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현_양윤화 ‘두 개의 터널을 지나서 본 태양 그 옆에 쌍무지개’ 리뷰: 움직임의 영도

글: 권태현(미술비평)

양윤화, 〈엉덩이, 볼을 긁적이는 손, 눈썹, 머리를 긁적이는 손, 기지개 켜기〉, 퍼포먼스, 50분, 2019

양윤화가 이번에 엮어낸 작업들은 하나의 시도에서 출발한다. ‘엄마’라는 낱말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읽어보는 것이다. 그는 ‘엄마’라는 글자를 내려놓고 “제로 직진 아니면 좌회전 가로로 긴 창문 세로로 긴 창문 다시 직진 아니면 우회전”이라고 읽는다. 아니, 본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나도 그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먼저 ‘엄마’라고 써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알고 있는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한글이라는 언어의 체계(langue)가 몸에 배어 있기에 자꾸만 소리 내어 읽게 된다. 그것을 보고 나는 자연스럽게 목을 울림과 동시에 입술을 다문다. 만들어낸 울림을 따뜻한 바람과 함께 코로 살포시 뿜어내고, 잠시 목에 떨림을 지속시킨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입술을 떼어내며 다시 한번 목을 울린다. 이번에는 코와 입으로 동시에 울림이 퍼져나가도록 한다. ‘엄마’라고 옮겨 적을 수 있는 소리가 난다. 어쩌면 가장 먼저 배웠을지도 모르는 말. 그 단어를 둘러싼 두터운 의미와 정동들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이렇게 정해진 규칙에 따라 몸의 기관을 움직이며 말이 입 밖으로 뱉어지는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니 또 다른 방면에서 감각되는 것도 있다. 언어는 의미를 담는 동시에 움직임들의 연쇄 또한 담아낸다. 그것은 몸을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일종의 스코어이기도 한 것이다.

양윤화, 〈제로 직진 아니면 좌회전 가로로 긴 창문 세로로 긴 창문 다시 직진 아니면 우회전〉, 비디오, 2분 8초, 2015

새삼스럽게 언어와 움직임의 관계를 짚어내는 이유는 양윤화의 작업이 낱말에서 의미를 비워내려고 시도하면서 이미지, 말, 움직임, 그리고 다시 (무빙) 이미지를 교차하며 번역해나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리플렛에 영상 링크로만 제시된 옛 작업 〈제로 직진 아니면 좌회전 가로로 긴 창문 세로로 긴 창문 다시 직진 아니면 우회전〉을 통해 작가가 반복하는 형식을 톺아보며 더 이야기해보자. 우선 ‘엄마’를 그 제목으로 읽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을 읊고, 그것과 연결되는 이미지들을 이어붙인다. 길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들이나, 집에 달린 창문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아가 그 이미지들을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며 안무로 다시금 번역한다. 돌고 돌아 그 낱말은 또 다른 움직임을 지시하는 스코어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그 말에 붙어있던 의미가 잠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어에 붙어있는 의미를 뜯어내려는 시도에서 바르트(Roland Barthes)가 ‘글쓰기의 영도(Le Degré zéro de l’écriture)’라고 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의미의 수단일 뿐인 언어는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이다. 도구화된 언어는 인식의 체계를 하나로 수렴시키고, 대문자 역사에 봉사하며 억압을 재생산한다. 거기에서 바르트는 영도의 글쓰기를 통해 문학에서 의미를 비워내는 것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한 글쓰기는 명료한 상징을 담아내는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부정하고 차라리 기호의 부재와 중립, 백색, 순수, 영도 같은 자기 부정을 택하는 것이다. 구조적인 언어와 개인적인 문체 사이에서 그런 부정의 운동은 구조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구원하기 위해 그것을 없는 존재로 생각해야 하는 오르페우스의 역설이기도 하다. 문제는 설령 의미를 비워낸다고 해도 의미 없음이라는 의미가 그 자리를 다시 채워버린다는 것에도 있다. 영도의 이상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의 중력 속에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보려는 그 줄다리기는 적어도 어떠한 힘의 관계를 감각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맥락에서 양윤화의 작업은 말과 몸 그리고 움직임이 의미와 맺는 관계 속에서 또 다른 방식의 영도를 상상할 여지를 만든다.

양윤화, 〈엉덩이, 볼을 긁적이는 손, 눈썹, 머리를 긁적이는 손, 기지개 켜기〉, 퍼포먼스, 50분, 2019

‘엄마’라는 기표를 표백했던 이전 작업에서 나아가 이번에 새로 선보인 작업들은 거기에 또 하나의 번역을 더한다. 그 낱말을 불어(maman)와 영어(mom)로 각각 옮겨 작업을 전개하는 것이다. ‘maman’은 〈엉덩이, 볼을 긁적이는 손, 눈썹, 머리를 긁적이는 손, 기지개 켜기〉라는 작업이 되어 전시보다 앞서 퍼포먼스로 펼쳐졌다. 이전 작업과 같이 제목의 문장이 안무가 되어 퍼포머에 의해 수행되고, 그것을 또 다른 퍼포머에게 가르치는 과정이 공연의 뼈대를 이룬다. 그러한 몸짓에 제목의 문장을 불어로 읽는 법을 익히는 음성이 겹쳐진다. 무언가 배우는 과정들이 퍼포먼스를 구성하기에 공연은 계속되는 말과 몸짓의 반복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공연의 전체 짜임 역시 반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작업은 총 세 개의 챕터로 나뉜다. 첫 번째 챕터는 문장을 배우는 사운드에 안무를 배우는 퍼포먼스가 실황으로 펼쳐진다. 그 과정이 끝난 뒤에 두 번째 챕터에서는 방금 진행된 퍼포먼스를 찍은 영상을 보게 된다. 공연장의 불이 꺼지고 단순히 기록 영상을 찍는 줄 알았던 두 사람이 퍼포머가 되어 그 자리에서 바로 캠코더에 달린 모니터용 프로젝션으로 촬영한 영상을 상영한다. 마지막 챕터는 다시 불이 켜지고, 이번에는 음성만이 공간을 채운다. 공간이 밝아지니 관객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볼거리 없이 소리만 울리는 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본다. 몇몇 사람들은 안무의 스코어가 되어버린 그 문장의 동작을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퍼포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상태가 지속되며 공연은 끝이 난다.

양윤화, 〈엉덩이, 볼을 긁적이는 손, 눈썹, 머리를 긁적이는 손, 기지개 켜기〉, 퍼포먼스, 50분, 2019

양윤화의 작업에서 반복과 그 같음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차이들은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퍼포먼스에서 보고 들었듯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반복이라는 것부터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어떤 기표라도 가장 처음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떠한 상징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같은 기표가 반복되어 나타났을 때야 비소로 그것은 상징으로 인식된다. 반복을 통해서 기표들은 공명하고 의미에 꿰뚫린다. 양윤화의 작업은 언어의 체계를 모른다고 가정하는 픽션으로 그 과정을 역으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표의 반복을 통해 상징들을 체계적으로 꿰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을 관통하고 있는 상징의 체계를 또 다른 방식의 번역과 반복을 통해 거꾸로 뽑아내며 그 구멍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컨대 공연의 마지막 부분, 갑자기 기지개를 켜는 어떤 사람을 보고 또 다른 관객은 자신이 나름대로 세워두었던 체계를 몽땅 다시 의심하게 된다.

양윤화, 《두 개의 터널을 지나서 본 태양 그 옆에 쌍무지개》 전시 전경
양윤화, 〈엉덩이, 볼을 긁적이는 손, 눈썹, 머리를 긁적이는 손, 기지개 켜기〉, 비디오, 25분 20초, 2019

또 하나의 문제는 발화 행위와 시간의 얽힘이다. 퍼포먼스에서 “그는 곧 제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할 거예요.”, “제가 지금 그러라고 했으니까요.” 같은 대사는 말을 마법 주문처럼 쓰며 발화와 그것에서 파생된 움직임, 그리고 시간을 뒤섞는다. 대부분 영상 작업들로 이루어진 전시에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리와인드 기법이 눈에 띈다. 만들어진 안무를 4명의 퍼포머가 디렉션에 따라 수행하는 영상 작업 〈엉덩이, 볼을 긁적이는 손, 눈썹, 머리를 긁적이는 손, 기지개 켜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돌아간다. 그 특유의 시간성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와 행위 사이의 관계가 재고된다. 한편으로 자주 쓰이는 리와인드 기법은 기표를 단단히 구축하는 반복이 아니라, 기표를 해체하는 뒤집어진 반복을 은유하는 형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윤화, 〈두 개의 터널을 지나서 본 태양 그 옆에 쌍무지개〉, 비디오, 8분 37초, 2019
양윤화, 〈두 개의 터널을 지나서 본 태양 그 옆에 쌍무지개〉, 비디오, 8분 37초, 2019

‘mom’을 “두 개의 터널을 지나서 본 태양 그 옆에 쌍무지개”로 읽어내는 작업은 두 개의 영상과 하나의 플립북으로 만들어졌다. 터널과 태양, 무지개의 이미지들을 그러모은 영상 작업에는 이미지와 문자의 차이에서 촉발되는 고민들이 들러붙는다. 이미지가 문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은 화면 안의 모든 것이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두 개의 터널’을 담아낸 푸티지들은 오직 터널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동차 유리의 얼룩이나 창밖의 풍경들이 화면에서 어지럽게 움직인다. ‘쌍무지개’에 해당하는 이미지들은 무지개 우산이나, 퀴어 운동을 상징하는 깃발로 이상한 도약을 해버리기도 한다. 전혀 상관없는 정치적인 사유를 포함하여 온갖 잉여의 것들이 그곳에서 솟아난다. 이미지들은 항상 특정한 의미로 구조화된 다음에도 의미작용의 주이상스로 넘쳐흐르기 마련이다.

양윤화, 〈두 개의 터널을 지나서 본 태양 그 옆에 쌍무지개(You know this dance now)〉, 비디오, 24분 17초, 2019

전시장 맨 위층의 독립된 공간에 상영된 또 다른 영상 〈두 개의 터널을 지나서 본 태양 그 옆에 쌍무지개〉는 가장 설명적으로 단어를 이미지로 해체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다시 안무로 번역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득하게 그 몸짓을 작가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장면을 담아나간다. 잔잔하면서도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 친구가 춤을 배워나가며 서서히 혼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또 다른 말소리가 리듬에 올라탄다. 안무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는 말을 다시 영어로 번역하여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가만 들어보니 가사의 뒷부분은 점점 몸짓을 가리키는 말에서 벗어난다. 움직임을 지시하던 말들은 그 내용을 잃어버리고, ‘우리’라는 주어가 갑자기 등장하며 지시의 대상 또한 흐려진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이 춤을 출 때면 우리는 함께야. 우리는 어두운 터널들을 함께 지나갈 수 있고, 태양을 볼 수도, 함께 무지개를 그릴 수도 있어.(Wherever we are, we are together when we dance to this dance. We can walk through dark tunnels, look at the sun, draw a rainbow together.)” 작가는 ‘친구’라고 쓰지만, 가장 처음의 그 낱말이 크게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다시 그 주인에게 돌아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한 반복과 번역의 과정을 거쳐 저 멀리 갔다 온 그 말은 이제 처음과는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무던히 원래 가지고 있던 구멍을 드러낸다. 제로, 창문, 엉덩이, 터널… 물론 그것은 다시 의미로 가득 차 있지만, 이제야 그 틈새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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