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제현_회화를 둘러싼 질문들

엄제현

박제호, 이연석 2인전 《Vera Verto: Why Are Digital Kids Painting Again? Because They Think It’s a Good Idea》 전시장 광경, 사진출처: 위캔드 페이스북 페이지

본고는 집단오찬에서 황재민이 제기한 회화에 대한 논의의 끌개이다. 그가 진지하게 펼친 회화에 대한 질문은 동시대의 중요한 사유 중 하나다. 《Vera Verto: Why are Digital Kids Painting Again? Because They Think It’s a Good Idea》라는 다소 긴 이름의 전시는 (거진)파산한 회화에 대한 현재적 지위를 물으며 작금의 시공간 내부에서 회화가 어떤 방식으로 통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의 있는 질문인데, 반쯤은 잔, 반쯤은 생쥐인 불완전한 이미지는 회화가 처한 불명료한 입지를 직유적으로 나타낸다.

누구나 회화적 방법론에 대한 곤란함을 직감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회화는 그 매체를 작동시키던 내부의 게임이 끝에 다다랐으며, 명민했던 선배들의 분투가 부수고 또 만들어낸 판타지는 회화를 계속해서 밀어붙임으로써 공백을 지워나갔다. 사납게 말하자면, 그 덕에 회화는 반쯤은 통속이며, 반쯤은 키치이고, 잠정적으로 예술인 것이 되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시간의 틈새 속에서 그것의 예술로서의 가능성이 담보되는 최소한의 이유는 회화를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들로 인해서이다.

‘예술이 동굴을 탈출했을 때, 사진이 발명됐을 때, 미국산 후기 모더니즘의 평면성 신화가 무너졌을 때. 하지만 회화는 언제나 다시 등장하고 그것은 더는 놀라운 일도 되지 못한다.’1) 그뿐이겠는가. 피카소의 회화가 미메시스를 파괴했을 때, 마르셀 뒤샹이 선구하고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확언하듯 미술의 중심논의가 도상에서 지표로 이행했을 때,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스트랩의 연작에서 증언하듯 회화에 대한 감상이 더는 불가능해졌을 때, 앤디 워홀이 공업적인 생산을 그대로 반영하여 이미지를 제작하기 시작했을 때, 마그리트가 지시대상과 지시물의 관계를 비관계적 언어의 게임으로 전환시켰을 때 등등등 우리는 잇따른 공격으로 빈사에 이른 회화의 당대를 목격하고 있다.

황재민은 이 모든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기에 회화가 갖는 딜레마에 조응하듯 수식에서, 문장에서, 쓰기의 형식에서 이율배반적으로 일관되게 표현한다. (의미를 잃었다 찾은, 낡은 것으로서 새롭게, 죽음과 부활, 회화의 불가능성 내지는 회화의 특정성이 갖는 당위, 힘을 잃었기에 힘을 얻는, 부정성과 긍정성, 모호함으로써의 좋은 재능이자 게임의 외적 위치, 회화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질문 등) 회화는 분명 캔버스라는 유한한 공간성 속에서 무한한 소재와 내면성을 창출할 수 있는 동시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회화에서 회화가 지시하는바 이상을 볼 수 있던 이들에 의해서, 즉 회화로부터 회화와 현실의 관계를 진취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이들을 통해서 그 생명을 연장시켜 왔다. 황재민 또한 그중 하나로 그의 텍스트는 회화가 처한 현재를 그 나름대로 명료하게 진단하고 있다. 이를테면 회화는 수차례 폐기되었음에도 지속적으로 돌아오는 (더 정확히는 임사상태에서도 삶의 관성을 지속하고 있는) 논리적 불모 속에서 무엇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지 사유하며 유보조항을 달거나 은유를 동원하여 회화의 진동을 사색한다.

하지만 여러 논의를 포괄하며 회화의 결점으로 알려진 주장들과 대질하는 탓에 각 논의가 파생시키는 기저의 더욱 쟁점적인 요소들을 성급하게 무마하곤 하는데, 그중 몇 가지를 열거코자 한다. 이를테면 ‘회화를 기각하는 행위를 낭비로 간주할 때 물적 근거를 지닌 예술 양식을 이론의 부속품으로 여길 때, 비언어적 예술로서 미술이 갖는 미덕은 사라진다.’2)는 대목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예술은 과연 언어적인가, 비언어적인가? 예술이 비문자이거나 비음성적이라 하여 비언어적이라 치부하는 일은 성급하고 유치한 일이다. 예술은 언어 이전의 인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언어 없이 표상 이전의 대상으로 도망갈 수도 없다. 작품에 대한 인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생각하자. 우리는 대상을 관찰할 때 끊임없이 눈동자를 굴려 캔버스 내의 인접한 대상에서 대상으로 옮겨 가며 시각의 겹침을 통해 상을 획득한다. 한데 이것이 ‘본다’는 상황을 모두 말하지 않는다. 이윽고 획득된 회화에 대한 인상은 개념과 연관한다. 당장 황재민의 비평을 보더라도 박제호의 작업을 시대착오적으로 규정하는 이유를 회화가 상실한 물신성과 연관시키며 그 지위의 담보를 찾을 수 없는 동시대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이때 회화를 읽어내는 과정은 비언어적 예술이 갖는 미덕을 존중하지 않고 단일 회화의 개별성의 차원으로부터 탈피해서 회화의 이론이 누적한 상황적 가정 속에서 개념을 통해 소급적으로 구성된다.

물론 개별 회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연석의 회화는 기존재하는 상품 택을 붙인 채 두껍게 걸리고, 또 붓질로 뒤덮인 불균질한 표면 대신 미디엄이 깨끗하게 발린 균질하고 반질거리는 표면을 갖는다. 입체성을 강조하는 캔버스의 두꺼운 측면이나 투명하고 평평한 표면은 그 자체로 사물의 상태를 지시한다.’3) 그러나 우리가 이 묘사를 통해서 작품의 현존을 얼마만큼이나 가늠할 수 있을까. 회화는 언어화된 그 만큼만 드러나는 것이고, 항상 언어 바깥에서 유령처럼 모호하게 배회하는 무엇일까.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잔여와의 괴리는 비평과 회화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문제 삼는 것일까. 회화가 자신을 보여주는 만큼이나 비평도 뭔가를 ‘보여준다.’ 그 보여주기는 작업의 작은 우주 안에서 황재민이 제시하고 싶은 만큼의 특성을 표면화하여 제시한다. 묘사를 벗어난 회화의 특징을 가치 있게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누락하고 이내 결손되는 영역은 보상 불가능한 상해를 입히며, 단순히 작품을 보면 된다는 식의, 지시대상을 가리키는 문제로 다시 환원하면 해소되는 손쉬운 고민에 머무르지 않는다. 작품과 언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격과 그사이의 괴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언어가 불완전하며, 우리가 작업에 관해 언어를 통해 말하는 행위는 개념을 경유하며 일어나기에 우리가 ‘회화에 대해’ 얘기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냉담한 전망이다. 만약 작품이 예술로써 취급되는 순간이 만약 비평가들의 언어에서 지시되고 유통되는 상황들 속에서라면 예술을 비언어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취해야 할까. 그렇다면 비언어적 예술이 갖는 미덕, 나아가 비언어적 예술의 존재론적 지위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예술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언어의 편? 비언어의 편? 그도 아니면 캔버스 바깥의 복잡한 상호행위들의 편?). 회화를 회화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불능의 상황, 즉 회화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회화의 불가능을 증거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가 말하는 회화의 모호성은 어떨까. 황재민에 따르면 ‘힘을 잃었기 때문에 회화는 여전히 논란을 촉발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부정성과 긍정성을 내포하기에 임의적이고 중간적이며 그러므로 모호하다.’4) 그리고 이 모호성으로 인해 회화가 좋은 재능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호성의 지위는 회화로부터 촉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화를 둘러싼 미술의 자장 안에서부터 자체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회화는 그 속성이 내재적이며 스스로 발산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에 기만적이다. 이는 단순히 회화가 자신만을 속이는 단계에 머물지 않는다. 회화가 아무렇지 않게 화이트큐브를 배회할 때, 관객은 회화로부터 아직도 무엇인가 남아 있는지 회화 내부로부터 그것을 찾아내려 들기에 회화는 미적 사기를 친다.(회화에 대해 요사이 쏟아진 낭만주의적 비평들은 회화의 희생자들이다.) 더 큰 문제는 언제든 회화를 감상할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이 회화로부터 모종의 감상을 획득할 때, 그것이 회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회화를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의 심미적인 태도로 인해 고양될 때, 없는 것을 보았다고 믿고 말하게 만드는 내용 없는 소비를, 뒤집힌 쾌락을 제공하는 범죄를 저지를 때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의 환각성은 가장 악질적인 상태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회화가 갖는 모호성이 추상의 베일 속에, 색과 형태의 불분명한 조합 속 어딘가에 위치하는 듯 관람객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주목시키고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포착하라고 유혹하는 환상을 제공하는 회화는 어떤 가련함마저 유발한다. 황재민은 텍스트 내내 회화에 일종의 거리를 두며 규정을 회피한다. 회화를 담론적 얼개 안에서 사유하는 일을 예술의 비언어적 특성 내지는 물질적 근거를 간과하는 것으로 여기면서도, 회화가 캔버스와 벽을 떠나서도 모종의 ‘회화적임’을 고집하고자 할 때 ‘당위(!)’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단순히 담론의 규칙 안에서 안전하게 논의를 이어가려는 유약함이라고 볼 수 없다. 동시대 회화 속의 공허를 그 또한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사소한 시빗거리들이다. 디지털 환경이 우리의 시각성을 굴절시킨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망막적인 진술일까? 예를 들면 빛에 노출되는 색채가 디바이스상에서 픽셀의 영역으로 넘어가며 발생하는 색감의 변질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스마트폰의 테두리 부분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굴절로 인한 형태의 왜곡 문제인가? 아니면 스마트 기기 네트워크를 통해 온갖 이미지를 선별하고, 귀속하고, 나열하고 직조하고 내보내고 탐닉하는 일체의 과정 때문에 일어나는 주체와 이미지의 관계적 오인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스크린과 이미지는 결합물 이상의 담론적 현상이 아니라는 듯 취급하는데, (‘그러나 회화는 캔버스와 이미지의 결합물 이상의 담론적 현상이며 그러므로 스크린과 단순히 겹쳐질 수 없다.’5)) 스크린과 이미지의 관계는 담론적 현상이 아니라면 무엇을 경유해 우리에게 드러난단 말인가. 스크린 위의 이미지가 나타난 적도 없기에 사라진 적도 없다는 보드리야르의 유령적인 논의는 그렇다면 무엇이며, 스크린을 통해 시각성을 사유한 라캉의 논의는 무엇인가. ‘매체를 매체 자체로 이해하지 못할 때, 예술은 예술을 위판 판단 기준의 힘을 예술 바깥의 기관에게 이양하며 힘을 잃는다’6)고 말하는데, 회화의 판단 가능성은 이미 회화 내부에 없다는 사실, 제 자신이 문제적이 되는 상황은 회화 바깥에 있다는 사실로 인해 무엇이 부정될까? 예술의 판단 기준이 예술 내부에 있어야 하는 당위는 무엇이며, 예술은 하나의 분과로 규정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퀴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에 왜 매달리는 것일까. 그것은 왜 인식론과 존재론의 문제에서만 다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보기’라는 문제를 어디로 국한하고 학문적 과제로 삼아야 하는 걸까? 예술의 판단 기준이 시각성 안에서 그 당위를 획득하는 거라면 우리가 대중문화, 권력, 분배, 차이, 혐오, 갈등, 배제, 계급, 성, 인종, 종교, 민족, 가치, 진리 등에 천착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다시, 시각 연구라는 것은 매체를 통해서만 다루어져야 할까? 매체에 대한 논의는 다학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분과적으로? 아니면 개념주의적 전환 이후 철학의 하위 학제로 편성되어야 하는가. 보다 느슨하게 따져볼 때, 매체를 매체 자체로 이해할 때만 예술은 자기의 판단 근거를 세울 수 있는 걸까? 황재민이 이런 식으로 논의를 긋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화에 ‘관한’ 얘기로 넘어가자. 우리에게 놀라움을 계시하는 모호성이 소진되어 헐떡대는 회화가 자꾸 귀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회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회화의 논의를 촉발하는 모호성이 회화 외부에 있다면 우리는 회화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미라의 숭배와 회화의 관람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얼마만큼의 차이값을 갖는 걸까. 아르놀트 하우저의 주장대로 “예술활동의 주역을 담당하던 계층이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상실해 다른 계층이 문화의 새로운 담당자가 된다든가 그들 자신의 정신적 토대에 변화가 온다 하더라도 하나의 예술양식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일은 없다.” 회화는 이런 이유에서 남아 있을 뿐이라면? 이를 진지하게 주장하기 위해선 다른 논의를 우회해야 한다. 클래식이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이유는 뭘까. 교육이 민주화됨에 따라 시민의 교양이 평균적으로 상승한 증거? 아니면 서구의 음률 체계가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지표? 그도 아니라면 화장실의 직접적인 외설성을 덜어내는 베일? 클래식이 끝장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화장실에서 들려도 상관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똥을 누는 동안 녹턴이 들리는 상황을 황당해하는 인간은 없다. 마찬가지로 호텔에서 회화가 걸려있는 이유에 개탄하는 인간도 없다. 회화가 호텔에서 가장 의욕적으로 구비되어 즐비하게 늘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회화가 이미 통속화된 매체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투숙객의 심미적 감상을 위해 놓여있지 않다. 회화는 건축이라는 조형물의 부조처럼 달라붙어 있다. 그것이 거기 놓여있어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에 사실 회화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그럼에도 호텔 벽에 회화가 넘실거리는 이유는 없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개발되고 오토스케이프가 나타나면서 스트랩은 인간에게 더 이상 정지한 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언하였다.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가 가속하는 삶의 속도로부터 자유자재로 브레이크를 밟고 작품을 감상할 주체가 남지 않았다. 황재민은 회화가 과속방지턱이라 했지만, 리히터의 이미지에 비춘다면 하이패스에 가깝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적인 내면을 통해 작품을 시간 들여 감상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 앤디 워홀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음에도 붓터치에서 뭔가를 캐치할 수 있다는 믿음. 여하한 키치가 주는 심미안의 충족과 알찬 감상이라는 만족감.

회화에 대해 어떤 질문을 다시 겨누어야 할까. 헤겔이 일찍이 네덜란드 회화를 당대적인 표현으로 칭송했던 이유는 언뜻 소재와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견해는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한다. 헤겔이 보기에 소재의 다양화는 아름다운 이념상만을 추구하던 기존의 미적 범주에 대한 부정과 다양화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이때 일상적인 것이 소재로 다루어지는 것은 주체의 주관성 심화를 예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네덜란드 회화는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르자면 이전의 신학적 소재들은 따라서 역사의 선형성 속에서 후진적인 것이 되며 더 이상 예술적 가치를 내재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논의를 도출하게 되지만 이는 회화 내부의 발전사적 규칙을 무시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견해에 가깝다. 안드레아 오르까나의 스뜨로찌 예배당 제단화의 예가 그 반례라 할 만한데, 르네상스 시대에 도미니코회를 찬미하기 위해 헌납된 이 벽화는 중세미술의 의식적 성스러움과 고답적 배치를 따르고 있지만, 버나드 베런슨은 오르까냐의 벽화가 선보이는 조형적 양감과 화면공간의 심화와 확대를 되짚으며 이 벽화가 미술사 내에서 진보적 노선을 취했다고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회화에 있어 키치의 문제는 (콰트로첸토 시기 성화가 또한 알리듯이) 단순히 소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헤겔의 진술은 소재의 직접성을 다루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당대에 대한 적확한 인상을 역사에 기입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네덜란드 풍경화는 기존의 이념상과 세계의 질서가 붕괴되었음을 알리는 사물들의 전위를 그려내고 있던 것이다. 거꾸로 베런슨의 논의를 따를 때 우리는 또 다른 함정을 보게 된다. 그것은 회화 내적인 성취가 곧 예술의 조건이라고 믿는 낭만주의적 판타지에 젖어 드는 문제를 야기하는데, 이들 모두를 거부하기 위해선 양자를 같은 논의 선상에 둘 수 있는 다른 조건을 설정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우린 이미 이를 알고 있다. 하나의 작업이 등장하는 역사사회적 조건과 대응하는 예술적 생산을 선별하고 가치를 따지는 일. 당대적 주체의 인식을 재단하고 반영하는 작업을 등재하는 일. 또는 그러한 작업을 동시대 주체의 인식적 증거 내지는 조건으로 주장하기 위해 투쟁하는 일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이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지난하게 파고 들어가 정합성을 따지는 일이야말로 소재 또는 특정 행위에 제한되지 않고 작품과/매개된 세계를 다각적으로 인식하는 리얼리즘에 관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태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재민의 텍스트는 회화의 현재적 조건을 따지는 동시에 전시의 주제와 능란하게 결부되는 매력을 갖추었다.

그와 별개로 요즘 제철을 맞은 유미주의 비평들에 신물이 난다. 이택광이 이미 90년대의 경향을 가리켜 ‘주례 비평’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작품이 심미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는 듯 혼사를 벌이는 비평들이 득세하고 있다. 원고료를 매개로 작품과 화음을 내며 자신의 언어를 어여쁘게 세공하고 밤낮으로 조탁해 작품만큼 아름다운 비평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환대받는 세계가 경멸스럽다. 또다시 고용되기 위한 비평들의 치장이 지독히도 싫다. 작품에서부터 과잉된 감동을 얻었다 착각하고 제 자신의 정념을 텍스트로 쏟아내는 키치 비평들이 두렵기까지 하다. 키치. 19세기 말에 처음 등장한 키치란 낱말은 장구한 미술사의 궤적에서 본다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개념이다. 미술사에 있어 온갖 고전적 논의들이 심도 있게 통용되면서 키치가 구닥다리 취급받는 모양새는 무척 의아하고 신기하다. 여기엔 어떤 음험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다소 막연한 생각이 든다. 어쩌면 현대적 삶 자체가 키치라는 점에서 회화는 아직도 당대적 인식을 효과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술을 보기 열망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아무리 제프 쿤스 이후로 키치에 대한 논의가 주변부적인 것으로 퇴각했다 해도, 또한 우리의 감성일반이 키치 또한 유쾌하게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모했다고 해도 논의를 멈출 수 없다 생각한다. 회화가 실체를 포착할 수 있냐는 질문은 멍청한 류가 되었다. 리히터의 회화가 어떤 상도 포착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미 세계상은 회화가 내용적으로 담지할 수 있는 역량의 바깥에서 심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위에서 기술한 대로 회화를 돌파구로 삼는 예술가들을 통해 얼마간의 성취를 또다시 희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화의 죽음이, 그래서 그것의 묘사와 결부된 개념과 인식, 구도와 판단이 언어를 통해 부분적으로 내지는 다각적으로 펼쳐지는 과정에서 회화의 게임이 간헐적으로 계속될 여지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게임의 소재가 회화여야만 할 이유가 없는 이상 차라리 화이트큐브에 안착되어 있는 전 세계의 모든 회화를 남김없이 실종시켜버리는 것을 제안한다.

 


1) 황재민, ‘좋은 아이디어를 위한 절반의 마법’, <집단오찬>, 2020.5.17, https://jipdanochan.com/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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