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균_디지털 나르코시스-미디어 묵시록

윤태균

1.
이것은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에 대한 재독해로 시작된다. 그는 「미디어의 이해」(1964)를 통해 전기 매체 시대의 감각을 탐험으로서, 또 계시로서 제시한다. 이제는 일반명제와 같이 여겨지듯이, 미디어는 단순한 의미 전달 수단이 아니다. 미디어의 형식은 곧 내용이다. 매체 자체의 특성, 매개성에서 그 의미가 도출되는 것이다. 즉 “미디어는 메세지다”[1]. 미디어는 인간이 세계를 수용하고, 또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식론적이다. 미디어는 해당 환경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사유방식, 감각에 관여한다. 미디어로 인한 매개와 전달가능성은 그 자체로 내용이 되며 형식이 된다. 구텐베르크의 활자발명 이래로, 인간의 감각은 인쇄 매체의 시각편향에 종속되어 왔다. 이처럼 시각편향의 문화로의 외파는 인간의 여타 감각을 제한해왔고, 이는 곧 마비, 곧 나르코시스로 전개된다. 과도한 시각 신호의 압력은 극단적인 자기 단절을 초래한다. 외상적 압력의 순간 속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마취 상태로 진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쇄 문화의 외파(explosion)의 끝에서, 미디어는 내파(implosion) 상태로 접어든다. 이때 새롭게 등장하는 미디어가 바로 ‘전기’이다. 결국 전기 미디어 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새로운 감각의 장을 맞이한다.
전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등장 이후, 인간은 인쇄문화의 시각편향으로 인한 마취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전기 미디어를 자신의 신체로서 이식한다. 즉 인간은 미디어를 자신의 중추신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이식한다. 맥루언에 따르면, 기계 장치로서의 미디어는 우리 신체의 확장으로서, 시각이 아닌 다른 여타 감각으로 확장된다. 단일 감각에 대한 편향에서, 여타 감각을 자극하는 ‘촉각’적 미디어는 인간 신체에 새로운 경험을 경험케 한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우리의 몸이고, 미디어의 주체는 우리이다.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기계 장치를 신체로서 새롭게 수태시킨다. 그러나 맥루언에 의하면, 감각 마비의 원리는 전기미디어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새로운 기계 장치가 감각적 경험의 수용을 더욱 광포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중추신경은 이를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추 신경이 기계로서 노출될 때, 생존을 위해 그것을 마비시킨다. 결국 맥루언에게, “전기 미디어의 시대는 무의식과 무감각의 시대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무의식을 알아챈다. 기계장치로서의 미디어가, 드디어 인간에게 신체의 확장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전기 미디어들로 총제적 감각의 장을 제공받는다. 이것이 우리가 실존적으로 세계를 지각할 수 있고, ‘무의식을 의식’할 수 있게 하는 계기이다.

2.
미디어의 외파와 내파는 전기 미디어 시대를 거쳐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까지 반복된다. 전기 미디어의 연속으로서, 디지털은 미디어의 작동 방식이다. 맥루언이 제시한 ‘지구촌(Global Village)’개념이 적극적으로 실현되듯, 디지털은 소통가능성을 전제한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맥루언에 따르면, 내파로 도래한 전기 시대에, 전기 미디어들은 신체로 수태됨으로써 감각의 확장과 함께 개별 감각들의 균형을 찾았다. 하지만 이윽고 나타난 디지털 미디어는 신체를 무한히 확장시키며 수많은 감각정보들을 제공한다. 촉각적인 (공감각적인)디지털 미디어 또한 각 감각에서의 정세도를 지속적으로 높여간다. 우리는 비로소 전기 시대에 미디어에 대한 무의식을 의식할 수 있게 되었지만, 디지털 미디어가 제공하는 강렬한 감각 경험에 또다시 극단적 자기단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무의식은 다시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층위에로 숨는다. 즉 무의식은 디지털 미디어 그 자체에 침전된다. 이 때문에 나르코시스는 더욱 은밀하게 지속된다. 감각도, 무의식도, 우리가 새롭게 수태한 디지털미디어-신체로 인해 우리가 경험해온 어떤 것 보다도 더 극심한 마취상태에 놓인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등장하고, 이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미디어를 위해 적용되기도 한다. 디지털 현미경과 디지털 망원경은 시각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에 보증된 과학적 신뢰는 인간이 (확장된)시각에 의존하게 만든다. 또 어떤 디지털 미디어는 그 어느 때보다 감각의 평형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디오북, 오디오 비주얼, VR 등의 새롭게 나타난 현상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가 어떤 감각 체계에 위치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일정 정세도를 경험한 우리의 감각은 큰 내파 없이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같은 의미에서, 디지털은 실천적이다.

3.
디지털은 테크놀로지가 작동하는 방식이자 동시에 인간이 그것을 지각하고 사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디지털은 단순한 감각 형식이 아닌, 인간의 정보화와 개념화 방식에도 관여한다. 디지털은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디지털이 인간에게 주입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디지털 미디어 작동에의 반복적 노출과 순응, 훈련을 통해 이것을 체화해 나간다. 이러한 ‘디지털적 인간’은 동시대에서, 특히 ‘동세대’에서 발견된다. 성장 과정 후에 디지털 혁명을 경험한 세대와 달리, 디지털 혁명 이후의 동세대는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디지털-테크놀로지 장치로서의 신체는 선천적인 것이 된다. 앞서 말했듯, 발달과정에서 그들의 무의식은 디지털의 층위에 고착한다.
(아마도 오이디푸스 이후) 주체는 디지털미디어를 사용하고, 또 수용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진부한 이분법으로 설명하자면, ‘가상’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이 만들어낸 새로운 층위들은 현실-가상의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초기의 디지털 장치에 관한 담론에서는 그러한 구조가 가능했지만, 기저에 농축된 무의식들로 인해 디지털은 전혀 다른차원으로 전회한다. 디지털은 더 이상 현실과 병치된 또 하나의 가상-세계가 아니다. 이제 디지털 세계는 라캉(J. Lacan)적 상상계에 걸쳐있다. 디지털 미디어가 우리의 주체를 비칠 때 주체는 온전히 담기지 못하고, 디지털의 부호화 방식으로 철저히 분해된다. 이때의 부호화 과정에서 상실되는 주체의 데이터는 결여된 것이자, 동시에 우리가 욕망하는 것으로 남는다. 결국 디지털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신체는 수태된-분열된 신체이지만 총체로서의 주체성을 갖기 위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이해를 위해 인간은 디지털 미디어의 수태를 욕망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말마따나, 디지털 미디어는 더 이상 인간 신체의 확장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확장된 디지털 미디어와 디지털 네트워크의 장에서 결여되고 분열된 신체를 절감하며 더 이상 우리 미디어-신체를 장악하지 못하고 정보의 매개체가 된다. 가질 수 없는 통합적 주체의 반영(reflection)은 수면에 비치는 나르시스의 상처럼 디지털 미디어의 표면에서 우리를 매혹한다.

[도 1] 황지용, Aliasing, 인터랙티브, 2020

4.
디지털 미디어는 그 상호소통성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타인의 응시를 매개할 뿐이다. 그러나 할 포스터(Hal Foster)의 논문에서와 같이, 응시는 사방에서 바라보여 지지만 “세계의 스펙타클” 속에서 하나의 얼룩에 불과한 주체에 선재한다.[2] 응시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 상상계로 향한다. 회화와 사진은 스크린(screen)으로 타인의 외상적 응시를 길들이지만, 디지털 미디어의 스크린은 그 투명함으로 찢어발겨진 상태이다. 실재적 타인의 외상적 응시는 디지털 스크린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제된 상호소통성은 응시를 막지 못하는, 명목상의(기만적인) 스크린만을 형성할 뿐이다. 결국 디지털에서의 주체는 타인에게 응시되는 주체이고 전시되는 주체이다. 이처럼 디지털 미디어가 가능하게끔 보여주는 주체의 총체적-기계-인간의 이미지는 완벽한 오인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열된 주체는 기만과 오인으로, 디지털 미디어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총체적 주체로 반영한다. 이러한 상상계적 디지털 미디어는 그 자체로 라캉의 ‘거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의식이 침전된,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상징계의 보수적 규제를 받지 않는 전 오이디푸스적 욕동은 다시 귀환하여 디지털 미디어 세계에 침투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찢어진 스크린은 타자의 응시, 즉 욕망을 직접적으로 매개한다. 욕망 매개의 장으로서, 디지털 미디어의 스크린은 그 자체로 상상계로의 회귀가 가능한 실재(Real)이다. 아날로그 사회와는 전혀 다른 층위를 형성하기에, 디지털에서의 응시(욕망)는 거세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미디어는 실재계와 맞닿아 새로운 종류의 정신분열을 야기한다.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의 트라우마적 이미지들이 욕망의 기표로서 유희하는 것 또한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주이상스(jouissance)이기 때문이다.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가 이야기하듯, 정신분열증은 상상계와 근접해 있다. 상상계에서 나타나는 리비도적 욕망은 프로이트가 억압하고 축소한 것처럼 부정적이지 않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욕망은 신비롭고 생산적인 것이다.[3] 마찬가지로 상상계적 디지털 미디어 또한 새로운 생산의 가능성을 잠재한다. ‘오이디푸스화’ 되지 않은 동세대의 디지털적 인간이 새로운 방식의 생산 조건에 놓여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기성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감각을 생산한다.

[도2] 김동희, 정신질환 컴필레이션, 단채널 비디오, 2’03”, 2020

5.
클레어비숍(Claire Bishop)의 2012년 에세이에 따르면, 현대 미술에서 지속되어온 재목적화의 전략은 디지털 시대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된다.[4] 디지털 시대의 재목적화 전략은 디지털의 형식 전환과 코딩 변환 과정과 유사하다. 인터넷의 무한한 자료들에서, 선택과 큐레이션은 새로운 작업 전략이 되었다. 즉 우리는 기존의 요소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생산해낸다. 작업의 물리적 표면이 아날로그라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선별 전략이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원본성과 저자성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존 산물에 대한 유의미한 재전유이다. 이러한 전략은 디지털 시대의 표류(dérive)이다. 예술가들은 임의의 체계로 디지털 네트워크를 서핑하며 큐레이션과 리서치를 행하는데, 이 체계는 디지털의 부호 처리 과정을 닮아있다.
이제 예술작품의 제작 조건은 디지털의 방식으로 새롭게 재편된다. 디지털이 가지는 부호화 방식, 네트워크에서의 금융 체계라는 조건에서 예술가들은 새롭게 제시된 기술적 상황에 적합한 전략을 취하게 된다. 작품이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실천적 의미의 디지털로서 작업되는 것이다. 기존의 디지털 아트가 새롭게 디지털화 되고 아날로그 아트 또한 디지털화 된다. 비숍에 의하면,이러한 상황은 기존 예술 형식의 노후화와 더 나아가 비물질화, 탈저자성, 탈상품화의 측면에서 예술 자체의 긴급한 노후화를 예견하고 있다.

[도3] 구태승, abiior, oil on canvas, 10x10x3.7cm(x7pieces), 2020

6.
이제 디지털은 인식의 미디어를 넘어서 존재의 환경을 형성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세계의 방식이 디지털의 방식이다. 디지털은 형식과 방식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구성된 세계를 여러 감각 파편으로서의 이미지로 채운다. 디지털 이미지들은 파편화되어있다. 시각자료, 텍스트, 사운드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부유하며 디지털 인터페이스 (혹은 플랫폼)의 표면에서 아상블라주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단편적 이미지들은 짧게 반복된다. 뜨거운 파편들의 반복은 순간적 몰입과 더불어 순간적 망각을 낳는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포털 사이트와 같은 디지털 아케이드에서 이미지와 텍스트 묶음으로 제시된 수많은 파편적 블록들은 이페메라(ephemera)로서 빠르게 스크롤되어 사라지고, 곧바로 잊혀진다. 건망증적 사고는 디지털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것은 디지털이 가지는 비선형적인, 정보의 파편들로 이루어졌다는 특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어떠한 아날로그적 정보가 디지털로 변형될 때에, 이것은 연속성을 잃고 파편적 부호들로 대체된다. 이 부호들은 아날로그가 원래 가졌던 윤곽만을 얼추 형성할 뿐이다. 이 때문에 디지털은 ‘납작해’진다. 그러나 이 납작함은 단지 조형적 피상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디지털은 수많은 정신적, 사회적 층위를 형성할 수 있다. 여기서의 납작함이란 디지털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숙명, 즉 의미와 맥락의 납작함이다. 디지털은 부호의 파편화로서 작동되기에, 아날로그의 입체감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것이다. 디지털은 납작하며, 울퉁불퉁하다. 기표로서의 수많은 디지털 이미지들은 납작함을 전제로 우리 주변을 부유한다. 이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디지털의 신화에서도, 우리는 의미의 납작함 속에서 고립된다. 디지털 미디어에서의 주체는 타자와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타자로 존재하며 명징한 의미전달을 성공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데리다의(Jacques Derrida)의 차연(differance)과 같이, 정착하지 못하는 납작한 기표들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결정이 지연된다. 그러나 납작한 기표들은, 희망적으로 말하자면,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도4] 강운지, Post-Neighbor, 디지털 비디오, 1’14”, 2019

7.
우리,예술가와 존재는 임박하게 맞이한 이 디지털 나르코시스의 시대에 어떠한 생존 전략을 취할 것인가?

 

 


[1]마셜 맥루언,김상호 역,미디어의 이해,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2]Hal Foster, Return of the Real, 1996, 138-1
[3]질 들뢰즈,펠릭스가타리,김재인 역,안티 오이디푸스, 2014, 민음사
[4]Claire Bishop, Digital Divide: Contemporary Art and New Media, Art Forum, 2012

* 작품 이미지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음

* 전시 정보
<<디지털 나르코시스>>
참여 작가:황지용 강운지 김동희 구태승
전시 장소:대안예술공간 IPO
전시 일시:2020. 05. 10 – 2020. 0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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