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_양방향 길, 가지 않은 길

1.

   「양방향」은 김유림의 첫 개인 시집 표제시다.1) 그것만 읽어도 좋고, 다른 것과 같이 읽어도 좋은. 실은 같이 읽으면 참 좋은 시가 마침 하나 있다. 그 다른 시는 곧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알다시피 이 유명한 시는 시의 화자가 먼 훗날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할 거라고 하는 곳에서 끝이 난다.

숲속에서 두 길이 갈라졌고, 나는―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지
그리고 그게 모든 걸 바꿔놓았어.

  야심가라면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갈 거야”라고 말할 것이고, 하지만 그런 길을 찾는 건 힘들기에,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왠 한숨일까? 이 한숨이 이 시의 묘미다.
프로스트에겐 선택한 산책 경로를 늘 후회하곤 하는 영국 친구가 있었다. 에드워드 토머스. 하루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느 길을 택하건 넌 언제나 한숨을 쉬고, 다른 길을 택했으면 할 테지.” 에드워드의 그런 특이한 성격은 이 시의 영감이 되어주었다. 프로스트는 갈림길에서 어쩌지 못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응시했다.2)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더라도,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놓치게 되어 있는 법. 사람이 많이 가는 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적게 간 길을 고르면, 많이 간 길을 놓친다. 많이 간 길을 고르면, 적게 간 길을 놓친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상관없는 것을 상관있게 만드는 묘책이 있는 법. 야심가는 가지 않은 길(자기가 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에서 오는 한숨을 가지 않은 길(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여 달래고 숨긴다.
  프로스트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이 교묘하고 자기 기만적인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프로스트의 시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 “시의 화자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읽기를 가리키며, 그러는 동안 시인 자신은 더 복잡한, 반어법적 읽기를 요구한다.”3) 그렇지만 프로스트는 야심가가 아니더라도 궁금한 걸 묻지 않는다. 정말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를 놓치는 것인지를. 그리고 우리는 시 「양방향」의 한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길 경험을 발견한다.

나는 둘 다 걸어 봤다.

  인생의 먼 훗날도 아닌데, 젊은 시인은, 유림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2.

외국의 산책길.

사람들도 몇 지나쳤지만
전부 외국인이었다 나도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서
둘러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해했고.

  여기서 양방향은 매우 간명하게 묘사되었다. 외국에 나가면 전부 외국인이다. 그렇지만 나도 외국인이다. 여기서 “도”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가성비가 좋다. 마치 유림 옆에 친구가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유림: 여긴 전부 외국인이야.
친구: 야, 우리도 여기선 외국인이야.
유림: 다들 이 시간에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네.
친구: 야, 한국도 그러잖아.

  외국으로 나가보고, 한국으로 들어와보고, 그러니까 양방향을 다 가보고…. 이러한 양방향 길 체험을 후원하는 경험은 무엇일까? 바로 저 외국 여행 경험일까? 혹, 우리의 일상적인 길 경험 중 그런 게 있을까? 그렇지만 우리는 늘 갈림길에서 한쪽만 고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갈림길의 사전적 정의에 이런 게 있듯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경험 이야길 하기 전에, 속담 이야기부터 해보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영어로는 “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too.” 피터 센게는 이렇게 말한다. “You can have your cake and eat it too.” 하지만 단서를 붙인다. “―but not at once.” 전부 번역을 해보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단, 한꺼번에는 아니.”4)
  우리는 이 “한꺼번에”를 하나의 관점으로 취할 수 있다. 즉 한꺼번에라는 관점을 취하면, 한꺼번에라는 안경을 쓰면,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다 잡을 수 없다. 프로스트의 친구 에드워드는 바로 이 안경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게 해주는 안경은 어떤 안경일까? 센게는 말한다. “때로는, 가장 뒤얽힌 딜레마도, 시스템 관점에서 보면, 전혀 딜레마가 아니다. 딜레마는 ‘과정’ 사고가 아니라 ‘스냅숏’ 사고의 인위적 산물이며, 시간에 걸친 변화를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빛깔로 나타난다.”5)
시스템 사고는 오래된 것이다. 시스템 사고는 지혜를 품으며, 종종 속담 발생기다. 가령 농장에서 자란 아이들은 “젖소가 주는 우유와 젖소가 먹는 풀과 들판을 비옥하게 만드는 똥의 연결을 본다. 지평선에 뇌우가 있을 때, 작은 아이라도 우물의 수문을 닫을 줄 안다.” 비가 오는데 우물의 수문을 왜 닫는다는 말일까? “흘러내리는 빗물이 우물을 오염시킬까 봐. 아이들은 문 닫는 걸 까먹으면 물을 끓이거나 멀리서 양동이로 길어 와야 한다는 걸 안다. 그들은 삶의 반직관적 사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즉 홍수가 가장 크게 날 때가 물 보존에 가장 신경 써야 할 때라는 것을.”6)
삶의 반직관적 사실.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직관적이다. 유림은 나무의 반직관적 사실을 받아들인다.

밑동 아래 뿌리가 어지럽게 표면을 뚫고 나온 한 나무
를 보며 나무의 줄기를 보는 건지
나무의 옹이를 보는 건지
전체를 보는 건지

몰라도 그것은 하나의 나무였다

  그렇지만 유림은 시간에 걸친 변화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번에 양방향을 걷고 있는 것도 같은데 그건 왜지? 왜 유림의 시스템 관점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그것도, 한꺼번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노란

부분과 노랗지 않은 부분으로
산책길을 나누고

나는 둘 다 걸어 봤다
푹신하고 시끄러웠다

  나는 유림이 탐사하는 시간 내지는 공간이 묘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표제처럼 “양방향”이라는 특징. 나는 언제나 양방향이라는 특징을 유지하는 어떤 신비한 시간이나 공간의 존재를 생각해본다. 흔히 양방향 길은 갈림길이지만, 가도 가도 양방향 특징이 보존되는 길. 우리는 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만, 바로 그 선택이 선택되어,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선택되지는 않는 길. 그 길의 존재 그 자체.

 

4.

  이 길의 또 다른 특징은 호기심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하나를 절대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호기심을 소진시키는 행위. 그때 우리는 흥미를 잃고, 호기심은 어쩌면 다른 것으로 변질될지 모른다.

산책길이 서울과 같은 어느 외국 도시에 갔다
새가 울고 나무가 울창하다 나무가 울창하고 덩어리째
눈으로 들어와 어떤 인상도 남기지 않았다 햇빛이 풍경을
밀고 들어오는
방식이 흥미로웠으나
새가 우는 소리는 흥미를 끌지 않았다

흥미를 끌고

그렇지 않고가 서울과 같은 산책길을 가진 외국의 어느
도시에서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프로스트 시의 야심가에게 사람이 많이 간 길은 흥미롭지 않은 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선택의 사실에 압도되어, 그는 두 길 다 흥미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억압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가기에 그만큼 식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가기에 그만큼 흥미로울 거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다. 야심가에게도 에드워드에게도 문제는 두 길을 다 선택할 수는 없다고 하는 그 오래되고 직관적인 관습과 믿음이다.
내가 저 기묘한 양방향 특징을 보존하는 곳이 흥미로운 것은 늘 우리 옆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어떤 눈에는 감쪽같은 방법으로 늘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은 또한 인간을 위해 전면적으로 알려진 적도 없기 때문이다. 속담은 통상 지혜를 담고 있지만, 때로 지혜는 새것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새 부대와 함께. 너는 이미 그 새 부대를 알고 있을 것이다.

 

5.

  이제 속담이 아니라 경험으로 돌아와보자. 양방향 길 체험과 새로운 시스템 사고를 후원하는 경험은 무엇일까? 우리의 일상적인 길 경험 중 그런 게 있을까? 있다. 가령 골목길을 걷는다고 생각해보자. 골목길에서 우리는 분명 갈림길을 만날 것이다. 그렇지만 경험 많은 여행자는 그 갈림길을 인생의 갈림길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찾아갈 곳이 분명 있지만, 그리고 그곳은 분명 여정의 목적지 중 하나겠지만, 이 목적지들은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게 아니라, 골목 이곳저곳에 숨어 있다. 우리는 결국 모든 길을 다 걸을 수 있을 텐데, 왜냐하면 모든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갈림길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프로스트 시에서 그렇듯 한 길만 갈 수 있게 하는 길이 아니라 모든 곳을 갈 수 있게 하는 길이다. 양방향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곳을 갈 수가 없다.
  물론 모두가 같은 경로로 모든 곳을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은 우리는 길을 가다가 서로를 마주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서로 동행자가 될 수도 있고, 잠깐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다. 이때 우리의 발밑에 놓인 길은 인생 외길과는 다른 성질을 갖는데, 한 길을 걷고 있지만 다른 길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빼앗지 않으며, 갈림길에서도 그런 성질을 유지한다.

 

6.

  양방향 길 체험을 후원하는 골목길 경험. 그렇지만 또 어두운 범죄와 범죄 영화들이 경험의 질과 가치를 역전시켜놓은 길. 이제 왠지 구석에서 웬 악한이 튀어나오거나 뒤에서 따라올 것 같은 길. 갈림길이 무서운 길. 그렇지만 또 우리의 “디자인 씽킹” 문제해결사 백종원이 이러저리 바쁘게 걸어다니면서 다시 밝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길. 멸종되어가는 희귀물인 양 나들이객들이 찾아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부작용을 낳는 길.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모든 길이 실은 드넓게 펼쳐진 골목길 아닐까? 사실 스마트폰의 네비게이션 시스템은 모든 길을 골목길로 간주하지 않는가? 좌회전, 직진, 우회전, 3시 방향, 11시 방향, 유턴…. 우리는 인간을 위한 길의 본질을 외길이 아니라 골목길로 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양방향의 의미는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유림의 시에서 양방향이 그 오래된 비극적 성질들을, 너무나도 오래되어 양방향의 본성인 듯 여겨지는 성질들을 벗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한편으로, 악명 높은 양방향 이름들: 모순, 대립, 역설, 딜레마, 갈등…, 그리고 급기야 전쟁. 다른 한편으로, 회색분자로 내몰린 양방향 애매성. 이제 양방향은 새로운 옷을 입었는데, 그 옷은 갑옷처럼 절대성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르지 않으며, 아름다운 자연의 색이다. 좋은 옷이 그렇듯, 가볍고 어여쁜.
새 옷을 차려입고 유림은, 산책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고는, 이제 정말로 가지 않은 길을 갈 연습을 한다. 이 가지 않은 길은 자기가 택하지 않은 갈림길의 다른 길을 의미하지도 않고 사람이 적게 간 길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갈림길에서 늘 갈등했던 인간이 이제 양방향의 진정한 야심가가 되어 날아올라 돌아오지 않을 길이다.

나는 갈색 지붕의 주택 초입에 서서
발밑에서 부서진 한 토막의 가지를 들고

그것을 멀리 던졌다

날아가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것은 새롭게 발견한 산책의 용도였다

  양방향의 새로운 진리를 이미 배운 우리는 어느 날 인생의 어느 골목길에서 호기심에 눈이 반짝이는 유림을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걸 또 예감하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영영 헤어진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건 너무 직관적인 해석이다. “날아가 돌아오지 않았으며”는 양방향의 가지 않은 길에서는 “이제 진정한 만남이 있을 수 있으며”를 반직관적으로 함축할 수밖에 없다.

 


1)  김유림, 양방향, 민음사, 2019, 152-4쪽.

2) Jay Parini, Robert Frost: A Life, New York: Owl Books, 2000, p. 153.

3) 같은 책, pp. 154-5.

4) 피터 센게, 『학습하는 조직』, 강혜정 옮김, 에이지21, 2014, 107쪽.

5) 같은 곳.

6) Peter M. Senge 외, The Fifth Discipline: Fieldbook, New York: A Currency Book, 1994,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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