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재_영화적 충돌에 관하여: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 영원과 자동수기인형

정민재

▽▽영화적 체험에 관해서—그것이 지면에 올라가는 한 편의 글이든, 아니면 신문에 올라가는 짧은 글이든, 그것도 아니면 한 권 분량의 책이든 상관없이—글로 서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영화적 체험 그 자체가,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영화 속에서 체험했는지를 서술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즉, 영화적 체험에 관해 묘사하거나 서술할 수는 없지만, 영화적 체험에 대해—이를테면, 대물적인 방식으로—서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어질 경우, 우리는 후자에 대해 서술할 수 있다는 희망에 휩싸여 종종, 자주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느낀 감상과 줄거리에 관해서만 서술하게 되는 우를 범한다.
▽▽그러나 영화적 체험은 말해진 것에 대해 하나의 체험(experience)으로 존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험 그 자체가 중요한 예술적인—‘예술적’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무방하다—진리를 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딜레마란 다음과 같다.

  1. 영화적 체험에 관해 글로 서술하는 일의 불가능성
  2. 영화적 체험 그 자체를 글로 서술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3. 중요한 (예술적인) 진리를 표현하고자 할 경우, 2번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조건
  4. 그러므로 다시 1로 돌아와야 한다. 무한퇴행의 문제에 빠진다.

▽▽하나의 영리한 술책은 1번이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영화적 체험에 관함>이라는 한 논의 영역을 전부 제거하는 것이다. 유니콘과 황금 산, 프랑스의 왕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being)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철학의 교훈을 따라서, 분석철학적 논증의 라인을 받아들여서 <영화적 체험에 관함>이라는 논의 영역을 날카로운 면도날로 삭제하게 되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에게 무한퇴행의 딜레마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 우리가 새롭게 직면하는 문제가 있다면 예컨대, 3차원 좌표공간의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지하철의 내부—내부의 한 좌표점—에 앉아 있는 주인공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그 장면에서 영화적인 진리를 체험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제거주의자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위의 믿음직한 방법(methode)이 신뢰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감상자든, 평론가든 영화의 진리 체험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위험한 우회로, 샛길, 숲길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우선 나는 길이 나아가는 대략적인 방향을 지시하고자 한다. 원래—영화적 체험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는—나는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 영원과 자동수기인형>1)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영화사(history of movie)적으로 특별히 거론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2) 다시 말해서 이 글에 붙어 있는 거창한 청사진과 비교하였을 때, 이를 뒷받침하는 레퍼런스로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이 거론되거나, 인용돼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동시에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외전>이 영화적 체험, 그리고 영화적 진리를 말하는 데 있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이는 역으로 3번의 서술(중요한 (예술적인) 진리를 표현하고자 할 경우, 2번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조건)을 표상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이는, 작품의 외적인 논의와는 무관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외전>에 대해서 순수하게 문자 그대로, 영화를 보고 느끼지 않은 점을 기술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내가 경험하고 몸으로 체험한 감상을 나열한 뒤에, 그러한 감상에 담겨 있는 감상적(感傷的)인 부분을 (마치, 플라톤의 비유를 빌리자면 고기에서 정확하게 살점을 발라내는 것처럼) 제거해 나가면서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던 진리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 절에서, 헤겔의 <미학>에서 몇 가지 시사점을 가져올 계획이다. 헤겔은 예술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악명이 높은 철학자인데, 독자는 필자가 인용한 헤겔을 읽으면서 그러한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1번에서 다루었던 <영화적 체험에 관해 글로 서술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다루면서, 불가능함이 영화적 진리를 말하는 것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예술 속의 진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현시하면서 진리가 불가능하게 말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미지 출처_메가박스

1.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전하고 싶어, 나의 마음을”
소중한 동생을 지키는 대가로 요크 가문에 입성한 ‘이자벨라’. 더이상 꿈도
희망도 없는 그녀의 앞에 나타난 자동 수기 인형, ‘바이올렛 에버가든’.
“나도… 행복을 전하고 싶어”
언니의 편지를 받고 C.H. 우편사를 찾아온 ‘테일러’는 사람들에게 우편배달 일을 시작하고, ‘이자벨라’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바이올렛’에게 대필을 부탁하는데… 무수히 늘어놓은 아름다운 말보다, 단 한 마디로도 소중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다.3)

▽▽우선 영화의 구성을 살펴보게 되면, 우리는 <외전>이 수미쌍관의 구조를 영화 속에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외전>의 첫 쇼트는 거대한 증기선을 타고 수도 라이덴에 들어오는 테일러가, 푸른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쇼트는 에이미 바틀렛의 집에 가서 대필한 편지를 전달한 테일러가, C.H.의 황금 모터사이클에 탄 채로 석양이 지는 저녁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장면으로 끝난다. 첫 쇼트와 마지막 쇼트 사이에서 이야기는 물 흐르는 것처럼 전개되는데, 자동 수기 인형인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에이미를 가르치기 위해 여학원에 가고, 데뷔탕트4)를 성공적으로 치른 에이미와 바이올렛은 헤어진다. 그리고 우편사를 찾아온 테일러를 바이올렛이 붙잡아서 라이덴의 우체국에서 일을 하게 만든다. 그러니 <외전>은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외전이라고 부르기에 적절한 영화지만, 이 작품이 OVA가 아니라 극장판으로 기획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반대로 ‘외전’이라고 말하고 정리하기에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감상자의 뒤통수를 잡아끄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외전>은 왜 외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일까? 왜, 어디서부터 <외전>은 본편의 외전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자.

1) 영화의 길이: 1시간 30분이라는 길이는 4월 24일에 개봉한 본편의 극장판과 맞먹는다.
2) 바이올렛 에버가든: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라이덴을 찾은 테일러를 거 두어들일 뿐 아니라, 편지를 대필하기도 한다. 그녀의 행위가 없다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3) 교토 애니메이션: 안타까운 참사가 벌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마지막 작품이다.
4) 위의 세 가지 이유가 아닌 알 수 없는 이유가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논의를 위해서 2번과 4번을 제외하고 싶다. 왜냐하면, 4번의 경우 알 수 없는 이유가 작동하고 있다면 우리가 그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번의 경우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이야기의 화자가 아니므로, 역시나 <외전>이 외전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로는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이야기한 두 쇼트의 배치가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의 화자는 테일러다. 정확히 말하면, 에이미와 테일러가 번갈아 가며 이야기의 화자로서 영화를 완성시키고 있다.

18일 일본 교토의 애니메이션 제작회사 ‘교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건물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뿌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사진출처

▽▽1번(영화의 길이)는 애니메이션 제작에서는 기술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3번에 집중하고, 3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외전>의 비외전적인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19년 7월 18일에 발생한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방화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짐작한다. 당시 나는 신주쿠역 근처의 라멘집에서 라멘을 먹고, 에비스역 근처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전시장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와이파이를 택시 안에서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별 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켜서 트위터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 본 트윗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트윗에 대한, 야마모토 유타카5)의 인용 RT였다.

▽▽ “조금 닥쳐 줄래?”

▽▽일본어 뉴스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교토에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완전히 불에 탔다는 사실, 둘째, 스튜디오를 방화한 범인이 역시 화상을 입고 근처에서 붙잡히고 말았다는 사실, 셋째, 화재로 서른 여섯 명의 사람들이 (당시 서른 네명) 사망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3) 의 사실이 어떻게 비외전적인 가능성을 <외전>에게 부여하는 것일까? 영화의 한 신으로 돌아오자. 두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 끝나고, 처참하게 불탄 마을에서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에이미는 어린 테일러를 ‘주워서’ 기르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는 영화 내부의 사건—전쟁으로 불탄 마을—이 비극적으로, 영화 바깥에서 벌어진 사건—스튜디오의 방화와 죽음—을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외전>이 작품 바깥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비외전적인 가능성을 획득하는 매우 독특한 영화로 존립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2. 정신의 기묘한 모험

이러한 관점은 크게 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예술—그것을 통해 자연의 온전한 풍요로움이 나타나는 자유로운 환상의 대상으로,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넘어선 스스로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대상으로서—은 과학적 탐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관점이다. 과학은 필연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우연적인 것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 철학적으로 탐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모든 것에 손을 대는, 삶을 둘러싼 상황의 진지함을 경감시키는, 모든 곳에서 만족스런 형태를 전시하고 우리를 즐겁게 하는 붙임성 좋은 재능이지만, 그러나 이는 진정으로 궁극적인 삶의 목표와는 구분된다. (중략) 그렇기에 혹자는, 외연/현상이 진정한 목표를 위한 참된 매개물이 될 수 없으므로, 진정한 목표는 기만과 외연/현상에 의해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예술은 다른 매개의 수단과 목적을 공유해야 하며, 그리고 예술의 매개, 외연/현상의 매개는 이러한 목적(주: 진정한 목적)을 위해서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6)

▽▽영화의 안과 밖이, 내부와 외부가, 프레임 안과 프레임 바깥의 현실이 날카롭게 나뉘어질 수 없다는 사태는 우리를 감상(感傷)의 늪 속으로 깊이 끌어들인다. 한 가지 사실을 참고하면, <외전>은 극장에서 상영될 때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모든 제작진들의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갔다. 이는 프레임의 안—바이올렛과 주변 사람의 이야기—과 바깥을 연결하는 다리로써 기능함과 동시에, 우리가 ‘2019년 7월 18일의 사건’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명령으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시네마와 시네마 바깥의 현실 사이에서 경계선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전>은 영화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한다. 앞서 말했듯 프레임 안에서 이야기되는 바이올렛과 에이미, 테일러의 이야기는 그리 특별한 소재가 아니다. 셋은 전부 평범한 사람이며, 평범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네마 바깥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교토 애니메이션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도, 만약 사건이 없었다면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불가역성은 영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크레딧에서 유의미한 기여를 한 모든 사람의 이름을 볼 수 있으며, 이는 관객의 정서에 피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현실의 사건이 과거에 만들어진 영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영화적 체험에 관해 말하는 일의 불가능성에 대해 상기해 보자. 불가능성이란 말은 말 그대로, 이런 경험들을 서로 묶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보편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필자가 먼저 떠올리는 구절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윤리학과 미학은 서로 동일한 것이다.”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충돌하는 일이었습니다. 윤리학은 과학일 수 없습니다. (중략) 윤리학이 말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 우리의 지식을 늘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한 경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어도 그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7)
▽▽영화적 체험에 관한 것이 미적인 것이라면, 미학의 주제라면, 게다가 이것이 윤리적인  것과 동형(isomorphism)이라면 윤리적인 것=미적인 것은 본성상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처음에 제시된 딜레마에 직면한 독자가 어렴풋이 깨달았던 바, 애초에 영화적 체험에 관해 말하는 일은 불가능한 과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체험에 관해, 그 시대에 ‘영화’라는 예술 장르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이 있다. 헤겔은 『미학』과 『예술철학에 관한 강의』에서 아름다운 것, 예술작품의 본성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헤겔—헤겔은 1770년에 태어나고 1831년에 사망했다—이 언급하고 있는 예술 작품들은 18세기와 그 이전에 제작된 작품이다. 예를 들어, 초상화를 포함한 회화, 클래식과 가곡을 포함한 음악, 또한 당시에 예술로 인식되었던 교양 소설(Bildungsroman) 등등. 젊은 시절에 예술 작품을 탐닉한 경험을 살려서 자신의 저서에서 ‘예술 작품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낭만주의자 헤겔은, 윤리와 미학에 대해 학문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단언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렇듯 열심히 헤겔이 예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여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헤겔이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철학적 이론은 예술 작품이라는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타당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대상을 벗어나고 있는—완전히 대상을 벗어났다면 영화적 체험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가 이를 서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네마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사건=아름다움의 경험과 거부할 수 없는 윤리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도저히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략은 헤겔이 염두에 두었던 전략과는 달라야 한다. 후자의 치명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1번 문제에 대한 전략은 큰 틀에서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돌아가야 할 곳으로.

하나의 본질적 균열Kluft은 뒤로 굽혀져 있음에서의 존재Sein in der Zuruckgebogenheit이다(능력, 그러나 이제까지 항상단지 눈앞의 것으로서의 존재자에 입각해 사유되었던 가능성을 토대로 한 능력은 아니다).
이러한 균열을 깊숙이 쪼개는 것, 또한 이로써 그러한 균열을 합일적으로 벌어지게 하는 것—이것은 고귀한 인간의-성정Herrschaft으로, 앞으로 도약하는 근원이다. 고귀한 인간의-성정은 물려줌으로 존재한다. 더 낫게 말하자면, 물려줌으로 현성한다. 또한 고귀한 인간의-성정 자세가 물려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귀한 인간의-성정은 끊임없는 근원성을 물려준다. 존재자가 존재에 입각해 변형되어야만 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즉 근거 제시되어야만 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고귀한 인간의-성정이필연적이다. (중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인간의 성정은, 비록 자신의 지속성의 본연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서긴 하나(즉 비록 겉으로는 장기간 중단된 듯 보이는 ‘자신에게 관련된 순간들의 항구성’에 따라서긴 하나) 어떠한 힘과 폭력보다 더 작용을-미치면서 남아있다.8)

▽▽1절에서 필자는 의도적으로 4번의 ‘기타’를 무시했다. 눈치 챈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4번의 기타를 무시하는 제스처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이제 <외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재인 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편지는 위에서 아래로, 또한 아래에서 위로 전달되고 있다.
▽▽에이미 바틀렛은 테일러에게 편지를 적는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단순하다. 마법의 주문을 외우라는 말과 함께 “에이미,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돼”라고 말하면서 편지는 끝난다. 에이미는 테일러가 문자를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짧은 편지를 부쳤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에, 서로 입장이 뒤바뀌면서 테일러 바틀렛은, 이제 요크 부인이 된 에이미에게 짧은 편지를 부친다.

테일러가 에이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수녀님에게 들었어.
언니는 날 위해서 멀리 떠난 거라고.
그렇게 헤어졌지만 내게 편지를 써 줬지.
그러니 나는 테일러 바틀렛이야.
에이미 바틀렛의 동생이야.9)

▽▽영화의 만듦새가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거나, 아니면 영화사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거론할 만한 작품은 아니라거나, 아니면 엄밀한 의미에서 ‘시네마’와는 다른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은 <외전>을 묘사하는 말로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하여, <외전>은 스스로의 무력함을 감출 생각이 없으며 이러한 무력함이 다른 방식으로 보충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은 정반대다. <외전>이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장소가 있다고 했을 때 이는 현실에서 교토 애니메이션의 제1 스튜디오가 불타지 않은 가능세계의 한 장소와 동일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세계의 어느 시점에 밝은 미래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올 예정이었던 작품들은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밝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장하거나, 윤리적인 애도를 가리킬 수 없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아무도 없는 지하철 열차에 앉은 사람이 바라보는 공허한 어둠이, 시네마 경험 속에서 진리로 드러나는 체험을 거론한 바 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하철 좌석에 앉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창 너머의 명멸하는 빛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영화를 보고 나서 진리를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하철 좌석에 앉아 본 적이 있는 사람만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러한 진리가 다시 시네마와 시네마 바깥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둘 사이의 연결가능성을 절단하고 차단시키는 페이퍼 나이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과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네마 안에서 지시가 완결된다는 말은, 시네마의 바깥에서 어떠한 지시 행위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을 함축한다. 물론 <외전>이라는 영화는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바로 그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전 바깥에서 시네마를 지시하는 우리의 손짓은, 비록 그것이 완전히 무의미한 언어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단순하게 사적인 언어(private language)라는 표현으로 정리해버릴 수 있는 몸짓은 결코 아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손편지를 쓴 경험이 없는 사람, 사람으로부터 진심 어린편지를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외전>이 정성스럽게 그려내고 있는 진리의 조각은 망각의 강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다. 오직 그와 같은 경험을 한적이 있는 사람, 경험과 나를 분리할 수 없는 사람에게만 진리 체험의 순간은 유예하거나 지체하는 바 없이 그에게 도착한다. 편지로서 <외전>은 시네마의 안과 바깥을 넘어서 다른 가능세계의 관객들에게 전달되어야 하고, 떠나야 하는 사람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머나먼 여행을 떠나야 한다. 비록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바뀌는 일은 없겠지만—영화적 체험에 대해 말하려는 충동, 그 충동의 결과로서 충돌이 의미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희망은 존재하지 않겠지만—미적 대상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불안한 정신은 위로 흐르는 크레딧을 앞에 두고서야 깊은 위안을 얻는다.

 


1) 이하 <외전>으로 총칭한다.
2) 하지만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 중에서 <외전>은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는 특별하게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두 예술사가 갖는 차이점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싶지만 본 평론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 이상으로 말하지 않겠다.
3) 네이버 영화 소개문에서 발췌함.
4) 여학원에서 숙녀 교육을 마친 사람이 사교계에 데뷔하기 위해 왈츠를 추는 의식을 이르는 말. 프랑스어에서 온 말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5) 러키스타, 칸나기, Wake up, Girls! 등을 감독한 애니메이션 감독.
6) G. F. Hegel,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Art: The Hotho Transcript of the 1823 Berlin Lectures, translated by Robert F. Brown, 182. (인용문은 필자가 직접 번역하였다. 한국어 번역이 있을 경우 번역서에서 가급적 인용하고자 했다.)
7)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케임브리지 윤리학 강의”, 『소품집』에서 인용. 비트겐슈타인, 『소품집』, 이영철 옮김, 책세상.
8) 마르틴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이선일 옮김, 403-404페이지.
9) 본 영화는 넷플릭스의 자막과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의 자막이 다른 관계로, 여기서는 넷플릭스의 자막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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