리된 극장 안의 관객의 감각이 또한 쓸쓸히 음미된다.

그 얼굴과 목소리로부터 감각되는 죄책감은 구형 텔레비전 영상으로 제공되는 <거리에서>(박종필, 1채널, 2007)에서 극대화된다. <거리에서>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그리고 본다는 것의 윤리적 책임의 문제를 환기한다. 감독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찍는 노숙자는 촬영자 없는 카메라-아이, 그의 질문과 의도 속에 노출되지 않은 시간 안에서 감독 너머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뭘 알고나 찍고 있냐.” 뜨거운 눈물과 함께 제시된 이 말은 나에게 담담한 충격을 주었는데, 영상을 통해 겪는 ‘참을 수 없는’ 감정과 맞닿았기 때문이다. 닿을 수 없는 거리로서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 영상과 관객 사이, 겨울 세계의 비참함와 따뜻한 극장 사이의 아득한 거리감이 다시 몰려온다. <무>에서 그러하였듯. 내가 관객에 머물렀다는 죄책감과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이것들을 가지고 자기의 세계를 반성하는 과정이야말로 다큐멘터리가 이 겨울의 극장에서 만들어 낸 윤리의 종착점이다.

 

퍼포먼스 유감: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행위’에 대하여

요컨대 관객은 자신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이미지를 보는 것에 대해 이미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이미지들의 정치적 몽타주에 내재하는 변증법이다.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다른 이미지의 신기루를 고발하는 현실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 이미지는 동시에 그것 자체를 포함하는 우리 삶의 현실로서의 신기루를 고발한다. (…) 이처럼 관객이라는 단순한 사실, 이미지를 본다는 단순한 사실이 나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행위의 이미지, 진짜 현실의 이미지 또는 진짜 현실로 즉각 뒤집힐 수 있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행위는 이미지라는 악과 관객의 죄의식에 대한 유일한 답변으로 제시된다.

–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 지적 해방과 관객에 관한 물음』, 현실문화연구, 2016, 124-127면

앞서 살핀 영상이 던지는 질문은, 구체적으로 2000년대 다큐멘터리의 피사체였던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비판이라는 질문이 유효한지, 또한 그것은 오늘 다큐멘터리의 관객들에게 과연 ‘참을 수 없는 순간’을 제공하고 있는지 관객에게 묻는 것이었다면, 전시에서 영상 사이에 삽입된 퍼포먼스는 영상이 던지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한 살아있는 ‘행위’로서, 이미지들을 뒤집거나, 관객이 지닌 죄의식에 대한 답변을 던지며 움직여야 할 것이다. 윤서비(<오 다나>), 이세승(<새야 새야>), 주혜영(<배열된 사실들>), 하수민(<키스>) 연출이 구성한 전시 퍼포먼스는 관객들에게 사전 공지되지 않은 채 하루에 두 번, 우발적으로 만나는 사건으로 구성되었다. 하나의 퍼포먼스 팀이 한 시간의 전시를 책임지는 구성이어서, 공교롭게도 나는 2번의 관람 동안 조우할 수 있었던 <키스>와 <오 다나>만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키스>는 남성 두 명과 여성 한 명으로 구성된 퍼포먼스 그룹이 영상과 연관있는 듯한 인물의 모티프만을 추려 새로운 관계 맺기의 서사로 각색한 이야기를 전시한다. 배우는 노동자, 경찰, 노숙자 등으로 변신하여 영상이 끝난 다음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다음 영상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키스’는, 윤영선의 희곡 「키스」에서 보듯, 인간과 인간의 거리감 곧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는 순간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관계 맺기의 행위로 제시된다. 그리하여 <디메틸아날린·유리섬유를 흡입해도 괜찮은가·연속측정>의 영사 이후 청년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키스를 갈구하고, <거리에서>의 마지막 영상이 끝난 후 노숙자로 분한 남자배우가 거적을 깔고 누워있는 상황을 제시하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펼친다. 이러한 퍼포먼스의 구축은 피사체가 촬영하지 않은 곳에도 삶은 계속되는 것, 영상 밖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던지는 듯하여, 다시 영상에서 제시한 디에게시스의 확장으로 관객들에게 제시된다. 이야기의 후일담이란 본편보다는 관심이 덜한 법, 그리하여 긴장감은 현저히 떨어지고, 극장에 갑작스레 출현한 몸은 저 옛날의 연쇄극(Kinodrama)의 몸처럼 영상의 곁다리에 서 있는 듯하다. 눈앞의 날것들의 생생함에도, 앞서 영상들이 던진 질문이었던 죄의식, 거리감,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어떠한 긴장감도 갖지 못한 채 앞서 영상에 대한 보조적 설명으로 서 있어 유감이었이다.

<오 다나>는 정반대의 방식이지만, 역시 이 전시가 의도한, 극장에 몸을 등장시켜 해석을 교란하며 새롭게 도약하는 화두를 제대로 극장 공간에 던져두었던지 묻고 싶다. <오 다나>는 영상에 각인된 ‘시대’에 착안하여, 퍼포머 개인의 삶을 서사화하고 퍼포머가 다큐멘터리가 제시한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위다나’는 처음에는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객으로, 영상이 끝난 다음에는 빈 스크린에 자신의 유년시절 기억이 담긴 사진 오브제를 제시하거나 상영에 여러 오브제를 개입시키며, <무>가 영사되는 한 귀퉁이에서 박스로 종이 집을 짓고 들어눕는 등 영상의 이미지와 병렬적인 이미지를 펼치고 있다. 아무튼 그녀는 영상의 서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그 속에 개입하고자 몸이 증거하는 그녀 자신의 서사를 지키고 거기 있다. 그러나 중반을 넘어 이러한 ‘적극적’ 개입은 갈수록 위악적인 것으로 느껴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 20대 초반, 가정과 개인의 고통을 감내하며 여기 춤추는 인간으로 서 있는 개인의 서사와 그녀의 오브제 자체가 관객에게 던지는 화두가 과연 다큐멘터리를 매개한 삶-관객의 거리감, 죄책감, 죄 많은 우리시대의 은유로서의 겨울, ‘참을 수 없는 것’의 화두를 뒤집거나 다층적으로 해석하는 충격을 던졌는가 참담히 되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서 있다 하여, 그의 신체가 육박하고 목소리가 들린다 하여 그의 삶이 영상이 재현하는 이미지보다 더 핍진하다 느끼지는 않는다.

위의 두 사례를 바라보며, 나는 ‘이미지’와 ‘행위’의 변증법을 통해 ‘참을 수 없는’ 순간을 창조하는 것으로 지적으로 해방된 관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랑시에르의 말을 떠올렸다. 랑시에르는 이미지를 뒤집고,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행위’로 전복되는 정치적 몽타주의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란즈만의 다큐멘터리 <쇼아>에 등장하는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근무한 이발사 아브라함 봄바의 시퀀스를 언급한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아브라함은 긴 침묵과 눈물을 흘린다. 감독은 증언을 요구한다. <쇼아>에서는 결국 ‘목소리’의 힘, 아이러니하게도 증언의 반대편에 놓인 침묵이 담고 있는 ‘행위’를 통해 결국 재현 불가능한 것들을 이야기한다는 이 영화의 아이러니를 묘파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종류의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을 작동시킨다.” 가스실에서 일어난 일에 닿을 수 없다면, 다시 말해 전시에서 우리 눈 앞에 제시되었던 영상 너머 한 노동자의 자살과, 노숙자의 눈물에 우리가 닿을 수 없다면, 예술은 눈물이나 침묵과 같은 행위들로 그것의 등가물을 제시하고, 이미지는 다시 배열된다. 만일 이 전시에서 이러한 것들을 영상과 다른 곳에서, 극장에서 떠돌아다니는 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면 나는 보다 많은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바퀴 달린 의자의 은유: 공간과 관객

  유감스럽게도 전시 기획에서 영상의 감상과 배치를 위주로 관객들의 시선과 관람을 강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실패의 한 축으로 보인다. DMZ영화제의 부대행사로 기획되어 영화관람의 관습에 익숙한 관객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영상의 상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이 방식이 ‘전시’의 관점에서 퍽 이질적이었다. 공간의 배치는 특정한 관객을 훈련하고, 모든 예술은 자신의 공간에서 훈련된 관객을 상정하며 제작된다. 설치미술이나 전시성을 결합한 다원예술공연에서 관람객의 ‘공간의 탐색’ 행위는 중요하다. 공간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관람객의 능동적인 발견과 인지의 과정이 자연스레 학습되고, 이를 통해 전시 안에 삽입된 퍼포먼스의 행위 역시 관객들의 보다 능동적인 의미의 발견 과정과 연계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비유하자면 영화관람은 근육을 사용치 않으나, 전시는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공간 안에 놓인 나를 수차례 발견하며 나의 위치를 정위하는 과정이다. 몇 차례 나와 함께 극장의 어둠 속에서 영상에 주목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이내 주저앉았다.

두 편의 퍼포먼스가 갈 길을 잃고 헤맨 영상은 특히 네 번째 선보인 <무> 이후의 공연에서였다. 커다란 스크린에 육박하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표정을 세세히 담아내고 있는데, 인간의 내밀한 정서, 그 핍진한 환유로 표현되는 이 ‘얼굴’이라는 강렬한 이미지 앞에서 몸이 지닌 육체의 핍진성은 그 강도가 떨어지게 된다. <거리에서>처럼, 영상이 주는 스펙터클에 거리를 두고 목소리와 흐릿한 영상으로 상상케 하는, 조그마한 텔레비전의 영상과 같은 구도, 어찌 보면 영상이 지닌 디에게시스에 과감하게 곁을 주는 듯한 섬세한 조율이 영상의 배치 과정에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퍼포먼스는 이 네 번째 영상 이후로는 부차적인 것으로 기억에서 멀어지거나, 영상의 이미지를 온전히 감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처럼 극장 한 구석에 놓여 있어 나로서는 유감이었다.

결국 앞서 제시한 “‘현장성’과 ‘수행성’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아이디어는, 불사의 존재인 ‘극장’과 결합하여 새롭게 갱신될 수 있는가.” 하는 화두는 미해결로 남은 셈이다. 상상해 본다. 다큐멘터리 필름의 관람을 분절적으로, 또한 다양한 오브제들을 자유롭게 관찰하는 공간으로 배치하였다면 어땠을까. 그리하여 새로운 공간 안에서 관객들이 이미지와 행위가 서로 개입하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관찰하도록, 또한 그 기회를 기획의 단계에서 각 단위의 자율성에 놓아두지 않고, 조율하고 의도적으로 배치하면서 구성하였다면 어땠을까.

바퀴달린 의자는 이 전시의 관객들을 은유하는 듯하다. 첫 번째 영상을 관람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바퀴의자의 쓰임을 알게 되는데, 길게는 17분, 짧게는 4분 남짓 구성되어 관찰에 ‘집중을 요하는’ 관람객들의 엉덩이를 포근하게 하는 장치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바퀴 달린 의자는 앉아서 영상을 바라보는 관객들을 이동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영상과 영상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동은 수단이었을 뿐 새로운 발견이 아니었다. 이 어정쩡한 배치는 어찌 보자면 이 전시를 관람하는 관객의 상이 좀 어정쩡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아내게 했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도전적이다.’ 평론가가 쓰는 ‘도전적이다’는 말은 대체로 외연이 넓은 것인데, 이 전시기획의 의도에 담겨 있는 질문의 시의성을 인정하고 싶다. 맨 처음 바퀴달린 의자를 발명한 사람은 냉소적인 구경꾼에게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자에 곧 토머스 제퍼슨이 앉았고, 찰스 다윈이 애용하였다. 공통의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다큐멘터리와 현대의 실험적인 연극들은 공통으로 당면한 과제가 있다.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으며, 수행성과 현장성은 오롯이 제작자의 몫이 되어버린 상황, 능동적이지 않은 관객들,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의 시대 이후, 어쩌면 그 전부터 진부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어 버린 ‘진정성’이라는 테제. 겨울이다. 그리하여 이제 한 줌의 남은 사람들이 곁불을 쬐는 공간이 되어버린 이 극장에서 마주하는 대화는 오늘 다큐멘터리는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던지는 황금가지를 들고 어떻게 새로운 공간과 관객을 혁신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다면 고맙겠지만, 어떤 것들은 질문 자체가 영감을 주어 행동을 부른다.

겨울에는 왕을 죽이고 봄을 맞아야 한다.

 


1)  이승민, 「서문」, 『한국 다큐멘터리 50개의 시선』, DMZ Docs, 2019.

2) 두 개의 영상은 이강현의 전작 <보라>(2011)와 <얼굴들>(2017)의 장면들이 선택되어 있다.

3) “박배일 : 현장의 감독들이 한 번씩 하는 고민일 것이다. ‘나는 활동가인가, 감독인가’ (…) 그런데 <밀양 아리랑>이 끝나고 그후 1년 넘게 밀양과 연대하면서 그 고민이 정리됐다. 현장에서 활동가 비슷한 일을 해야 할 때면 활동가의 일을 하면 되고, 또 누군가 현장에서 나를 감독이라고 부르면 감독 일을 하면 되더라.”(박배일·김설해·오재환·조영은 대담, 「현장과 연대하는 다큐멘터리, 시스템이 아닌 태도로서의 공동제작에 대해 말하다」, 위의 책, 18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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