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타르코스 인터뷰: 두 태어난

번역: 홍승택

버트란드 버디에가 크리스토프 타르코스를 인터뷰하다.

1996년 11월 3일-파리 13구

Christophe Tarkos, 사진 링크

버트란드 버디에(이하 버디에): 당신의 최근 글, 행동시학에 있는 하나, 니오크에 있는 다른 하나, 두 개의 글은 당신의 발전을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그래』의 독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그래』를 시작하는 “바깥의 시” 안에 있는 “말반죽의 이론”에 관해서요.

크리스토프 타르코스(이하 타르코스): 모든 경우에, 당신은 말반죽을 사용할 의무가 항상 있어요; 그것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에요. 이 책은 말반죽에서 시작해요. 이건 조금 더 생기 있게 하지만 말반죽에 머무르면서 조금 바뀐 것이에요. 분명히 이건 조금 모순적인데, 말반죽에서는 생기 있게가 멀리까지 이끌지는 않으니까요.

버디에: 『그래』라는 제목은 암묵적인 동의를 생각하게 해요. 말반죽이 지지나 암묵적인 동의로 도착하는 것으로의 의미로 구성되는 것인가요? 그 텍스트가 합의로 도착하는 것에 이용되나요?

타크로스: 아니요. 그것은 거기로 도착하기 위해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 시작에서 그래를 갖고 있으니까요. 그것은 마치 우산으로 찌르기예요; 말반죽을 웃게 하기 위해서 그 시작에서 당신은 그래라는 찌르기가 필요해요. 당신은 그것을 오직 웃게 만들 수 있어요; 그것이 다소 탄력적인 것처럼, 당신은 의미 안에서 그것을 다소 늘일 수 있어요: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에요. 많지는 않지요, 하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시도할 수 있어요 당신 자신을 열기 위해 그리고 춤을 추기 위해 춤을 추기 위해…말반죽을 아주 조금이라도 젓기 위해서는, 당신은 조금 젖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일 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말반죽은 약간은 증명 안에 있어요-저는 이 떼의 이미지가 좋아요-증명은 완전히 늘일 수 있는 것이에요, 숨 막히는 가능성, 당신은 그것을 많이 움직일 수는 없어요; 그것은 매우 조금 그리고 매우 천천히 움직여요. 그것이 정확히 당신이 말반죽으로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더 빌수록 그것은 더 쓸모없는 것이 돼요…그것이 움직이는 덩어리예요 하지만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에요, 그게 다예요…당신은 그래의 좋은 양이 필요해요…저는 특별히 「접시」 글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 남자가, 말하는 사람이, ‘나’는 농담하고 있다’라고 거기서 말하는 그 글이요. 콤포트 그릇을 움직이게 하는, 진동을 일으키는 농담의 행위는 두려움을 유발해요. 웃음은 그것의 기원에 있어서 매우 이상한 것이에요.

버디에: 당신이 웃음에 대해서 거론하니까, 그 주제에 대해서, 저는 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결국 당신 자신을 거리 두게 하는 것인 이 거대한 덩어리를 당신이 가지고 나서 당신이 언어로 하는 것이 아이러니의 실행을 생각하게 만든다고요, 그렇지 않나요?

타르코스: 아니요, 아이러니의 실행은 없어요. 웃기죠. 그건 저를 성가시게 하는 단어예요. 만약에 당신에게 와서 좋은 아침입니다 라고 말하는 경찰관이 있고 당신이 그에게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하고 말한다면, 그건 아이러니가 아니에요; 혹은 당신이 세금을 낼 때요. 그리고 예를 들어서, 바로크 오페라 글 안에 거기에 아이러니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에 관해서 문제를 갖고 있어요, 아이러니로 이해되는 그것이요, 항상 그 문제가 있어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요. 사람들은 저에게 형식주의에 관해 말합니다, 저는 그들이 왜 그것에 대해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요; 아이러니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가 있어요; 텔레비전이 아이러니하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보면 바로크 오페라 글은 이상하긴 해요.

버디에: 그런데도, 당신의 글은 거리 두기의 인상을 줘요. 그것은 기능하고, 그것은 기능하고 어쩌면 그것이 일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상 그것은 멈추지 않을지도 몰라요 또는 그것은 오직 아이러니를 향해 진화할 수 있어요.

타르코스: 오, 알겠어요. 그래요. 왜냐하면 만약 그게 아이러니를 향해 진화하면, 그것은 어떻게 될 거냐면, 제 말은 거기에는 즐거움이 있고 그리고 절대 그..그…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을 향해서는 절대 진화하지 않을 거예요. 사실, 저는 아이러니가 그렇게 좋은 거라고 생각 안 해요, 물론 제가 이해하는 바에 따라서요. 왜냐하면 그건 당신의 작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니까요. 저는 당신이 언급한 거리두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것 없이는 쓸 수 없어요. 정의에 따르면, 글쓰기는 실제의 것, 외부의 것이에요. 저는 이 사실이 아이러니를 견뎌 넘는다고 생각해요.

버디에: 당신의 글은 자주 간단한 문장으로 시작해요, 당신은 언어를 일하게 만들어요, 복수형들 안에서, 글 안에서, 문법 안에서…그리고 나아가면서 그것은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요.

타르코스: 그리고 저는 멈추죠.

버디에: 그리고 당신은 멈추죠. 하지만 당신은 계속 당신이 언어로 하고 있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되는 것의, 자기-조롱의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왠지 시의 자기 관계에 대해서도 말이에요.

타르코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들은 저의 마음 안의 기술적이지도 언어적이지도 않은 층위에 자리 잡습니다. 레이몽 루셀은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페르낭 레노는 아이러니하지 않아요…만약 어떤 남자가 아이러니해지길 원한다면, 그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까지 저는 생각해요, 왜냐하면 아이러니해지길 원한다는 것의 사실은 거기에 전혀 아이러니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만약 거기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하나의 측면이라고까지 저는 생각해요, 만들어내는 측면이요.

버디에: 당신의 모든 텍스트들에는 설득하는 것에 반하는 호전적인 면이 있어요, 친숙한 언어, 하지만 이런 언어의 톱니바퀴들을 발가벗기는 것은 언어를 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요-그것이 제가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거예요; 언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여주는 것 속에서, 당신의 언어가 더 믿을만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당신이 증명하는 언어의 신용할 수 없음과 당신이 말하기를 요구하는 진실 사이에는 모순이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타르코스: 거기가 바로 정확히 모순이 없는 곳이에요. 매우 이상한 어떤 것, 항상 저를 놀래키는 것, 하지만 저를 완전히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당신은 시도를 해봐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 딱 맞는 도구, 언어를 가지고, 매우 정교하게, 한 개의 죽음처럼 직선적이게, 알지 않는가, 미세하게, 그리고 덧붙이면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곳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진실을 말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게 저를 완전히 미치게 만들어요,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이요. 다른 면에서 당신은 그저 말반죽을 갖고 있을 뿐이에요, 알겠지만, 당신은 그렇게 많이 갖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은 정말 그것을 가지고 진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에요. 당신은 어떤 설명을 하려고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에요, 당신은 그것을 직접 사용할 거예요, 휙, 그리고 끝났어요, 말반죽, 그게 당신의 접시예요, 그것이 어쨌든 유일한 접시예요-꼭 필요한 것은 그것이 진실된 접시가 되는 것이에요. 그게 실제 시예요, 시는 항상 그런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만들고 있는 언급은 정확히 한 사람이 어떤 개인이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이 만드는 그런 종류의 언급이라는 것은 사실이에요. 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떤 날, 저는 그들이 당신에게 “진실을 다루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들은 진실을 말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훌륭한 시들을 만들어요. 어떤 사람도 철학적인 텍스트들을 뭔가를 말하는 텍스트로써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또는 당신이 공리들의 묶음을 가진 것이겠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진실의 최대치의 가능성을 말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꽤나 쓸모없는 텍스트들을 만들게 될 거예요. 그것은 시보다 더 쓸모 있거나 더 명확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같은 것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교육학이겠죠, 곧바로 당신은 교육학을 다루는 것이 되고, 우리는 그것이 뭔지를 알죠, 그것이 거짓을 말한다는 거요: 하지만 그게 정상이에요; 그것이 교육학의 기능이니까요.

버디에: 하지만 당신은 아주 분명하게 말해요: “당신은, 진실이 말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시다…시는 세계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실을 밝힌다.” 여기서 이 진실, 그게 뭔가요?

타르코스: 진실에 관련된 문제는 전문적인 진실을-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전문적인 진실 말하기의 외피 아래 다른 전문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은 실패하게 될 거예요, 모든 경우예요. 진실은 바로 표현과 의미 사이에서의-쓰여진 문자들 사이에서의-콜라주예요. 그것 둘이 붙는 유일한 순간은 시 속에 있어요. 그게 시가 흥미로운 이유예요, 어찌 되었든.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는 어떤 흥미로운 것도 없을 거예요.

버디에: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언어를 세계로 도달하기 위한 것에서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죠, 당신은 언어가 원래 그것이었던 것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는 것이죠? 또는 사람은 소외되어 말한다는 것이요, 프리정이 말한 것처럼, 그는 라캉으로부터 빌려온 것이 분명한데, 라캉 자신은 분명히 그것을 빌려왔겠죠 그…

타르코스: 페르낭 레이노로부터죠, 당연히.

버디에: 당신은 그런 문제 안에서 글을 쓰지는 않나요? 당신은 니오크에서 “세계는 참고 문헌이 아니다, 그것은 시니피앙이 아니다, 세계는 참조 문헌이 없다, 그것은 양면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중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호가 아니다.”라고 썼어요.

타르코스: 네…그들은 단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바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요,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제가 이 생각으로부터 찾아낸 이상한 것은 언어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저에게는 언어는 세계의 밖에 있지 않아요, 그것은 당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한 주머니의 모래와 같은 콘크리트예요, 그것은 완전히 실재예요, 완전히 실질적이고, 효율적이고, 쓸모가 있죠.

버디에: 당신이 제안하고 있는 답은, 예를 들면, ‘단어’라는 단어를 쓰기 위해서; 당신은 ‘단어’라는 단어 말고도 다른 단어들을 사용했을 거라는 거죠, 당신은 ‘용어’라는 단어를 또는 ‘문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거죠.

타르코스: 네, 그런데 ‘단어’라는 단어에 있어서는 더 명백해요, 그리고 그건 더 더러운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의자’라는 단어, 당신은 그걸 말할 수 있는데, 흠, 우리는 그것의 근사치를 생각하려고 시도할 수 있어요, 더 적게나 더 많게요,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때에 당신은 그게 뭔지 알게 되고, 다른 때에는 그러지 못하고, 하지만 어쨌든…그래서 ‘단어’라는 단어는, 그 정의는,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이 순수한 상태에서의 거짓말이라고요. ‘의자’라는 단어,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아요; 반면 ‘단어’라는 단어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어요: 이 단어가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거짓말을 말하고 있어요; 그것은 심지어 더 이상 거짓말의 한 예도 아니에요, 그들이 당신에게 말하고 있어요.

버디에: “진실을 말하기, 오오, 그것은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당신은 많은 동시대 작가들을 일축하고 있어요.

타르코스: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인상을 가지고 있어요, 제 생각이 멍청하고 유명론적이라는 거요-그것은 더 가상적인 것, 그리고 동시에 더 오래된 것을 다시 합쳐요, 그건 전부 그런 맥락이에요, 중세의 유명론자들 때부터…그들에 대해서 제가 저 자신이 모순적인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하나 있어요: 한편에서, 그들은 세계와 언어가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 그들은 만약 당신이 언어를 바꿀 수 있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해줄 거라고 말해요. 저는 그게 조금 모순적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언어는, 그건 마치…호르몬 같은 거예요. 당신이 그것을 진실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위치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실이 맞아요…진실, 그것은 철학적인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치료법적인, 의학적인, 완전히 의료적인 거예요; 거짓말, 그것은 어떤 사람을 죽일 거예요. 이것이 당신이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한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고, 그리고 그의 온 생 동안 그는 아파요, 왜일까요? 왜냐하면 한 때 거짓말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동사 수준에서 현실성을 가져요; 동사는 완전히 육체적이에요, 형태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육체적이게 되는 것을 넘어, 그것은 총소리와 같아요. 당신은 이 순간에는 언어가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도구가 되는 것에 더해서, 도구, 당신의 머리 안의 총알, 그것들은 실체적인 것들이에요. 이런 식의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당신이 언어를 바꾸게 되면,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는, 아마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이것이 한계가 정말 명확하고, 정말 가깝고, 물리적인 이유예요…

버디에: 그래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문자 그대로의 것들로부터 구분시키는 것이군요, 왜냐하면 당신은 말하자면 절대적 사실이 있다는 생각에, 그런데 -이다의 진실이 아니라, 목적 보어가 없는 진실이 있다는 생각에 더 빠져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타르코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장-마리 글레이즈가 말했던 건데, “중의적인 것은 없다”예요. 그리고 진실은, 저에게는, 텍스트의 진실이에요. 모든 것이 텍스트에 있다는 단순한 거예요. 어떤 순간에, 당신은 말해요, “쓸모가 있다, 그 텍스트는 무언가를 위해서 쓸모가 있다.” 오, 아니에요. 텍스트는 어떤 것을 위해서 쓸모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이 어떤 것이에요. 저를 항상 괴롭히는 것은 텍스트의 물질성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텍스트 안에 진실이 있어요, 그게 다에요, 텍스트의 물질적 존재의 손에 잡히는 진실.

버디에: 어떤 것에 대한 진실이 아닌 것; 단어는 지시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타르코스: 네, 그래서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이 아닌 이유예요. 그건 다양/, 다양한/, 다양성의/, 다양성… 인쇄된 것의 물질적 다양성보다 더한 거예요…그것은 진실로 호르몬적인 거죠; 물리적 진실. 당신이 한 사람에게 한 단어를 말했는데 그가 아프다면, 또는 한 단어를 말했는데 그가 나아진다면…당신은 말하겠죠, “네, 하지만 단어가, 그게 의미를 갖고 있나요, 그게 진실을 말하나요, 그건 뒤틀린 진실 아닌가요, 그렇지 않나요…” 어쩌라고요! 정말 어쩌라고요! 사실은 그 단어가 물리적인 효과를 갖는다는 거예요.

버디에: 하지만 그 순간에 어떤 사람은 항상 그것에 반대할 수 있어요, 당신의 텍스트는 자기참조적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진실이라고요.

타르코스: 하지만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또 다른 것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있어요, 뜻이요. 그것은, 멍청한 것이지만, 하지만 단어는 우리가 뜻, 의미라고 부르는 것과의 관계에서 감각에 연결되어 있어요. 더 이상한 것은 한 편으로는, 당신은 “당신의 텍스트는 그것 스스로에게 충분하다, 그것은 순수한 물질성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어떤 단어든,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의미의 감각적 기능을 참조한다는 것을 항상 잊어버려요. 그래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은 물질이다, 이것이 유일한 진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질성은 당신이 의미를 위해 갖고 있는 감각에 대한 관계 속에 항상 있어요, 어쨌든 물리적인 것이지만. 당신은 그것을 형식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아요-한자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기호를 넣지 않는 이상. 그것은 화면의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나 형식적일 거예요. 만약 당신이 오래된 어떤 것을 입력하면, 그곳이 우리의 의미-탐지기가 무언가라도 찾기 위해 허둥지둥하고, 미쳐버리는 곳이에요; 그것은 모든 것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찾을 거예요, 데니스 로체의 『기술의 지식의 위탁』에 있는 것까지요. 우리, 우리 모두는, 작동하는 의미 탐지기를 갖고 있어요.

버디에: 당신의 몇몇 시들은 그것들의 길이로 인해 놀라워요. 예를 들어 “기차”, “바퀴의 회전”, 그리고 “나 아니”는 수십 페이지 동안 연장돼요. 이것들이 여전히 시로 불릴 수 있나요? 혹은 이것들은 당신이 임의로 중단한 것인가요? 왜냐하면 그것들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타르코스: 한 편의 시는 공기의 돌풍이에요, 다른 게 아닙니다; “아연”을 예로 들면, 그것은 이런 작은 돌풍의 상징이에요. 그 시는 두 번째의 그런 다음 세 번째의 시로 도착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그것이 시인과 광인의 차이입니다; 시인은 시를 끝내는 사람이에요.

 

* 이 인터뷰는 『Tombe Tout Court』 1997년 호에 최초로 실렸으며 2000년에 Roof Books(www.roofbooks.com)에서 출간한 타르코스 영역본 선집인 『Ma Langue est Poétique』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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