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 Fisher_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

글: 마크 피셔(Mark Fisher)
번역: 이여로

Bran Castle, Romania

올여름,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했다. 과로에서 오는 탈진으로 생산적 활동이 불가능했던 나는, 늘어나는 피로와 우울 속에서 소셜 네트워크를 표류하고 있었다.

‘좌익(Left-wing)’ 트위터는 종종 비참하고 낙심한 지역(zone)일 수 있다. 올해 초 트위터에서는 몇 가지 이슈가 큰 화제였는데, 좌파(left)로 인식되는 사람들 몇몇이 ‘호명’ 되고 비난받은 것이다. 이 사람들 말이 때론 반대할만한 것이긴 했지만 그들이 한 개인으로서 쫓기듯 비난받은 방식은 그곳에 끔찍한 잔여물을 남겼다. 악한 양심(conscience)과 마녀사냥을 일삼는 도덕주의의 악취. 이 사건들에 내가 함구한 이유는, 말하기 부끄럽지만 두려워서였다. 불량배들은 운동장의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그들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언쟁(exchange)의 공공연한 야만성은 더 만연한 무언가를 같이 끌고 온다. 그 만연함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쇠약하게 만드는 것. 불쾌한(snarky) 원한의 분위기. 이 원한의 가장 빈번한 대상은 오언 존스(Owen Jones)[1] 인데, 지난 몇 년간 영국에서 계급 의식을 끌어 올린 가장 책임감 있는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이, 내가 그리도 낙담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것이 투쟁을 실제 영국 생활의 중심지까지 끌고 가는 데 성공한 좌파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누가 그와 함께 주류를 이루려고 하겠는가? 이렇게 방울방울 떨어지는 모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한 한계점에 머물러 있는 것뿐일까?

우울감의 마비 상태에서 나를 깨워준 한 가지는 옆 동네 입스위치(Ipswich)에서 열리는 인민회의(People’s Assembly)에 참석하러 가는 일이었다. 인민회의는 으레 비웃음과 비아냥거림을 받아왔다. 유명인 몇몇이 앞에 나서 선도하는 연예인 문화마냥 존스를 포함한 언론 좌파들이 스스로를 과장해서 전시하는 쓸모없는 스턴트 쇼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입스위치에서 열린 회의는 이같은 풍자화(caricature)랑은 매우 달랐다. 오언 존스의 열렬한 연설로 막을 내린 저녁 일정의 전반부는 분명히 주빈석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지만, 후반부에는 서퍽주(Suffolk) 전역에서 온 노동계급 활동가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서로를 지지하고 경험과 전략을 공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좌익주의가 위계적이라는 사례가 되기는커녕, 인민회의는 수평적 관계가 어떻게 수직적 관계와 결합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미디어의 힘과 매력은 이제껏 한데 모여 정치 회의를 해본 적 없는 사람들과 노련한 운동가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끌어들였다. 분위기는 반-인종차별적이고 반-성차별적이었지만, 매캐하고 숨 막히는 안개처럼 좌익 트위터에 드리워진 죄책감과 의혹에서는 신선하게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러셀 브랜드(Russell Brand)도 있었다. 나는 브랜드를 오랫동안 지지해왔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유명 코미디언 중에, 노동계급에서 온 몇 안 되는 인물. 지난 몇 년간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어이없을 만큼 고상한 얼간이 마이클 매킨타이어(Michael McIntyre)와 지루한 고학력 코미디언들이 무대를 장악해선 사람들을 칙칙하게 젖게 만들기나 했고, 점진적이지만 돌이킬 수 없이 중산층화되었다.

브랜드와 제러미 팩스맨(Jeremy Paxman)[2]의 인터뷰가 뉴스나잇(Newsnight)에 방송되기 전날, 입스위치에서 열린 브랜드의 스탠드업 코미디 메시아 콤플렉스(Messiah Complex)를 본 적 있다. 그 코미디 쇼는 분명 친-이민적이고, 친-공산주의적이고, 반-동성애차별적이며, 노동계급의 지성으로 가득 찼고 그걸 보여주길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대중문화가 그런 주제들을 다루는 방식에 비춰보면 아주 이상한 쇼였다(한마디로, 후기-구조주의 ‘좌파’ 설교자들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정체성을 최우선시하는(identitarian) 경건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맬컴 X, 체 게바라, 기성의 리얼리티를 뒤흔들고 해체하는 싸이키델릭한 정치가들이 그랬듯, 손가락을 흔들며 설교하는 대신 무산계급(proletarian)적이고 관능적인(sexy) 공산주의(communism)를 보여줬다.

다음날 밤, 브랜드의 출현(appearance)이 분열의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했다. 우리 중 몇몇의 눈에는 브랜드가 팩스맨을 웅변적으로 제압해버린 것[3]이 몹시도 감동적이고 기적적이었다. 노동계급 출신인 자가 지성과 근거를 사용해 계급적으로 ‘윗사람’인 자를 그토록 완벽하게 부숴버린 자리가 언제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건 자니 로튼(Johnny Rotten)이 빌 그런디(Bill Gruddy)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과는 다르다[4]. 자니 로튼의 적대행위는 계급적 고정관념에 도전하기보다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브랜드는 팩스맨보다 앞서 나갔고, 유머의 사용은 ‘좌파주의(leftism)’의 엄숙함과 브랜드를 구분해준 것이었다. 브랜드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반해, 도덕적인 좌파들은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데 전문가고 그들의 머리가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젖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에 도덕적인 좌파는 신속하게, 이 사건은 브랜드가 주류 미디어인 ‘토론’의 싱거운 관습을 비범하게 깨뜨린 것도 아니며,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브랜드 자신의 주장과도 무관한 것이라 못 박았다(귀를 틀어막은 소부르주아 나르시스트 ‘좌파’에게는 브랜드의 주장이 브랜드 본인이 혁명을 이끌기 원한다는 말로만 들릴 것이다. 그들은 이에 전형적인 분노로 반응했다. ’나를 이끌어 줄 벼락스타 같은 건 필요치 않거든‘). 도덕주의자들에게 중차대한 이야기로 떠오른 것은 브랜드의 개인적 품행, 특히 그의 성차별주의(sexism)에 관한 것이었다. 도덕적 좌파들에 의해 끓어오른 열성적인 반공주의(McCarthyite)적 분위기 속에서, 성차별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들은 곧 브랜드는 성차별주의자라는 의미였고 또 그가 여성혐오자(misogynist)라는 의미였다. 자르고 말리고, 완결짓고, 정죄하기.

우리 중 누구나가 그렇듯, 브랜드도 자신이 사용한 언어와 행동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 질문은 동료의식과 연대의 분위기 속에서 건내져야지, 지금처럼 익명의 사람들 앞에 세워져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메하디 하산(Mehdi Hasan)에게 성차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브랜드는 그를 심판하는 사람들의 돌 같은 얼굴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기분 좋은 유쾌함이 가득한 겸손을 보여줬음에도 그랬다. 내가 성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할머니 생각이 나네요. 내가 알던 사람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인종차별을 하셨죠. 그런데 할머니는 그 사실을 몰랐어요. 나도 내가 혹시 어떤 문화적 선입견(hangover)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달링(darling)’이나 ‘버드(bird)’같은, 무산계급(proletariat)의 언어를 아주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죠. 그러니 여성들이 내가 성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나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나도 노력할 거고요[5]

브랜드의 개입은 [좌파를] 지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감(inspiration)이었고, 병력을 소집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영감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몇 달 전이라면, 상위 계층에 속하는 좌파(PoshLeft) 도덕주의자들이 우익 언론에서 긁어모은 ‘증거’를 손에 쥔 채 브랜드를 그들의 캥거루 재판[6]으로 끌고 와 인격적으로 살해할 때에도, 나는 침묵했을 것이다. 다음에는 내가 그들을 상대할 차례였다. 대화를 나눴던 팩스맨이 그랬듯, 브랜드에 대한 반응은 아주 빠르게 의미심장해졌다. 로라 올드필드 포드(Laura Oldfield Ford)가 지적한 것처럼, 무언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분명해진 것 중 하나는 스스로를 ‘좌파’로 꾸미는 사람들 대다수가 계급에 대한 물음을 억압하는 어떤 방식이었다.

계급 의식은 미약하고 일시적이다. 아카데미와 문화 산업을 장악한 소부르주아들은 논의 주제가 떠오르기도 전에 그것을 사들여 막아버릴 수 있는 선취권과 미묘한 편향을 가지고 있고, 만약 논의가 발생하면 그걸 논하는 것이 끔찍하게 부적절하고 예의를 파괴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몇 년 간 나는 좌파, 반-자본주의자들의 행사에서 연설해왔지만, 대중 앞에서 계급에 대하여 말하거나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계급 [문제가] 다시 등장하자, 브랜드 사건을 다루는 어느 곳에서도 계급 문제를 배제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브랜드는 사립학교 출신 좌파 세 명에게 신속하게 심문을 받고, 판결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브랜드가 노동계급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백만장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좌파주의자’들이 팩스맨의 질문 이면에 흐르는 전제에 근본적으로 동의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무엇이 이 노동계급에게 말할 권리를 주는가?” 그리고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잃지 않아야 하니, 계속 가난하고 불분명하고 무력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좌파주의자들의 생각을 일러주는 것이기도 했다.

누군가 브랜드에 관해 쓴 페이스북 글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 글을 누가 썼는지 모르고, 지명하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그 글이 스스로를 좌익으로 분류하는 동시에 그러한 자기 분류를 전시하는 게 나쁘지 않다는, 일련의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증상(symptomatic)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마치 아이들의 숙제를 검토해주는 학교의 교사나 환자를 판단하는 정신과 의사인 것처럼 그 말투 전체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압적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브랜드는 좋지 않은 관계나 경력 하나만 추가되어도 마약 중독이나 더 나쁜 일에 빠질 정도로 극심하게 불안정하다. 그 사람들은 본인들도 사실 브랜드와 아주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브랜드가 ‘불안정’해지는 이유가 바로 그 ‘좌파’ 부르주아들이 거들먹거리면서 유사-초월적으로(faux-transcendent) 내리는 ‘평가’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를 충격적으로 밝혀주는 지점이 또 하나 있다. 브랜드의 부분적인 지식과 종종 주춤거리고 설득하듯 내뱉는 어휘들을 독학자의 특성이라고 언급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관대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만한 문제가 전혀 없어’ 얼마나 훌륭들 하신가! 이건 ‘원주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19세기 식민지 관료의 글도, 사립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다니는 소년을 묘사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어느 교장이 쓴 글도 아니다. 바로 몇 주 전 ‘좌파’의 글이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까? 가장 먼저, 우리를 암울하고 의기소침한 단계(pass)로 이끄는 담론과 욕망의 정체를 밝혀내야 하는데 그곳에서 계급은 사라졌지만 도덕주의는 어디에나 있고, 그곳에서 연대는 불가능하지만 죄의식과 두려움은 편재한다. 우리가 우파에 의해 겁박당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운동(movement)을 더럽히는 주관성의 부르주아적 양태(mode)들을 우리가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초래한 두 가지 리비도적-추론적 배치(libidinal-discursive configurations)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좌익이라 부른다. 브랜드 사건에서 분명해졌듯, 이는 곧 계급 투쟁의 수행자로 정의되는 좌파가 거의 다 사라졌다는 신호이다.

 

뱀파이어 성 안으로 Inside the Vampires’ Castle

첫 번째 배치의 형상은 내가 뱀파이어 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뱀파이어 성은 죄의식의 전파에 특화한다. 그 성은 파문시키고 정죄하고자 하는 성직자의 욕망과, 실수를 가장 먼저 발견하려는 학계 공론가들의 욕망과, 배타적 그룹의 일원이고자 하는 힙스터들의 욕망으로 추동된다. 뱀파이어 성을 공격할 때의 위험은, 그것이 동시에 인종차별, 여성차별, 동성애차별에 맞선 투쟁을 공격하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고, 이런 생각을 강화하는 무엇이든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뱀파이어 성은 여러 차별에 맞서는 투쟁의 적합한 표현이 아니라, 이러한 운동의 에너지를 전유(appropriation)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적 도착증으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 정체성을 우선시하는(identitarian)[7] 범주들로 규정돼선 안 되는 이러한 투쟁이, 부르주아적 대타자에게 인정받는 ‘정체성들’에 대한 탐구가 되는 순간에, 뱀파이어 성이 탄생했다.

내가 백인 남성으로서 분명 즐기고 있는 특권은 부분적으로는 나의 민족성과 성별을 내가 잊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이러한 맹점을 어쩌다 의식하게 되는 일은 갑자기 정신이 드는 계시적 경험이다. 그러나 뱀파이어 성은 정체성 중심의 계층화(identitarian classification)에서 자유로운 세계를 추구하기보다, 사람들을 식별-수용소(identi-camp)로 다시 몰아넣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은 지배 권력(dominant power)에 의해 마련된 용어들로 영원히 규정 받고, 본인의 자의식 때문에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며, 동일한 정체성 집단에 속하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유아론(solipsism)의 논리에 따라 고립된다.

나는 여기서, 계급에 대한 단순한 언급마저 인종과 성의 중요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곧장 읽혀버리는, 반대로 뒤집힌 투사-부정의 매커니즘을 발견했다. 그런데 뱀파이어 성은 계급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인종과 성에 대한 극히 자유주의적인 이해를 이용하므로,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올해 초, 특권이라는 주제로 트위터상에서 벌어진 터무니없고 외상적인(traumatic) 모든 논란에서, 계급적 특권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부재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인종, 성, 그리고 계급을 접붙이는 일(articulation)이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뱀파이어 성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계급과 다른 범주들을 뜯어 놓는 짓(dis-articulation)이다.

뱀파이어 성이 해결하겠다고 덤벼든 문제는 이것이다. 어떻게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졌으면서 동시에 희생자, 소수자(marginal), 반대자로 등장할 수 있을까? 해결책은 이미 주어져 있다. 기독교 교회에. 뱀파이어 성은 기독교가 발명한 심리 고문 기구들과 어두운 병리학, 지옥 같은 전략들, 그리고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기술한 모든 것을 사용하고 있다. 나쁜 양심의 사제단, 죄의식을 퍼뜨리는 경건한 행상인들의 둥지, 이것이 정확히 니체가 기독교보다 더 나쁜 것이 이미 오고 있다고 말했을 때 예언한 것이다. 자, 바로 여기에 있다…

뱀파이어 성은 어린 학생들의 에너지, 불안, 취약함을 먹어 치우지만, 대개는 특정 집단의 (더 ‘주변적’일 수록 더 좋다) 고통을 학문적 자본(academic capital)로 전환하며 살아간다. 뱀파이어 성에서 가장 찬사를 받는 인물은 그 고통에서 새로운 시장을 발견해 끄집어낸 사람들이다. 착취 받는 기존의 어느 집단보다 더 억압받고 더 종속된 집단을 발견한 자들은 [아카데믹의] 대열에서 매우 빠르게 승진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뱀파이어 성의 첫 번째 법칙(law): 모든 것을 사유화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라. 뱀파이어 성은 구조주의 비평(structural critique)에 이론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적 행위 외의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노동계급은 끔찍하게 발전이 없고 종종 아주 무례하기만 하다. 기억하라: 개인을 비난하는 일은 비인격적 구조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보다 언제나 중요하다. 실질적인 지배 계급은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은 계급으로서 행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우리가 말하는 ‘음모론’의 대다수는 지배계급이 계급단결을 통해 보여주는 것들이다). 뱀파이어 성은 지배 계급의 복제된 하수인(dupe-servant)이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연대(solidarity)’와 ‘집단(collectivity)’에 관해 입바른 말이나 하면서, 권력이 강제한 개인주의적 범주들이 정말 유효한 것처럼 군다. 왜냐면 흡혈귀들은 그 핵심에서 소부르주아이기 때문에 뱀파이어 성의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극히 경쟁적이지만, 그들의 경쟁의식은 또한 부르주아 계급의 전형적인 수법인 수동적인 공격성으로 억압되어 있기도 하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연대가 아니라 상호 간의 공포다. 이제 자신이 폭로되고, 비난받고, 살해 받으리라는 공포.

뱀파이어 성의 두 번째 법칙: 사유와 실천(thought and action)을 매우, 매우 어렵게 보이도록 하라. 결코 가벼워선 안 되고, 유머도 없어야 한다. 유머는 그 정의상 심각하지 않다. 그렇죠? 사유는 고된 작업이고, 찌푸린 미간에 고상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감이 있는 곳에, 회의주의를 도입하라. 이렇게 말할 것: 서두르지 마, 우리는 더 깊이 생각해야 해. 기억할 것: 확신을 갖는다는 건 억압적이고 이내 수용소(gulag)로 귀결될 수 있다.

뱀파이어 성의 세 번째 법칙: 가능한 많은 죄책감을 퍼뜨려라. 죄책감은 많을수록 좋다. 사람들은 분명 기분이 나쁠 것이다. 이는 사물의 중력을 이해하고 있다는 표지(sign)이다. 당신이 특권에 죄책감을 느끼고 당신 아래 계급의 사람들도 당신과 함께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면, 계급 특권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너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구나, 그렇지?

뱀파이어 성의 네 번째 규칙: 무언가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어라(essentialize).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복수적이고 다양하다고, 뱀파이어 성의 구성원들을 통해 (그들의 변함없는 부와, 특권과, 자신들에게 동화시키려는 부르주아적 배경을 은폐하기 위해) 언제나 말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항상 적이 상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뱀파이어 성에 활기를 돋아주는 욕구들(desires)은 상당 부분이 파문하고 비난하려는 성직자들의 욕구이기에, 뱀파이어 성에는 선과 악에 관한 강한 구분이 있어야 하고 악은 필수적이다. 전술에 주목하라. X는 특정한 방식으로 발언/행동했다. 이 발언/행동은 트랜스포비아적/성차별주의적 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까진, 그래 괜찮다. 그런데 그다음이 놀라운 것이다. ‘X는 따라서 트랜스포비아거나 성차별주의자’라고 규정된다. 무신경한 발언이나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의 정체성 전체가 규정된다. 일단 뱀파이어 성이 마녀사냥을 시작하면, 그 희생자는 (자주 노동계급의 사람이며 수동적인 공격성을 보이는 부르주아식 예절을 교육받지 못한)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부추겨지다가, 그로 인해 더더욱 천민 취급을 받을 것이고 흡혈귀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뱀파이어 성의 다섯 번째 법칙: 자유주의자처럼 생각하라(당신이 그러하니까). 어떤 일에 대한 분노를 끊임없이 먹어 치우며 살아가는 뱀파이어 성은, 지극히 분명한 사실들을 끝없이 지적하는 것으로 자신의 작업을 이어간다. 자본은 자본과 같이 행동한다(아 그래, 이건 아주 좋지 않은 일이야!) 억압적인 국가 기관은 억압적이야. 우리는 항의해야 해!

 

유럽의 신-무정부주의(Neo-anarchy)

두 번째 리비도적 대형(formation)은 신-무정부주의이다. 내가 신-무정부주의자라는 말로, 영국의 연대 연맹(The Solidarity Federation)과 같이 실제 일터에서 조직되어 활동하는 혁명적 노동조합운동(syndicalist)주의나 무정부주의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 말은 오히려,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정치적 개입은 트위터에서 논평을 하거나 학생 운동에 그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뱀파이어 성의 주민들처럼, 신-무정부주의자들도 계급적 특권층 출신은 아니더라도, 대개 소부르주아 출신이다.

그들은 또한 압도적으로 젊다. 20대나 30대 초반에 신-무정부주의적 입장에 선다는 것은 어떤 좁은 역사적 지평을 의미한다. 신-무정부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만을 경험해보았다. 그들이 정치적 의식을 갖출 때까지 노동당은 소수의 사회 정의만을 갖고서 신자유주의를 구현하던 블레어주의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이제 종종 완고하게 우쭐대는 모습을 보자면 그들 중 상당수는 주목할만한 정치적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신-무정부주의가 지닌 문제는 그것이 탈출구를 제시하기보다 아무런 반성(think) 없이 지금의 역사적 순간을 반영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당의 역할이 주요 산업과 공공 설비를 국유화하거나 국민건강보험을 설립하는 것임을 잊었거나, 어쩌면 정말 모르고 있다. 신-무정부주의자들은 국민건강보험 제정을 위한 시위에 참여하거나 복지국가가 해체되고 있다는 항의를 리트윗하면서, ‘의회 정치는 무엇도 바꾸지 못해’ 라거나 ‘노동당이 쓸모 있던 적 있냐’고 역설할 것이다. 이상한 암묵적 규칙이 있다. 의회가 해온 일에 항의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의회나 대중 매체에 들어가 변화를 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류 미디어는 업신 여겨야 마땅하지만, BBC의 토론 프로(BBC Question Time)는 트위터에서 지켜보며 신음하는 시간이다. 순수주의(Purism)는 결정론(fatalism)으로 빠진다. 부패한 주류와 엉켜 어떤 식으로든 더럽혀질 바엔 피하는 편이 낫고, 내 손을 더럽히는 위험을 감수할 바엔 쓸모없는 ‘저항’을 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그토록 많은 신-무정부주의자들이 우울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의 우울이 대학원 생활이 주는 불안감에 따라 심해진다는 것은 분명한데, 뱀파이어 성이 그렇듯 신-무정부주의자들도 대학가에 본거지를 두고 있고, 석·박 학위를 따려는 연구자들이나 근래에 학위를 마친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기 때문이다.

Mark Fisher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두 가지 배치 형태(configuration)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그것들이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기 때문에, 자본에 의해 번영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이다. 자본은 계급 의식을 분해함으로써 조직화한 노동계급을 제압하고 ‘고된 노동에 종사하는 가정’이 더 넓은 계급적 이해관계 대신에 스스로를 그들만의 협소한 이해관계로 규정하도록 유혹함으로써, 노동조합을 자신의 아래에 사악하게 복종시킨다. 이런데도 자본이 과연 계급정치를 도덕적인 개인주의로 대체하려는 ‘좌파’를, 연대를 구축하는 대신 공포와 불안을 퍼뜨리는 ‘좌파’를 염두에 두기나 할까?

두 번째 이유는 조디 딘(Jodi Dean)이 말해 온 의사소통 자본주의(communicative capitalism)에 있다. 자본주의적 가상공간(cyberspace)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뱀파이어 성과 신-무정부주의자들을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뱀파이어 성의 경건한 도덕주의는 수년간 특정 ‘좌파’의 특징이었지만, 당신이 교회나 다름없는 그 좌익 그룹의 일원이 아니라면 그들의 설교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고, 그들의 담론이 전파하는 영매적 병리학(psychic pathology)에서 우리 스스로를 거의 보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정체성 우선주의(identitarianism)를 배격하는 일이 긴급하고, 또한 정체성 따위는 없으며 다만 욕망, 이익, 신분(identification)만이 존재함을 인식해야 한다. 영국의 문화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근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선보인 존 아캄프라(John Akomfrah)의 설치작업 <끝나지 않는 대화 The Unfinished Conversation>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담은 필름에서 아주 강렬하고 감동적으로 보여주듯― 정체성을 우선시하는 본질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람들을 이미 존재하는 어떤 동등함(equivalence)의 사슬로 묶는 대신, 요지는 어떤 연결(articulation)도 잠정적이고 변형 가능한(plastic)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다. 새로운 연결은 언제나 새로이 창조될 수 있다. 무엇도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다. 슬프게도, 우파는 좌파보다 더 효율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따라 행동한다. 부르주아-정체성주의 좌파는 어떻게 죄책감을 전파하고 마녀사냥을 해야 할지는 알지만, 전향시키는 법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도, 결국 그들의 요점은 아니다. 목표는 좌익의 입장을 대중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사람들을 그 위치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고, 우위를 점하는 엘리트의 지위에 머무르면서, 이제는 도덕적 우위로 더해지는 계급적 우위까지 점하는 것이다. “네가 감히 말을 하다니.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건 우리야!”

그러나 정체성주의를 거부하려면 계급을 재신설해야만 가능하다. 핵심에 계급을 두지 않는 좌파는 자유주의적 압력 단체가 될 수밖에 없다. 계급의식은 언제나 이중적이다. 계급의식에는 계급이 모든 경험을 틀 짓고 형태 짓는 방식에 대한 지식과, 계급 구조 내에서 우리가 점하고 있는 특정한 위치에 대한 지식이 함께 담겨 있다. 우리가 투쟁하는 목적은 부르주아에게 인정을 받기 위함도 아니며 부르주아들 자체를 해체하려는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파괴해야 하는 것은 계급 구조다(어떤 구조는 모두를 상처입힌다. 그로부터 물질적 이익을 얻는 사람일지라도 상처 입는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노동계급의 이익은 모두의 이익이다. 부르주아의 이익은 자본의 이익이다. 그것은 누구의 이익도 아니다. 우리의 투쟁은 새롭고 놀라운 세계를 구축(construction)하는 쪽으로 나아가야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왜곡되는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다.

만약 이런 일이 위압적이고 검열적인 작업으로 보인다면, 그래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앞서가 이런 저런 모습들을(prefigurative) 만들어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예-상(pre-figuration)을 넘어설 것이다. 우리는 선순환을, 주체성의 부르주아적 양태들(mode)이 해체되고 새로운 보편성이 세워지는 자기-성취적 예언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고 학대함으로써 자본이 할 일을 대신해주는 행위를 멈추고, 동료애와 연대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이 말은 물론 우리가 언제나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배제(exclustion)와 제명(excommunication)의 두려움 없이 기꺼이 불화(disagreement)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할지 아주 전략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제나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본의 리비도를 조정하는 기술자들에 의해 소셜 미디어에 평등주의(egalitarianism)가 울려 퍼짐에도, 이곳이 현재 적의 영토임을, 자본의 재생산에 전념하는 공간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지형을 점령할 수 없고 계급 의식을 생산하는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의사소통 자본주의가 지정해주고 참여하도록 끝없이 회유하는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계급투쟁임을 기억해야 한다. 목표는 활동가가 ‘되는’ 것이어선 안 되고, 노동계급이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를 변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뱀파이어 성 밖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 이 글은 2013년 11월 22일 노스 스타(The North Star)에 최초 게재된 기사로, 저자인 마크 피셔의 동의로 시민 교육을 표방하는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 openDemocracy에 재-게재되었습니다.

* 원문: https://www.opendemocracy.net/en/opendemocracyuk/exiting-vampire-castle/

 

 


[1] 오언 존스(Owen Jones, 1984~): 영국의 좌파 운동가로, 2011년 차브족(Chav)에 대한 문화비평서를 출간했는데, 비행 청소년쯤으로 분류되는 노동계급 출신 차브족에 대한 도덕적 혐오가 어떻게 계급 의식을 은폐하며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밝혔다.

[2] BBC 뉴스나잇을 25년간 진행한 언론인으로, 정치인들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유명함.

[3]

Jeremy Paxman: 러셀 브랜드, 정치 잡지를 편집하는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Russell Brand: 뭐, 매력적인 여성에게 [스페셜 에디터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 같은데요. 일반적인 기준이 뭔지 몰라요. 정치적인 잡지의 편집을 맡는 사람들이 누군지 모릅니다. 보리스…* 그는 한번 맡았죠. 그렇죠? 나는 미친 헤어스타일에, 아주 훌륭한 유머 감각을 가진 사람인데,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상적이죠. * Boris Johnson (1964-) 보수당 정치인으로 현 58대 영국 총리. 언론인 출신으로, 보수 일간지 더 타임스에 재직 중 인용구를 조작하다 해고되었고 이후 보수 성향 잡지인 스펙테이터의 편집장 등으로 활동.
Paxman: 그런데 당신이 투표를 안 한다는 건 사실입니까?
Brand: 예, 안 하죠. 투표 안 합니다.
Paxman: 그럼 당신이 어떻게 정치에 대해서 말할 권리를 가집니까?
Brand: 음, 아주 좁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내 권리를 얻지는 않는데요. 나는 다른 곳을 보죠. 휴머니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위해서요. 대안의 뜻은, 대안적인 정치 시스템입니다.
Paxman: 그건…
Brand: 아직 발명 못 했어요, 제러미![웃음] 지난주에 잡지 편집해야 됐고요. 할 일이 많아요. 그래도 내가 할 말은, 당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거죠. 지구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면 안 된다.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해선 안 된다. 입증할 책임은 힘(power)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요. 새로운 걸 해보려고 잡지 편집을 맡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요.
Paxman: [끊으며] 어떻게 사람들이 힘을 얻는다고 생각합니까?
Brand: 세대를 거쳐 보존된 위계질서(hierarchical systems) 같은 게 있는 것 같은데…
Paxman: 그들은 투표를 통해 힘을 얻어요. 그게 사람들이 힘을 얻는 방법…
Brand: 당신 말은 제러미…
Paxman: 투표하라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Brand: 그건 아주 좁고, 아주 좁은 규범적 제한(parameter)이죠. 그 안에서 변화란…
Paxman: 민주주의는 그렇게 작동합니다.
Brand: 잘 안 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제러미. 지구가 파괴되고 있고, 거대한 규모의 경제적 격차가 있다는 걸 생각해봐요. 당신 말은 대안은 없다는 거 아닌가요? 대안은 없다고. 오직 이 시스템만 있다고.
Paxman: 아니, 그런 말이 아닙니다. 당신이 투표할 수 없다면, 우리가 왜 당신의 정치적 견해를 들어야 하냐는 겁니다.
Brand: 내 정치적 견해 들을 필요 없어요. 근데 내가 무력감(apathy) 때문에 투표를 안 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대대로 계속되고 있는 정치계급의 거짓말, 배신, 기만에서 피로와 권태를 느끼고, 거기에 흥미가 없어서(indifference) 투표를 안 하는 거죠. 그런 정치 시스템에서 대변(represent) 되지 않는, 권리를 박탈당하고, 환멸을 느끼고, 낙담한 하층계급들이 극에 달해 있으니, 투표는 그 시스템에 암묵적으로 공모하는 것이고, 그건 내가 제안하려는 게 아니에요.
Paxman: 바꿀 생각은 왜 안 합니까?
Brand: 하고 있어요!
Paxman: 투표로 시작하는 건 어떻고?
Brand: 아하, 그런다고 될 리가 없죠. 사람들은 이미 투표를 해왔고, 그게 지금의 패러다임을 만들었는데요!
Paxman: 언제가 마지막 투표였습니까?
Brand: 해본 적 없어요.
Paxman: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Brand: 네. 그게 진짜 나쁘다고 생각해요?
Paxman: 그럼 18세 전에는 어땠습니까.
Brand: 마약 중독자가 되기 바빴죠. 봉사해야 할 주민들은 무시하고, 정말 대기업들을 위해서만 행정을 운영하는, 무관심한 시스템에 악화돼가는 사회적 조건이 바로 내가 길러진 곳이니까요.
Paxman: 당신에게 마약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정치계급 탓으로 돌리는 겁니까?
Brand:아니, 아니, 아니. 내가 현행 정치 시스템에 의해 소외된 사회적, 경제적 계급의 일원이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마약 중독은 막대하고, 소외되고, 빈곤한 인구가 있을 때 만들어지는 문제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은 현행 정치 시스템에 참여하고 싶다고 느끼지 않아요. 왜냐면 그들에게 무엇도 해주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요. 정치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나는 그 무관심이…
Paxman: 당연히 그들을 위하지 않지요, 그들이 나서서 투표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Brand: 아, 사랑스러운(my darling) 제러미, 그런 말이 아니에요. 무관심은 우리한테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무관심은 정치인들이 만들어요. 그들은 우리 요구에 무관심해요. 기업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잖아요. 보세요, 토리당[보수당을 칭하는 속어]은 EU를 법정에 세우죠. 상여금(bank bonuses)을 깎으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아닙니까? 아니에요?
Paxman: 그렇…
Brand: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 거기 맞춰요?
Paxman: 당신은 민주주의를 믿지 않아. 혁명을 원하는 거잖습니까. 아닙니까?
Brand: 지구는 파괴되고 있어요. 우리는 하층계급을 생산해내고, 전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가진 진짜 문제, 적법한 문제는 우리가 가진 정치계급에 의해 다뤄지지 않아요.
Paxman: 그래요, 전부 사실일 수 있지요.
Brand: 사실이에요!
Paxman: 그런데 당신은… 나는 그 문제들로 당신과는 논쟁하지 않을 겁니다.
Brand: 그럼 왜 언짢은 거죠? 턱수염 때문은 아니잖아요. 턱수염은 아주 멋지구만.
Paxman: 왜냐면 아마도…
Brand: 만약 데일리 메일[영국의 보수성향 황색언론]이 투표를 원하지 않으면, 나는 하겠어. 그들에게 반대하니까. 턱수염아 더 자라라, 겨드랑이털에 엉키게~
Paxman: 당신 정말 하찮은(trivial) 인간이야[웃음]
Brand: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하찮다고?
Paxman: 그렇소.
Brand: 몇 분 전에 당신은 내가 혁명을 원하기 때문에 나랑 한판 붙었어. 지금은 하찮은 인간이군요. 나는 여기저기 튀어 다니는 구만[팍스맨 무릎에 손을 짚으며].
Paxman: 당신이 혁명을 원해서 덤벼든 게 아니오.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원하지. 나는 그게 어떻게 될런지 묻는 거요.
Brand: 300명의 미국인이 85만 명의 최빈층 미국인과 같은 양의 부를 가질 만큼 빈부격차가 심한 곳이 되진 않겠죠. 착취당하고 소외된 하위계급은 계속해서 무시당하고, [영국의 보수 정치인 데이비드] 캐머런과 [조지] 오즈번이 은행가들이 계속 상여금을 받아 챙길 권리를 지켜주려고 법정에 가는 동안 복지는 개박살나는 곳은 아니겠죠. 이게 내가 말하려던 전부…
Paxman: 계획이 뭐요? 그게 내가 물으려는 전부입니다. 무슨 계획이요? 혁명에 관해 모호하게만 말하고 있잖소. 그게 뭡니까?Brand: 부(wealth)의 대규모 재분배, 기업의 중과세, 에너지 기업을 비롯해 환경을 착취하는 어떤 기업에라도 막대한 책임을 묻는, 사회주의적 평등주의 시스템이요. 그들에게 세금이 부과되어야죠. 이익(profit)이라는 개념을 굉장히 축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데이비드 카메론은 이윤은 더러운(dirty) 단어가 아니라고 말했죠. 나는 이윤은 추잡한(filthy) 단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윤이 있는 곳에는 적자도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시스템은 이러한 생각은 다루지 않아요. 그럼 누가 투표를 하겠어요?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Paxman: 그 세금을 누가 걷겠소.
Brand: 우리에게 필요한 건, 중앙 집권적인 행정 체계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건…
Paxman: 정부?
Brand: 좋아요,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겠고. 관리 봇(Admin Bots)이라고 부릅시다. 지 혼자 앞서가지 않게.
Paxman: 그럼 그것들은 어떻게 선출됩니까?
Brand: 제러미, 이딴 호텔 방에 앉아서 인터뷰 하고 있는 사람한테 세계적인 유토피아 시스템을 고안하라고 하지 말아요. 나는 단지 추세를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Paxman: 당신은 혁명을 부르짖었잖소!
Brand: 네! 물론이죠. 변화를 요구하죠. 진정한 대안을 요구합니다.
Paxman: 당신에게 동의할 사람이 많소.
Brand: 좋네요!
Paxman: 지금의 시스템이 모든 종류의 문제를 다루고 있진 않지. 맞소. 하층계급은 거기에 무정함을 느끼고. 정말 큰 무정함을 말이오. 그런데 그들이 당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Brand: 맞아, 그들은 투표하면 안 돼요. 투표를 안 해야지. 굳이 투표할 필요 없어요. 왜냐면 그들이 어떤 지점에 도달하는 때를, “이제 이거면 충분해. 투표 그만해. 시늉 좀 그만하고. 정신 차려. 현실적이 되라고. 현실적이 될 시간이야”라고 생각할 때가 되는 걸 볼 겁니다. 왜 투표를 하죠? 그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걸 보지 않았나요? 이미 알고 있지 않아요?
Paxman: 투표는 변화를 만듭니다.
Brand: 나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에 더 영향을 받아요. 그들을 응원하면서요. 아 그리고 맨시티에 지는 일에도 그렇군요. 슬프지만.
Paxman: 이젠 일부러 웃기려 드는군요.
Brand: 익살(facetiousness)은 진지함 만큼 가치 있어요. 나는 당신이 지금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진지함과 엄숙함을 착각하거나.
Paxman: 익살로 세계 문제를 해결할 순 없소.
Brand: 지금 시스템으로도 해결 못 해요! 아니, 까불면 재밌기라도 하지.
Paxman: …가끔은[웃음].
Brand: 그래요, 가끔은. 제러미. 들어봐요. 낙관적으로 접근해봅시다. 당신은 정치인들 질책하고 혼내는 데 일생을 바쳤죠. 나 같은 코미디언이 “다 쓸모없는 것들이고 그것들이랑 엮이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할 때요. 당신은 좀 나를 혼내려는 것 같은데, 내가 더 이상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아 미안하네요!
Paxman: 그 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오. 단지, 당신이 어떤 일에 그토록 모호(unspecific)한데, 사람들이 왜 당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는 겁니다.
Brand: 아니 그럴 필요… 자요, 우선,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든 말든 상관없어요. 나는 여기 몇 가지 생각들(ideas)에 관심을 끌어보려고 온 거예요. 우선 좀 웃어보자고요. 나보다 훨씬 나은(qualified) 대안적 아이디어들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자격 있고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지금 정치가들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질 않으니까요. 그들은 그럴 생각 없죠. 그들은 대중을 회유하려고만 들죠. 기후 변화에 대응하겠다고 그들이 내놓는 조치는 사실 기후 변화에 관심도 없는 것이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없어요.
Paxman: 문제가 커지면 그들도 한 인간으로서 외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진 않습니까?
Brand: 그럴지도 모르죠. 근데, 그 사람들이 진짜 압도됐건, 그냥 습관대로 고개를 끄덕이건, 다 말장난(sematic)일 뿐이에요. 국회의사당에서 내가 눈치챈 게 바로 이거에요. 이튼 출신인 자들이 하는 그럴듯한 말을, 정확히 똑같이 옥스퍼드 출신 사람들이 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거기에 가면 생각하죠. ‘으아 이게 뭐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흠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만!’ 그리고 나는 생각하죠.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요. 우리는 더 이상 기만적이고 틀려먹은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어요. 지구와,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면 유지될 수 없어요. 엘리트를 위해, 정치나 기업 엘리트를 위해 봉사하는 시스템은 아니에요. 이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Paxman: 정말 믿지를 않는군요.
Brand: 완벽하게 믿어요. 피곤하다는 듯 보지 말아요. 무슨 턱수염에 파이프 물고 난롯가에 있는 사람 같네! [웃음]
Paxman: [노동당의] 에드 밀리밴드(Ed Milibadn)는…
Brand: 그는 보리스 [존슨]이랑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죠. 아니에요?
Paxman: 그렇소만 그리고는 런던 북부의 종합 평준화 학교에 갔지요.
Brand: 아주 좋네요. 다 좋아요. 근데 내가 하려는 말은, 기존 패러다임 안에서는 변화가 충분히 극적이지도, 충분히 급진적이지도 않다는 겁니다. 진정한 변화와 대안이 제시되지 않을 때, 공공의 혼란과 불만이 있음을 이해하시겠죠. 진정한 대안, 진정한 선택지가 있을 때, 거기에 투표하라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푸-! 신경 끕시다. 왜 그런 척만 합니까? 왜 그런 얼척없는 환상에 말려들어요?
Paxman: 왜냐하면 투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너무 늦을 수 있습니다.
Brand: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때가 됐고, 이 운동은 이미 일어나고 있고, 어디서든 발생하고 있어요. 우리는 소통(communication)이 동시적이고 공동체(community)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시대에 살아요. 점거 운동(occupy movement)은 1% 대 99%라는 생각을 대중의 사전에 실어놓았어요. 이 세대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막대한 기업적 착취를 깨닫게 되었어요. 이건 헛소리(nonsense)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주제들은 다뤄지질 않고 있어요. 누구도 조세 피난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누구도 재계와 보수당의 공모를 다루지 않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정말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고 있다면, 내가 우스워 보이지 않겠어요? 그럼 나는 또 왜 그걸 진지하게 다루겠어요? 투표에 완전히 무관심한 젊은 사람들에게 왜 투표를 장려하겠어요? 우리가 그래야 돼요? 지루하지도 않아요? 특히 당신은 누구보다도 지루하지 않나요? 매년 그들의 거짓말과 헛소리를 들으면서, 그들과 이야기해오지 않았나요? 상황은 이래요. 누가 당선돼요, 다른 누가 또 당선돼요, 그런데 문제는 계속됩니다. 이런 허울뿐인 짓에 왜 계속 참여하겠어요?
Paxman: 이렇게 분노하는 사안에 익살맞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놀랍군요.
Brand: 네, 분노해요. 분노합니다. 왜냐면 내게 이건 실제적인 거에요. 나한테 이 문제는 주변적인 게 아니에요. 헌금을 바친 교회에서 잠깐 일어나는 사소한 일 같은 게 아니에요. 나한테, 이 문제는 내가 비롯된 문제입니다. 이게 내가 신경을 쓰는 문제라고요.
Paxman: 희망이 보입니까?
Brand: 예, 맞아요,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정말 벌어질 일이에요.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요. 이제 끝이고, 일어날 때에요. 선조를 찾는 TV 프로그램에서 당신을 봤었는데, 당신은 할머니가 귀족층에게 어떻게 당하는지 봤죠. 그리고 그게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다는 걸 알기에, 당신은 눈물을 흘려요. 그게 언제였죠? 1세기 전? 그건 지금도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나는 바로 그렇게 취급받는 여성에게 태어났어요. 오늘도 나는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 여성과 이야기하고 왔어요. 우리가 이런 느낌에 함께할 수 있다면, 사람들을 감정적 포르노에 빠져들게 만드는 TV 프로그램의 애절한 감상주의 대신에요, 이런 느낌에 함께하고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왜 그러지 않나요? 그게 왜 순진한(naive)한 거에요? 그게 왜 내 권리가 아니에요? 내가 배우라서? 내 말은, 나는 그럴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서 권리를 얻을 필요가 없어요. 나는 누구로부터도 권리를 얻을 필요가 없어요. 나는 그걸 갖고 있습니다.

[4]: 1976년 12월 1일, 섹스 피스톨즈는 퀸(Queen)의 대타로 빌 그런디의 토크쇼에 출연한다. 그런디가 경멸조의 질문을 이어가다 동행한 수지 수에게 “끝나고 만나자”는 농담을 던지자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가 곧장 욕설을 퍼붓는다.

[5]

[6] 통상적인 법, 정의, 절차, 합의 등을 생략하고 벌어지는 불공정한 재판.

[7] 현재 유럽에서는 ‘아이덴티타리언’이라는 새로운 극우 운동이 퍼지고 있으나, 이 글이 작성된 2013년과의 시차가 크고 맥락상 정체성을 우선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므로 이후로는 ‘정체성우선주의’ 등으로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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