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원·이여로_긴 끈을 위한 주석

최대한 익명의 움직임에 의한 책

강보원 (문학평론가)

오규원은 『현대시작법』의 초반부에서 “시는 공적 언술이다”라고 쓴다. 그 책에는 시에 대해 또 다른 많은 말들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문장이 그 책을 요약하는 하나의 문장이며, 또 시의 조건과 한계와 가능성 전체를 요약하는 바로 그 문장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시가 공적 언술이라는 말 자체는 아주 단순한 문장이기 때문에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원칙적으로 아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 해석들에 오규원이 동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말이다. 아마 오규원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나는 그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문장은 그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며 또 그 해석은 그가 쓴 책 『현대시작법』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며 그래서 사실 이렇게 해석되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만약 그가 이런 해석에 정말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그 이유를 그가 자신이 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오규원이 그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중 하나는 네 생각을 좀 그만 말하라는 것이다. 네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적어도 시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시에게 중요한 것은 물론 시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이런 입장 속에는 네 생각을 이제 좀 그만 듣고 싶다는 오규원의 생각도 섞여 있었을 것 같다. 오규원은 “인간중심적” 시에 대해 여러 곳에서 비판하는데, 사실 이 비판의 요지는 결국 “너 중심적”인 시들이 싫다는 것이다. 오규원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 나름의 짜증과 지루함과 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감정들은 그의 매우 엄격한 이성 앞에서 마모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 변했겠지만. 말하자면 나는 “인간중심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일종의 에둘러 말하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중심적으로 쓰지 말자. 그런데 네가 뭐였지……? 그래!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가 말한 “날이미지” 시론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 눈앞에 있는 뭘 좀 써라,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눈앞에 있는 뭔가를 말하는 동안에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동안에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규원에게 있어 중요한 건 흔히 생각하듯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져오는 어떤 중단이다. 그 중단만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물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좋다.

이것은 “시는 공적 언술이다”라는 문장에 대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표준적인 해석이다. 그렇지만 이 문장은 표준적인 해석과 완전히 배치되지는 않는 또 다른 의미의 층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시가 공적 언술이라는 것은 시 자체가 갖는 형식에 대한 말이기도 하지만, 시가 쓰이고 기록되고 읽히는 방식에 대한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공적인 것은 공적인 것으로서 사용되고 유통될 때만 공적일 수 있다. 제복은 공적인 의복이지만 집에서 입는다면 사적인 놀이에 사용되는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공공의 공간에 등록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모두에게 접근 가능해야 하며, 그것은 결국 출판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또한 그것은 읽혀야만 하는데 그 말은 시가 어떠한 수준에서는 결코 잊히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완전히 잊힌 어떤 것이 있다면, 누구도 그것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공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관점은 읽히지 않는(인기가 없는) 시는 시가 아니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시라는 텍스트가, 그리고 더 나아가 비-텍스트를 지향하는 어떤 텍스트들이 갖는 공간적 한계에 대한 말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까지 썼을 때 제기될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이렇다.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공적 영역에 등록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적 영역에 등록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어떤 등록자를 필요로 하며, 다시 말해 실재하는 구체적인,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의 모든 부분이 언제나 공적이지만은 않은 어느 누군가에 의해 쓰이고 등록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시는(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혹은 저작권 제도라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하는 생각처럼) 주인을 갖는다. 이것은 시가 공적 언술이라는 그 정의에 있어 피할 수 없는 한계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등록되는 장소/방식과 등록되는 어떤 것의 성질을 완벽히 분리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종류의 필연성은 이 공적인 것의 잔여, 개별적인 자아를 가진 사적 인간의 여하한 흔적을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 속에 남기며, 이는 “네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시의 근본적 입장에 반하여 시라는 텍스트에 독특한 모순과 충동을 부여한다. 그것은 소멸에 대한 충동이다. 반드시 나타나는(등록되는) 방식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소멸에 대한 충동.

이여로의 『긴 끈』은 끊임없이 이 텍스트의 충동, 즉 그것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다. 이 책은 끊임없이 말하는데 그 말의 내용은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이다. 따라서 “A는 P를 믿는다. A는 P를 생각한다. A는 P를 말한다. 는 명제의 형식은, ‘p’는 p를 말한다. 는 형식임이 분명하다”라는 문장은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 된다. 따로 떼어져서 그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인용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인용된 저자의 일기들, 이 두 종류의 텍스트는 책의 양 페이지를 두고 서로를 분리하는 동시에 그 분리를 교란하며 공적인 언술들의 모음에 다가간다. 시대와 국가가 다른 많은 저자의 텍스트들은 이 책의 현장성 쪽으로 끌어당겨지며, 저자의 글들은 수많은 인용들 속에 뒤섞여 저자로부터 멀어진다. 이 책은 저자의 생각을 표현한 어떤 구조물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데, 그 거부하겠다는 결심이 저자의 생각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익명의 움직임에 의해서 거부”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결과적으로 저자를 완전히 지우고자 하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기보다(그리고 그 실패를 매우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전시하기보다) 오히려 멈추지 않는 소멸에 대한 역설 속에 머무르며, 어떤 누군가의 일기, 그러나 모두에게 공개되었으며 누구나는 결코 아닌 특정한 어떤 누군가, 이 파편들을 그럼에도 관통하고 엮어내는 긴 끈, 말하자면 p에 의해 쓰인 일기라는, 모두로부터 먼 어떤 곳에 도달하려 시도한다.

 

독립출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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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의 특이함은, 공공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시”를 비롯한 대문자 “문학”의 특이함은, 그것이 프로그램화된 문법성을 드러낸다는 내적 형식에 따라, 누구든 깃들 수 있는 공적 언술이 되지만 동시에, 그 게임에 참여하는 개별 주체의 특이성 또한 그 공공성에의 참여 정도에 따라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출판은, 내가 보기에 이런 대문자 영역의 공공성을 그냥 무시하고, 개별 주체의 특이성을 주장한다. 독립출판에 대해 비판하기를, 새로운 플랫폼이 활성화된 것은 좋지만 그것이 과잉생산되며 수준이 낮아졌다고들 한다. 나 역시 독립출판 워크숍 따위는 도둑질이라 생각하며 이러한 힐난에 동참했다.  『긴 끈』을 작업한 이후 나의 의식이 바뀐 것은 정서적 연대라기보다(내 책도 거지 같다는 자조가 아니라), 그 비판이 범주 오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독립출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 기대해야 하는 것은,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이런 면에서 강보원 비평가가 그것을 제작이 아닌 행위에 곧바로 대입한 것도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줄이면, 독립출판을 하면서 자신이 그런 공공성에 기입되기를 바라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걸 뒤집어서 비판하는 것도 이상하다. 여기에는 또 다른 공공성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주장하고 원하는 바대로, 정말 각자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인지, 실상 그 결과물들은 통속적인 관습에 기댄 또 다른 “동일성”만을 드러내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가령 독립출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수필이라는 텍스트를 나는 거의 읽지 않는데, 그건 단지 내가 EQ가 떨어지는 인간이거나 미적 취향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개별 출판물에 대한 비판은 하나 마나한 말인데, 내용으로 매체를 판단하는 것은 대개 후건 긍정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나는 독립출판이라는 매체의 생산성을 두 가지로 나눠 말해보고 싶다.

물적 측면에서, “문학” 내외부의 변화를 촉구할 (이 말은 어떤 천재적 개인이 독립출판으로 책을 낸다는 말이나 강력한 자본을 갖췄다는 말이 아니라, “더 이상 이것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인식에 가까운 것 같다) 여지가 또 하나 생겼다는 점이다. 가령 작고 양질의 출판사들이 생겨나고 존속하게 된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를 생산성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은 까닭은, 가령 미술에서 참여나 관계에 기반하고 그것을 강조한 작업들이 그저 제스쳐로 끝나 버린 것과 달리, 출판과 서점은 비록 여전히 작고 위태롭더라도 물리적 토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현상에 기존의 사회경제적 개념을 대응시켜, 수요를 상회하는 대랑생산의 문제로 말하기도 한다. 대량생산된 가축이 쓰레기로 전락해 살처분되듯, 다소 전문화된 의식을 갖춘 대중들은 독자보다 작가가 많은 시대, 읽히지 않는 말들의 범람을 멀찍이 바라보며 냉소를 비춘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라고 말할 때,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가 문제이지, 중단과 절망하기 위한 분석을 위한 분석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또한 문화가 대량생산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물리적 사건이라기보다 비유이다. 그것들은 대개 웹상에 점을 찍고, 몇백 부 안팎으로 생산된다. 우리가 그것을 대량생산이라고 부를 때 전제하는 것은, 그것이 교환됨으로써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본의 이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을 과거의 동인지에 빗대 말하거나, “민속지적 기록으로만 남을 것”이라 즐겨 말하는 것 또한, 더 이상의 사유가 중단된 보수적 인식을 드러내 주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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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이 생산성을 어디로 해석할 것인가? 여기서 문제가 다소 사변적 의식에로 전환된다. 사람들의 욕망을 온건하게 수용할 수 있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생겼다는 점이다.

가령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말의 허망함은, 내 생각에, 그것이 예술가라는 단어를 감각적으로 인용하거나, 내용을 휘발시키는 전칭 판단의 지나친 범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어떤 사람도 예술가가 될 생각이 없는데 누군가 대신 그것을 발화해주기 때문이다.

예술의 지위와 기능에 대한 지난한 논의가 있다. 얼핏 상이한 그 논의들의 공통적인 전제는, 예술이 언제나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더 아름다운, 더 올바른, 더 윤리적인 체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예술은 그것이거나 그것의 부분, 수단, 재현(뭐가 됐든)이다. 설령 예술을 극단적으로 심미화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에서도, 그것은 천재라는 가상의 주체의 속성일 뿐이다. 그것이 가능한 개체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모두가 접근 가능한 방식이 아니라 진리의 특권적 점유라는 점에서, 보편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당위가 아니라 변수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야 한다. 그것을 강조하는 방식은 더 큰 소외만 야기한다.

나는 환원 불가능한 개별성을 각자가 확보하고 강조하는 법에 관심이 있다. 이는 권력의 문제로, 어떤 게임에 참여할지 선택함으로써 각자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임이 목적이 될 수 없다면 수단으로 뒤집으면 그만이다. 나의 공부는 이것을 목표로 할 텐데, 이러한 내용상의 소박함은 이론적 정치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여전히 소박하게 주장하는 말은 대개 보수적으로 이용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문장으로 발표를 끝마치려고 한다. “오늘날의 예술은 우리가 개인적 책임감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나는 어느새 다시 책임감이라는 개인 윤리에 가까운 영역에서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영역은 예술의 본성 따위가 아니라 담론의 겹침 속에서, 구체적인 장소들을 확보해야만 보존될 것이나, 동시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이러한 등 떠밂 뿐이기도 하다.

 

*  『긴 끈』의 출간연계행사인 <긴 끈을 위한 읽기>에서 발표된 글을 엮었습니다.

*  『긴 끈』은 2019년 인천문화재단의 <바로 그 지원> 출판 부문으로 선정되어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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