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한_그럼 저는 갓난아이인가요?

전대한(대중음악비평)

재미공작소에서 펴낸 책 『씬의 아이들』의 소개 글은 다음과 같다. “‘홍대-인디-씬’을 보고 꿈을 키웠고, ‘씬’ 안에서 성장했으며,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5명의 이야기를 에세이와 인터뷰로 엮은 책”이다. 나는 이러한 『씬의 아이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 음악가(몬구, 연진, 전자양)와의 인터뷰나 한 비평가(김윤하)와 한 기획자(하박국)의 에세이는 아마 누군가에게는 이미 씬에서 공고히 자리 잡은 이들의 추억팔이에 불과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홍대와 인디 씬이라는 특수한 장소들에 대한 유의미한 아카이빙으로 여겨질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납득할만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통해 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평가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진출처: 재미공작소 블로그

그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책 제목이 주는 기이함과 그 기이함 뒤에 자리하고 있는 (세대론 측면에서의) 정치적인 함의(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씬의 아이들』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매우 기만적이고 크리피하다고 느낀다. 도대체 씬의 ‘아이들’은 누구인가? 분명 책에 등장한 다섯 사람이다. 그런데 그들의 물리적인 나이를 고려하면 그들은 당연히 아이들이 아니다. 게다가 씬에서의 경력을 생각해본다면 더욱더 아이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어엿한 어른들이다. 책에서 다루어진 음악가들의 경우 이제 막 음악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목을 받은 음반들을 여럿 발표했으며, 비평가와 기획자의 경우도 자신의 활동을 다년간 지속해오며 씬에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은 실제로 아이들이 아니며, 경력이나 활동의 측면에서 비유적으로도 아이들이라고 부르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아이들’이라고 호명하는가? 만약 그들이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아이들’로서 호명하지 않았다고 반론한다면, 다음처럼 다시 물을 수도 있겠다. 왜 그들은 자신들이 ‘아이들’로 호명되는 것을 묵인하는가?

추측해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이유는 그들이 홍대-인디 씬의 태동기 혹은 초창기부터 활동하며 씬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라는 것을(비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그럴듯한 표현처럼 보인다. 그들은 실제로 씬과 함께 성장해왔다고 할만한 이력들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 그들은 씬과 함께 자라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에서라면, 오히려 그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르지 말아야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씬과 더불어 성장해왔고 지금까지 씬에서 활동을 지속해왔다면, 역설적으로 이는 그들이 적어도 씬만큼은(물리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홍대-인디 씬에 대해 결코 이제 막 생겨났다거나 어리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보편적으로 홍대-인디 씬이 90년대 중반에 형성되었다고 간주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이 씬을 어린 대상인 ‘아이들’이라고 진술하는 게 어색해 보인다.

좌측부터 연진, 몬구, 전자양, 김윤하, 하박국_사진출처: 재미공작소 블로그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아이들’이라는 개념이 가진 이미지를 토대로 책에 실린 사람들에게 재기발랄하다거나 여전히 생기 있게 새로운 일들을 해나갈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일을 목표했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겠다. 특히, “앙팡 테리블”과 같은 관용적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장 콕토의 책 제목으로부터 유래한 관용어구 “Enfant Terrible(앙팡 테리블)”은 ‘무서운 아이’를 뜻하는 표현으로, 기성세대의 관습에 맞지 않는 특이하고 반항적인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여기에 덧붙여, 예술이나 패션 등의 분야에서 흔하지 않은 성공을 거머쥔 신인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설령 『씬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을 통해 책에 담긴 다섯 사람이 이렇게 ‘무서운 아이들’로 비추어지기를 의도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관용적인 의미에서의 ‘(무서운)아이들’로 보기에는 그들은 씬에서 상당히 안정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사진출처: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 홈페이지

흥미롭게도, 이러한 기이한 호명은 대중음악 씬의 일만은 아닌듯하다. 『씬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이 주는 크리피함에서, 나는 곧바로 2018년에 개최되었던 <쌈지스페이스 1998-2008-2018: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이하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을 떠올렸다.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에도 ‘아이들’은 없고 ‘어른들’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시의 기획자들은 전시 서문과 기획자 인터뷰1)에서 “2000년에 쌈지스페이스에서 있었던 전시 <무서운 아이들Enfants Terribles>에 착안한 제목”이며,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기성 작가임에도 제도 안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을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여전히 간직했음을 암시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씬의 아이들』도 비슷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꺼림칙함을 영 떨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유가 어찌 되었건, 다 큰 어른들을 아이들이라고 스스로 호명하는(혹은 호명 당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문화연구자 채태준의 문장을 옮겨 적는다.2)

지금의 슬픔으로 생애를 추적해, 끝끝내 어린 몸에 어떤 이미지를 투사하는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 시절에는 본질적인 진정함이 존재한다는 환상과 역설적으로 놓쳐버린 ‘수행들’, 모든 변화가 가능했던 시기로부터 지금의 나를 향한 아쉬움의 의지 때문이다. 이 의지는 신화에 대한 인간의 탐색과 다르지 않다. 필연적인 결핍을 안고 살았던 역사 속의 인간과 오늘의 인간은 모든 빈 공간이 채워진 완전한 세계를 그려왔고, 그 그림은 곧 ‘신화’라는 근원적 세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어린 몸이야말로 경험이 담보하는 사실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닿아본 적 없는 신화다. 길들여진 몸으로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몸을 보며, 모든 것이 다를 수 있었다는 아쉬움과 진정한 것에 대한 그리움을 스치는 일, 우리의 결핍을 잠시나마 해소하는 일. 일련의 과정은 신화를 지탱하는 제의로서 어린 몸이 등장하는 재현물이 우리에게 주는 새삼스럽지 않은 감상이다.

채태준은 이에 덧붙여, 아이들을 둘러싼 서로 다른 욕망들이 아이들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을 경유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상(image)을 투사해왔다고 지적한다. ‘아이’라는 주체의 복합적인 경험들이 단일한 상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아이의 특징에 해당하는 ‘어리숙함‘이나 ‘순수함’ 등을 이유 삼아 아이를 ‘회귀하고 싶은 대상‘이나 ‘보호받아야 할 대상’ 등으로 정체화시키고 그에 따라 아이들을 소비해왔다는 것이다.

나는 『씬의 아이들』과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이 그러한 투사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들을 ‘아이들’이라고 호명하거나 스스로가 ‘아이들’로 호명되는 것을 묵인하는 어른들 뒤에는, 결국 그들 스스로가 그 ‘아이들‘의 상을 가진 이들로 보여지고 소비되었으면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욕망이 무엇을 향하는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자신들은 순수한 아이들처럼 관습화된 제도나 씬에 편입되지 않은 채로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생기 넘치는 아이들처럼 활동을 왕성하게 지속해나갈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싶었을 수도 있으며, 아직은 미숙하지만 점차 더 발전해나가는 아이들처럼 자신들도 그렇게 앞으로 더 발전할 것임을 에둘러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상들이 복합된 하나의 상(image)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어떤 목적과 어떤 의도로 그렇게 했건 그 자체만으로는 약간의 불순함과 그로부터 오는 크리피함을 제외하고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분명히 씬에서 ‘어른들’인 그들이 스스로를 ‘아이들‘이라고 호명하는(혹은 호명당하기를 자처하는) 바로 그 순간에 발생한다. 그 순간, 진짜 아이들은 ‘아이들‘이라는 자신들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끝내 자신들의 위치와 정체성마저 빼앗긴 채 부유하게 된다. 미숙함과 발전 가능성과 재기발랄함과 같은 아이들에게 흔히 주어지는 상(image)은, 모두 꽤 오랜 시간 동안 경험을 축적해 왔음에도 스스로 ‘아이들’이기를 자처하는 ‘어른들’에 의해 선점되었다. 그래서, 진짜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들일 수 없다. 진짜 아이들은 더 이상 미숙해서도, 또 발전 지향적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능력을 검증받은 이들보다 미숙하거나 잠재적이기만 한다면 무용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태생부터 완벽해야만 하고, 완성형인 동시에 더 발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아이들에게 가당키나 한가? 끝내 씬의 (진짜) 아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마저 빼앗긴 채, 나가떨어지고 만다.

오히려 나는 묻고 싶다. 왜 그들은 여전히 ‘어른들’이 되지 못한 채(않은 채) ‘아이들’이고 싶어 하는가? 게다가 정말로 그들이 씬의 ‘아이들’이라면, 이제 막 씬에서의 창작이나 비평 혹은 기획을 시작하는 이들은 대체 무엇인가? 그 사람들은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갓난아기에 불과한가? 만약 그렇다면 나의 이 글도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보다 경력도, 물리적 나이도, 한참 못 미치는 나의 언표는 비판이나 회의적 진술일 수 없다. ‘아이들’ 조차도 되지 못하는 내게 주어질 수 있는 언어는(사실 언어가 아니라 한낱 소리에 불과하겠지만) 그저 옹알이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수에 맞게, 나는 이제라도 내게 알맞은 언어로 이 글을 다시 쓰기로 한다.

응애.

 


1) 《아트인컬쳐》2018년 9월호. Pg 124.
2) 채태준. “어린이와 어린 몸,영화 <4등>과 <우리들>”. 2017. https://blog.naver.com/loose_collective/2209620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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