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원_아주 조금 있는 문학

강보원(문학평론)

1.

데리다는 한 텍스트에서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1)고 쓴다. 데리다가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썼는지와는 별개로, 이 말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문장에서 그가 문학의 정의를 양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 특히 가시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대상을 양적으로 표현할 때 생기는 이점은 그것을 실제로 눈에 보이고 공간을 차지하는 구체적 양상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양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은 그 대상 자체의 비가시성 때문에, 혹은 그 대상의 보이지 않음을 보려고 하는 노력 때문에 함께 보이지 않게 되는 다른 가시적 부분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문학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는 우리가 문학이라는 개념 자체, 혹은 문학성 혹은 문학의 본질과 같은 추상적인 성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이다. 그렇다면 그것과 함께 가시성의 영역에서 사라지는, 원래 비가시적이지만은 않은 부분들은 무엇인가? 바로 문학성을 이루는 개별 문학 작품들, 문학성이나 문학의 본질을 이루는 바로 그 표면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면 문학은 그 표면의 가시성에 의해 양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예컨대 어떤 문학은 다른 문학보다 더 많이 팔리며 그러므로 실제로 더 많이 존재한다.

자크 데리다(1930~2004)

그런데 문학을 이렇게 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데리다의 저 말에는 어딘가 이상한 지점이 있다. 왜냐하면 문학을 양적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꼭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는 정도는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학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도처에, 흘러넘치듯이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데리다는 문학이라는 말로 원래는 가시적이지 않은 문학의 본질이나 문학성 같은 것을 뜻했기 때문에, 이 구절을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단지 표현상의 오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내가 인용한 데리다의 문장에서 흥미를 느낀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텍스트에 있어 단지 표현상의 오해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데리다 자신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러한 오해가 때에 따라서는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텍스트 자체는 그 안에 단지 오해만으로 넘길 수 없는 어떤 진동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는 데리다의 구절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했는데, 이 구절의 앞뒤로 데리다는 내가 꼭 생각하는 바는 아닌 방식으로 문학을 표현하고 있다.

문학은 자신의 제한없음으로 인해 스스로 무효화된다. 만일 문학에 대한 이 지침서가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고 우리에겐 이제 그 점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는 것, 어떤 경우에도 문학의 본질, 문학의 진리, 문학의 문학적 존재 혹은 문학적임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2)

인용된 첫 문장에서 데리다는 먼저 문학이 스스로 무효화되는 것이라고 쓴다. 그리고 그 뒤에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는 바로 그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 구절은, 적어도 그 자체로는, 어쨌든 그 무효화의 과정이 완전하지 않을 수 있으며 거기에 어떤 잔여가 존재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다. 다만 그 가능성은 뒤에 따라오는 구절들이 형성하는 맥락에 의해 곧바로 취소된다. 그런데 그것이 취소되는 방식은 여전히 어떤 애매함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고 말하는 대상, 즉 무효화와 그것의 잔여가 대립하는 장소는 어떤 수식어도 없는 “문학”이다. 반면에 이 대립을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맥락 속에서 취소시키는 문장들에서 그가 “어떤 경우에도” 없다고 강하게 단언하는 것들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비가시적인 대상들인 “문학의 본질, 문학의 진리, 문학의 문학적 존재 혹은 문학적임”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여기에는 어떤 어긋남이 있다. 양적이며 그러므로 보이는 것으로서의 문학과, 양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보이지 않는 그것의 본질, 진리, 기타 등등과의 어긋남이. 두 번째로 이 어긋남을 경유해서 취소되는 것은 단지 데리다의 문장 속에서 문학이 순간적으로 가졌던 “거의 없거나 아주 조금 있”는―그 양적인 희박함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렬해지는―실체성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실체성을 무심결에 포착했던 양적인 접근 방식 자체이다. 따라서 이 애매함을 피하기 위해 위의 인용구에서 “문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두 구절만 떼어와 나란히 놓는다면 아래와 같은 대립이 선명하게 보이게 된다.

1) 문학은 자신의 제한 없음으로 인해 스스로 무효화된다.

2) 문학은 거의 없거나 아주 조금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립으로부터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문학의 양적인 실체성은 왜 이러한 애매한 방식으로, 다시 말해 취소되지 않는 방식으로 취소되어야만 했을까? 그리고 문학에 대한 양적인 접근과 대립하는 문학의 무효화가 “자신의 제한 없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제한 없음”은 이 무효화와, 그리고 동시에 거부된 것으로서 그것의 잔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2.

우선, 현대의 문학적 글쓰기는 다른 용례들 중의 하나 그 이상으로 충분히 가셰가 기저라고 부른 텍스트성의 일반적 구조에 다가갈 수 있는 특권적 지침일 수 있다. 문학이 언어로 “행하는” 일은 어느 정도까지는 법적 용어처럼 법칙과 공유할 수 있는 그다지 특별하달 것 없는 계시적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힘은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상황-정확히 표현하면 우리 자신의 시대를 말하는 바 그 때문에 우리는 또 한 번 ‘문학의 문제’로 고심하며 자극받고 소환되는 것이기도 하다-에서 글 일반, 나아가 글의 해석에 관한 철학적 혹은 과학적-예컨대 언어학적-한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심지어 ‘본질적인’ 것을 가르쳐준다 …… 문학은 위반하고 변환시키는 일에, 그리하여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법을 생산하는 일에,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바로 그 근본 바탕의 가능성이 적어도 ‘허구적으로’라도 도전받고 위협받고 해체되며 불안정함 그대로 현전하게 되는 담론의 형식들, ‘작품들’과 ‘사건들’을 생산하는데 기반을 둔 제도이다.3)

이 글에서 데리다는 “다른 용례들 중의 하나”이자 “어느 정도까지는 …… 그다지 특별하달 것 없는 계시적 힘을 갖”고 있는 문학이 어떻게 우리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법을 생산”함으로써 텍스트 일반에 대해 “본질적인” 것을 가르쳐주는 제도로 인식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얘기되었듯 문학이 가진 “위반하고 변환시키는” 기능에 근거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문학은 문학 자신이 설립한 실정성조차도 배반하므로 실정적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특성만으로는 왜 문학의 “무효화”를 초래하는 것이 그것의 “제한 없음”인지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문학이 결정적으로 “무효화”되는 것은 문학이 가진 이 “위반하고 변환시키는” 기능이 단지 문학이라는 담론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이 문학이라는 실정성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텍스트 일반의 실정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가정될 때이다. 정확히 이 모든 담론에 적용되는 특성으로의 확장의 순간에, 단지 특정한 규칙이 아니라 상이한 규칙들의 체계가 공유하고 있는 규칙 그 자체의 불가능성을 가로지르는 역량을 획득하기 위해서 문학은 “다른 용례들 중의 하나”일 수 없고, 말하자면 자신의 몸을 버려야 한다. 텍스트 일반에 대해 본질적인 것으로서 동시적으로 모든 곳에 존재하기 위해서 문학은 비가시적인 것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문학의 무효화는 보기와 다르게 문학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나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양적 축소가 아니라 양적인 접근에 대한 거부이며, 그러한 한에서만 가능한 편재의 욕망을 지시한다. 기본적으로 알려진 것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것, 혹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의 우위라는 노선을 따르는 이 논변은 문학의 본질에 대해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에 속한다. 예컨대 신형철이 “한 사회를 지배하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 –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 – 를 무력화하는 ‘문학적 판단’ 기능”4)에 대해 말할 때도 그의 요점은 동일한 데에 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문학이 어떤 독자적 판단 체계를 이룬다는 지점이 아니다. 그가 문학의 역량을 발견하는 것은 문학이 그러한 독자적 판단 체계를 넘어서는 지점, 그 문학적 판단이 “어떤 지배적인 판단체계로도 파악할 수 없는 진실이 있음을 고지하면서 사건을 특정 판단체계의 권력으로부터 회수하여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만든다”5)고 말할 때다.

여기에서 두 가지 생각이 작동하고 있다. 문학적 판단이 다른 모든 판단의 결과들을 무화시킬 수 있음으로 그것들을 관통하는 특권적 자리에 있다는 것(그러므로 문학은 “다른 용례들 중 하나 그 이상”의 글쓰기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특권적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문학이 특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판단들을 “무화”시키는 역할에 머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형철이 말하는 “문학적 판단”의 기능은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만드는 것이지 스스로의 사유로부터 어떤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김연수가 “이 사람 말과 저 사람 말이 달라서 모순이 생길 때 비로소 진실을 볼 수 있다는 관점”6)을 자신의 문학론으로 택할 때도 유사한 관점이 제시된다. 모순이란 결국 어떤 것을 일관성 속에서 알 수 없게 되는 지점이다. 그 모순을 직접적인 진실로서 회수할 때, 그러니까 그 부정성 자체를 문학의 판단과 일치시킬 때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비-판단이며 생각이 아니라 비-생각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특정한 것이 아니며 모든 판단과 생각을 가로지르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다시, 문학은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이다. 그러한 비-판단과 비-생각이 어떤 실정적인 진실로서 전환되는 한에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에 문학이 스스로 무효화된다는 말이 문학이 “거의 없거나 아주 조금 있다”는 양적인 접근과 직접적으로 대립된다는 독해에서부터 시작했다. 즉 이러한 무효화가 양적인 접근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읽을 때, 무효화의 논리 자체가 양적인 접근 혹은 그것이 초래할 어떤 결과에 대한 방어라는 측면에서 읽을 때 우리에게 다시 보이는 것이 있다. 만약 무효화의 논리가 역설적으로 문학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양적인 접근은 바로 그 존재를 가장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글을 좀 더 발전시킨 다른 글7)에서 신형철이 봉착하는 난관은 우리에게 바로 그 취약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소설의 인식적 가치를 옹호하는 논변들로부터 시작하는 이 글에서 신형철은 분명히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만드는 부정적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설로부터 도출하려고 한다. 예컨대 “그럼에도-살아-감”8)이라는 소설의 응답은 분명히 하나의 입장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에 착수하자마자 그는 어떻게 그런 식의 구체적인 인식이 소설에 고유한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에 맞닥뜨린다. 왜냐하면 입장이라는 것은 그것이 명시적으로 표현되는 한 전적으로 접근가능하며 교환가능한 하나의 진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진술은 결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여러 종류의 판단 체계 [……] 를 무력화하는”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심지어 하나의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문학은 자신이 채택한 바로 그 입장과의 관계마저도 박탈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입장이 다른 경로로도, 예컨대 이론적인 방식으로도 접근가능한 것인 이상 문학은 “이론적으로 얻어진 통찰을 예시하는 것 이외에 어떤 기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9)라는 물음에 언제나 노출될 수 있는 것이며 그 물음은 문학의 고유성을 박탈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취약성 때문에 신형철은 이 글의 시작에서 그가 “소설‘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쓰면 제일 좋을 텐데, 아직은 역부족이라서, 소설‘도’ 할 수 있고 특히 좀 더 잘하는 일에 대해 써보기로 한다”며10) 소설에 고유한 것을 찾는 작업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물러서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문학이 스스로 무효화된다는 정식화는, 그러한 정식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텍스트의 불가능성의 층위에 편재하고자 하는 욕망임과 동시에, 그러한 정식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마주해야만 하는 더 끔찍한 무효화에 대한 방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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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나 과연 이 문학의 편재성은 우리가 끝끝내 고수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오규원은 참고할 만한 방향을 던져준다. 그는 『날이미지와 시』에서 “문학이란 인간이 할 만한 일 가운데 하나인 것은 틀림없지만 할 만한 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11) 내게 이 말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문학을 세계에 많은 일들 중 하나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할 만한 일 가운데 하나’로서의 문학은 결코 독점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어떤 한계를, 모든 것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의, 정확히 한 부분으로서의 문학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만약에 문학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문학이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하는 제도라면 문학은 단지 할 만한 일들 중 하나일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은 바로 그 일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 말을 바꿔보자. 문학이 하나의 생각이라면, 문학은 할 만한 생각이지만 세계에 많은 할 만한 생각 중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또 다시 두 가지를 말해준다. 문학은 어떤 특정한 생각이다. 또 그 생각은 다른 생각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규원이 거부하는 것은 정확히 “현대의 문학적 글쓰기는 다른 용례들 중의 하나 그 이상”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는 문학적 글쓰기를 “다른 용례들 중의 하나”로 한계짓고자 하며,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계단을 밟지 않는다. 그 계단을 오르는 순간 고정된 육신을 벗을 수 있는 바로 그 계단을 말이다. 그것은 그가 어떻게 『현대시작법』이라는 책을 쓸 수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현대시를 어떤 체계적인 방법에 의해 분석할 수 있고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그것이 문학의 부정성과 맞닿아 있는 신비성을 해체하는 바로 그 기능 속에서 어떤 유일한 시론이 된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우리가 용기라고 불러야 할 태도를 함축한다. 물론 우리는 신형철에게도 용기가 있었다고 평가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봉착한 모순 앞에서 물러서는 이유를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소설이 중요한 것이 되기를 바라”12)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쓸 수 있었으며, 그 물러섬을 전제한 채로 소설에 대해 사유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규원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어쩌면 반대되는 종류의 용기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종류의 용기이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대상을 그것의 한계 속에서 사유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한계 속에서 사유하는 것은 사실상 그것을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이 용기는 더 간단히 사유할 수 있는 용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는 담론의 한 부분으로서의 문학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학의 무효화가 초래하는 결과들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그것의 말하지 않음, 사유하지 않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무효화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문학의 “제한 없음”을 다시 주장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그것은 요약하자면 문학성의 상대성에 기대어 단절에 기반한 새로움이라는 가치를 중요시하는 경향이다.

조강석의 글로부터13) 촉발된 논의에서 그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조강석이 인용하는 랑시에르 자신은 예술의 실효성이라는 것에 대해 애매함이 없지 않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가령 그는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실효성이 분명히 있다고 얘기하면서도 그것은 작가가 그에 대해 의도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단언하며 창작자-작품-감상자의 직선적 연결을 끊어내고자 한다. 사실 『해방된 관객』의 상당 부분이 이 직선적 연결에 대한 비판에 할애되고 있다.

예술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반항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가정된다. 예술은 작업실이나 미술관 바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를 동원할 수 있다고 가정된다. 예술은 스스로 이 체계의 요소임을 부인함으로써 우리를 지배 체계의 반대파로 변모시킬 수 있다고 가정된다. 예술가가 서투르거나 수신인이 어쩔 수 없는 자라고 가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인에서 효과로, 의도에서 결과로 가는 이행은 늘 명증한 것으로 상정된다 …… 이를 예술의 실효성에 대한 교육학적 모델이라고 부르자.14)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교육학적 모델”의 핵심은 특정한 예술 작품이 어떤 정치적인 전언이나 효과를 노리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예술 작품이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관객에게 특정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그 믿음이 아무리 “중립적” 혹은 “미학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믿음이 이미 “교육학적”인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 목표는 예술의 특정한 비판적 개입에 대한 욕망, 그리고 예술이 비판적 개입을 할 때 자신을 교육자의 위치에 놓고자 하는 욕망에 제한을 두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요지를 끝까지 밀고 갔을 때 그것은 사실상 예술 작품 그 자체를 두고서는 어떤 내적 실효성도 논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이는 부분적으로 랑시에르가 미학적 실효성이 예술의 범위를 한참 넘어선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는 예술이 “시공간의 나눔과 감각 제시 방안에 기인”하는 정치를 수행하며 “이 틀 안에서 예술가들의 전략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이 효과가 미학적 단절을 거치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규정 가능한 어떤 계산도 하기 어렵다.”15)고 단언한다. 이 단언은 그가 말하는 미학적 실효성이 통상적 의미의 효율성으로 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효율성이란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는 바로 그 매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강석은 이러한 실효성 개념을 그 불안 속에 둔 채로 그것의 한계와 역량 속에서 사용하는 대신, 그것을 통상적인 의미의 “효율성”과 일치시킨다. 예컨대 그뢰즈의 그림을 두고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어떤 결함이 “전언을 전달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지적”16)하는 디드로를 인용하며 “그 결과 감상자에 대한 작용과 효과의 측면에서도 비효율적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생각해 보게 한다”17)고 얘기할 때 이는 뒤에 배치될 “실효성”의 공간과 그 성격을 이미 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정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알려진 것을 그대로 형상화하는 미술 작품과, 베이컨의 “기괴한” 그림을 대립시키며 예술의 실효성을 얘기할 때 그는 랑시에르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다시 한 번 알려진 것과 알려질 수 없는 것, 판단 중지의 역량으로서의 미학이라는 대립 속으로 문제를 가져간다. 그와 함께 미학적 실효성이라는 개념, 작품과 독자 양쪽에 외밀한extimate 것으로서의 거리를 취하는 그 개념은 그것에 고유한 거리를 상실하고 작품의 내적 평가에 대한 측량의 기준으로, 작품-정동의 직선적 관계를 매개하는 다리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조강석의 논리는 또한 정확히 랑시에르가 “예술의 실효성에 대한 교육학적 모델”이라고 부른 것에 수렴한다. 여기서 판단을 무화하는 것으로서의 미학적 역량은 그 자체로 진실이 되지는 않지만, 진실로 접근하도록 하는 유일한 보증으로서의 작인이 된다. 그렇다면 조강석의 글이 랑시에르를 인용하며 무엇을 의도했든 조연정이 이 글을 “전언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 사이의 불일치라는 문학사의 오랜 아포리아”18)로 읽은 것은 온당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조강석의 주장 자체가 아니라, 그의 글에 대한 반응에서 나타나는 어떤 공통적인 경향성이다. 최근 들어 우리는 이와 같은 문학적 진실 개념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판들의 한 초점은 이 편재하는 문학성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성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비판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이때까지 얘기되어온 문학의 “바깥”들이다. 예컨대 조강석을 비판하는 조연정의 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조연정이 조강석의 “미학주의적” 관점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놓을 때다.

만약 최근의 여러 사정들을 겪지 않은 문단이었다면, 조강석의 글은 문학과 정치의 관련을, 즉 작품의 재현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 사이의 관계를 랑시에르의 논의에 기대 섬세한 방식으로 질문하는 역시나 유려한 글로 읽혔을 것이다. 아니 좀 더 신랄하게 말해본다면, 문학 밖의 현실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지는 못하며 조강석의 말처럼 ‘아는 것’을 ‘보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효과만을 지녔을지 모르는 『82년생 김지영』 같은 소설이 지금처럼 활발하게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메시지의 전경화가 작품을 미학적으로 누추하게 만들고, 오히려 미학적 가치에 헌신한 작품이 의외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말을 반복하기에는 문학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많이 달라져 있다. 문학의 누추화를 걱정하기에 앞서 삶의 비참을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불행한 시절을 우리가 살아내고 있기도 하다.19)

조연정은 조강석이 이야기한 “재현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 사이의 관계를 이론적인 수준에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인정하고 있지만 다만 그러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문학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많이 달라져”있으며, 이는 또한 우리가 “문학의 누추화를 걱정하기에 앞서 삶의 비참을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불행한 시절”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이론적인 판단의 외부로서 실천적 판단이 있으며, 그에 대응하는 자족적인 내부로서의 문학과 그것의 외부로서의 현실이 있다. 이러한 대비는 신형철의 글을 비판하는 인아영의 글에서도 반복된다. 그가 문학적 진실이라는 것이 “단지 자족적인 세계 안에서만 작동하는 진실이 아닐까”20)라고 물으며 “현실의 다른 영역과 분리된 문학적 진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21)고 얘기할 때 설정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문학의 외부로서 비참하고 다급한 현실이다.

이러한 비판들의 공통적인 다음 단계는 새로움에 대한 호소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중요해지는 것은 문학이 그 새로움에 부응하고 바깥으로서의 “현실”을 수혈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문학성의 상대성이다. 문학성의 상대성에 대한 참조 속에서 우리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문학을, 전혀 새로운 문학을 상상하고 맞이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의 변화에 따라 문학성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것”22)이라는 지적이나 “이제 읽고 쓰는 ‘나’들의 자리에서부터 문학(성)을 ‘후험적’으로 말하”23)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몇몇 필자나 특정 주제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지난 5년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소영현, 조연정, 장은정, 강지희의 글은 …… 현실의 변화에 따라 문학성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것임을 알려준다.”24)는 인아영의 정리는 문학성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논리가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움의 중요한 성격 중 하나는 그것이 항상 시간적 단절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문학성이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는 “우리는 이전의 문학으로 돌아갈 수 없다”25)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이 단절을 보증해주는 작인이자 주체는 “집단의 체질 자체가 달라진 …… 지금의 독자”26)들이며, 이런 목소리들을 묶어주는 것은 “리부트”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는 단절이고, 그러한 단절로부터만 얻어질 수 있는 새로움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의 논리적 흐름에는 두 가지 검토할 만한 부분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여전히 “제한 없음의 무효화”라는, 정확히 “무효화”라는 특정한 방식의 말하지 않음을 다루는 데 있어서, 문학성의 상대성이라는 논리는 적어도 그 자체로는 여전히 우리에게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 여전히 문학이 “텅 빈 기표”라는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비화와 상대화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한 두 가지 방식이다. 여기서 신비화는 상대화로 대체되며 무한한 능력을 지니는 대신 무한한 효용을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상대화 속에서 문학은 어떤 것이든 읽고 어떤 것이든 쓸 수 있고 모든 것을 흡수 가능한 글쓰기의 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문학이 주장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진정으로 문학이라는 제도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해 모든 방식으로 말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제한 없음의 무효화는 그것이 너무 비대해서 문제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은 실질적인 영토의 확장이다.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거부하는 대신 문학이 할 수 없는 것은 원칙적인 수준에서 철폐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문학의 역량, 문학의 제한 없음은 오히려 확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문학성의 두 가지 버전은 말해지지 않는 것이 갖는 공통적인 한계를 상이한 형태로 공유한다. 그것은 우리가 문학에 고유한 것을 말하는 일을 사실상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검토해야 할 두 번째 문제는 이 상대화를 통해 정립하고자 하는 문학성이 단절을 전제한 새로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문학들이 새롭다고 하더라도, 그 문학적 흐름을 옹호하기 위해 새로움이라는 수사를 동원하는 일 자체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 아닐까?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우리는 이 새로움이라는 수사가 실은 어떤 관성적인 보존의 절차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그것은 단절과 새로움이라는 수사가 정립하는 특정한 시간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이기도 하다.

“퀴어서사 미학을 위하여”라는 부제와 “퀴어서사 리부트”라는 단절의 수사로부터 시작하는 김건형의 글27)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은 기존의 근대 문학적 독해와 구별되는 “퀴어 미학을 창안”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이 새로움의 성취는 기존 근대문학의 미학과의 단절로부터만 가능하다고 전제된다. 근대문학적 리얼리즘을 “이성애자 남성 지식인에게 당연한 세계 원리”28)로 상대화한 뒤 “그 폭력적인 것은 이제 없어도 되지 않을까요?”29)라고 기각하면서, 그가 발명이라는 형식 속에서 요청하는 것은 정확히 그러한 근대문학의 외부로서의 퀴어 문학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단절의 제스처가 오히려 끊임없이 타자로서의 근대 문학을 불러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김건형은 퀴어서사에 대한 독해가 “보편 문학사”에 편입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을 강박적으로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강박적인 탐색이 보여주는 바는 퀴어서사의 새로움을 정초하기 위해 근대문학이라는 타자를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정도만큼, 그 시도 자체가 이미 근대문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애초에 근대문학 자신이 바로 그 새로움을 발명하는 기계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풍경>이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 <내면적 인간>에 의해 도착적으로 발견되었다는 것, 또 그때까지의 문학 언어로 덧칠된 곳이 아닌 신세계, 훗카이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 그가 홋카이도를 대상으로 상상(환상)한 것은 그러한 공허를 채워줄 <신세계>였다. 그는 광활한 들판에서 이렇게 느꼈다고 적고 있다. 사회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자랑스런 얼굴로 전하는 <역사>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소라치라는 지명이 나타내는 것처럼 그곳에는 이미 아이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곳은 충분히 <역사>적인 공간이다. 구니키다 돗포에 의한 <풍경>의 발견은 그런 식으로 역사와 타자의 배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타자는 단순히 <풍경>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30)

이제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독자들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의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비이성애자-비남성-비지식인 독자의 존재다. 그들은 남성중심적 근대문학의 자장 안에서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제야 가시적이 된 존재로 재현된다. 이런 재현 방식은 그들이 어떤 근본적인 배제를 통해서만, 즉 새로움이라는 명칭과 함께인 한에서만 장에 출현할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그 이전에는 결코 온전한 주체성의 형태를 지닐 수 없었다는 가정 하에서만 재현될 수 있다는 한계를 지시한다. 이러한 시간성의 논리에 따르면 “리부트” 이전의 시점에 그 주체들은 남성적 근대문학에 의해 억압받거나 그러한 결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회유되거나 자신의 욕망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거나31) “기묘한 해석 노동”에 시달려온32) 모습으로만 재현될 수 있다. 단절에 기반해 의미화되는 시간성에 대한 비판은 절대적인 퀴어 서사의 양적 증진과 질적인 변천33)이 없다거나 그러한 현상이 논해질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현재의 특권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시간적 동질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서 획득한 관점을 가지고서 과거로 돌아간 어떤 인물이 느꼈을 법한 억압에 대해서, 그것을 과거의 주체들이 그대로 느꼈을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러한 과거의 억압된 주체라는 것 자체가 새로운 발명품으로서 현재를 서사화하는 데 동원된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현재의 서사화 속에서 퀴어서사의 창안이 갖는 의미는 그 흐름의 가속에 이바지한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지며, 그에 따라 가속되는 서사화 자체는 그 서사의 흐름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배제를 자연적인 것 혹은 정치(윤리)적인 것으로 정립한다. 퀴어서사를 다루는 데 있어 이러한 단절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는, 일상적인 층위에서의 퀴어서사의 출현이 갖는 의미34)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퀴어서사들의 출현 자체가 말하는 것은 퀴어서사를 말하는 데 있어서 그 밖의 더 큰 서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성을 상대화한다는 것은 문학을 상대화하는 것과 다르다. 문학성이 상대적인 것일 때 우리는 원칙적으로 모든 종류의 글쓰기를 잠재적인 문학적 텍스트로, 그러므로 그것의 바깥이 없는 그러한 글쓰기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상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대화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작용한다. 풍경으로서의 근대문학, 그리고 그 풍경에서 벗어나는 것으로서의 퀴어서사라는 독해가 반복하는 것은 새로움을 매개로 한 확장이다. 그리고 이 둘은 “총체성의 누빔점이기에 자신이 어디에 서서 무엇을 하는지 보지 않아도 되는”35) 바로 그 원근법적 소실점을 정확히 공유하는데 왜냐하면 이 지점에서 문학이란 무엇으로든 채워질 수 있는 텅 빈 기표로, 이제까지는 존재한적 없던 광활한 영토로, 자신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만큼은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4.

특히 새로움과 관련해서 납득하기 어려운 비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특정한 종류의 실험은 베케트가 했다, 보르헤스가 했다 등등. 그런데 거꾸로 말하면 전통적인 서사로 구성된 소설들도 다 과거에 있었던 거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이건 체호프가 했고, 톨스토이가 했던 거라고 …… 문학에서 예를 들면 에마뉘엘 카레르의 <러시아 소설>이나 <나 아닌 다른 삶>을 보면 실제 자기 삶을 자전적인 요소로 투입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작품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그것 때문에 작품이 다시 틀어지고, 자기도 틀어지고, 이 과정들이 계속 발견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또 소설에서 쓰고. …… 이를테면 세계는 이미 픽션으로 이뤄져 있고, 우리가 픽션의 영향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렇지 않고 사실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생각 역시 언어의 한계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36)

단절과 새로움이라는 수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문학을 초월적인 혹은 초역사적인 대상으로 봐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문학의 역사성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우선 문학을 어떤 비시간성 속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위의 대담에서 새로움이라는 기준에 대한 정지돈의 신경질적인 거부에서 드러나듯이, 어떤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볼 것인가 반복으로 볼 것인가를 평가하는 시선은 필연적으로 투명한 것으로서의 기준을 설정한다. 체호프와 톨스토이를 반복하는 것은 반복으로 인식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체호프와 톨스토이가 의지했던 구조는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의 원근법적 질서는 문학이라는 제도가 부과하는 압력과 강요에 의한 하나의 질서이지만, 그것이 근대문학 자체로 성립하는 것은 그 질서의 우연성과 작위성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다. 많은 가능한 배치들 중 하나인 원근법적 질서가 리얼리즘이라는 현실-재현의 틀로 보이게 될 때 사라지는 것은 이러한 우연성과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근대문학으로부터 단절하고 전혀 새로운 문학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과 새로움이라는 수사가 바로 근대문학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문학이란 제도를 어떤 불투명한 것으로 바라봐야 할 이유, 문학이라는 글쓰기의 장치를 거칠 때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압력, 세계를 특정한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만드는 그 입장 자체를 문학 자신의 것으로 귀속시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은 그것에 외부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저러한 조건들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러한 조건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근대문학을 특정한 주체들에 의해 전유 혹은 오염된 것으로만 바라볼 때 중립적이 되는 것은 바로 문학이란 제도 그 자체이다. 그럼으로써 해결책은 다른 주체들의 투입으로 상정된다. 반대로 근대문학적인 배치는 문학적 재배치의 결과 중 하나이며, 근대문학적인 배치를 가능하게 한 바로 그 동일한 압력으로부터 또 다른 배치가 가능할 수 있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바로 그 동일성으로부터 근대문학적 배치에 기반한 작품들도 다르게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질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연적일 수도 있었으나 현재로서는 그렇지 않은 또 다른 질서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기존의 질서와 동등하게 맺는 어떤 관계의 수립이라는 측면에서, 정확히 그것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어떤 잠재성의 평면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그저 태연한 반복의 실천이다. 이 실천은 무언가를 거부해야 할 것으로 상정하거나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체호프와 톨스토이와 베케트와 또 다른 수많은 글쓰기들이 나란히 놓인 평면에서 그 모든 것들을 동시대적으로 파악한 채로 그저 원하는 것을, 그때그때 필요로 하거나 마음이 끌리는 것을 뒤섞고 반복한다. 세계 그 자체를 픽션으로 보는 일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반복의 실천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평이다. 거기에는 단독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연적 질서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한 텍스트의 안과 밖은 수평적이고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또 다른 텍스트를 만들어내고 옆에 놓을 수 있다.

지금 다시 1인칭에 대한 논의를 통해 하려는 것이 단지 작품 내적 시점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의 관계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이 재배치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문학에서 소위 현실과 픽션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은 사실상 “자전적”이라는 말과 함께 언제나 있어왔다. 이 의문을 회피하는 가장 편리하고 표준적인 방법은 어쨌든 우리가 다루는 것이 “소설”이라는 식의 주장이다. 이 경우 소설을 성립시키는 건 소설이라는 벽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어와 함께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애초에 어떻게 소설이라는 형식이 실제 일어난(심지어 일어난 것과는 다른) 사건을 소설로서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은 소설적인 것 자체는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전혀 중요치 않은 어떤 층위에서 그것을 소설로 만드는 구조가 있다는 것, 그러므로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배치할 것이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1인칭에 중요한 것은 결코 사적 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요점은 소설이 픽션이므로 작품의 화자가 실제 현실의 작가와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식의 분리에 있지 않다. 문학이 특정한 형식을 통과한 글쓰기인 이상, 그것이 공적 언술인 이상 사적 개인으로서 작가의 탈개성화라는 것은 문학이 하나의 형식으로서 처해 있는 조건이며, 문학을 긍정한다는 것은 이 조건을 문학의 입장으로서 긍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1인칭에 있어서 “나”라는 형식이 갖는 의미는, 카프카가 “‘나’를 ‘그’로 대체할 수 있었을 때 문학에 들어섰다”37)고 말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라는 지칭이 작가의 탈개성화를 위한 도구였다면 ‘나’라는 형식은 그 탈개성화를 개성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1인칭의 내부에서 실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1인칭은 3인칭의 반복이다. 단지 그것은 탈개성화가 3인칭 형식과 맺는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고진에 의하면 “<작가> <자기> <표현> 이런 말들이 이미 근대문학적인 것”38)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그러한 표현의 매체로서의 문자가 자신의 기원과 모습을 감추고 투명한 것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의 1인칭 소설이 근대문학적 재현 방식의 “허구”에 저항하며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을 옹호하는 움직임이라는 독해는 여전히 근대문학적 이분법으로 회귀한다. 예컨대 최근의 1인칭 화자들에 대해 “이들은 그저 ‘나’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정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이다] …… 문제가 되는 것은 ‘나’라는 사건이며 모든 ‘나’는 그 자체로서 끝없이 탐사하고 발굴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39), 라고 말할 때 이 모든 논리는 현실-재현이라는 대립 속에서 현실을 구성하는 특정한 관점(우리가 흔히 “일상”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현실)을 자연화하며 그러한 한에서만 발견되는 ‘나’라는 대상을 특권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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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런 식의 특권화에 저항하는 글쓰기들과 독해들이 있을 것이다.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40)에서 “나는-”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무수한 문장들은 그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한 사람의 나라는 것을 박탈한다. 이 “포스트모던”한 작품이 아주 엄격한 구조에 의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기서 작중 인물로서의 ‘나’와 작가 사이의 환원불가능한 거리를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어떤 방어에 불과하다. 반대로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더라 하더라도 그 사실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지점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것은 모눈종이처럼 아주 단순한 구조이고, 그 구조를 통하는 한해서만 전해지는 사실들이며, 1인칭이라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도록 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이야기에 특정한 변형을 가하게 만드는 작인이 된다. 『자화상』의 구조는 그 자체로 어떤 대칭성과 그 대칭성 위에서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슬프거나 슬프지 않거나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역사적이거나 역사적이지 않은 모든 사실들이 “나는-”이라는 구조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기입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 수많은 문장들의 무차별적인 배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바꾸거나 바꾸지 않는 방식으로 반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익명적이고 공적으로 바쳐진 구조를 통과한다는 사실은, 정확히 원래 그것들이 배치되어 있던 자연적인 구조를 상대화한다는 맥락에서, 자연적인 ‘나’가 그 사실들과 맺고 있던 특권적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특권에 대한 포기가 궁극적으로 문학을 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특권의 포기는 문학에 “본질적인” 행위와 상응한다. 즉 문학 속에서 나는 나로부터 발생했거나 나를 이루는 나에 대한 문장들을 인용될 수 있는 것들의 영역에 양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 그 문장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독점권을 포기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 요구에는 부정성이나 모호함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실정성을 위반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목표인 것도 아니다. 아주 실정적이고 구체적인 주장이 있으며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반박당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책들이, 특히 문학이라고 불리는 모든 책들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불일치의 정도와 양상은 문학이라고 불리는 책들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성할 것이다. 다만 이 요구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책들이 있다. 그 받아들임은 그 책의 만질 수 있음만큼이나 구체적이며, 그 책이 보이지/읽히지 않을 수 있음 만큼이나 사라질 수 있으며, 수많은 사물들 가운데 혹은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거의 없거나 아주 조금 있는 그런 것이다.41)42)

 


1) 데리다, 『Dissemination』, Barbara Johnson 옮김, Chicago: U of Chicago P, 1981, 223쪽, 「해체, 해석, 문학: 데리다와 윤리」 강우성, 『영미문학연구』 2005년 제8호, 15쪽에서 재인용. 이 글의 데리다에 대한 인용은 강우성의 논문을 기반으로 했다.
2) 데리다, 위의 글, 같은 쪽
3) 데리다, 『문학의 행위』, 데릭 애트리지 엮음, 정승훈, 진주영 옮김, 강우성(2005) 12쪽에서 재인용, 번역 수정
4) 신형철,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쓰고 ‘서사윤리학’으로 읽기: 장편소설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단상」, 『문학동네』 2010년 봄호, 신형철의 이 글과 뒤의 김연수의 문학론에 대한 인용은 인아영, 「시차(時差)와 시차parallax – 2010년대의 문학성을 돌아보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5) 신형철, 위의 글
6) 김연수,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 제4회 part 2
7) 신형철, 「신은 소설을 읽지 않는다」, 『문학동네』, 2016년 겨울호
8) 신형철, 위의 글, 579쪽
9) 카이 함머마이스터, 『독일 미학 전통』, 신해경 역, 이학사, 2013, 266쪽. 신형철, 위의 글, 571에서 재인용
10) 신형철, 위의 글, 566쪽
11) 오규원, 『날이미지와 시』, 문학과지성사, 2017, 146쪽
12) 신형철, 위의 글, 571쪽
13) 조강석, 「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 문장웹진 2017년 4월호
14)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 2016, 74쪽
15) 랑시에르, 위의 책, 93쪽
16) 조강석, 위의 글
17) 조강석, 위의 글
18) 조연정,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문장웹진> 2017년 8월호
19) 조연정, 위의 글
20) 인아영, 「시차(時差)와 시차parallax – 2010년대의 문학성을 돌아보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6쪽
21) 인아영, 위의 글, 13쪽
22) 백지은, 「‘K문학/비평의 종말’에 대한 단상(들)」,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23) 김건형, 「소설의 젠더와 그 비평 도구들이 지금」,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28쪽
24) 인아영, 위의 글, 13쪽
25) 인아영, 위의 글, 13쪽
26) 노태훈, 「‘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문학사: 최근 한국 소설의 징후」, 『문학들』 2018년 가을호, 43쪽
27) 김건형, 「‘퀴어 신파’는 왜 안 돼? ― 퀴어서사 미학을 위하여」, 『크릿터』 2호, 민음사, 2020
28) 김건형, 위의 글, 23쪽
29) 김건형, 2019, 32쪽
30)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7, 11쪽
31) 하나의 예시로서 이성미, 「참고문헌 없음」, 『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14-25쪽
32) “‘그녀’들은, 카프카와 만과 조이스와 카잔차키스 소설의 주인공들과, 그것을 읽는 자아를 애써 일치 시키고자 할 때에도 필시 이물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럼에도 결국에는 기이한 희열을 맛보는 ‘해석 노동’을 해 보았을 것이다.” 김미정, 「여성교양소설의 불/가능성:한국-루이제린저의 경우(1)」,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6년 겨울호, 84쪽. 김건형, 위의 글, 24쪽에서 재인용.
33) 물론 이를 인상적으로 다룬 글로 김건형, 「2018, 퀴어전사 ―前史·戰史·戰士」, 『문학동네』 2018년 가을호.
34) “이제 퀴어는 순정한 사랑의 장면이나 숭고한 희생의 담지자 같은 상징적 지위에서 세속적인 일상으로 내려온다. 낭만화와 비극화를 모두 넘은 퀴어의 세속화인 것이다.” 김건형, 위의 글
35) 김건형, 2020, 22쪽
36) 정지돈, 강동호,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160, 167, 168쪽
37) 『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0
38) 가라타니 고진, 위의 책, 249쪽
39) 인아영, 위의 글, 8쪽
40) 에두아르 르베, 『자화상』, 정영문 옮김, 은행나무, 2015
41) 이 글은 2020.06.25. 요즘비평포럼 <전지적 1인칭 시점 – 1인칭의 역습 vol.2>의 발제문으로 작성되었다.
42) 원래 이 글의 제목을 <자유롭지 않은, 새롭지 않은, 가능한>이라고 짓고 싶었지만 쓰다 보니 글이 그런 방향에 딱 들어맞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을 이 글의 부제 정도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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