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정원석: 할아버지 시계

조재연(미학)

정원석, 『할아버지 시계』, 별관,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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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하게와 물끄러미가 어긋나고서야 비로소,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었다. 열지 않는 서랍 속의 드물게 남는 사진처럼 사랑도 무수히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한심한 반복들을 고작 잊고선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을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영원을 부정할 그 말이 준비된 것이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는 비로소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이제까지 ‘영원’이란 낱말이 고비를 맞았던 것은 ‘영원’을 영원으로 맞이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영원은 영원을 지지하고 믿음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부정하고 의심할 때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상징을 다이아몬드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손쉽게 모든 사물에 함부로 부딪쳐 보고 떨어진 파편에 당혹감을 느끼지마는, 사랑을 대추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좀처럼 부서질 것을 알기에 감사하고 조심히 안는다. 현명한 자들과 믿음 있는 자들이 모두 틀려 사랑이 종말의 위기를 맞는다해도, 여전함으로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믿지 못해 떨고 있던 자들의 몫 때문일 것이다.

지킨다는 것은, 영원을 맞을 지킴이라는 것은 그런 줄 알고 있으려 한다. 그리고 예술을 지킨다는 것도, 예술을 영원히 남긴다는 것도 같은 말일 줄 안다. 마치 부수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듯, 변해버리거나 흩어져버린 예술에 때로는 죄책을 묻고 ‘예술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 따위를 고민하면서도, 예술은 변하거나 결코 사라져버릴 것임을 아는 것으로써 그를 오래도록 지켜낼 수 있음을 마음먹고자 한다. 정원석의 『할아버지 시계』(별관, 2020.4.18-5.2)는 꼭 그런 마음으로 나서고 있다. 그에겐 예술이 대단치는 않은 것 같다. 그는 예술이 단단하기보다 여리고, 병을 앓을 만큼 약하고 결코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까’라고 섣불리 묻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이렇게 묻는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예술에게 무언가를 요망하는 것보다 그는 앞서서 그것을 지켜내려 한다. 그렇게 지켜낸 후에야, 감사하고 조심히 안은 후에야 변혁이나 가르침과 같은 요망은 가능할 테다. 예술로 세상을 변혁하려는 자들이 드물게만 있었을 때도, 예술에 무언가를 주려는 이는 그리고 예술을 지키고자하는 이는 얼마나 있었을까.

예술의 나약함을 그저 원치 않게 알게 되었더라면, 사실주의는 사실과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사실들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는 나약함에 대한 것으로, 인상주의는 빛의 순간적인 상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인상을 포착하는 데 실패하는 부실함으로 대하고선 그들의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전시 이후에 그 앎이 있다면 그들의 실패에 ‘근대’와 섣부른 이별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아낄 수 있고 여전함으로 빛나는 모든 것들을 지킬 수 있다. 모든 것은 빛나지 않지만, 빛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잠언은 그렇게 지켜질 수 있다. 그래서 정원석의 작업에는 어느 하나 ‘이것은 세상의 어떤 사물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세상은 단정하고 또 단단한 것이지만 예술은 그것을 단언할 만큼의 것은 아니다, 그러니 작업은 예술이 실패한 표정들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또 아끼기 위해서 끌어모은다. 나약하게 실체도 실재도 없이 어떤 색만을, 어떤 윤곽만을, 어떤 상징만을 무른 방식으로 가져온다. 대단치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 대단치 않은 것을 예찬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것은 대단치 않은 것에서, 대단치 않아도 아끼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전하려는 것이다.

정원석, 「기분좋은날에」, oil-pastel, 30x3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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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이렇게 녹아내릴 수 있는 것이었을까. 비밀 같은 나약함을 솔직히 토로해버린 예술을 이다지도 감사히, 조심히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기분좋은날에」는 좀 더 기쁨에 젖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색이 허름하게 서로를 침범하게 두지 않고 예리하게 서로를 베어냈다면, 정서를 표현할 상징이나 표정이 허투루 삼가지지 않고 명석했다면 그것은 ‘기분 좋은 날’에 정면으로 마주하여 닿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업은 예리하고 명석한 기쁨으로 건너가지 않는 직전에 물러선다, 과연 ‘기분 좋은 날’은 그렇게나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서. 기분 좋은 날이 올 때까지 그날을 바랐던 염원들, 이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물었던 망설임들, 그리고 이날이 지나갈까 애탔던 불안들을 두고 어떻게도 작업은 ‘기분 좋은 날’의 정면만을 택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 놓고 기분 좋은 날 안으로 진입하는 대신 그것을 표현하는 데 무력하기로 한다. 염원들, 망설임들, 불안들을 저버릴 수 없어 기꺼이 녹아내린다. 그리고 작가는 그런 예술의 대단치 않음을 아끼기로 또 안기로 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꿈속에서」가 꿈결에 함부로 젖지 않는 이유와 「태풍오는날에」가 급하게 철벅거리지 않는 이유는 정면에서 다룰 수 없는 것들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무엇도 아닌 무력한 작업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술이, 특히 회화가 이제까지 내밀하게 숨겨왔던 ‘생성’이다. 「기분좋은날에」가 ‘기분 좋은 날’을 제외한 나머지를 저버릴 수 없을 때, 그것으로써 기분 좋은 날을 앞서고 뒤따르는 모든 흐름들을 지켜낸다면, 작업은 멈추거나 죽은 사물이 아니라 감히 ‘생성’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기분 좋은 날이 ‘되는’ 것을 뒤로 연기延期했다가 이내 그날을 지나쳐 초과하면서, 작업이 그날이 오기 전의 염원에서부터 그날 후의 불안까지를 모두 경유해 흘러내리고 있는 까닭이다. 작업은 보는 이가 전시장 안에 들어왔을 때 늘 그에게 일관된 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그는 어쩌면 관객이 들어오기 전에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앞선 작업처럼 다른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뒤뚱거리고 저벅대는 걸음으로 전시장을 돌아다녔을 수도 있다.

정원석, 「무제」 연작, water-color on paper, 39x26cm, 2019

그러니 「무제」 연작은 그러한 ‘생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다. ‘제목 없음’은 이름 없는 존재를 일컫고 있지 않다. ‘무제’는 이름을 얻는 것을 연기한 완성 이전의 작업을 일컫거나, 이름을 얻었다가 이제는 작품의 소명을 다하고 이름을 잃어버리려 하는 작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제」 연작은 ‘작업 이전의 작업’이 ‘전시 이후의 작업’까지로 흘러가는 생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기분좋은날에」가 그랬듯이 정면을 지나치는 것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은 한순간의 완성을 보이는 작품으로서의 작업일 수 없다. 그는 탄생부터 소멸까지 모든 것을 경유하는 ‘작업으로서의 작업’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은 옅은 하나의 색으로 시작했다가, 진해지기도 하고, 다른 색과 섞이며 온 면적을 매웠다가 마지막에 가서 옅어지며 사라지려 한다. 멈추거나 죽은 사물은 변화를 모르기 때문에 단단하고 강인하다. 그러나 생성이란 이름의 변화를 사뭇 내재하려하는 존재는 변질될 것이기에, 결국 태어났다 소멸할 것이기에 나약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술은 전시 안에서 완성된 상태로 처음부터 끝없이 멈춰있는 것으로 보이기만 하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에 태어났었고 어느 순간 사라질 것이다. 영원을 강요하거나 위장하지 않고도 함께할 수 있는 작업이 여기에 잠시 있다.

정원석, 「하늘」, sticker, a4, 2019

주제는 반복된다. 한번은 정면에 마주 닿기를 연기하면서 그리고 한번은 작품으로서의 작업이 아니라 작업으로서의 작업이라는 상황에 참여함으로써. 전자의 주제는 「하늘」에서 반복된다. 「하늘」은 다른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하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데, 그것은 작업이 ‘하늘’을 마주하기를 연기하는 까닭이다. 무수한 화살표는 위를 향해 있다. 그것은 하늘을 보여주기보다 무수한 화살표만큼 위로 또 더 위로 올라가야만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을 지시한다. 하늘은 하나의 빛깔도 하나의 형태도 아니기에 작업은 무엇을 그린다해도 하늘 중에 ‘어떤’ 하늘을 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늘 모두를 그리기에는 예술은 다시 한번 나약하다. 황급히 ‘어떤’ 하늘을, 일부의 하늘을 서둘러 그리면서 빠트린 다른 ‘하늘’이 생각난다면 그 다정을 어찌 지나칠 수 있을까. 그래서 「하늘」은 하늘 모두를 작업과 전시 너머의 것으로 남겨 놓기 위해, ‘어떤’ 하늘을 제외한 나머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오직 하늘이 우리 위에 있다는 것만을 가리킨다. 한편 면적의 끝까지 배치된 화살표를 제외하고도 두께를 지닌 중첩된 화살표는 하늘의 높이뿐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두꺼운 무게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서 우린 어떻게 걸어왔고, 어찌해 멈춰서 고개를 들게 될까. 화살표엔 하늘의 높이도, 하늘을 보는 이의 고개의 무게 혹은 그가 감당했던 중력의 무게마저도 담겨있다. 때때로 작업이 멀리서 색색깔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일 때면 하늘이 먼저 그만큼 다가온 것마저도 느낄 수 있다.

정원석, 「새떼」 연작, pen, a4, 2018

작업으로서의 작업이라는 후자의 주제가 반복되는 것은 특히 마커를 활용한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새떼」는, 「우체국」은, 「애벌레」는 그러니까 세계는 예술이 어찌한다고 하더라도 점과 선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음을 보인다. 실재에 다가가는 것을 저어하거나 다가섬을 허락받지 못하는 운명은 그가 결국 점과 선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출신을 지닌 까닭이다. 혈관이 보이는 실재의 새는 작업에서 고작 점의 집합이고, 답장을 바라지 않아야 할 우편이 도착하고 떠날 실재의 우체국은 작업에서 고작 점과 선의 집합이며, 언젠가 화살표가 가리켰던 하늘로 오를 실재의 생명을 표현하기 위해선 고작 선을 구부릴 수밖에 없다. 작품으로서의 작업이 아니라 작업으로서의 작업이라는 상황. 이 상황은 겨우 한번을 멈출 수도 없다.

정원석, 「스티커북」, sticker, 27x20cm, 2017

「스티커북」 연작에서 우리는 그렇게 그의 근심에 가까워질 수 있다. 형상에 도달하기 이전의 「무제」 연작과 마커로 그린 연작들은 하나의 예고였다. 그렇다면 형상에 도달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나약함을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와 그는 형상에 도달한다고 해도 별수 없을 것이다. 처음으로 ‘어떤’ 것이란 형상에 가까운 「스티커북」 연작은 마땅히 어떤 ‘이미지’란 것에 도달한 결론에서마저도 근심을 지속한다. 어째서 이미지란 것들은 점, 선, 면이 아니란 말인가. 비로소 형상이란 것에 닿은 다음에도 스티커들은 오히려 그것이 여전히 점, 선, 면의 집합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겨울밤만큼 어둡고, 겨울 바다만큼 깊다해도 고양이는 울지 않을 것이며, 거북이는 헤엄치지 않을 것이다. 눈사람의 형상을 그리고도 ‘논사람’이라고 표기한 한 작업은 차마 ‘ㅜ’라는 모음으로 건너가기 전에 이를 연기하고, ‘ㅗ’에서 멈추고 만다. 형상에 도달하면 그뿐인가. 여전히 우리의 출신은 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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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이라는 소소함에 대해 염려하지 말자. 영웅들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숭고한 동기로 나설 때에도, 제일 보잘것 없이 나약한 한 호빗은 그의 삼촌이 반지를 짊어질 수 없다는 소소한 염려 때문에 반지를 목에 걸고, 영웅들은 구원하지 못한 세상을 구원한다. 백호는 능남과의 승부를 위해 선수로서의 생명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가 농구를 시작한 동기는 소연이에 대한 짝사랑이었다. 강자들은 세계를 지배하고자 위대한 항로에 올랐지만 루피는 그저 바다 어디서든 자유롭기 위해 여정에 오른다. 숭고한 성취의 이룩은 숭고한 동기에서만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소소함은 세상의 거창한 이론들이 맺게 되는 관계와 다른 것일 줄 안다. 하지만 소소해서 나약한 이들은, 강인한 자들처럼 부딪치고 부수는 위대한 행위들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때로는 무릎을 꿇기도 하고 두 손을 빌면서 지키고 안는 법을 알고 있다. 강인한 자들은 믿음이 깨질 때마다 새로운 믿음을 생산하는 데 나서겠지만, 나약한 자는 깨어질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절망하지 않고 깨진 조각에도 여전함으로써 믿음이라 생각할 것이다. 전시의 제목으로 빌려온 ‘할아버지 시계’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계이므로 그것은 결코 일반 명사로서 시간을 잰다는 의미를 가진 ‘시계’일 수 없다. 하지만 움직이지도 않는 것을, 시간을 재지도 못하는 것을 전시는 기어코 ‘시계’라 부른다. 전시는 다다르지 못할 나약함으로 정면을 연기하고 초과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날’에, ‘하늘’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소소한 점들만으로는 ‘고양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소소함 때문에 고양이를 보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약한 것을, 나약함이 있고서야 예술을 껴안고 지킬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작품은 누군가에게 보이는 게 그들의 직업이기 때문에 전시장에 누군가 들어설 때마다 연기를 시작한다. 멈춰 있는 것처럼, 영원할 것처럼, 실재에 도달할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강제한 직업이다. 하지만 『할아버지 시계』의 기획을 맡은 정희영이 “기획자라면 전시에서 하고 넘어가야 하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원석이가 하염없이 그린 수천 장의 그림을 바라보다 보면 의무감에 하려던 말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전할 때 그런 강제는 분실되어 버린다. 기획자라면 전시에서 하고 넘어가야 하는 압제를 포기했으므로,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만들고 잠을 못 이루게 했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가 먼저 다한 근심 때문에 예술이 아직 남아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경제의 타자이며, 자본이 침식해오는 세계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고, 인류가 여지껏 인류일 수 있었던 근거다. 그러나 예술에게 우리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많은 진심으로 반복하고 싶다. 현명한 자들과 강성한 자들은 예술은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그것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탠다. 그러나 이제 예술이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었다. 다만 예술의 영원을 부정할 준비가 된 말이 예술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는 비로소 예술을 시작하려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현명한 자들과 강성한 자들 그리고 믿음 있는 자들이 모두 틀려 예술이 종말의 위기를 맞는다해도, 여전함으로 예술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믿지 못해 떨고 있던 이 전시의 몫 때문일 것이다.

 

*정원석 작가의 전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링크를 통해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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