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_오민수 개인전 ‘전기는 흐른다’ 관람기: 불투명한 소음을 통해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서운

예측 가능한 사실이 다가오고 있다. 예측이 실현되는 순간 예측은 사라지고 현실로 다가오는 공포가 있다. 그것이 어떤 절망의 한 조각일 수 있고 어둠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죽음에 집중하는 고통을 짐작하기 어렵다. 특히, 그것이 보이는 현실 공간에서는 고통이 희석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노동의 신성함을 주장하지만 숨어 있는 노동자의 이야기는 듣지 못한다. 죽음으로 보여야만 뚜렷하게 보이는 현장이 있다. 이것만 조금 바뀌었다면, 이것만 조심했다면, 이것만 먼저 알았더라면, 따위의 뒤늦은 한숨 섞인 말들이 지루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누구도 모른다는 듯 시간은 흐르고 일상은 돌아간다. 지친 목소리들과 견디는 몸들은 나를 지키기에도 버거운 시간을 살고 있다. 외면하고픈 사실과 현실에서 우리의 판타지는 퇴색되어간다. 예술은 현실과의 괴리감에 괴로워하는 양상을 띤다. 예술의 현실참여, 현실참여의 예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목소리를 들려주고 보여주는 과정을 여러 가지 실험으로 고민하고 있다.

SNS에 소개된 전시 소식을 읽었다. “전시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꼭 가서 보시라고 권”했다. 이 문장에는 어떤 간곡한 부탁이 들어 있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고 궁금하기도 했다. 질문으로 시작되는 ‘일용직 노동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서였기도 했다. 전시공간 인스턴트 루프로 가는 길은 한적했지만 따뜻했고, 입을 가린 사람들이었지만 웃는 눈들이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그렇게 골고루 비추는 듯했으나 전시장으로 가는 길은 은유적인 느낌이었다. 알 듯 모를 듯 찾아간 그곳은 낮은 지붕들과 함께한 아주 좁은 전시장이었다.

작은 전시 공간은 고작 서너 명 정도만 관람할 수 있다. 전시는 깜깜한 공간에서 24분 동안 지속한다. 시작되기 전 “지루할 수 있습니다. 지루하시면 아무 때나 나오시면 됩니다”라는 친절한 설명은 단호하게 “절대 안 나가겠다”는 약속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스물세 살 청년의 퇴근 전 20분을 소리로 재현한다. 소리는 절규로 함성으로 침묵으로 다가온다. 새벽을 여는 시간이었으며, 잠을 자는 시간이었으며, 철야를 하는 시간이었으며, 밤새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소리로 치환되고 소음은 목소리로 변환된다. 나는 한 청년의 죽음을 소리로 들었다. 규칙적 역방향으로 진행되는 초침 소리는 살고자 했던 목소리가 내는 함성이었다. 일곱 개의 장치들은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희망을 가려버린 검은 달처럼 비쳤다. 청춘은 빛과 소리를 품고 사라져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시간은 흐르고 작업장도 흐르고 전기도 흐른다. 파열된 소리는 우리가 외쳐야만 하는 부정의 함성이었으며 조용한 비질과 흐르는 물소리는 한 사람이 사라져가는 것을 외면한 우리의 무책임이었다.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을 서서 보았고, 서서 들었다. 앉아 있기에는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4시 12분, 그곳에 있던 한 청년노동자의 숨결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오민수 개인전 《전기는 흐른다 Electricity is Running》 전시장 광경, 사진출처: 링크

이북명의 소설 「전기는 흐른다」를 읽었다. 소설 속 인물 김창화는 해방된 날 장진강발전소의 최고 책임자가 된다. 그가 최고 책임자가 된 이유는 하나였다. “우수한 전기기술자요, 인망이 높은 김창화 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장을 잘 아는 노동자였다. 김창화는 소설 속에서 그리 빛을 발하는 인물이 아니다. 단편소설에서 많은 인물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모든 인물에게 이름을 붙였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 소설은 1945년 8월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며, 일제강점기 시절 이름을 빼앗기고 산 노동자에게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엄혹한 시절을 함께 견딘 작은 연대였다. 오민수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일곱 개의 죽음과 생 사이, 메울 수 없는 파장의 깊은 빈틈에 염원의 소리와 노래를 담아 이제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라고 했다. 오민수 작가는 작은 공간에서 일곱 가지의 빛과 어둠과 소리로 한 노동자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작가 이북명과 작가 오민수는 그렇게 75년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가만가만 위로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도 호명하지 않는 이름이 있다. 기계들 속에서 기계와 같이 숨을 쉬면서 움직이고 있지만 노동자의 이름은 기계의 원플러스원처럼 호명된다. 스물세 살 청년의 이름은 천 원짜리 누전차단기를 설치하지 않아 사라졌다. 사라진 이름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고 한낱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한 청년노동자가 감전 사고로 숨진 지 3개월이 안 돼 또다시 같은 장소에서 택배 상차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후진하던 트레일러에 치여 숨졌다. 애도가 시작되기도 전에 슬픔이 찾아오는 일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오민수 개인전 <전기는 흐른다>는 젊은 예술가가 찾고자 하는 판타지의 희망일 수 있다. 죽음을 대하는 형식은 하나의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죽음에 무감각해지고 있으며 무감각해진 죽음은 투명하거나 희미하게 드러난다.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에게 광범위하게 되새김질 되고 있지만 정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노동이라는 명사는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오민수 작가는 작은 공간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가득 채움으로써 그 사람이 노동현장에서 겪었던 시간을 함께 흐르게 하고 있다. 24분의 시간은 보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며, 온전히 한 사람에게 전념할 수 있는 함성의 시간이다. 움직임이 없다면 흐르지 않는다. 오민수 개인전 <전기는 흐른다>는 스물세 살 청년노동자의 이야기이며, 죽음에 대한 애도이며, 삶에 대한 소리의 기록이며, 불투명한 현장의 환상을 현실로 이끌어내는 상징이었다.

이 전시는 여기가 아니면 안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작은 공간 인스턴트 루프를 찾아가는 길은 낯설고 아름다웠다. 고양이들이 지붕과 지붕 사이를 산책했다. 손을 잡은 연인들은 사진을 찍고 서로에게 따뜻한 눈빛을 건넨다. 감자칩을 파는 가게를 들여다보는 작은 사람을 보았다. 조용했다. 전시를 본 후 다시 그 길을 걸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흐르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충분한 애도는 충분하지 않았고 지극한 슬픔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스물세 살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작가는 설명하지 않았다. 글을 읽지 않았다면 이 전시는 현대의 물질성에 근접한 가장 세련된 전시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곱 개의 시각적 이미지는 빛과 암흑, 소음과 소리로 증폭되면서 감정이 감전되는 경험을 통해 결국은 차오르는 슬픔과 함께하는 ‘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_ 이성복의 시 <그날> 중에서

지금 우리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사는 것일까. 서로의 곁을 내주는 시간에 대해, 분노를 통한 함성에 대해,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들에 대해, 외면하는 부끄러움에 대해 아프게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많은 분이 봤으면 좋았겠다 싶은 이 전시는 막을 내렸다. 작가 오민수의 작업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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