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제현_거식증을 앓는 세계

엄제현

먹방의 범람은 어떤 사회적 징후일까? 단지 구강기적 시기로의 퇴행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설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퇴행은 결과적인 표현태이지 그것을 초래하는 원인이라 볼 수 없으니까.

먹는다는 행위는 개체의 생식을 넘어선 범주로, 청소년기에 흔히 있는 단식투쟁이 이를 뒷받침할 예랄 수 있다. 얼핏 보기에 단식을 통한 부모에 대한 반항은 그들을 직접 겨냥하지 않는 자기파괴적인 태도처럼 보인다. 오히려 반대이다. 단식은 관계에 일격을 가하는 추상적인 잽이다. 식사가 유지하는 공동체의 연속성에 대한 공격은 먹기-소화하기-배설하기의 장내 순리에서 이탈함으로써 단순히 생물학적인 반동을 일으키는데 그치지 않고 체순환의 자연적 질서 위에 덧씌워진 재생산의 질서, 그 재생산을 구성하는 사회적 질서의 특정한 흐름에 반감을 표함으로써 관계를 볼모로 잡는다. 닫혀 있는 입은 그것이 보다 본래적인 신체 선열임에도 불구하고 중지의 선언이다.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서건, 말을 하기 위해서건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벌어져야’ 한다. 이러한 분열은 지속의 조건으로 자리한다. 출산을 위해서 여성의 질은 개대되고, 찢어져야 한다. 배설을 위한 괄약근의 이완은 섭취의 최종적인 보증이며 마찬가지로 열려야 하고, 입술 또한 대화를 지속하거나 섭취를 지속하기 위해선 벌어져야 한다. 닫힌 입은 음식이 밖에서-안으로 들어오는 일방향적 구조에 기인하는, 외계에 대한 어떤 기호적 거부의 증거로서 제시된다. 섭취를 통해 안과 밖이 연결되는 통로를 입의 수준에서 봉쇄함으로써 바깥에 대한 거부, (특정한 레서피에 따라 제작된) 질서를 내면화하고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상징적 행위로 등재한다.

bj쯔양의 먹방 장면_출처

그러니 식사는 단순히 생물학적 존속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삶 충동과 죽음 충동사이의 대립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범주로까지 확장된다. 식사는 음식물 이상의 추상적인 무언가를 받아들일 것이냐/아니냐의 문제이다. 투쟁현장에서의 단식, 정치인들의 단식, 종교적인 수행에서의 단식, 모두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투쟁현장에서 단식이 하나의 수단인 이유는 한 개인의 추상화된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의 삶이 말라간다는 직유를 상연하는 포르노가 아니라 노동자의 구체적 신체를 볼모로 잡아 자본과 노동 간의 모순적 질서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대결에 직접적으로 들어섰다는 강력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이때 입은 자본의 순환과 질서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동시에 말로써 그 질서를 게워낸다. 종교적인 단식은 또한 속세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자신을 현혹하는 일체의 감각적 자극 내지는 구체적인 욕구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거부의 선언으로써 동원된다. 그렇기에 입은 언제나 유혹과 관련된다. 입/혀/말은 들어가는 것이건 나가는 것이건 강력한 의미사슬을 구성한다. 입의 통제는 교환의 논리에 대한 반발을 가능케 한다. 다문 입은 언어를 교환할 수도 없으며 호흡에 관해 일정부분 가스교환에도 참여할 수 없다.

위와 같이 먹는다는 행위가 단순히 몸짓에 그치지 않는다면 당연히 의미를 형성한다. 먹방을 단순히 1차적 욕구들의 난교가 벌어지는 외밀한 향락으로 간주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 순박해진다. 먹방에 기대어 욕구를 충족하는 시청자는 단순히 나 대신 먹는 주체 그 이상의 형상에서 만족을 희구한다. 그 만족의 대상은 매 식사에 따른 종별적 대상물에 있지 않다. 먹방은 먹는다는 행위를 보는 것이다. 벌어지는 입에서 섹슈얼한 기호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벌어지는’ 것은 심각하게 음란한 기호이다. 그것이 욕구의 충족이고 또한 지속이란 점에서 얼마든지 에로티시즘과 관련된다. 그러나 먹방이 제공하는 쾌락은 1차원적 충족을 지나 제의적인 만족까지 포괄한다고 여길 수 있다. 먹방은 대체로 ‘입을 쩍 벌리기’, ‘한 입에 다 안들어갈 듯한 양을 가감없이 집어넣기’, ‘일반인의 식사량을 아득히 초월하는 양을 쓸어담기’, ‘전투적인/행복에 겨운 태도로 씹어삼키기’, ‘완전히 비운 그릇 앞에서 만족하기’의 일반적인 식사의 순서,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식사량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어떤 속류영웅적인 면모를 발견된다. 일반인들에겐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에 도전해서 시련을 극복하고 서사를 긍정적으로 성취하는 영웅서사의 흔한 구조가 먹방에서 재발견된다. 거기서 대중의 소망은 충족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서인가?

어쩌면 현대인이 거식증에 걸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더 이상 즐겁게 소화할 수 없는, 다시 말해 먹는다는 행위에 이미 삽화되어 있는 사회적인 표징,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삶의 영위의 불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식증에서 뚜렷이 구분되는, 식욕의 발생과 신체적 거부는 단순히 몸의 사실성이라는 이데올로기 차원의 진실의 간언을 넘어선다. 주체는 먹기를 욕망함에도 불구하고 충족에 실패한다. 그가 섭취하고 소화시켜 동화되어야 하는 사회의 질서는 먹방러들의 식사량만큼 거대해서 넘볼 수가 없다. 따라서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것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만족의 일시적 해결이다. 현실이 부과하는 압력을 먹방으로 치환하여 해결하는 은유의 공정이 작동한다. 당신은 먹어야(받아들여야) 한다. 음식을 삼켜 소화하듯이 세계의 질서를 내면으로 융화하여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당신에겐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세계는 당신에게 그것을 받아들이길 요구한다. 그 고도로 추상적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주체의 욕구는 구강기의 수준까지 퇴보하여 단순화된다. 구강기의 욕망하는 아이의 상태에선 세계의 요구에 부응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MBC <나 혼자 산다>의 한 장면, 출처

이를 반증하듯 이 세계에 출생은 없고 배설만 있다. 질은 폐쇄되고 항문만 열리는, 초경 이전으로 퇴행한 세계. 인간적 순환과 재생산이 꽉 막힌 세계. 영양의 선택과 배제를 통해 주체 밖으로 내던져지는 불필요의 총화인 대변처럼 불필요한 잉여만 나뒹구는 세계. 출산의 불가능이 거시적으로는 세계의 불가능이듯이 신체 수준에서 거부되는 질서들의 다단한 표현들. 그럼에도 상황을 부정하고 백일몽적으로 현재를 타파할 대안은 즉시적인 이미지의 호출과 열광 속에서 이루어진다. 절망적인 현상태를 묵과하기 위한 대리자가 있다면 단연코 그것은 먹방이다. 먹방러들은 시청자들이 못 다한 욕망을 보란 듯이 성공시키면서 세계를 지탱하는 아틀라스이다. 그렇기에 먹뱉은 또한 강력한 논란거리이다. 진실소진의 세계에서 먹는 양의 진실성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허기만큼을 더해 대신 섭취할 존재들이 그 역능을 갖지 못하는 건 중대한 위반거리이다. 세상은 나에게 분명히 먹고 마시며 또한 즐기라고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그들이 부른 초인이 맥을 못 춘다는 것은 아찔한 상황이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에 국한되지 않고 그 행위 자체로 재화를 벌어들이는 신자유주의 정언명령의 총아이다. 결국 시청자들은 끝끝내 만족할 수 없는 아귀의 공허 속에서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먹을 돈이 없다.) 속류 샤먼들의 제의를 관람하고 그 안으로 불투명하게 통합되는 객체로 전락한다. 너도나도 처먹는 것에만 몰두하는 세계는 그렇게 탄생한다.

먹방러들은 자신들이 감히 체현할 수 없는 사회의 질서를 성공적으로 시현하는 존재들이기에 오늘날의 한 단면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먹방은 비극적으로 획득된 인기이다. 이내 시청자들은 세계와 원만히 동화되고 싶은 프티부르주아적 요구와 그것의 불가능을 필연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하며 자신의 알 수 없는 욕망 주위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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