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은_미술비평,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ㅠㅠ

오정은

비 오는 어느 날,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좌석에 앉아 ‘미술비평’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예술인이 된 이후, 비평은 이제 생계를 위한 거의 절대적인 도구가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미술비평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는 없지만, 글을 씀으로 인해서 이따금 돈을 벌고 드물지만 가끔 문화예술계에 소개되고 있음은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활동의 지속성을 보장한다든가 무언가 낙관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소개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작가, 비평가, 기획자, 리뷰어, 연구자, 강사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를 때 그것이 곧 그때 상황에 비추어지는 내 모습이려니 했다. 그것은 그들이 담당하는 사업에 필요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했고, 혹자가 나름으로 품었을 기대 수준이 얼마간 충족돼 부여받은 예우의 훈장 같은 것, 혹은 친교를 위한 일시적이며 임시적인 호칭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독서왕 선발대회’에서 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의 내 이름은 독서왕이었다. 학교에서 딱히 책을 많이 읽은 기억이 없지만, 준다는 상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자격이 의심되니 수상을 정중히 거절하겠다는 입장을 표할 만큼 머리가 크지 않았었다. 나는 얼떨결에 상을 받고 내가 왜 독서왕인가를 사뭇 생각해보았다. 당시 존재했던 다른 상들(일기쓰기 상, 독후감 상, 시화 그리기 상, 과학 상상 포스터 그리기 상, 모형 비행기 만들기 상 등)하고 다르게 ‘독서왕’은 과제도 경쟁도 없었고 따라서 수상기준도 알 수 없던 거라 내심 의아했던 것 같다. 교내 어린이 독서왕을 선발하라는 교육감이나 교장 선생님의 사업 지침에 황급히 수상자를 물색해야 했던 담임 선생님의 시선이 말수가 적고 순응적이어서 왠지 독서왕의 이미지를 가진 나에게 꽂혔을 것이다-라고 나름의 추리를 해보았다. 이후에도 나는 바른 생활 어린이 상이라든지 근면상이라든지 하는 이름의 수상 이력을 추가하며 내가 상상한 가설에 확신을 심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인 데다 친구들에게 먼저 장난을 걸 용기가 없어서 순종적이고 성실하게 보였을 뿐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나는 수업시간에 떠들고 교복을 줄이고 머리를 탈색하고 학교 담을 넘고 조회·종례를 빼먹고 하면서 비로소 교사와 나 사이에 심어졌던 수여자-수상자의 관계로부터 달아날 수 있었다.

버스 차창에 대롱대롱 맺혀 있다가 주위의 다른 빗방울과 합쳐져 부피가 커지고 무거워지면 아래로 또르륵 떨어지는 빗물을 보다가 문득, 미술비평에서 미술과 비평의 관계가 저렇게 물과 유리 같은 불수용성의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미술의 이미지와 현상을 글로 옮겨다 해석하고 쓰는 비평은 언제나 미술에 대해서 타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동떨어진 외부인은 아니고, 미술계에 유리막을 놓고 관찰하는 타자. 서로 간의 영역이 다르지만 투명하게 서로를 들여다본달까. 그러나 비평은 그렇게 보는 것으로만 그치면 안 되고 텍스트 생산을 함으로써 미술계에 읽혀지고 회자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유명한 시구는 어디에나 적용된다.

어떤 형식의 글을 따를까, 무엇을 인용하며 얼마만큼의 분량으로 쓸까, 글 쓰는 작법과 투고할 매체를 고민한 흔적, 그리고 그 결과가 세상에 유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깃든 심정의 축축함은 유리막에 막혀서 전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의 사사롭고 민감한 사정이나 치부는 볼 필요도 없고 보는 것이 예의도 아닌 사회의 불문율 가지 같기도 했다.

Bas Jan Ader, I’m too sad to tell you, 1970, 사진출처: 링크

​나는 최근에 읽은 두 권의 미술비평서 신작-『다공예술』(강수미 저, 글항아리, 2020), 『태도가 작품이 될 때』(박보나 저, 바다출판사,2019)-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미술가 바스 얀 아델(Bas Jan Ader, 1942~1975)의 동일한 퍼포먼스 작업이 언급된 사례를 봤다. 작가 자신의 우는 얼굴과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I’m too sad to tell you)”라고 쓰인 손글씨가 있는 흑백사진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I’m too sad to tell you)>(1970)을 본문 도판으로 실은 각 책의 저자는 저마다 현대미술의 비물질성과 실존적 작업을 말하기 위해 아델의 작업을 소개했다. 본래 영상으로 제작된 이 작업은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작가는 멀쩡히 길을 걷다가, 자전거를 타고 잘 가다가, 나무 위에 뜻 없이 매달려 있다가, 지붕 위에 반듯이 누워 있다가 강물이나 땅바닥으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Fall>연작 등 지속적인 신체 퍼포먼스 작업을 수행했다. 이후 아델은 <기적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miraculous)>(1975)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혼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려다 그대로 실종되어 미술사의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아니, 그의 퍼포먼스는 작가의 생명이라는 최후의 것까지 비평의 재료로 내놓으면서 미술사에 항구적인 영감을 주었다.

요절한 천재 미술가로 불리는 박이소(1957~2004),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1922~1973), 베르나르 뷔페(1928~1999), 마크 로스코(1903~1970), 잔 에비테른(1898~1920),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끊어낸 자기네들 목숨이 이후 그들을 수식하는 미술계 수사 어구를 만들고 작가론을 기술하는 문맥과 문체 사이를 타고 흐르는 감각의 색채를 결정짓듯이. 한 손으로 배의 조타를 잡고 패기 넘치게 바다를 향해 가는 바스 얀 아델의 최후의 흑백 사진은 그에 관한 비평이 전제할 이미지를 단적으로 축약하고, 예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Ed Atkins, Good man, 2017, 사진: 오정은

동시대 글로벌 미술계의 촉망 속에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백남준 아트센터 기획전 《울렁거리고 일렁거리는》(2018.3.22~6.24) 에 포함된 <쉭 소리를 내는 자>(2015)를 통해 알려진 바 있는 영국의 젊은 미디어 아티스트 에드 아킨스(Ed Akins, 1982~)는 컴퓨터 모션 그래픽을 이용한 아바타와 에니메이션 영상으로 독특한 미감의 작품세계를 구축해가는 중이다. 2017년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오래된 음식(Old Food)》에서 보여진 이후, 2019년 제 58회 베니스 비엔날레 아르제날에 초청되어 재상영된 16분짜리 영상 <좋은 사람(Good man)>(2017)은 언캐니 밸리를 자극하는 의문의 수도승과 소년, 아기가 번갈아 가며 등장해 화면을 응시하며 구슬프게 눈물을 흘리고 소리 내 운다. 비가 내리는 어둠 속 미지의 공간을 배경으로 “선생님, 누가 다 이들을 죽였나요?(Sir, who is all the dead?)” 라고 놀라 절규하는 소년의 눈물과 외침도 영상의 모호한 서사를 명쾌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인간을 형상화한 이 가공의 캐릭터가 우리를 보고 흘리는 눈물은 생명을 가볍게 비꼬는 것인가, 아니면 엄중하게 동정하거나 찬탄하는 것인가? 소년이 죽음을 책망하며 질문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인간? 신?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1966~)은 『스크린의 추방자들』(2016)에서 이미지를 상품의 하나로 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디지털 이미지의 멍은 자신의 자글자글한 글리치와 픽셀화된 아티팩트이고, 산산조각나고, 심문과 조사의 대상이 된다. 도난당하고 잘리고 편집되고 재전용된다. 그들은 구매되고 판매되고 대여된다. 조작되고 변질된다. 매도되고 숭배된다. 이미지에 참여함은 곧 이 모든 것에 참여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들 이미지를 비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누가 다 이들을 죽였’는지 확증할 수 없는 주체의 존재와 사건의 미스터리 속에서 단지 모종의 공포와 슬픔의 이미지만이 공감의 여과대를 쉽게 통과해가고 있다. 그것은 불수의적인 신체 반응이며 무성 상태로 이루어진다.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I’m too sad to tell you).’ 그런데 나는 여기에 어떤 말을 더 부착해 이를 전유하고 설명하여 해석하려 드는가?

두 달 반 동안의 북대서양 횡단을 목표 삼기에 무릇 낭만적으로는 보이나 무모한 것이 자명한 4미터 크기 포켓 크루저 ‘Guppy 13’과 청년 바스 얀 아델의 마지막 이미지는 오늘날 다큐멘터리에 취해지고 있는 향락을 더하면서 예술가의 죽음을 미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과연 인간의 죽음마저도 성공한 미술로 풀이·거론되는 것이 온당할까? 그런 의미에서 당사자의 생존과 직결된 작가론에 쓰이는 찬사는 흡사 경솔하고, 위험한 것은 아닌가? 누가 미술가의 죽음을 성공에 이르게 하였는가? 이미지? 비평?

나는 이 질문에 선뜻 답을 내놓기보다 유예하는 의미로, 바스 얀 아델을 연구한 안지산의 회화와 박보나의 글귀를 아래에 순서대로 제시해둔다.

필자가 아르코미술관 특별전 《관계적 시간》(2016)에서 직접 촬영한 안지산 작가의 <잔잔한 물결에서의 삶>의 일부

바스 얀 아더르의 기존 제도에 대한 거부와 도전은 그의 실종으로 완성된다. 아더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이로 알려진 서른셋에 ‘기적을 찾기 위해’ 떠났다. (…) 기적을 찾겠다는 내용의 제목, 생사를 알 수 없는 작가의 실종은 수수께끼처럼 남아 작업의 결말을 유희적으로 열어놓는다. 이 모든 것이 작가가 계획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면, 실종은 실패가 아니라 작업의 성공을 의미할 것이다.” -박보나, 『태도가 작품이 될 때』, pp.19-20.

한편, 버스 안의 나는 달리는 차의 속력을 따라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파노라마 풍경을 넋을 놓고 보다가, 수평으로 흐르는 그것의 전개와는 다르게 수직으로 가해지는 빗방울의 움직임에 주목해 보았다. 하나의 창문, 한 화각 안에 보이는 무빙 이미지의 서로 다른 방향성과 상이한 속도감은 중첩된 다채널 영상의 실사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망중한의 변화하는 이미지를 보면서는 자연스레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된다.

2020 서울사진축제 《보고 싶어서》(2020.7.14~8.16,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인상 깊게 본 함혜경의 작업 <나의 첫사랑>(2017)은 인적 없는 바다에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모습, 물이 빠지고 한적하게 햇볕에 몸을 말리는 수영장의 타일 바닥, 반짝이는 백사장 같은 사진과 영어 독백 나레이션 사운드가 재생되는 약 11분 길이 영상이다. 영사기를 통해 화면에 투사되는 서정적 푸티지(footage) 위로, 한글로 번역된 문학체의 나레이션 자막이 겹쳐진다. 새삼스러운 발견이지만, 이미지는 서사와 엮이기를 선호하는 것 같다. 함혜경이 이들 사진에 첨가한 가공된 노스텔지어적 이야기는 캘리그래피가 있는 그림엽서처럼 접목되어 작품의 영상미를 이루고 있었다.

울고 있는 남성의 얼굴이 프린트된 사진의 오른편에 비스듬한 기울기로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I’m too sad to tell you)’라고 쓴 아델의 서사에 대한 충동은 미술에서 그다지 이례적인 경우가 아니다. 비록 작가의 황망한 실종으로 끝이 났지만, 그가 계획한 마지막 수행작업 <기적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miraculous)>를 의미 있게 한 것도 그가 작업을 예고하며 부여해둔 서사적 장치에 의해서였다. 픽션과 넌픽션을 오가며 포스트 프로덕션을 수행하는 에드 에킨스는 이러한 서사적 장치에 보다 두터우면서도 비규칙적인 레이어를 쌓아서 관람자로 하여금 혼란과 혼성을 지각하게끔 한다. 그것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같은 비평가가 에드 에킨스를 동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지목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Power 100」, 『ArtReview』, 2016).

이에 증명이라도 하듯 에킨스는 2015년 맨체스터 국제 축제(Manchester International Festival)에서 열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대담에서 모션 캡처 카메라를 활용해 자신과 오브리스트를 3D 아바타 소년 캐릭터로 구현해 실시간 움직임으로 보여주며 특이 상황을 연출했다. 대담 중인 둘의 목소리는 그들 머리 위에 떠있는 3D아바타 캐릭터의 더빙판이 되어 있었다. 에킨스의 이 같은 소위 퍼포먼스는 아티스트-비평가 토크의 일반적 상황 이미지를 바꾸어 놓는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코로나19 전염의 공포가 전세계에 확산된 오늘에 와서는 비대면 상황을 다루는 익숙한 범주 중 하나로 제시될 아이디어로 보인다.

Ed Atkins in conversation with Hans Ulrich Obrist, MIF15 YouTube영상에서 캡처

이 글을 마치며, 나는 다시금 ‘미술비평’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미술’과 ‘비평’은 사이에 유리창 같은 경계를 두고 있지만, 친연관계인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 상보하고 접합되는 이상 둘은 서로를 꾸준히 필요로 하며 공생해 갈 것이 분명하다.

도상과 알레고리, 은유와 상징을 함유한 이미지가 빗물처럼 유리창에 붙어 맺혀 있다가 주위의 다른 이미지와 합쳐져 부피가 커지고 무거워지면 아래로 떨어져 또르륵 사멸해가는 것이 보인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창문에 습기가 서려 축축해지면 나는 그 위에다 무어라 글자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글은 실종될 위험을 무릅쓰고 미술로 항해하는 비평, 아니 나와 미술의 관계로 진전될 수 있을까? 아아 이제 더는,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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