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산_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③

정강산(독립연구자)

 

4. 세계가 되고자하는 재현/기계/객체: 한국 동시대 미술의 경향들 

(1)  ‘납작함(flatness)’의 속도와 즉자적 디지타리아트(digitariat)54)

이런 조건이 가진 규정성의 자장 내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혹은 어떤 제약 속에 놓이는가? 어떤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이 질문들과 함께, 이하의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몇몇 한국 작가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우선 2010년대 중후반기에 지속적으로 호출되었던 레이어(layer) 혹은 납작함(flatness)이라는 개념의 유행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디지털 매체와 재현장치들이 시지각적 감각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며 그로 인해 변형되는 경험세계와 실재의 범주를 그려내는 한국 동시대미술 작가군을 설명하는 데에 종종 동원되는 ‘레이어’는 일정한 두께를 가진 ‘(단)층; 막’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다소 구별되는 용례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그것은 팝업창으로서 무한히 겹쳐 쌓는 것이 가능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 모델에 가까운 의미로 통용된다. 말하자면 여기서 ‘레이어’란 현실의 질감과 양감이 제거되어 있는, 매끈하게 표백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기술적 요소들을 통해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상을 만들고 조작해 낼 수 있는 포토샵 특정적인 맥락이 두드러지는 개념인 것이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둔 채, 김희천의 「home」(2017)을 독해해보자. 이 작업은 으레 레이어라는 키워드로 독해된다. 본 작업의 서사 플롯은 일본어를 구사하는 화자가 가상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소녀 탐정 에리카의 자취를 추적하며 서울 일대를 훑고 다니는 과정으로 짜여있으며, 작중 에리카는 실종된 할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에리카의 시점은 애니메이션으로 작화된 서울의 풍경 속에서 전개되고, 화자의 시점은 카메라로 촬영된 서울의 풍경 속에서 전개되는데, 이 풍경들은 각각 실재에 대한 복수의 ‘레이어’를 형성하며, 양자는 서로 교차하거나 두서없이 연결되다가 결국 뒤섞여 들어간다. 이로서 관객은 화자의 위치를 좇고, 화자는 에리카의 위치를 좇으며, 에리카는 할아버지의 위치를 좇는 구도가 생성된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서로의 위치를 정확히 식별해내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실종된 것인지, 에리카는 할아버지의 실재에 접근했는지, 화자의 ‘성지순례’는 어디서 종료되는지, 관객이 지켜봐 온 것이 정확히 화자의 시점이었는지 혹은 에리카의 시점이었는지는 서사가 종료되는 순간까지도 불분명한 채로 남는다. 애초에 복수의 ‘레이어들’로 파악된 세계 속에서 단일하게 현상 가능한 세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들이 공동의 세계 속에서 조우하지 못한다는 서사 틀은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에 가깝다. 또한 그것은 부유하는 기표들의 체계에서 나타나는- 최종적인 기의로의 안착의 실패와 지시 관계의 붕괴를 재연해 보인다.

김희천, <홈 HOME>, 2017, single channel video, Full HD, 40 mins

한편 이러한 「home」의 특징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전형을 제시한 폴 오스터(Paul Auster)의 「뉴욕 3부작」의 그것과 상당히 동연적이다. 다시 말해 오스터에게 뉴욕이 다뤄지는 방식과, 김희천에게 서울이 다뤄지는 방식은, 양자 모두 의미가 상실되고 실재가 유예되는 공간으로 수렴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닮아있다. 나아가 실종된 이를 찾는 탐정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부터, 작중인물들이 서로의 위치를 추적하고자 분투한다는 점, 그 과정에서 사실과 허구의 뒤얽힘, 재현된 것과 재현대상 간의 괴리에 대한 혼란스러운 심상이 나타난다는 점,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관람자 또한 길을 잃게 된다는 점까지. 각 작업에서 ‘탐정’이 지닌 위상 또한 유사한데, 이들은 모두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모종의 의미들을 조립하고 ‘전체’에 대한 상을 그러잡기 위한 시도를 하지만, 끝내 어떤 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의미 부재의 심연 앞에서 좌절하기 때문이다.

홈 HOME, 2017, single channel video, Full HD, 40 mins

따라서 「home」에서 에리카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의미를 파악하는 주체의 모델(탐정)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제스쳐에 가까울 것이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 탐정은 설 곳이 없다. 이렇게 대략 30년간의 시차를 두고 상이한 공간에서 유사한 구조의 작업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닌데, 전지구적 가치사슬 속에서 뉴욕과 서울이라는 공간은 물리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를 초과하는 동질성 속에 통합되어 있으며, 근본적으로 60-70년대 이후로 장기지속 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자장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55) 그런 점에서 김희천의 작업은 일견 디지털 통신 매체와 재현장치들에 대한 코멘트에서 출발하여 그 자장 내에서 작업을 종결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찍이 하비가 지적한 바 있는 시공간 압축(time-space compression)56)의 제 조건들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모종의 압축된 시간감, 압축된 공간감으로서, 이때 주체는 자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을 명확히 알 수 없을 만큼 여러 겹(layer)으로 눌러 붙은 세계를 마주하며, 그 위에서 주체의 시점과 그가 발 디딘 지반은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표; 표면의 무한한 연쇄만으로 이어지는 자율화된 기호체계로의 전환과 정확히 조응한다. 그런 점에서 레이어는 단순히 디지털 재현 기술에 특정적인 의미로서의 ‘레이어’에 그치지 않는다.57) 레이어는 제 아무리 쌓이고 중첩되어도 실재 혹은 ‘총체적’ 세계로 가닿을 수 없는, 불가해하게 압축된 실재의 표면을 암시한다.

‘납작함’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대목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낼 것이다. 납작함은 스마트폰 · PC스크린 등의 디지털 화면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한 주체의 심상이라는 식으로 기술·매체적 측면에서 협소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배면에는 해석학적 심층 모델의 소멸이라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으며, 자본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동원되어 온 교통 및 통신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심상의 장과,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이 전제되어 있다(이는 동시에 시간의 절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납작함’은 시공간 압축의 다른 표현이며, 가상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현실감의 상실이 아니라, 감지 가능한 세계로서의 실재성 자체의 상실을 표지하는 알레고리이다. 결국 납작함의 동력이란 금융세계화와 더불어 가속화된- 이미지와 서비스에서부터 소비재와 금융, 경험에 이르는 상품생산의 회전시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압축의 감각이 대두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생산에서 회전시간의 가속화는 교환과 소비에서 그에 걸맞은 가속화를 수반한다. 통신 · 정보흐름 체계의 개선은 유통기술(포장, 재고관리, 컨테이너화, 시장반응 등)의 합리화와 결합하여 상품이 더 빠른 속도로 시장체계를 통해 유통될 수 있도록 했다. 전자은행과 신용카드는 화폐의 역방향 흐름의 속도를 개선시킨 혁신의 일부였다. 금융서비스와 시장(전산화된 거래의 도움을 받아)도 마찬가지로 가속화됐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지구적 주식시장에서 ‘24’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 됐다.”58)

안진국이 옳게 지적했듯, 기술은 그저 납작하지 않다.59) 납작함이라는 디지털 기술 매체 기반의 심상의 배면에는 단순히 이미지 편집기술과 편재하는 송신장치, 가상현실이 아니라, 위와 같은 금융 및 컴퓨터 공학과 관련된 복잡한 실천과 제도들이 있다.60) 디지털 전산화와 컴퓨터 프로그램의 복잡한 수학적 공식들은 금융화의 핵심 요소이며, 금융과 함께 발전해왔다. 지난 20-30년간 미국에서 금융 및 보험과 디지털 소프트웨어 · 컴퓨터 시스템 설계 부문이 동시에 성장하며, 제조업 일자리의 큰 감소량을 상쇄하는 경제의 새로운 동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 기술에 기대고 있는 디지털 디바이스가 정보와 이미지를 회전시키는 속도와, 금융이 생산의 각 국면에 개입하고 화폐 자체를 유통 및 회전시키는 속도는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포개어진다.61) 온전히 디지털 디바이스들에서 연원한 것으로 돌려지는 유동성, 일회성, 단발성, 일시성, 즉각성 등은 금융세계화와 더불어 놀라울 정도로 단축된 자본의 회전시간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공할 속도로 수초마다 갱신되는 이미지, 뉴스 등 정보가들의 가시적인 변화들은- 정리해고, 이직, 파산, 매각, 인수합병, 투기, 젠트리피케이션 등이 빚어내는 실재의 속도에 대한 거울상이다. ‘납작함’은 금융화가 개입한 생산의 속도를 자신의 조건으로 삼는다.

courtesy of artist, Kang Jungsuck, stills from ‹GAME I: Speedrun Any% PB›(2016)

강정석의 「GAME I: Speedrun Any % PB」(2016)는 위와 같은 조건 속에서 출현하는 납작함의 심상을 보다 징후적으로 체현하고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 TV와 같은 개인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송출되는 기존 FPS 게임방송과 작가 본인이 제작한 게임 화면이 조합된 모종의 플레이 영상이다. 영상 속에서 몇몇 게임들에 대한 ‘유저’로서의 체험기와 소감을 전달하는 내레이션은, 이내 개인 스트리밍 방송의 형식을 빌어 관람자를 향해 직접 말을 건넨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익명의 관객들과의 영속적인 피드백 과정의 전면화이다. 이때 설정되는 ‘시청자; 관람자’와 ‘게임; 작품’ 사이의 즉각적인 피드백 과정의 속도감은, 나노초 단위로 변화하는 주식시장 및 환율 그래프가 전 세계로 동시에 발신되고 동시에 적시 전자결제를 통해 다시 시장으로 피드백되는 과정의 속도감과 같으며, 그에 결정적으로 기대고 있다. 더불어 강정석이 직접 제작한 게임 상에서 이루어지는 ‘스피드 런’은 어렴풋이나마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험이 근본적으로 어떤 순환의 속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62)

여기서 캐릭터는 모든 경험 가능한 서사들을 건너뛴 채, 최단 시간 내에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달린다. 달리 말해 스피드 런이라는 형식 속에서, 목적지는 캐릭터의 임의적 도달 지점으로 설정되어 있을 뿐- 여타의 서사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에서는 계속해서 달리는 ‘현재’만이 유효하며, 그 결과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부유감(sense of floating)에 대한 예찬이자 무의미의 축제이다. 그런 점에서 강정석은 어떤 선험적 의미와 가치도 지니지 않는 장으로서의 내재성의 평면 속에서 들뢰즈의 ‘강렬도’가 도착하게 된 역설적인 지점을 보여준다. 강정석에게 주체와 객체 혹은 재현된 것과 지시대상의 분할은 이미 게임과 그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폐지된 것으로 간주되며, 세계에 대한 어떤 판별이 시도된다기보다는 그저 현재의 속도; 강렬도만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courtesy of artist, Kang Jungsuck, stills from ‹GAME I: Speedrun Any% PB›(2016)

납작한 존재에게 허용된 유일한 이념은 현재주의이다. 그에게 시간적으로 앞과 뒤를 분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공간적 이동은 어떤 속도의 강도 이상의 것으로 셈해지지 않는다. 그 연장에서 그가 스스로 “동세대”63) 작가로서 표명되길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여기서 동세대란 ‘동시대’ 속의 ‘동일한 세대’를 암시한다. 그러나 서동진의 지적대로, 동시대는 현재 이외의 시간감을 갖지 않는 담론적 시간성이다.64) 역사와 토대 없이 불확실성 속에서 부유하는 시간, 미래라는 시간성이 과거와 함께 상실된 시간이 바로 동시대인 것이다. 이 속에서 상이한 주체들 간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집합적 동질성이란 비슷한 현상학적 경험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기에, 가능한 주체화란 필연적으로 ‘세대’와 같은 정체성의 범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런저런 정체성의 구획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실재란 애초에 허구로서 간주되며, 검토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강정석의 작업이 위치하는 층위에 대한 강력한 암시를 제공한다. 요컨대 그의 작업은 현대문화의 깊이 없음을 지시하고 대중문화와 고급예술 사이의 수직적 높이를 평준화시키는 기획으로서 제안된 무라카미 다카시식의 슈퍼플랫(Superflat)의 수준을 초과하여, 감지 가능한 세계로서의 실재 자체가 이미 초압착(Supersqueezed)65)되어있는 조건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게임을 비롯한 디지털 디바이스에 매개된 이미지들의 효과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실재가 텍스트의 효과로서 구성된다고 말하는 기호체제의 전환을 그 조건으로 삼고 있으며, 변화된 기호체제 속에서 가능한 논리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한편 강정석은 여러 지면을 통해 작가의 ‘전략’을 강조해 왔다.66) 이는 일견 게임 속의 디지털 자아를 연장하여 미적실천에 섣부르게 적용한 듯한 방언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치에서 이념이 떠나간 자리를 메우는 것이 게임이론적 정치공학이듯, 그의 ‘전략’은 불안정한 조건 위에서 매 순간마다 생존을 위한 어떤 선택을 감내하며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고 생애주기를 성실하게 관리하는- 후기자본주의의 예술가 모델에 동반되는 용례에 가까울 것이다.67)

그런 점에서 그는 증강된 이미지와 실재의 속도 속에서 압도된 즉자적 디지타리아트(digitariat)의 모습을 체현하고 있으나, 디지털은 그저 닫힌 공간으로만 간주되긴 어렵다. 지젝이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에 기대어 말했듯, “우리 사회의 작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제 메커니즘까지도 규정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는 오늘날 권력을 지탱하는 기술적 그리드의 최종적인 형상”이며, 이들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들에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요체이기 때문이다.68) 오늘날 권력의 한 측면은 디지털 대타자에게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그렇게 작동하는데, 이 세계에서 인민들은 권력의 일부를 계약 속에서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 외부에서 자신도 모르게 권력의 자양분이 될 정보를 갈취당한다. 그러나 동시에 디지털은 모든 재화의 이동을 통제하는 장치이자 우리 삶 전반의 조건이 되고, 오늘날의 거의 모든 인간 행동과 경험, 감정을 매개하고 조직한다는 의미에서 공유지이다. 따라서 그곳은 계급투쟁의 장으로서의 열린 공간이자 개입의 공간이지만, 디지털을 자발적인 향유의 공간으로 설정한 채 그 속도감을 탐닉하는 강정석의 아바타가 이러한 실재에 가닿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69)

(2) 분기하는 시점들

반면 함양아의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2.0」(2019)은 웹 등을 통해 모은 이미지들과 그린스크린으로 직접 촬영하여 채집한 인물들을 조합하여 만든 일종의 현대의 풍속도인데, 여기서 각 인물들은 미세하게 움직이며 오늘날의 경제 체제가 자리잡아온 과정들을 순차적으로 시연해 보인다. 금융가를 연상시키는 마천루가 세워지고, 울타리가 솟아나며, 기계화된 생산 모듈이 등장하는 와중에, 그 속을 이리저리 헤매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두서없는 풍경은 어떤 ‘시스템’에 대한 알레고리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은 함양아가 구축한 서사 내부의 인물들이 맺는 상호관계가 아니라, 그가 미처 조정할 수 없었던 구성(composition)의 측면이다. 요컨대 이 작업은 콜라주의 방법론에서 나타난 어떤 전환을 체현하고 있다.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2.0」에서 콜라주는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의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다르고도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1956)와 같은 작업에서 나타나듯 안정된 풍경을 구성하기 위해 원근법적 규칙을 준수하며 부분들을 하나의 구도 속에 통합하는 양상도 아니고, 신학철의 「한국근대사: 공중누각」(1983)과 같은 작업에서 나타나듯 하나의 조형적 형상을 만들기 위해 각 부분들이 전체 속으로 통합되는 양상도 아니다. 함양아의 작업에서 콜라주 된 각 부분들은 일체의 연관도 없이 흩어져있으며, 서로 다른 구도로 투시되어 단일한 시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있다. 즉, 단일한 형상보다는 분기하는 시점 자체가 전면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일 시점의 완연한 분열과 와해는 그 자체 심화된 화폐와 기호의 물화를 자신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러한 ‘부분’의 물화는 비단 함양아 뿐만 아니라 일단의 회화들에서도 관측되는 것인데, 예컨대 김동진에게서는 2016년도 이후로 시점의 소실 자체가 하나의 형식적 쟁점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단일 오브제를 그린 것들을 제외하면, 그의 작업에서 사물들은 하나의 시점 속에 통합되어 있지 않다. 「Meaning is Lost」(2016)에서 전면에 그려진 목 잘린 신체들은 배경과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놓여있으며 서로 어떤 유의미한 관계도 맺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는 한편, 「Passive Destruction」(2018)에 나타나는 인간, 쓰레기, 동물 등의 대상들은 한 공간을 점유한 것처럼 놓여있으나 어떤 연관도 없는 듯한 시점들 속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다시점적 투사 속에서 각기 상이한 소실점을 지닌 오브제의 연쇄가 만드는 풍경은 결국 내적으로 총체화되는 데에 실패한다. 그가 그것을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이는 단일한 주체의 시선을 전제하지 못하는 시점의 불안정성과 조응하는 구도로서 징후적이다. 말하자면 김동진의 작업은 한데 모여 있지만 각자 상이한 세계에 놓여있는 파편적이고 부분적인 존재들을 드러내며, 따라서 어떤 대상이 전체와 관계 맺는 방식을 파악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물화된 시각성을 체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지적 히스테리 상태에 처한 주체의 시점을 증언하는 것처럼 보인다.70)

(3) 물화된 기계

브레튼우즈 체제와 케인즈주의의 몰락이 야기한 금융세계화 및 기호의 물화가 만들어내는 현기증 나는 속도 속에서 ‘납작함’은 압축된 시공간에 대한 알레고리였으며, 이는 해석학적 심층모델의 상실, 깊이감의 상실을 동반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곧 주체와 객체의 구분 또한 모종의 평면 속에서 압축되는 양상을 야기한다. 그에 따라 이미지와 실재의 경계가 무뎌지고 양자가 동일시되는 정도와 비슷하게, 기계와 인간의 경계는 모호한 것으로 나타나며, 동일시된다. 이 국면에서 기계는 물화되어 인간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자율적인 작인으로 나타나며 인간의 유기적인 부분 혹은 인간 자체로 격상된다. 포스트휴먼이라 불리는 담론적 유행은 그 정제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의 논의들이 제1세계를 중심으로 제기되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디선가 기계를 인간의 실존적 부분으로 셈한다는 것은, 그곳에 자율적인 모습으로 현상할 만큼 충분히 기계화된 생산과정들이 전제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인간과 기계의 명증한 분할과 양자의 상이한 위상이 (기호와 지시대상의 분리가 인식되었던 것과 같은 기제에서) 전제되어있던 모더니즘의 국면에서 기계는 미래주의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통제 가능한 하나의 수단이자 약속으로서 나타나지만, 오늘날 기계는 염지혜의 「미래열병」(2018)에서 기괴한 춤을 추는 휴머노이드(humanoid; 인간형 로봇)가 보여주듯, 그 자체 불가해한 하나의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71)

정금형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성립한다. 그는 이런저런 기계들과의 섹스를 연상시키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기꺼이 “인형극”이라 부를 만큼 기계에 의인화된 역할을 배정하고 있다.72) 전동 청소기가 등장하는 「진공청소기」(2007)든, 러닝머신과 벨트 마사지 기계 등의 운동기구가 등장하는 「휘트니스가이드」(2011)든, 심박측정기와 마네킹이 등장하는 「심폐소생술연습」(2016)이든, 그에게 기계를 사용하는 동작들은 기계와의 ‘접촉’으로 전환된다. 그 배면에는 반본질주의적 신체론 및 탈중심화된 주체론이 자리하며, 무엇보다 자동차를 발의 연장으로 간주하는 맥루한식의 사고가 심화될 수 있는- 기계·기술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있다. 그러나 기계가 점차 인간을 닮아가는 듯한 상황은 그 자체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자율적인 사실이라기보다, 생산양식이라는 사회적 실재의 요구에 기대고 있다. 복잡한 디지털 알고리즘을 통해 자가 학습하는 AI가 엔지니어의 소프트웨어에 전적으로 의지하듯, 기계의 자율은 그 자체가 인간의 정밀한 기획과 조립을 통해 구현된 것일뿐더러, 정확히 단기적인 고이윤을 위해 생산과정에서 임금에 해당하는 가변자본의 비중을 줄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는 자동화의 시도와 함께 이루어진다. 동시에 인간이 여타의 보철물을 통해 신체를 보완하거나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기계를 닮아 가는 것은 언제나 계급과 계층을 매개하여 차등적이고도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요컨대 루게릭병에 걸린 보통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스티븐 호킹의 장비들을 향유할 수 없다. 양 경우 모두에서 실질적인 변화의 조건이 되는 것은 생산양식이다. 인간의 부분대상이자 인간 자체가 되어가는 듯한 기술을 그 현상학적 층위를 넘어서 조명하게 되면, 결국 인간과 기계의 구분은 뚜렷이 유지되고 있으며, 양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한 심상은 이미 그것을 아우르는 사회적 실재(혹은 역사)의 효과에 가깝다. 이 속에서 우리는 기계와 마냥 기쁘게 춤출 수만은 없을 것이다.

김아영,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2017, 단채널 비디오, 약 20분

정금형의 경우와 비슷하게, 김아영의 무의식은 선진 산업 부문의 기술을 전용할 수 있는 제1세계의 경험세계 속에서- 사물인터넷 등과 같이 행위자로서 행세하는 기술적 오브제들이 범람하는 상황에 대해 미학적으로 반응한다. 그의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은 모든 무기물들이 자율적인 작인으로 역할 하는 세계를 그려낸다. 여기서 데이터베이스의 조각은 ‘현존’을 부여받고, 의인화되어 발화의 ‘행위자’로 서사의 전면에 나선다. 그렇게 김아영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완벽히 사라진 듯한 애니미즘적 풍경을 묘사하는데, 이때 그가 인간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주체와 객체의 분할을 허위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을 촉구하는 라투르 식의 존재론에 기대고 있음을 감지하기란 어렵지 않다. 요컨대 그에게 대상(object)이었던 것은 물(thing)로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의 이주에 주목했던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의 착안점이 ‘페트라’라는 ‘데이터 주체’의 이주를 서사화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심증을 더욱 굳히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주체와 객체(대상)의 분할이란 인간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추상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시민과 국가, 노동과 자본 등의 현실적인 실재의 분할을 이미 그 자신 내에 각인하고 있는 개념으로서, 그 폐기란 관념적으로 쉽게 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페이스 스캐너 기능이 탑재된 중국의 감시모니터에서 드러나듯, 혹은 구글과 페이스북의 게걸스러운 데이터 수집에서 보이듯, 무심하게 스스로 작용하는 물(thing)의 목적인은 심지어 1킬로바이트(Kilobyte)의 데이터 조각의 경우에라도 이미 사회에 매개되어 있으며, 그 질료인을 한참 초과한다. 우리는 그렇게 사회적 실재에 매개된 물(thing)을 대상(object)이라 부른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 분할의 지표로서의 주-객의 변증법을 벗어난 순수한 물 그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자지구에 낙하되는 네이팜탄이 하나의 객체로서 지닐 수 있는 물(thing)성과 그 행위자성에 주목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실로 외설에 가까울 것이다. 달리말해, 김아영은 군사용 드론을 화자로 내세운 작업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대상은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으며, 그것의 배치와 작동을 결정하는 주체는 인간들이 조직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조건 속에서야말로 그의 작업은 작동한다.73) 그것은 인간이 극단적으로 객체화되어있는 조건에서 대두되는 이해할만한 시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되는 것이 물(thing)들 자체는 아니다. 차라리 주체는 사물을 그러한 방식으로 내비치게끔 하는 사회이다. 이 국면에서 비인간과 기술을 비롯한 기존의 객체는 물화되어 주체와 동일시되거나 주체의 자리를 위임받는데, 이는 정확히 물화된 기호가 하나의 완결된 세계와 동일시되거나 실체의 자리를 넘겨받는 논리의 다른 버전으로 읽힌다. 즉 그것은 다소의 우회로를 거치지만, 전환된 기호체제의 논리적 궤적에 조응하며, 물화된 사회적 관계의 현상 형태이다.

현재의 통화·화폐체제와 기표 우위의 기호체제에서, 재현된 것과 지시대상의 간극, 객체와 주체의 간극, 인간과 기계·기술의 간극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재현된 것, 혹은 객체, 또는 기계들은 이제 그 자체 독자적인 작인이자 주체가 되고자 하며, 세계 자체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정치적 분할과 구분, 주체와 객체의 대립과 적대를 만들어내는 실재는 사라지지 않으며, 완전히 자율화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위상을 지탱하는 원리이자 기반으로 남아있다. 생산양식은 곧 모든 사회적 실천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사라지지 않는 매개자이자 지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야말로 비로소 예술은 이미 도래한 세계의 전면을 밝게 비출 수 있다.

5. 나가며: 세계에 모순이 있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이 글에서 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심화 및 지양에 따른 화폐 · 통화체제에서의 전환이 곧 변화된 기호체제의 근간이 되며, 이들이 예술적 형식의 한계이자 조건을 정초한다는 점을 상론하려 했다. 예술의 초월 불가능한 지평은 생산양식이며, 역사이고, 실재이다. 이들은 모든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실천들이 상대하게 되는 최초의 동일성을 가리키는 각기 다른 표현들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곧 어떤 불가지론과 신비화된 수사학, 혹은 현상학적 비평에 의해 잠식된 예술을 구제하고, 예술이 다시금 세계에 관해 말을 건넬 수 있는 인식론적 계기를 마련하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서 우리가 얻게 될 것은 더 이상의 자유낙하는 없을 것이라는 약속과, 역사적이지만 확고한 판단의 지반이다.

다소 고전적인 주장이지만, 부분들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 일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작업이 규명되었을 때야말로 풍부하고 살아있는 세계가 생동감 있는 동학 속에서 파악될 수 있으며, 역사 유물론적 문예론의 유일한 사명은 바로 그렇게 매개된 것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상론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층위와 위상에 놓인 채 자율적인 것으로 현상하는 대상들이 실은 서로 불가분 한 관계 속에서 직조된,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것의 양 측면이며, 현실적인 실재의 분할들은 그러한 분할의 조건이 되는 최초의 동일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내는 것. 대립된 것들이 전체 속에서 모순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내는 것. 동일성과 비동일성, 즉 같은 것과 다른 것 혹은 보편과 특수는 서로 관계하는 한에서 각자의 의미와 존재를 구체적으로 획득한다는 것. 이들을 작업 속에서 밝혀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비평가의 임무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같지 않은 것들에 대한 발견에서 동일한 하나에 대한 주목으로, 그리고 다시 반대로 양자를 왕복운동 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객관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에서 가능한 작업이고,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작업이다.

*본 원고는 엄제현의 「서울올림픽 개막식과 코스모폴리탄」(1편2편)과 함께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된 기획입니다.

* 연재 링크

  1.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①
  2.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②
  3.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③

*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전문 다운로드 링크


54) 폴란드에서 용례화 된 이 개념은 ‘정보사회’에서 정보의 수집과 데이터의 통제 권한을 쥔 상위 계급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바 있으나, 나는 여기서 기업과 국가의 디지털 데이터 수집을 통해 정치의 대상이자 착취의 대상이 됨으로써 그들과 화해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는 인민(혹은 집단적 신체)의 형상을 가리키기 위해 ‘디지타리아트’라는 용어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68, 69번 각주를 참조하라.

55) 폴 오스터의 작업, 특히 “유리의 도시”와 “잠겨있는 방”에서 화자들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실체가 없는 기호의 접합체로 인식하고, 이를 자유롭게 취사선택하거나 그 위에서 인지적 공황상태에 처한다. 이와 유사하게, 김희천의 작업들에서 등장하는 페이스 스왑(face swap)은 개인의 내밀한 정체성과 표정을 담지하고 있는- 레비나스 식의 ‘환원 불가능한 얼굴’이 이미 하나의 기호로서 유동하고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결국 변화된 기호체제의 부유하고 유동하는 측면에 대한 미메시스이며, 그 기호체제의 실체는 자본의 유동성과 변동성 자체이다. 폴 오스터에게 집중적으로 포착되는 것이 글과 언어가 자율화; 물화되는 경향이었다면, 김희천이 응시하는 것은 이미지의 물화 경향이지만, 그들은 결국 동일한 실재의 다른 측면들이다.

56) 데이비드 하비, 앞의 책, p.185.

57) 그것은 단순한 레토릭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부유하는 상태, 깊이가 없는 상태 속에서 가능한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모종의 안정적인 지반을 의미하는 ‘home’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고향이자, 존재가 머무르는 곳으로서의 ‘집’이란 김희천이 묘사하는 세계에선 일찍이 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58) 데이비드 하비, 앞의 책, p.186.

59) 안진국, “어디에나 있는 헤테로토피아를 부유하는 납작해진 현대미술: 납작(flat), 디지털-인터넷, 편재성, 사악한 혐오 기계, 억압적인 의지”,  『미술세계』 8월호, 2019, p.141. 그러나 그는 기술 자체를 실체화하여 혐오의 정동이 분출되는 장치로서의 그 부정적인 측면을 기술의 심연 · 구조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외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이 처한 배치의 상태이다. 변증법적 시선은 기술이 여타 사회적 작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 나아가 그 기술이 추동되어 나온 맥락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즉 디지털 디바이스와 인터넷을 비롯한 그 소프트웨어는 혁명의 장치가 될 수 있는 동시에, 혐오기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60) 하비의 지적대로, 오늘날 우리는 “상이한 공간들에서 거의 동시에 쏟아지는 이미지들을 경험”하며, “세계의 공간들을 (…)일련의 이미지들로 전환”하는데, 이는 “지구 전역의 50여개의 다른 입지들에서 금융, 시장, 투입비용, 품질관리, 노동과정 조건에 대한 의사결정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공장들을 작동시킬 수 있”는 초국적 기업의 작동기제와 동일한 현상이다. 데이비드 하비, 앞의 책, p.199.

61) 하비는 전지구적 이미지들의 유통체계와 전 지구적 상품의 유통체계가 정확히 하나의 실재에 근거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세계의 지리적 복합성이 밤마다 고정된 텔레비전 스크린 위에 일련의 이미지들로 환원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전 세계의 음식은 이제 한 장소에 모이게 됐다.” 위의 책, p.211.

62) 이는 김희천의 「썰매」(2016)가 근본적으로 이미지 순환의 속도감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도 상통한다.

63) “동 세대 작가로서, 작가와 운영자, 다중사용자 Massive Multi–Player 와 1인칭 Single Player 사이를 긴장감 있게 오가는 이들의 활동을 응원한다.” 강정석,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 반지하, 2015년 5월 27일, 오후 8시 16분 게시. 2019년 11월 29일 오후 9시 13분 접속. https://c11.kr/bqg4

64) 서동진, 앞의 책, pp.12-13.

65) 슈퍼플랫’이 소비사회의 상품들로 인해 모든 문화적 생산물이 평평하고 단일한 깊이를 갖게 된 상황을 인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면, ‘슈퍼스퀴즈드’는 슈퍼플랫의 요구가 이미 실현되고 가속되는 국면을 지시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66) “나는 사회가 ‘조각’한 세대론 속 세대가 아닌, 나와 내 주변의 세대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동세대가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이 좋다.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세대 간의 연결점을 지적하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흥미가 없다.” 채연, “강정석, 인터넷 세대를 위한 영상 비망록”, 아트인컬쳐, 2014년 12월 08일 오후 3시 8분 게시. 2019년 12월 1일 오후 8시 접속. www.artinculture.kr/online/2463; “자신이 가진 공간적 문제를 예산 안에서 해결하는 전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팩이 나온 거잖아요? (…)왜 어떤 사람은 더 잘 팔았는가, 많이 판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얼까를 스스로 학습하게 돼요. 그게 마켓의 즐거움이죠. 상호 참조가 생기고, 전략을 수정하고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윤리적인 지점과 효율화를 동시에 저울질하는데, 이게 아주 일시적이고 아슬아슬한 상태에요. 출구전략이 없으면, 무척 비윤리적인 기업처럼 될 수 있잖아요.” 강정석, 권순우, 김윤익, 김익현, 유지원, 정홍식, “대화: 굿-즈(GOODS) 2주기(週期)”, 2018년 7월 17일 게시. 2019년 12월 1일 오후 8시 접속. https://pia-after.com/?p=609

67)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강정석이 은연 중 내비치는 유토피아적 충동을 온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의 유년기 사진들은 스피드 런의 한복판에서도 갑작스레 외삽 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가 호명하고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과거에 가까운 것으로서, 온전한 시간을 담지한 사라진 흔적으로서 지속적으로 재등장하는 것이다.

68) Slavoj Zizek, “We are already controlled by the digital giants, but Huawei’s expansion will usher in China-style surveillance”, Independent, 14 May 2019 10:15. 2019년 12월 2일 오전 9시 접속. https://c11.kr/bzoj

69) 여기서 우리는 대자적 디지타리아트의 형상을 보여주는 작업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포렌식 아키텍쳐(Forensic Architecture)는 「움 알-히란에서의 살인」(2018)에서 베두인족 거주지를 철거하려는 이스라엘 정부와 원주민들의 계쟁에 개입하여 디지털 재현 장치들과 3D모델링 시스템 등을 통해 정부의 발표와 전혀 다른 사실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냄으로써, 가능한 디지털-계급투쟁의 모델을 모색했다. 한편 자크 블라스(Zach Blas)는 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인종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여성을 정확하게 식별하지 못하며, 동성애자의 관상학적 특징을 파악하는데 사용되는 안면인식 기술을 상대하면서- 스캐닝 되지 않는 익명의 얼굴을 만드는 프로젝트(「얼굴 무기화 세트」(2011-2014))를 진행한 바 있다. 이들은 정태적인 제3의 자연이 된 디지털 공간을 다시금 정치의 장소로서 조명해낸다.

70) 이곳에서 전개된 김동진에 대한 분석은 나의 이전 작업을 일부 수정하여 재작성한 것이다. 정강산, “파국은 새로운 가능성을 담보하는가?”,  『퍼블릭아트』 4월호, 2019.

71) 오늘날 ‘4차 산업 혁명’을 둘러싼 공포는 바로 그러한 경향의 무르익은 표현이라 볼 수 있다.

72) 안소연, “1인 인형극을 통한 행위와 시각의 불편한 유희: 작가 정금형”(인터뷰), 웹진 아르코, 2016, 1월 18일 게제. 2019년 12월 4일 오전 4시 33분 접속. https://c11.kr/bwz5

73) 그러나 아스팔트, 페인트 등의 질료들과 엔지니어들, 관료들의 의지가 섞이며 그 모두가 행위소로 작용하는 균일화의 장으로서 실정적으로(positively) 조명되곤 하는 라투르식의 ‘과속방지턱’을 만들어내는 것을 결정하는 곳은 물(thing)이 아니라 관(government agenc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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