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제현_가치라는 환상

엄제현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극단적인 평가절하는 때때로 정치에 관한 냉소를 가볍게 넘어서는 듯하다. 왜일까? 언뜻 보기엔 아직도 ‘미’라는 개념이 직관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미몽적인 사유 체계에 기인하는 듯도 하고, 소정의 작품들이 소더비나 크리스티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형성하는 데 대한 아연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작품이 부자들의 탈세에 악용되고 있다는 (제네바를 시초로 생긴 프리포드나 국내에도 여러 번 발생했던 비자금 조성 등에 관한 이야기일 텐데) 해악의 원인을 작품에 돌려 미술이 내재하고 또 포괄하는 여러 가치를 폄하하고 이내 등을 돌린다.

 재밌게도 이런 점들이 예술의 유의미함을 읽어낼 기회를 준다. 현대미술은 사기라며 단적으로 몰아붙이는 대중의 뭇매는 현실을 지키려는, 더 정확히는 리얼리티를 어떻게든 수비하려는 자아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 말할 때 대중이 시비를 걸어오는 지점은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라는 개념을 환기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행위에 대한 가치를 묻거나(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데?) 예술 작품에 매겨지는 가치를 대질하기도 한다.(그것이 그런 가격-가치를 형성하는 이유는 뭔데?) 상품생산이 보편적인 세계에서, 상품이 가지는 가치가 본원적이고 내재적이며 무엇보다 합리적이라는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숭배하는 세계에서 이런 질문을 발생시키는 예술의 존재 가치는 때문에 지적 유희 정도로 치부될 수 없다. 작품들은 길목 같은 것이다.

 예술을 진지하게 대하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제힘으로 사유의 조타를 시작해야만 하는, 주체화의 기회를 접하게 된다. 길목에서 기존의 사유는 일순간 발이 걸리기에, 대중이 여기서 취하는 반응의 대개는 균형을 다시 잡기 위해 작품(과 그에 따르는 논의의 전반)을 회피하는 일이다.(그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워.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를 못 하겠어.) 그들은 사유의 싹을 자르고는 유턴한다. 현대미술의 텍스트들이 취하는 어법에 그들이 당황하는 이유를 혹자는 언어에 대한 용법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개념을 붙잡는 수단이고, 일상의 언어는 일대일로 대응하는 기호-언어의 세계를 구축하며 메시지의 송신-수신의 감도만을 높이려고만 사용되며, 개념을 붙잡으려는 언어의 체계 안으로 진입하려는 모든 시도가 생활 중에선 결락되어 있기에 미술계/비미술계의 간극의 골이 나날이 패여 간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그들이 사유하려는 그 지점은 일상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요구하기에 난관처럼 여겨진다.

 몇몇 걸작으로 추앙되는 작품들에 매겨지는 천문학적인 가격에 대한 공격은 공허한 질문 중 으뜸이라 할 법하다. 미술에 형성되는 가격이 장황한 허구라는 진지한 비난은 왜 자본주의 가치체계에 대한 공격으로 전도되지 못하는 것일까? 국내 미술시장이 양도소득세 외에 여타의 세금을 작품에 부여하지 못하고, 따라서 각종 비자금이나 탈세에 연루되는 사실은 미술이 사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에 건전한 가치 내지는 합리적 가격이란 것 자체가 허울 가득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비단 작품에만 적용되지도 않는다.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으로 나뒹굴 수 있는 주식, 시시각각 변동하는 환율, 단번에 꺾이고 단숨에 도약하는 선물가격 등 우리가 변동환율제를 맞이한 지 근 50년이 되었음에도 이 조악한 비난은 오로지 작품을 폄훼하는 데에만 쓰인다. 한 인간이 행성의 자전을 감각하지 못하듯 화폐의 실질가치가 끊임없이 변동되고 있음에도 명목가치라는 고정된 실체를 가진다고 믿게 만드는 주술적인 구조는 미술에 대한 경멸을 한껏 배가시킨다. 이것이 현실을 방어하는 논리가 아닐 이유가 무엇인가. 금융 경제의 철저한 비합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비토해야만 하는 희생제의물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양자 모두가 허구의 씨실로 짜여졌다는 점에서 현실과 예술은 짝패이다. 다만 무가치한 현실을 보호하기 위해 예술이 무가치하다고 선별해 억류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 채 행하는 것이 아니며, 더더욱 알고 있음에도 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르면서 아는 체 행한다.

2018년 10월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한화로 약 15억 원에 낙찰된 뱅크시의 <풍선과 소녀>, 낙찰 직후 액자 속 작품은 파쇄되었다,사진출처

 작품에 매겨지는 가치에 대한 불신이 앞서와 같다면, 작품을 생산하는 행위에 대한 가치를 묻는 일도 비슷한 결을 따른다. 정기적인 임노동이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가 규범으로 작동하려고 할 때, 부동산이나 복권과 달리 예술의 수행성이 노동과 대척점에 놓인다. 이유 모를 행운으로 인해 어느 날 벼락부자가 되는 앞의 두 예와 달리 예술은 인간의 손에서부터 탄생하면서 임노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수량만큼의 가격을 갖지도 않고, 정기적인 시간을 투하해야 하지도 않으며, 특정한 매뉴얼과 인과관계에 따라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공산품에 매겨지는 가격은 형이상학적인 동일성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작품은 그러한 보편성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임노동이 부를 생산한다면 작품은 논의를 생산한다. 이러한 차이를 직시하는 일을 그들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가볍게 차이를 인정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가 살포하는 가치체계에 대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만 하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그들은 차라리 작품에 몰두하는 일 전반을 싸구려로 취급한다.

 왜 하필 그 적대가 예술인지에 대한 다른 답이 있을까? 대중들은 자신이 체감하는 현실이 자율적으로 경험되고 누적된 총체적 산물로 간주한다. 그 현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과정 일체를 사회화라고 할 때 예술은 바로 그 사회화의 자율성과 자연성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메타적인 보기를 제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유정신병이라는 낙인은 정신병리학적이라기보단 사회학적 언어로 다루어져야 옳은데,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이 추종하는 인식작용을 거부하고 상이한 추상을 거친 이들에게 붙는 수식이기 때문이다. 가령 누군가에게 번개가 내리쳤을 때, 그것을 전하의 작용이 아닌 신의 분노라고 믿는 사람은 종교인이거나 정신병자이다. 그가 종교인일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방식으로 번개의 의미를 해석하는 이가 수적으로 우세할 수 있는 이외의 상황을 통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화폐에 관해 우리는 공유된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화폐는 감각이면서 초감각적이고, 주관이면서 객관이고, 현실이면서 환상이니까. 현실이라는 하나의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위해서 차용되는 환상 중의 환상이니까. 그러니 현실이 병 내지는 추상이라는 사실과 맞닥뜨리길 거부하고 현실을 지키려고 할 때 손쉽게 모순을 전치하는 환상의 대리물을 어거지로 예술이 떠안게 된다. 닮아있는 동시에 대척점인 거울의 상과 같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거부가 자아의 전략인 이유는 이러한 맥락이며, 일단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설이 세계를 지배하는 동안 그들은 그러한 담론이 생산하는 사회를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승인하고 합의된(?) 세계 안에서 삶을 희구하기에 그들이 당대를 대자적으로 사유할 매체를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합리적이다. 불행이 거기에 있다. 모르면서 아는 체 행하는. 벌거벗은 왕의 동화에서 군중은 왕의 피부를 보았지만, 오늘날의 대중은 그 피부를 옷으로 식별한다. 그러니 예술은 깬 채 꾸는 꿈으로 뒤집힌다. 달리 말하면 예술의 가치는 현실이라는 생산된 리얼리티의 꿈속에서 들려오는 라비앙로즈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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