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균_배너(banner), 복수의 화신

작가 이현호에 대한 비평과 그의 2019년 개인전에 부치는 글 B

글: 김동균(작가)

그림1. 전시장 입구에 설치한 현수막 작업. 영화 제목이기도 한 <벤허>라는 단어를 그대로 발음할 때 현수막을 뜻하는 영단어인 <배너>와 유사해지는 것에서 차용해 전시제목을 지었으며, 이와 함께 영화타이틀디자인 또한 패러디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들, 그 옆을 일렬로 메운 가로수, 전봇대 따위에 버젓이 걸려 있는 현수막들이 보인다. 선착순 특별분양, 명품아파트, 350세대, 프리미엄을 누려라…같은 무미한 문구들. 불법이기 때문에 적발되거나 신고가 접수되는 대로 잘려 없어지는 출력물의 무기력한 말로는 어쩌면 우리의 삶과도 닮아있다.

나무 쫄대나 노끈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는 팔랑이는 현수막처럼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도 위태롭긴 매한가지다. 정부, 지자체, 건설사와 같은 초대형 기관과 자본의 침투아래, ‘오래되고 낡고 못 사는 동네’ 라는 낙인과 누명 속에 속절없이 터전을 잃고 어딘가로 사라져가는 사람들.

그림2. 이현호의 개인전 <배너>가 개최된 인천문화양조장 건물 전경. 전시는 본 시설 내에 입주해있는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빔의 전시공간을 대관하여 이뤄졌다.

‘명품, 프리미엄, 혜택, 가치’라는 허울 아래 60m2, 76m2, 125m2에 삶을 송두리째 끼워 넣는 사람들.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그들대로, 보금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가지지 못해 무기력하고 가지기 위해 빌려서 무기력하다.

생성과 제거의 산란한 파생 속에 소외되어 있는 개인들과, 곳곳에 쟁여졌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현수막들은 어딘가 닮아 있다. 비극을 겪은 후엔 만연한 무책임에 노출되어 구제받지 못한 채 떠밀려간다는 점도, 어떤 목적을 위한 부속으로 사용됐다가 가차 없이 내버려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 사회는 어느덧 구성원들 개개인과 그들의 삶을 거리의 현수막처럼 내걸었다가, 돌연 삭제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속에서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뭔가를 그리는 것으로써, 뭔가를 만드는 것으로써, 이런 부조리한 무기력이 일상화된 현실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현호가 택한 것은 ‘복수’다. 그에게 있어 작업이란 작가 본인을 둘러싼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증이자, 성토이다. 회화는 그가 세상에 맞서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그림 3 4 5. 전시전경

그의 작품은 주로 ‘풍경’에 대한 관심과 흥미에 의거한다. 친구들과 낚시를 하기 위해 저수지를 찾아가든,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굽어진 도로를 거슬러 올라 학교를 가든, 몇몇 사람들이 공을 주고받으며 축구를 하고 있는 너른 운동장을 보든, 앵커가 딱딱한 표정으로 온갖 이슈들을 망라하는 8시 뉴스를 보든, 그의 초점은 늘 ‘그때의 풍경은 어땠는가’에 맞춰져 있다.

그가 현수막에 그린 그림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현수막에 그것이 걸려 있었던 뒤편의 공사현장을 그리거나, 그 위에 숱하게 적혀있는 ‘찬란하고 세련된 고급 아파트’가 지어질 어느 건설 예정지의 거대한 공동을 그린다. 누누이 버려지고 소모되는 현수막을 화면 삼아 노련한 솜씨로 아크릴물감을 덧발라 풍경을 그린다. 현수막의 글자들은 그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묘하게도 몬드리안의 구성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품의 메시지와 구성을 위해 쌀포대나 스티커에 인쇄된 글자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종구의 작품도 떠오른다. 어떤 측면에선 민중미술의 걸개그림 같기도 하다.

그림 6. 전시전경

버리고 짓이기는데 일말의 의구심조차 들게 하지 않는 허무맹랑한 문구들이 그의 붓질과 만나 요긴한 회화적 요소로 탈바꿈한다. 무엇이든 쉽게 내치고 부수는 세상을 현수막에 담아내는 과정을 통해 그는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와 망각에 대한 불감증을 꼬집는다. 이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것들이 지닌 나름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역설한다. 거침없이 잘리고 삭제되어야 할 것은 현수막이 아닌 ‘현수막을 만든 시스템’임을 웅변한다. 그렇게 버려진 자본의 산물들은 자신을 세상에 내놓고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체를 겨누고 그의 혐의를 낱낱이 술회하는 확실한 증인이 되어 의미심장하게 복귀한다. 말 그대로, 복수의 화신(‘畵’神)이다. 이런 경우 회화는 작가가 세상에 행하는 작지만 신랄한 복수다. 그 복수는 계란에 바위치기처럼 미미한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론 바위만한 계란처럼 마법 같은 것이 되어 저 멀리까지 활활 번지는 우렁찬 닭울음소리 같은 경종이 되기도 한다.

그림 7. 이번에 현수막 작업들과 함께 전시한 장지 작품. 철도 혹은 도로가 지나는 묵중한 교각을 분할화면을 연결한 파노라마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렇듯 때로는 날카로운 복수의 칼날이 되기도, 때로는 삶을 기억하고 기록함에 있어 소중한 도구가 되기도 하는 그의 풍경작업 일체를 선보인다. 회색의 풍경들을 아크릴을 사용해 그려 담은 현수막 연작과 여덟시 뉴스를 시청하며 방송국 스튜디오의 배경에 보여지는 풍경을 장지 위에 분채로 그린 연작회화, 그리고 작가가 직접 출연해 그를 둘러싼 이 세계와 작업에 대한 태도를 귀띔하는, 광고나 영화의 티져(teaser)영상 같은 느낌의 촬영물 (영상 말미의 크레딧에서 연출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등이 전시공간을 채울 것이다.

그림 8 9 10 11. 전시전경

이현호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그간 쌓아온 작업들의 스펙트럼에 접속해 회화를 통해 기억을 다루는 방법, 그냥 지나치던 단순배경으로서의 일상 속 풍경들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방법, 우리가 주목하고 초점을 맞추는 사건이나 현상의 이면에 존재하지만 가려졌던 것들, 혹은 그동안 계속, 그대로 그곳에 있었으나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보이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금 시야에 접어들게 하여 그것들에 대해 사고하여 현실과 자신에 대해 보다 기민해지는 방법, 거대자본의 논리로 재단되고 제약되는 현대인들의 팍팍한 삶 속에서 재치 있게 저항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방법에 대한 유쾌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어떻게 예술이 되어 가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일지에 이와 같이 적어 놓았다.

  “주말에 쉬는 것도 부족한데 그림 보러 돌아다닐 기운이 어디 있어. 그냥 집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할래. 그런데 보기 좋은 그림도 아니고 공사현장이 그려진 그런걸 보라고?”

본인의 작품에 대해 자조적으로 끄적거린 이 문구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답하겠다. ‘그런걸’ 마땅히 보았으면 한다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그냥 집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하는데’ 사용하는 성냥갑 같은 삶을 일깨워 생동하는 감각과 위트 있는 시각으로 삶을 창작하는 능동자로서의 지평을 열고 싶다면, 마땅히 그렇게 하라고 말이다. 이현호의 작품들을 통해 이러한 건강한 각성을 만나보라고 말이다.

예술은 국가, 사회, 삶, 일상, 집단, 개인 속에서, 늘 그랬던 것들. 그렇고, 그랬으며, 그래왔던, 그런 것들에 균열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그런게, 그런 것이 아니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전시는 그런 것을 위해 보는 것이다.

이현호의 작품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 ‘그런걸’ 어떻게 다루고 빚어내는지 지켜보자.

그림 13 14 15 16. 전시전경

 

* 엮인 글 링크

1. 이지부스트(easy-boost)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화가

2. 배너(banner), 복수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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