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균_혼종적 공동체와 타인의 얼굴 – 조은지 개인전: 두 지구 사이에서 춤추기

윤태균

타자와 공동체

타자성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타자성은 절대적인 특성이 아니다. 라캉의 편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상징계로의 진입과 동시에 그에 대한 반정립으로 발생한다. 비-자아로서의 타자성인 것이다. 이때 주체가 자기-타자, 나-너를 구분짓는 기준은 자아와 함께 형성된 상상적-상징적 두 세계의 실금일 뿐이다. 하지만 상상계적 타자가 아닌 존재하는 ‘타자‘는 우리의 외부에 명료하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타자를 절대론적인, 자명한 존재로 인지한다. 타자는 ‘나와 다른‘, ‘고정된’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타자를 향유할 수 없고 자신에게 동일시할 수 없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와의 관계는 신비와의 관계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주체에게 현현되는 타자는 ‘얼굴‘로서 다가온다고 말한다. 우리의 피부를 둘러싸는 타자의 얼굴과 시선은 주체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는 불청객이다. 하지만 우리가 타자의 얼굴을 책임을 수반하는 연대로서 받아들인다면, 타자의 얼굴은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닌 내면성의 세계에서 외부 세계로의 초월을 가능케 하는 통로가 된다. 타자는 주체가 책임져야 할 대상, 품어야 할 대상이다. 자아와 타자는 절대 같을 수 없지만 서로의 고통을 책임져야 한다. 그에게 주체성이란 초월로서의 타인에 대한 연대와 책임, 그리고 받아들임을 통해 나타난다.

신비주의적 단어들로 가득 찬 레비나스의 고찰에서도, 타자에 대해 가져야 할 우리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자신을 타자에게 이해시키려 하는 것,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려 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타자는 오만한 자아의 향유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가? 타자의 절대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가?

혼종적 공동체 만들기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는 주제인 디아스포라와 다문화에 대한 담론에서 ‘혼종성‘이라는 용어는 종종 그 순수성을 의심받는다. 몇몇 이론가들에 따르면 혼종성은 절대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문화, 정치적 권력에 의해 위계를 형성한다. 마이클 웨인(Michael Wayne)은 이러한 혼종화가 ‘문화의 교환과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는 물질적인 불평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나 혼종성’을 옹호한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차이와 다름이 뚜렷이 존재하는 상이한 집단들의 혼종화는 종종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혼종화는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상품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점에서 새로운 방식의 혼종적 공동체 만들기 방식에 대한 제안들이 필요하다.

조은지는 가상적 공동체와 집단을 ‘지구‘의 형상으로 표상한다. 원형圓形의 형태를 가지는 두 지구는 서로의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짓기 보다는, 서로의 형상을 유지하면서 단지 병치되어있을 뿐이다. 각 지구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는 개체가 모여있는 집단이 아닌 느슨한 공집합만을 가진 상이한 개체들이다. 조은지는 조화로운 공동체적 지구를 만들기 위해 혼종화의 전략을 사용한다. 서로 다른 목과 종의 생물들의 털 이미지를 병치하여 다양하지만-하나의 지구가 만들어진다. 또한 직접 배양한 심바이오틱 셀은 박테리아와 효모균을 함께 배양시킨 새로운 키메라 종이다. 이러한 이미지들과 거주민들이 모여 새로운 종으로서 하나의 지구 공동체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혼종적 공동체는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에서 ‘서드 이펙트’로 탄생한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하나의 신종이 아닌, 서로 공생관계에 있는 단지 서로의 경계가 해체된 새로운 종류의 혼종이자 공동체이다. 각각의 개체들은 경계가 해체되지만 위계를 갖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또 다른 지구는 스테인리스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재개발을 앞둔 예지동 식당에서 버린 스테인리스 식기들을 조은지가 수집한 것이다. 조은지는 식기들을 이용해 일종의 종교적 탑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을 형성한다. 이 스테인리스 식기들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재개발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흔적이자 지표이다. 이 지구는 단순한 식기들로 이루어진 구조물이지만 예지동의 기억과 소리들을 재생한다. 조은지가 해왔던 몇몇 작업들이  작업들이 사회적 상황과 맥락을 표현하는 참여적 작업임을 감안했을 때, 이 스테인리스-지구는 조은지가 표상하고자 한 재개발 사업을 앞둔 지역의 주민 공동체일 것이다. 전시장에서, 이 스테인리스 지구는 관람자에게 현현하는 어떤 공동체의 ‘얼굴‘이다. 타자를 마주하며, 우리는 이들을 대하는 어떤 태도- 그것이 배타적이든, 연대와 책임이든-를 요구받는다.

지구 사이를 유영하기

이 두 지구는 서로 상이한 공동체를 이루지만, 이 공동체들은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는 원형의 형태로 그 경계는 무한하다. 두 지구는 서로의 경계를 나누기보다는 확장하고 교차하며 또다른 혼종적 공동체의 형성을 시사한다. 두 지구는 분명히 서로에 대한 타자이지만, 서로의 절대성을 유지한다. 전체주의적 합일이 아닌 유기적인 혼종을 꿈꾼다. 동시에 이 두 지구는 관람객과 동등한 위치의, 절대적 타인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관람객은 이 두 지구를 타인으로 대하면서, 이들과 관계맺기를 강요당한다. 두 지구는 ‘타인의 얼굴‘이다. 관람객은 이 얼굴들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엿볼 수 있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지구들의 경계 사이에서, 관람객은 그 자신과 타인 (지구)를 구분하는 경계가 무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한다. 관람객은 자신을 포함한 세 개의 지구 사이를 유영하며, 절개되어 펼쳐진 공동체의 개체들- 혼종들이 드러내 보이는 연대와 공생을 탐구한다.

 <조은지 개인전 : 두 지구 사이에서 춤추기> (대안공간루프) 전시 전경, 사진: 윤태균
 <조은지 개인전 : 두 지구 사이에서 춤추기> (대안공간루프) 전시 전경, 사진: 윤태균
 <조은지 개인전 : 두 지구 사이에서 춤추기> (대안공간루프) 전시 전경, 사진: 윤태균

[참고문헌]
– 기다 겐 외 3명, 현상학 사전, 도서출판 b, 2011
–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그린비, 2018
– 비린더 S.칼라 외 2명, 디아스포라와 혼종성, 에코리브르, 2014
– 정은영, 조은지: 언어를 거스르는 유쾌한 언어들, 이대 대학원신문 58호
– 김장언, 삶과 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