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택_라캉 돌려 말하기

홍승택

“분석 경험에 관한 보고서에 합당한 문체가 이론의 모든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체가 언표들-분석 경험은 이에 따라 운용된다-이 은유 효과와 환유 효과, 즉 우리 주장에 따르면 프로이트에 의해 무의식의 메커니즘으로 기술된 메커니즘이 실현되도록 해주는 언표 행위의 뒷걸음을 자기 안에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증한다.”1)

돌려 말하기란 무엇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숨기고, 다른 식으로 표현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결국 말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숨긴다는 것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미 억압의 결과라는 것을 함께 생각하면 흥미롭다. 우리는 텔레파시로 무언가를 전하지 않고, 보통의 경우에는 그림을 그려 무언가를 알리지도 않는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 과정에는 억압이 있다. 언어로 정확한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에 곤란을 겪을 때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억압의 결과인 말을 다시 돌려서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말하기는 이미 돌려 말하기이기 때문에, 직언과 같은 “저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려라.”와 같은 말도 “나의 위치가 너보다 높고, 나는 너에게 명령할 수 있다.”의 돌려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쓰레기 하나가 정말 문제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쓰레기가 너무 많다면, 돈을 지불하고 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다른 업체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는 상하관계가 없어진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돌려 말하기를 한다면, “사무실이 너무 깨끗하네.”가 될 것이다. 혹은 “사무실이 너무 깨끗해서, 아무도, 그 누구도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며, 그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필요가 없다”라고 돌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너무 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의외로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사무실이 약간 지저분한데, 실제로 누군가 힘을 써 그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긴 그 정도가 심하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자니 눈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고, 난처하지만 그 정도 역시 참지 못할 정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상관이 말하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줍지 않기가 어려워진다.

대화를 가정해보자.

a)

상관: “저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려라.”
부하: “지금 저에게 당신의 위치가 저보다 높고, 그래서 당신이 저에게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을 돌려 말한 거예요?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더럽지도 않을 뿐더러, 꼭 제가 치워야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치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상관: “아니, 나는 단지 저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리라는 말을 한 것이다.”
부하: “…(할 수 있는 말이 없음)”

b)

상관: “사무실이 너무 깨끗해서, 아무도, 그 누구도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며, 그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필요가 없다.”
부하: “지금 저에게 저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리라는 것을 돌려 말한 거예요? (왜냐하면 실제로 사무실은 전혀 그렇게까지 깔끔하지는 않고,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바로 그 말로써 그것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상관: “그렇다.”
부하: “…(치우러 갔거나, a)의 대화로 넘어감)”

말하기가 이미 돌려 말하기이고 우리는 그 와중에 다시 돌려 말한다는 한에서, “사무실이 너무 깨끗해서, 아무도, 그 누구도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며, 그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필요가 없다.”는 “나의 위치가 너보다 높고, 나는 너에게 명령할 수 있다.”를 돌려 말하기(1)한 것인 “저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려라.”를 돌려 말하기(2)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돌려 말하기(1)과 돌려 말하기(2)의 차이는, 돌려 말하기(2)는 그 전의 말을 알아듣고, 의식화해서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촉구된다는 것이고, 돌려 말하기(1)은 그 전의 말을 의식화해서 대답하기를 거부당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저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려라.”라는 명령일 뿐이라고 그때 오히려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말을 말할 때, 하나의 말을 말할 때도 두 개를 말한다. 나는 1을 말할 때, 1을 말하고, 또한 1을 말한다는 것을 말한다. 일상적인 돌려 말하기도 이것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단순히 사무실이 깨끗하다는 것만 말해진다면, 사람들이 더 쉽게 그 말을 그냥 받아들일 것이고, 그런 한에서 돌려 말하기는 발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무실이 깨끗하네.”라고 내가 말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말하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돌아보게 하면서, 그런 고개돌림의 과정 속에, 전혀 깨끗하지 않은 사무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게 하고 (그래서 보통 상관은 상석에 앉는다. 상징적인 자리가 공간에 들어오는 방식), “저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려라.”라는 말과 함께, 혹은 또는, “내가 너보다 위치가 높고, 나는 너에게 명령할 수 있다.”라는 말도 한 것과 같게 되는 것이다. 어떤 말단직 부하가 “사무실이 깨끗하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일으키지 못하거나, 혹은 정말로 사무실이 깨끗할 때뿐일 것이다. 하지만 말단직 부하도 사람이기 때문에, 1을 말하면서, 1을 말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사무실이 깨끗하네.”라는 말로, 내가 이 말을 말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어젯밤 아무도 몰래 청소를 혼자 한 자신의 노고를 드러낼 수도 있다.

사무실에서는 위의 대화가 당연히 가능하다. 상관과 부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은 사무실에서 말하지 않았고, 세미나(와 카우치 뒤)에서 말했다. 자신의 말하기, 글쓰기 방식조차 분석가의 담화에 들어가는 것이며 분석가 양성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위의 대화의 ‘할 수 있는 말이 없음’의 상태에서 주체가 더 말하기를 원하는 곳. 혹은 상관의 “그렇다” 이후에, 부하의 “그러면 왜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렇게 말한 거예요?”라는 대답이 무례함과 상관없이 이어질 수 있는 곳.

라캉은 단지 재미를 위해서 자기 작업을 설명할 때, 발표할 때 이런 돌려 말하기를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런 부분이 너무 많다. 이 사실이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농담은 보통 한 줄이기 때문이다). 나는 라캉의 극심한 돌려 말하기를 ‘한 바퀴를 돌려 말하기’ 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한 바퀴를 돌려 말하기’와 반어법의 차이를 알아봐야 한다. 반어법은 돌려 말하기의 한 부분이고, ‘한 바퀴를 돌려 말하기’는 ①을 말하기 위해 ‘①이 아님’에서 시작했을 때, 거기서 출발해 ①까지 가는 경로를 말 속에 남기면서 가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①을 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욕망의 경제에서 ①이 ①이 되게 하는 것이 있다, 곱셈의 경제에서 그것이 그것이 되게 해주는 것은 1이고, 덧셈의 경제에서는 0이다. 그것은 항등원(identity element)이다.2) 욕망의 경제에서 항등원은 대상 a다. ①을 말하기 위해 ‘①이 아님’에서 시작해 ①까지 가는 경로를 남기는 라캉의 ‘한 바퀴를 돌려 말하기’는 ①을 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도중에 ①을 ①로 만드는 무언가, 다르게 말하면, ①에서 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빼도 남아 있는 무언가, 대상 a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말하기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말하는 것에, 그 내용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과 더불어, 그 말을 듣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한 바퀴를 돌려 말하기’가 특정한 상황, 특정한 단어를 중심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어떤 단어의 자리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말하기가 가능하고, 이것이 언제나 재생산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고, 그런데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이 말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다면 (세미나이므로 능동적으로일 것이다. 혹은 능동적으로 수동적으로, 또는 수동적으로 능동적으로일 것이다) 문제는 나의 듣기에 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설령 제비갈매기 무리에서 어떤 우두머리가 나타나 다른 갈매기들이 부리를 벌리고 있는 입들로부터 상징적 물고기를 삼킴으로써 제비갈매기에 의한 제비갈매기의 착취를 개시하더라도 (…) 그것만으로는 갈매기들 사이에서 이 우화적인 역사, 날개 달린 그들의 서사시가 우리를 『펭귄 섬』에 꼼짝 못하고 사로잡히게 만드는 역사, 우리 자신의 역사의 이미지를 재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비갈매기화된’ 우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 ‘다른 무엇인가’가 상징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며, 그것으로 언어를 만든다. 용법에서 해방된 상징적 대상이 여기와 지금으로부터 해방된 말이 되려면 차이는, 그러한 대상의 소재의 음향적 성질이 아니라 상징이 개념의 영원성을 발견하는 사라지는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이미 부재로 만들어진 현존인 단어를 통해 (…)“3)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이야.”, 라캉의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의 대답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는 선생님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글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도 아닌데, 무언가를 알려줄 생각도 없는 사람의 글은 무엇으로 향해야 할까. 궁금하게 함으로 일단 향하기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든, 말하기, 글쓰기가 계속 필요함, 나조차도 그럼, 으로 동시에 향하게 되지 않을까.


1.자크 라캉, 『에크리』, 홍준기·이종영·조형준·김대진 옮김, 새물결, 2019, 984쪽
2.이성민, 『사랑과 연합』, 도서출판b, 2011, 152쪽 참조.
3.자크 라캉, 『에크리』, 홍준기·이종영·조형준·김대진 옮김, 새물결, 2019,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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