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_토마스 루프 작가론: 암실을 벗어나 웹(Web)으로, 사진 너머의 사진을 향하여

글: 김지율

이미지와 사운드가 있다. 이것은 픽셀과 주파수로 구성되며, 다시 한 번 0과 1로 분해된다. 형태를 해체하여 들어간 가장 안쪽에서 우리는 0과 1이라는 단순한 부호를 마주한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작은 부호들을 추적함으로써 큰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토마스 루프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실의 다층적 구조를 파악한다.

현재 뒤셀도르프에 거주하며 작업하는 토마스 루프는 사진 매체에 대한 광범위한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렌즈를 통해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기록사진에 초점을 두기보다 사진의 속성인 조작성에 집중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입각한 연작들을 발표하는 그는 동시대 사진의 경향에 큰 축을 이루고 있다.

루프의 작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는 실재를 완벽히 재현해내는 사진에 대한 의심이다. 사진은 단순히 특정 시공간을 보존하는 기록으로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세계의 여러 층위를 드러내는 인식론적 도구이다. 다시 말해 루프에게 있어 사진의 본질은 기록성이 아닌, 그것이 작동하는 문법과 구조, 매체성 그 자체인 것이다.

<Sterne 23h 39m/-55°>, 1992

1989년에서 1992년까지 제작된 <별(Sterne)> 연작은 사진 매체에 기대되는 고정적 관념을 뒤집은 작업이다. 검은 바탕에 하얀 점이 흩어진 추상 이미지들은 루프가 직접 촬영한 사진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편집하여 만든 2차적 사진이다. 본래 유럽남부 관측소에 의해 촬영된 원본은 확대되고 오려져 천체 관측이라는 기존의 맥락에서 미학적 텍스트로 전환된 것이다. 루프는 재가공을 통해 과거의 한 단면이 아닌 여러 단층을 하나의 화면에서 동시에 제시한다.[1] 노출을 조절하고 셔터를 누르는 작가의 손은 이제, 원본을 크로핑(cropping)하고 트리밍(trimming)하는 손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러나 루프의 차용은 작품의 저자성에 도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진의 재현성에 대한 의심으로 나아간다. 한 컷의 이미지에 시간을 초월한 영원이 담기며, 어떤 구체성에도 얽매이지 않은 역사 이전의 태초의 공간, 원시의 시간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사진 너머의 사진이라는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난다.

<Nudes Pea10>, 2003

차용에 기반한 매체성의 실험은 1999년의 <누드(Nudes)> 연작으로 이어진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포르노그라피를 다운로드하여 흐릿하게 처리한 이 작업들은 예술의 범위를 확장시키려는 시도이다. 루프는 디지털 이미지들의 공통된 속성인 픽셀 구조의 조악함과 해상도의 열악함을 포착하고, 이를 극대화하여 회화처럼 부드러운 표면을 연출한다.[2] 외설적인 이미지가 현대 누드화라는 형식 하에, 의미를 생산해내는 작품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퇴폐적인 이미지에서 현 시대의 순간적이고 소비적인 성적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한편 작업이 내포하는 의미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연작을 독해하는 데 있어 더욱 주목할만한 것은 작업의 형식이다. 여기서 형식은 디지털 인터페이스에서 떠도는 이미지들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끌어내는 단서로 기능한다. 루프는 포르노그라피 그 자체의 내용을 연구하는 동시에, 이 이미지들이 디지털 플랫폼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실험한다. 포르노그라피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선정성’은 단지 ‘시각적 자극’일 뿐, 어떤 구체적 의미도 띄지 않는다.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빌려 표현하자면, 포르노그라피를 포함한 디지털 시대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그 의미 결정이 지연되어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3] 루프는 (차용의 형식을 빌려) 부유하는 이미지를 읽어낸다. 디지털 이미지에 새로운 기호적 성격이 부여된다. 맥락 없음에서 맥락이 생산되고, 모호함은 그것으로 본질이 된다. 시대에 관한 해석의 지평이 열린 것이다.

<Substrat 31 III>, 2007

인터넷의 가상 사진이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자적 수단, 감각의 자극임을 인식하고 그러한 이미지의 특성을 실험하는 루프는 2001년 연작 <근원>에서 사진 문법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화면은 기하학적 형태와 비재현적 색채로 가득 차있다. 이는 일본 만화의 한 페이지를 스캔하여 그 스캔본을 끊임없이 중첩시키고 레이어링 하여 만들어낸 결과이다.[4] 이미지들은 만화에서 차용되어 기술적 처리를 거친 가상의 산물로서 태어난 것이다. 범람하는 이미지로 인해 실재와 허구의 이분법적 구분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힌트를 얻어 완성된 작업은 이미지와 정보가 뒤엉키고 교차되어 그것의 끝에 남는 시각적 공허를 보여준다.[5] 허무와 무의미가 이미지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본질 없음’을 그는 ‘근원’이라 명명한다.

근원에 대한 의심은 루프가 사진의 매체성을 탐구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창조해내는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란 불가능하기에, 루프는 역사를 거치며 집적된 이미지를 탐색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튼 것이다. 차용된 이미지들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작동한다. 천체 관측을 위한 밤하늘 사진은 예술의 오래된 명제인 재현성에 대한 의심으로 귀결되며, 시각적 자극을 위한 포르노그라피와 만화는 디지털 시대 실재와 허구의 경계에 대한 통찰을 가능케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가상 세계, 두 세계를 매개하는 미디어의 세계를 차용의 형식으로 넘나들며 포착한 현실의 다층적 구조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원본과 복제가 섞이고, 실재와 허구가 혼합되었다. 한 장의 사진에 파편화된 세계의 여러 층위가 현상되었다. 암실에서 벗어나 웹(Web)을 마주하며 예술은 미지의 영역을 향하고 있다. 사진 너머의 사진, 이미지 이후의 이미지. 우리는 차원의 이동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1] ‘Fotografie ein Gesprach mit Thomas Rruff and Georg Winter’, in: ‘Zuspiel’, ed, Matthias Winzen, Stuttgart 1997, p.50
[2] Thomas Ruff’s pictorial world, Valeria Liebermann, 2004, Pornography 부분 인용
[3] 데리다의 차연에 대한 논의는Jacques Derrida, trans., Alan Bass, Writing and Differenc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참조
[4] “Thomas Ruff: Substratum”, TATE modern museum, <https://www.tate.org.uk/whats-on/tate-liverpool/exhibition/thomas-ruff/thomas-ruff-substratum> (접속일.2020.07.12)
[5] Thomas Ruff’s pictorial world, Valeria Liebermann, 2004, Substrata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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