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남_비장소의 상상속에서 유희하기 – 청주 퀴어 에세이

박규남

콜렉티브 살친구, <신기류 신지루 신기루>전시 전경, 햇빛이 잘드는 이곳 26도씨, 2020

‘비장소’라는 말은 서로 구분되지만 보완적인 두 가지 실재를 가리킨다. 어떤 목적(교통, 통과, 상거래, 여가)과의 관련 속에서 구성된 공간, 그리고 개인이 이 공간들과 맺는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층위의 관계가 어쨋거나 공식적으로는 상당히 겹치지만(개인은 여행하고 구매하고 휴식한다), 그렇게까지 혼동될 정도는 아니다. 비장소들은 자기와 타자에 대한 관계의 총체를 매개하는데, 그 관계는 간접적으로만 그 목적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적 장소가 유기적인 사회성을 창조하는 것에 반해 비장소는 고독한 계약성을 창조한다.1)

-마르크 오제, 『비장소』

오늘날 우리사회는 비장소를 중심으로 매일매일 리뉴얼되는 경험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공간이 되기도, 사물이 되기도 하며 심지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일정한 기간을 두고 끊임없이 변하는 전시면적들, 더 자극적이며 유용한 상품들, 모르는 사람과의 다중매칭 프로그램 등 이러한 장소들은 비록 충만해 보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결핍을 가속화하거나 공허함을 부풀린다. 국어사전에서 지칭하는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곳’,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의미한다. 공간은 가능성을 지닐 뿐 장소로서의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경험하는 자의 체험을 통해 감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스페이스가 여백으로서의 추상적 공간이라면 플레이스는 경험, 기억, 가치들을 통하여 주관적인 장소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최첨단의 기술시대와 자본주의적인 의식체계는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하는 형식으로 생산하거나 극대화시킨다. 만약 물리적인 공간이 부재한 상태에서 비장소를 통한 합리적 사고, 목적에 얽매인 결핍의 감정은 빈 곳을 넘어 그 자체로 투명한 것, 공허의 끝자락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로운 게이들에게도 비장소는 존재한다. 매력자본의 경쟁에서 배제당한 자들은 어플 속의 수많은 큐브를 관찰하며 노픽(사진이 없는)유저에게 쪽지를 보내거나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 원하는 플레이와 함께 가상의 계정을 적어 논다. 아니면 공공연한 장소에서 마치 기약이라도 한 듯이 조우를 하는 방면 이반업소를 찾아가 목적에 맞는 사람을 물색해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러한 대부분의 관계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작동되는데 특히 인터넷 보급률을 넘어 대량의 접속률을 자랑하는 한국 사회에서 퀴어 커뮤니티 공간은 대체적으로 실시간 가상세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크루징의 행위가 종전에 실제하는 공간(극장, 공원, 화장실 등)을 기점으로 흥했다면 오늘날은 온라인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중간 유통형식을, 서로에 대한 확인을 거친 후에야 암묵적인 승인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퀴어가 드러내기 어려운 문화라는 점과 종태원(종로와 이태원을 지칭한다)이라는 특정 장소를 기점으로 게이들이 모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퀴어는 변방의 문화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퀴어 장소, 퀴어에서의 비장소를 지역적 차원에서 논의할 때 퀴어공간은 더 은밀해진다. 지역 LGBT 커뮤니티 센터가 산재한 타국의 행보와 달리 지역의 공간은 협소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특정 요일과 시간에 따라 거점 퀴어공간으로의 임시적인 이민을 떠난다. 모든 인프라가 밀집되어있는 서울에서 생활하는 게이 인구와 지방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게이의 수, 연령층이 다르듯 퀴어적 장소는 비대칭적인 성격이 있다. 이러한 실제적 공간의 협소함과 부재함은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한다. 오히려 지역의 폐쇄성은 오픈된 맵과 소스들 사이에서 능동적으로 개방되며 사람들은 사이버 언어와 행위를 통해 조건부 소통을 진행한다. 그렇기에 유저 개개인에게, 지방 게이들에게 퀴어 비장소는 고독한 계약성을 넘어 오히려 실낱같은 희망이 아니었을까.

-청주에서 퀴어하기, 퀴어에서 청주찾기

콜렉티브 살친구, <주워들은 이야기>, 노트에 인터넷 기사 스크랩, 12x18cm, 2020

 2019년 아티스트 콜렉티브 살친구로 구성된 양승욱, 허호 작가는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퀴어에 대한 흔적을 찾으며 신 기류로서 청주퀴어를 리서치하고자 했지만 협소한 지역 퀴어공간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며 그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웹 서칭을 통해 그 이미지들을 수집하게 된다. 이슈화된 기사, 짧은 코멘트와 댓글, 긴 썰들의 파편화된 내용들은 공공연한 감정들을 공유한 채 집단의 신지루(일본말로 ‘믿다’)를 보여주며 이 플랫폼들은 개개인에게 지역의 신기루로서 남게된다. 게이 커뮤니티 상에 존재하는 청주의 DVD방은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댓글을 통해 타 지역으로 이전했다, 사라졌다를 추측하며 그곳의 존재여부를 살피는 것은 마치 청주 퀴어의 미시사를 찾는 것과도 같다. 또한 사우나라는 일반 업소를 끼고 연명해야 하는 퀴어공간의 정체성은 마치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의 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신기루적 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청주의 지역성과도 연동된다. 아티스트 스스로가 레지던시를 기반으로 상주하며 경험한 청주는 ‘직지’라는 역사문화원형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보를 보여왔음을 목도한다. 최초의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이라는 점, 기록과 인쇄를 통한 문화혁명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국보가 실제 청주시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 직지조형물, 직지시장 등으로 변형되어 마치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신기루로 작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청주라는 지역 안에서 문화도시에 대한 열망-존재로서의 문화-배제되는 문화-퀴어 커뮤니티의 문화-문화라는 암묵적인 믿음이라는 끝없는 알고리즘을 생산하며 신기루적 동질성의 체계를 이룬다.
결과적으로 청주에서 퀴어를 찾는다는 것은 집단의 상상력을, 폐쇄적인 문화 속에서 또 다른 도시성을 탐사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이번 전시는 이러한 문화적 현상에서 시작되었다. 직지의 허황된 이미지를 오마주 하듯 만들어낸 스크랩북은 단서나 증거의 형태로 콜라주되어 전시장 입구에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려있다.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 같은 청주사우나에 대한 멘션들, 청주퀴어축제조직위의 해체, 청주체육관 여장남자 사건 등 역사의 큰 맥이자 선별된 시간의 나열에서 벗어나 퀴어 미시사를 바라보는 두 작가의 눈은 디지털 산보자로서 사이버 스페이스를 항해하기도, 현장의 조리개로서 공간을 탐색하기도 하며 가상의 퀴어장소를 구축해낸다.


웰컴 투 더 크루징 월드, 부유하는 신체들

양승욱, <미완성 효과>, 가변크기,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15장, 2019

전시공간에 들어감과 동시에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들어가는 입구의 면적을 제외하고는 한 면의 공간에 평면적인 사진들이 크기를 달리 한 채 오목조목 붙어있다. 이 사진들은 한곳에 모아놨기 때문에 바라보는 시각적 위치를 정 반대편에 위치하지 않는다면 사진을 정확히 볼 수 없다. 이전의 전시인 동성캉캉-Treasure Hunt(아트비앤, 2019)에서 전시장 곳곳에 숨겨놓듯이 붙인 사진들, Im NO more MAD than you are(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19)에서 하나의 사진을 여러 장으로 분할하여 배치한 것과는 달리 이번 ‘미완성효과’ 연작들은 매스미디어의 MASS(덩어리)를 형상화하여 정해지지 않은 다수를 보여주듯이 그 이미지들을 응축해놓았다. 또한 전자의 전시들에서 보여주는 형식 외에도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크루징을 행하는 대상으로서 토이들의 부재이다. 공공장소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장난감들을 연출함으로서 좀 더 직접적으로 크루징 행위에 대한 노출을 감행했다면 이번 전시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파도 속에서 르포 형태의 카메라 시선에 집중한다. 다른 시간, 상이한 장소에서의 사진들은 모아지는 과정에서 좁은 공간의 서스펜스를 형성시키는데 퀴어적 협소함 속에서도 공간을 발견하고자 하는 개개인의 허황된 욕망, 크루징의 풍경을 탐색하는 긴장감의 레퍼토리를 현장사진으로 보여준다.
양승욱 작가가 배열한 사진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고정된 이미지에 불과해 보이지만 게이 애플리케이션이나 매칭 프로그램에서의 수많은 다중 스크린을, 사용자 인터페이스 상의 매력자본에 의해 구조화되는 큐브의 속성을 보여준다. 가상의 크루징 월드이자 사진 속에 있는 피사체들은 마치 자신의 프로필을 통해 기호화된 자신의 신체와(운동하는 모습, 벗은 몸) 취미(등산 인증샷, 전시회 관람, 맛집) 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다. 이러한 자아 연출의 사회적 양태는 사이버 에로틱 사회에서 점수로서 치환된다. 가장 대중적인 한 어플의 예로는 최근 리뉴얼된 프로필 편집기에 키와 몸무게, 인종, 자신의 타입과 취향(군인, 은둔, 베어, 근육 등), 찾는 상대(관계, 채팅만, 네트워킹 등)를 가장 상위의 구조로 위치시켜 놓음으로써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목적을 매핑의 주 요소로서 배치해놓았다. 그래서 고정되었지만 부유하는 사진들은 암묵적인 사이버 커뮤니티를 바라보는 구조화된 창이기도 하다.

양승욱, <미완성효과> 일부,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30x20cm, 2019

더불어 이번 연작 이미지들이 형상화하는 것은 성적인 신체로서의 부분과 사람들을 재현하는데 있어 누군가를 찾는 개인으로서의 현신들(밤에 빛나는 고양이의 눈, 돌고도는 회전목마의 유니콘들, 엉킨 타이어들), 청소기와 놀이터가 가진 남성 성기로서의 은유 등을 보여주며 결국 전체가 그 일부이자 일부가 전체를 구성하는, 어플과 신체 사이 유기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미완성 효과’라는 연작 제목 또한 이러한 작가의 유기적인 작업의 근간을 보여주는데 사진을 구상하고 연출해서 찍는 것이 아닌, 인화 후 개별 사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나 이미지들의 나열을 통한 서사의 구축을 이룬다. 그래서 비선형적으로 시작한 사진들은 선형적인 대칭성을 이루며 하나의 컷이 단서로서, 여러 장의 사진이 필름의 일부인 패턴으로서 의미체계를 보완하며 존재하게 된다. 현장탐사에서 시작한 포착의 순간들은 작가 개인에게는 크루징 장소이자 퀴어 공간이라는 보물을 찾는 아이의 시선일수도 있지만 일부로서의 쇼트, 여러 장을 넘김으로써 완성되는 시퀸스는 어른들의 은밀한 놀이로 종결된다. 작가가 사진을 찍을 때 단렌즈를 선택하는 이유 또한 스냅사진에서의 편리성을 떠나 멀리서 관음하는 타자가 아닌 가까이 마주하여 주체적으로 사물을 찾는 개척자의 시선을 보여주며 동시에 빛이 부족하거나 어두운 곳에서의 플래시를 터뜨려 찍는 행위는 은밀한 공간을 찾는 크루징 행위와도 닮은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미완성 효과가 자아내는 또 다른 측면은 이것이 심리학적 용어에 착안한 강박적인 증상을 말해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미지의 투사 후에 기록으로서 남는 사진은 현상하기 전 주위 환경, 빛의 패턴에 의해 ‘잠상’이 생기게 된다.2) 이 잠상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상을 할 때 나타나는 이미지로 엄밀히 말하면 비가시적인 이미지다. 작가 본인에게 반복되는 탐사 중에도 실재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심정은 개별적인 사진 안에 모호한 퀴어적 공간,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한 아쉬움의 ‘흔적’이 잠상으로서 남아있다. 그래서 인화 후에 모든 이미지가 영속적인 속성을 가졌을 때 배치 과정에서 사진들은 뜻하지 않게 유사성을 가진 채 이야기가, 개별 사진에 남아있던 미완성의 잔상은 하나의 구조이자 사람들의 형상으로서 비로소 완성된다.
완성된 사진들은 사후 작업을 거쳐 극도의 선명함과 색의 대비를 통해 인위적인 변형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친근한 사물을 낯섦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선은 피사체가 더 이상 사실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의식이기도 하다. 플래시를 터뜨려 주변과 분리되는 피사체나, 응고되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풍경들은 존재하지 않는 사건, 피해자를 증거화하기 위한 사진 촬영으로서 남는다. 사실이라는 단어가 진실을 담보하지 않듯 스냅 사진 속의 수많은 피사체는 모두 실용성이나 특정한 목적의 효율로 구성되었다 의미체계를 잃어버린 잉여 대상들이다. 이렇게 애매한 상태로서의 대상들은 그간 작가가 천착해온 작업의 의문(특정 권력의 소수자 혐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신념 등)이자 이러한 작위성의 신화적 현상들에 대한 대항이기도 하다. 미완성효과에 대한 작업 형식은 이러한 사람들의 강박적인 사고, 신기루적 상태를 보여주며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을 비출 수 있는지에 대한 기록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Don’t look back in anger! 대디 모션

Slip inside the eye of your mind
당신의 마음의 눈으로 들어간다면
Don’t you know you might find a better place to play
더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You said that you’d never been
넌 한 번도 가본적 없다고 했지만
But all the things that you’ve seen Slowly fade away
네가 그곳에서 본 모든 것들은 천천히 사라져 버릴거야3)

-Oasis <Don’t look back in anger> 인트로

 

허호, <찌>, 종이 위에 연필, 29.7x21cm, 2020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만큼 어려운 만남이 있을까. 나에겐 자장면에 만두 추가가 더 효율적으로 인용된다. 동성애자로서 느끼는 감정은 사회에서 용인되지도 않을뿐더러, 세상엔 다양한 성분류가 존재한다는 적절한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늘 숨겨왔어야 했다. ‘자연스러움’은 늘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만남뿐만이 아니라 행동이나 외모에 있어서도 말이다. 목소리가 여자 같다는 반 친구들의 놀림이나 쟨 좀 여성스럽다거나 하는 부모님의 말씀은 예민한 시기에는 의도치 않았던 스트레스로 들려올 때가 있다. 게이들은 가끔씩 융합되거나 화합할 수 없는 세상속에서 차라리 게이들만의 섬이 있는 게 더 나을듯하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실제로 ‘메종 드 히미코’라는 영화 속에는 중장년의 호모 아저씨들이 다 같이 사는 게이 실버타운을 보며 “정말 그런 것 인가, 이런 대디(나이가 든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은어)들의 삶이라면 나쁘지 않겠는데”라고 읊조린 적도 있다. 또 몇 년 전에는 텀블벅에서 게이빌리지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류의 것들은 어쩌면 희망적이다. 제한된 커뮤니티 내에서 더 암묵적으로 규정된 압박들은 자신이 게이 안에서 게이로서 존재함이 가능한지를 자문하게 된다. 그리곤 여러 의미에서 쉽게 지치고 무료해진다. 오아시스의 노래에서 노엘이 말하는 것처럼 더 좋은, 더 나은 곳을 찾고자 하는 마음의 눈은 결국 병풍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소진되어 하강한다. 그래서 의미를 상실한 게이는 더 음지의 공간을 향해 당도한다. 그러한 공간은 대체적으로 DVD방, 남성전용 사우나, 게이휴게텔 등으로 공적인 장소성을 끼거나 철저히 사적인 만남의 장으로 양극의 모호한 위치에서 쉽게 소비되어 이내 증발된다. 그렇게 오아시스의 노래를 벗삼아 누군가는 은밀한 퀴어장소로 자신을 이행시킨다. “이제 화내며 돌아보지 않아도 돼, 아무도 낯인지 밤인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줘”.

허호, 작품 전시 전경, 2019-2020

작가 허호가 구축하는 공간은 게이들의 은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작가는 실제 전시장 안에 위치한 비어있는 푸세식 화장실의 공간, 드러난 전시면적에 사우나에 주로 보이는 경고문을 붙임으로써 드러나는 게이들의 내밀한 공간을 형상화하여 자신의 회화작품을 설치한다. 일전의 전시 두 개의 가로선은 길이가 같다(2019, 무악파출소)에서 보여준 남성의 신체 드로잉과 자기경험적 에세이 또한 화장실과 이어진 주변부의 벽면을 통해 회화를 설치했으며 이러한 공공장소 안과 밖을 이어주는 작품들은 비장소를 떠도는 인간들의 군상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어디에나 만연한 화장실의 기표는 성적 쾌락을 위한 기의로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 채 재탄생한다. 공공장소에서의 개인적인 행위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다는 편리함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함 또한 내재하고 있다. 이와 다르게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더욱 유동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손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찜방이나 휴게텔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공간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매력자본에서 배제된 자들이거나 신세대와의 조화가 불가능한 중노년층의 소수자이다. 이러한 신체는 소통 가능한 장소에서 밀려나 비언어적인 소통으로서의 몸짓, 쾌락추구의 목적성을 가진 행위로 전이된다.

양승욱, <경고문>, PVC프린트, 84.1×59.4cm, 2020

이러한 공간이 장소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경고문이다. 실제 청주퀴어 탐사를 떠난 와중에 알게된 유일한 공간인 사우나에서 마주한 안내문이 사실상 경고문으로 작용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오히려 이러한 텍스트의 명시를 통해 은유적으로 퀴어공간의 상징성을 얻는 사우나의 이중적인 면모를 바라보며 두 작가는 안내문의 이미지를 재건한다. ‘강조’와 ‘위험’을 내재하는 붉은 색상을 무지개 빛깔의 색채로 채워 넣는 과정과 정형화된 경고문의 고딕체를 변형하여 글자를 겹치거나 위치를 바꿔보는 작업은 경고문이 가진 가독성을 해체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키치적인 작업은 특정 성별의 행각은 용인하는 사회적 배경, 게이들의 만남이 행해지는 특정 장소가 불법업소라는 오명을 비틀며 다시금 안내문으로 변환된다.

조금 더 깊숙한 공간으로 들어가, 작가의 초점이 몰리는 지점은 나이 든 중년의 육체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몸은 주류 속의 남성성, SF장르로 탄생한 터미네이터와 로보캅이 아닌 대중문화 바깥의 몸이다. 전자의 기계인간들은 테크놀로지적으로 강화된 육체를 가지로 집요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4)임에 반해 작가는 자기 경험에 기반하여 폭력으로부터 밀려난 외화면 속 다양한 형태의 신체를 조명한다. 이로서 타자화된 육체는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중년의 신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현된다. 게이 안에서 밀려난 몸, 이성과의 교제에서 탈각되어 새로운 섹슈얼리티를 경험하고자 하는 몸들은 대상화되어 정물적인 사물로서 재현된다. <찌>와 <백일몽정> 속의 고정된 신체는 소진된 몸으로 몸-짓의 생동감을 배제하여 무채색이나 단일한 색감을 활용하여 이방인으로서의 표피를 구성한다. 더불어 수평을 이루는 캔버스 안에 누워있는 신체를 수직으로 배치함으로써 프레임 안에 압축시키는데 신체의 불안정성을 다른 작품들과 연동지어 구조화된 몸을 연속선 상에 나열한다. 작가는 조르주 바타유가 주장한 것처럼 각 개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분리된 개체로 여기며, 에로틱한 시도, 즉 자기 자신의 육체라는 외로운 한계를 깨트림으로써 다른 사람을 알고자 하는 시도는 찰나적이나마 타인과의 연속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으로5) 유사한 신체들을 제시한다.

허호, <노매너1, 2>, 종이위에 연필, 21×29.7cm, 2020

작가가 구현하는 신체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점은 모호한 얼굴이다. <익명의 누군가>와 <노매너>는 외모지상, 얼빠 라는 개념에서 용인될 수 없는 인물들의 표정을 세심하게 묘사하기보다는 가리거나 규격 밖으로의 배제를 감행한다. 작가에게 작품 속 중년의 육체는 순수한 관찰의 대상이자 욕구를 내재화하고 있는 사회적인 구성물이다. 그렇기에 신체를 재현하고 현재화함에 있어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육체의 구도, 작품 간의 배치들은 입체주의가 가진 시공간을 표현하듯 회화 밖으로의 너머로 이동한다.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대디(나이든 게이를 지칭하는 은어)모션은 결국 작가 스스로가 고민해봐야 하는 자신의 담론이기도 하거니와 불특정한 3인칭의 현실이기도 하다.

투명한 곳을 상상하기, 빈 곳을 채워넣기

양승욱, <파동>, LED라이트, 30x16cm, 2020

비장소가 현대사회에서 목적성에 기반해 능동적인 소비공간을 창출해냈지만 단지 그러한 시스템 사회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폭력과 경제적 양극화가 체제 바깥으로 내몬 인구의 임시 거처들까지를 포함한다.6) 두 작가의 작업을 이루는 근간의 공간들은 폐쇄적인 사회 안에서 제대로 정주하지 못하는 퀴어들을 다룬다. 또한 청주라는 지역 안에서 간헐적인 소통을 주목함으로써 직접적인 경험을 대체하는 미디어 공간에서의 퀴어성을 현현한다. 원격탐사와 현장탐사를 병행하며 인식한 것들은 명증 가능한 단서들은 아니지만 빈 곳에 대한 가능성을 유추하게 된다. 작가 본인들에게도 이번 전시는 지역의 문화-문화 권력, 퀴어 문화, 게이들의 삶이라는 원동형의 고리를 물며 다시 읽고, 써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더불어 구성원에 와해되어 부유하는 존재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결핍의 탐색을 통해 존재를 완충하고자 하는 모습은 적극적인 퀴어-되기의 과정이다. 청주에 떠다니는 공간들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보며 그 설계도를 기반으로 가상의 퀴어공간을 구축해 보는 작업은 빈 곳을 채워 넣는 작가들만의 예술실천, 개념화의 현장인 것이다.

 


 

1) 마르크 오제, 『비장소-초 근대성의 인류학 입문』(Non-Lieux Introduction a une Anthropologie de la Surmodernite, 1992, 이윤영,이상길 옮김, 아카넷, 2017), p115
2) 테렌스 라이트, 『사진이란 무엇인가-사진의 이론과 실제』(The Photography Handbook, 1956, 이주영 옮김, 눈빛, 2017), p115
3) Oasis, <Don’t look back in anger>, 1995, 가사 중 일부 발췌
4) 클라우디아 스프링거, 『사이버 에로스-탈산업 시대의 육체와 욕망』Electronic Eros:Bodies and desire in the Postindustrial age, 1996, 정준영 옮김, 한나래, 1998), p139
5) 피터 브룩스, 『육체와 예술』Body work, 1993, 이봉지, 한애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0), p35
6) 마르크 오제, 앞의 책,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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