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_페드로 코스타를 보며 유아사마사아키를 떠올리다

김선호(만화평론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Casa de Lava’ 공식 트레일러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유아사마사아키의<너와 파도를 탈 수 있다면>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영화는 페드로 코스타의 <용암의 집>이었다. 그 이후에는 곤 사토시의 <천년여우>가 떠올랐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이것들은 본능적이고 시원적(始原的)이라는 점에서 정합하는 부분이 있다. 먼저 포르투갈의 명장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가 알다시피 페드로 코스타는 <용암의 집>의 도입부에 ‘솟구치는 용암’을 정말로 보여주었다는 실수*를 저질렀다.(*마노엘드올리베이라.) 물론 내가 그것을 ‘실수’라고 평하는 바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페드로 코스타의 이 영화를 통해 곤 사토시의 <천년여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천년여우>의 도입부에는 작품의 결말과 수미상관이 되는 쇼트가 선행등장한다. 우주로 나가는 어느 한 여인의 모습이 우주복과 함께 그려지고, 우주선이 발사되는 순간에 떨림이라는 현상이 영화의 물성으로 나타난다.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으로 보면 모르겠지만, 이 장면은 영화관에서 스피커가 전해주는 공기의 ‘떨림’을 몸소 느낄 때 효과가 증폭된다. 이때 온 몸을 에워싸는 소리의 떨림은 애니메이션이 갖는 액체적 성질과 그 포만감에 있어 유사하다. 단순히 온몸이 흠뻑 젖는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몰 한복판으로 빠져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내면으로 밀려 들어온다는 점에서 이것은 풍부함을 넘어선 포만감인 것이다.

그런 포만감이 시원적으로 등장해 삼출물 형태로 영화 전체에 퍼져 나간다는 게 <천년여우>의 작법이다. 그래서인지 비평이 사람들을 감염시켜야 한다는 비평의 테제가 떠오르기도 한다. 감염이라는 게 세포 단위에서 형질 변화를 끌어낸다는 맥락이기에 사용되는 말이다. 이론적인 맥락으로 사용했지만, 결국 삼출물이라는 것도 인체가 뿜어내는 이례적인 일들에 해당한다는 점을 생각하자. 영화 내로 급격하게 밀려오는 포만감의 파도가 마치 인체를 침공하는 바이러스의 군세처럼 느껴진다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건 면역체계 활성화에 따른 발열 등의 이상 증세일 것이다. 그러니 <천년여우>는 사실상 병상에 누운 환자 상태로 도입부를 시작하는 것이며, 우리가 지켜보는 것은 그가 과연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과정일 테다.

건강? 영화가 건강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다. 하지만 말을 바꾸어서, 인체의 ‘균형’을 회복한다고 보면 얼추 이해가 간다. 이른바 ‘항상성’을 지켜내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삶이라면 우리가 바라보는 <천년여우>의 여정은 상쇄의 서사이다. 주인공 치요코가 자신의 기억을 관통해가는 장면이 말 그대로의 ‘달리기(Running)’으로 묘사될 때, 그것은 영화의 ‘상영시간(Running Time)’을 재현하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 이에 따르면 <천년여우>는 영화라는 매체를 인격화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셈이고, 그 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건 애니메이션의 물성을 빌린 포만감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용암의 집>의 담론을 <천년여우>에 대입하는 것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곤 사토시는 어떤 이미지를 가정하고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드로 코스타의 실수라는 말은 자신이 전하려는 걸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직유법의 실망스러움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반면 <천년여우>의 도입부는 이미지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물성을 응용하기 위한 토대이다. 혹자는 실사 영화의 액체적인 질감을 두고서 물성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나, 물성이 ‘물리적 성질’의 준말이라면 애니메이션 매체를 구성하는 질료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액체성이다.

구분되어야 마땅한 것은 그 액체성이라는 게 꼭 ‘물’과 연관되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물과 연관된 무언가를 그려낼 수는 있겠지만 그 두 가지 사이에 등치공식을 세우는 것까지는 무리다. 오히려 나는 액체성을 담아내는 그릇에 집중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의 경우라면 러닝타임을 담아내는 스크린의 경계일 테고, 인간의 경우라면 인체의 7할이 수분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겠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천년여우>의 사례에서도 치요코의 직업이 여배우라는 점이 물이 담긴 그릇의 메타포를 말해준다.

영화의 후반에 그녀가 영화를 횡단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가지각색의 복장이 마네킹처럼 덮어 씌워지지만 달려감에 따른 운동은 소매의 나풀거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살짝 눈물을 흘리는 치요코의 모습은 찰랑이는 그릇에 담긴 수분이 주체를 못해 살짝쿵 새어 나오는 듯 보인다. 이 의미적 맥락을 따라가면,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찰랑이는 무언가이며, 그런 포만감으로부터 이따금 내용물을 게워낸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게워낸다’는 표현이 무언가 버겁게도 들리지만, 식중독에 걸리거나 이물질을 마셨다거나 하는 등의 부정적 상황에서 주로 이 표현이 사용됨을 고려하면, 무언가를 감당하지 못해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꺼내 놓는 것에 대한 표현은 ‘게워냄’이 적절한 것 같다.

다시금 게워낸다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본다. 페드로 코스타의 <용암의 집>의 도입부에서 드러나는 용암의 이미지는, 영화의 속살에서 하려는 말을 그대로 게워낸 것이기에 비판받았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게워내는 행위가 비판받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꺼내 놓았기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걸 게워낼 정도의 행실에서 평소의 태도를 유추하게 된다든지. 전자는 미학 후자는 윤리학과 연결된다. 그리고 미학이라면 몰라도 윤리학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말이 좀 있다. 영화가 윤리적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두 갈래 길을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영화가 묘사하는 내용이 윤리적인 가에 대하여. 두번째, 영화가 내용을 묘사하는 방법이 윤리적인 가에 대하여.

다시금 유아사마사아키의 <너와 파도를…>로 돌아와서 그의 전작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가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를 만들었을 때 나는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다. 마을에 홍수가 닥쳐오는데 인어들이 합심해 마을 사람들을 구해준다는 점, 그리고 그 인어라는 게 사실은 바다에서 실종되었던 마을 사람이었다는 점이 그렇다. 즉 이 영화는 자신으로부터 외면당한 것들이 바다로 방류되었다가 다시금 돌아와 자신을 구원하는 서사를 꾸리고 있다. 이때 미리 주의를 주고 싶은 것은, 여기서 외면당했다는 말은 의도가 아니라 비의도적인 측면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출렁이는 바다에 작디작은 어선이 위태로운 파도에 몸을 맡기는 도중에 해녀는 굴러떨어진다. 모두가 죽은 줄 알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어가 다가와 그를 구해준다: 그렇게 그는 한 명의 인어가 되어 육지를 떠난다. 이 모든 것은 인과가 아니라 우연,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의도와 비의도라는 구분을 의미와 무의미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는 없겠지만, 바다가 집어삼킨 가족을 떠올리며 그들이 즐겨 하는 말은 비의도가 아니라 무의미였다. 그러니까 바다에 빠져 물로 환원되는 모습은 주체에 빗금을 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작중에서 바다가 앗아간 가족의 모습은 달걀귀신처럼 묘사된다. 일렁이는 수면에 비친 얼굴은 어쩌면 찰랑이는 육체-그릇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이 영화에서 발견하는 물은 거울이 아니라 빗금이다. 동시에 마을에 전설로 내려오던 인어:그 빗금이 해금되어지자 전설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무의미라는 바다의 위협으로부터 마을 사람을 구해낸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서 하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괄목할 만한 지점은 영화에 나오는 두 주인공, 인간 카이와 인어 루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마음속의 빗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카이에게 바다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앗아간 장소이다. 그래서 유년기의 카이에게 어머니의 얼굴은 또렷하지 않고, 이 불투명함은 음악의 잡음이 되어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카이는 잡음이 없는 외딴 섬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 기타를 치는 것이며, 동시에 금기로 설정되었던 바다를 건넌다는 행위가 위의 세 가지 선율을 하나로 종합한다. 그렇게 영화의 결론: 카이가 외딴 섬으로 들어가 노래를 부르자 인어들이 힘을 되찾아 마을을 구한다. 찰랑이는 그릇은 더는 깨어지지 않을 테고 영화도 봉합되며 분열되려 했던 신체는 안정된다.

노래와 물이 아니라 금기와 그릇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주제이다. 물이 나온다고 해서 동일본 대지진이나 한국의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는 건 해당 사고들에 대한 서투른 감정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그 서투른 감정을 피해가려고 금기와 그릇이라는 주제를 택한 것도 아니다. 금기를 넘는 것이 그릇에 균열을 가져온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페드로 코스타의 <용암>을 두고서 상투적인 비판을 가할 수밖에 없다. 허나 그와 반대로, 상투적인 비판을 허용하는 이 영화가 미학이 아니라 윤리학을 적용하고 있음은 말해볼 수 있다. 페드로 코스타의 이 영화는 미학적인 측면에서 실수를 저질렀을지는 몰라도 윤리학적인 접근을 택했고 이 방법론은 옳다. 사실 평소 그의 성격을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페드로 코스타의 카메라는 늘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으니 말이다. (반다… 벤투라…)

솔직히 말해 <새벽을 알리는…>에서 여러 사건을 떠올렸을 때 나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유아사)는 현실을 픽션화하고 픽션을 현실화하는 것으로 모종의 교류를 시도했던 것일까? 다시 말해서, 영화를 애니화하고 애니를 영화화하는 것으로 소기의 성과를 이루어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한 희망적인 논파는 위에 기술해두었다. 그렇다면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 차례다.

유아사의 <너와 파도를…>를 보면서 <새벽을 알리는…>을 복기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주인공이 미쳐 보여서다. ‘미쳤다’는 표현이 조금 과격할지는 몰라도, 죽은 남자친구를 세상 어느 곳의 고인 물에서도 발견하는 여자에 적용하기란 쉬운 법이다. 물 안에서 죽은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재난을 돌파하는 기적을 일구어낸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아 있다. 물론 <새벽>의 카이를 두고서 ‘미쳤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는 없겠다만. 인어라는 전설 속 존재와 만났다고 주장하던 시점에는 그도 미치광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재난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는 모습을 두고서 마을 사람들이카이에게 미쳤다고 말하는 태도를 보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친 건 당신들이야’라는 말을 입안에 꺼내놓게 된다.

영화 <너와 파도를 탈 수 있다면>의 한 장면

그러나 애니메이션이 왜 애니메이션인지를 생각해본다면 그 말은 결코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애니메이션의 물성은 현실의 것과 달라서 쉽게 출렁이고 왜곡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두고 현실에 직접적으로 대응해보려는 생각은 일종의 ‘실례’가 된다. 현실에 인어가 없다는 사실도 알고, 인어와 함께 노래하고 춤출 수 없다는 점도 잘 알며, 죽은 남자친구를 물에서 발견하는 일이 있을리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가 있을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다.

과연 무엇이 있을 수 없는 일일까. 있을 수 없다는 말 자체에는 모종의 금기가 빗장처럼 자리한다. 이 빗장의 안쪽에 있는 우리는 바깥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안쪽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아니라 그저 금기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 이제 거울은 없고 깨어진 자리를 통해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그 수면을 안전하게 건너가는 방법은 우리의 그릇을 키우는 것뿐이다. 근력과 지구력을 키워 바다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물을 좀 먹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완전한 침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천년여우>의 결론이 깊은 어둠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우리가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 성찰과 숙고를 통한 횡단을 거친다고 가정해본다면, <천년여우>의 출렁이는 그릇이 넘침과 깨어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하고 있음을 말해볼 수 있다. 이 서사에서 어쨌거나 그는 자신이 지정한 과거-시원적인 포만감을 만족시켰다.

포만감의 측면으로 <너와 파도를…>에서<새벽을 알리는…>과의 유사점을 찾자면 노래를 부를 때만 죽은 남자친구의 영혼이 돌아온다는 대목이다. 노래에 희망을 결합하는 건 유아사 본인의 사적 취향인 듯 하지만, 그를 생각하는 히나코의 시점에서만 노래가 영화 내부에서 영화 바깥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히나코의 세계는 물로 꽉 들어차 포만감으로 가득하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직유하자면 그는 슬픔으로 가득찼다. 인체의 7할이 수분이라는 점에서 그가 눈과 코로 쏟아내는 퍼센트가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흐트러진 수분은 두 사람의 인연이 ‘사실은’ 아주 오래되었음을 지적하는 지점으로 흡수된다. 히나코는 어린시절 남자친구를 바닷가에서 구해준 바 있었고, 그 대목에서 라디오의 노래는 세계의 잡음에서 세계의 전부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를 충만하게 하는 것은 물과 노래이다.

위에서 나는 <천년여우>의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의 물성을 빌린 포만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연역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의 픽션화와 픽션의 현실화에 대한 관계이다. <너와 파도를…>은 유아사의 다른 작품과 밀접하게 닿아 있지는 않지만 히나코의 현실이 픽션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대해 말한다. 동시에 픽션이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지도 말한다. 영화 같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 ‘거짓말 같은’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는 히나코가 현실적이지 않은 픽션적인 연애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서사는 이 층위에서 진행되고 노래는 두 사람이 있는 두 개의 중층을 이어주는 단서다.

이를테면 <새벽을 알리는…>에서의 육지와 바다,인간과 인어, 의미와 무의미 등. 이것이 <너와 파도를…>에서는 액체의 분과로 돌아가 인간을 치유하는 에너지로 사용된다. <새벽을 알리는…>이 금기의 해제를 결론으로 내버려 두고 깜깜한 어둠으로 돌아간다면, <너와 파도를…>은 그 금기가 히나코의 현실과 픽션 사이에 자리해있음을 지적하며 멜랑꼴리로부터의 회복을 도모한다. 예컨대, 금기는 뇌간 주름 사이에 낀 물 때이다. 노래를 통해 장막을 걷어내는 과정에 항상 물 빠짐의 현상이 동반되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새벽을 알리는…>의 위기는 마을에물이 차오르는 것이었고, <너와 파도를…>의 위기는 빌딩에 불이 나는 것이었다. <새벽>의 카이는 노래를 통해 물을 바다로 돌리고, <파도>의 히나코는 노래를 통해 물을 하늘로 끌어 올린다. 절차는 좀 다르지만 결론은 같다. 금기가 해제되고 난 후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예우인 것처럼 말하는 인어와 (죽은)남자친구가 있다. 그렇게 물이 빠진 장소는 마치 처음과 같은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시원성에 대해서는 포만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물이 빠진 자리에 대신 들어서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남겨진 것들을 해소하고 나서도 다시금 남겨진 것이 생겨난다는 점이 일종의 수미상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고독이 아닌 동료의식을 따른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안다. 그래서 그 시작과 끝은 다르다. 있던 일이 없던 일로 되지도 않고, 어쩌면 모든 것이 그대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시작과 끝 사이의 상영시간 동안 달려왔던 우리에게는 허파 속 꽉 들어찬 수분이 남았다. 눈으로 소모되는 수분이 아니라 몸 구석구석을 타고 흐르는 형태로 말이다.

 

 


* 크리틱-칼은 여러분의 자유로운 투고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언제나 기다립니다. 크리틱-칼에 한 번이라도 투고해주신 필자에게는 1년에 한 번 5만 원을 고료로 드립니다. 투고 문의는 gocritical@gmail.com로 가능합니다.

* 2020년 3월부터 정기후원자 1000명 모집 프로젝트를 시작함에 따라서 차후에 1년에 한 번 5만 원 책 선물을 필자에게 드리는 방식은 글을 투고할 때마다 일정 고료를 필자에게 드리는 방식으로 바뀔 예정입니다. 또한 정기후원 규모가 확장되는 것과 비례하여 글을 투고할 때마다 드리는 고료의 규모도 조금씩 상향될 예정입니다.

* 크리틱-칼은 독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됩니다. 크리틱-칼 후원금은 홈페이지 호스팅 및 도메인 유지비 그리고 필진들에게 책 선물&소정의 원고료을 드리기 위한 비용으로 사용합니다. / 우리은행 1005-303-874628 (예금주: 크리틱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