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생쥐와 인간은 뾰족한 수가 없다┃유태영: 그날, 문을 열다

유태영, ⟪그날, 문을 열다⟫ 앨범표지, 미러볼뮤직/시서음률, 2019, 사진출처

1
몇 번이나 몽상을 했다.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에 그때 내가 그 연락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때 훼방을 놓았던 그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혹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이렇게 했거나 하지 않았더라면. 이쪽을 선택하는 대신에 저쪽을 선택했더라면. 그리고 그 시점에서 물러났더라면. ‘만약’의 층위는 나를 꼴사납도록 만드는 노도치는 이 생에 애달피 움켜쥘 수 있는 닻이 되어준다. 그러나 한사코 나는 결과 앞으로 흘러와 그것과 함께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깊은 고민이 만든 일이었든, 얕은 생각이 주선한 일이었든 돌이켜보면 어떤 순간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는 일은 드물었다. 단 하나의 선택이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은 ‘사실’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건은 ‘그냥’, ‘원래’ 일어난다. 아무리 추하고 악취가 풍긴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곱씹으며 음미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찌뿌둥함과 질척함을 느끼는 이 몸에서 ‘연속’해야 한다.

유태영의 《그날, 문을 열다》를 듣고서 매료되거나 무너져 내린다면, 그것은 과오를 범한 우리에게 돌이킬 수 있다거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하는 까닭에서는 아니다. 외려 그는 그런 종류의 희망이란 이미 고갈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당신을 무너뜨린다. 아프고 서글픈 날들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았고, 그 위에 외로울 일은 지속해 겹쳐질 것이고, 또 그 위에 믿음이 좌절되는 일이 쌓일 것이다. 우리는 어디쯤에서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서 걸어왔다. 앨범에 적힌 대로 빛은 “부서진” 모양으로, 삶은 “조각난 혹은 조각된” 모양으로 우리는 영영 나서야 한다. 그러나 그는 배후를 증명해내는 것으로, 고갈된 희망 앞에서는 휘청이지만 삶 앞에서는 휘청이지 않게 해준다. 우리에게는 희망의 균등한 고갈과는 반대로, 이렇게 될 줄 알고서도, “부서진” 모양으로도, “조각난 혹은 조각된” 채로도 삶을 끊지 않고 연속해온 역능과 역량이 있다는 것. 그런 한에서 《그날, 문을 열다》는 삶을 위한 찬가다. 시작과 새날 없이도 삶을 연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에 우리는 나서왔고,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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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문을 열다》는 다른 의미로 시곡詩曲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의미가 온전히 이해되는 일에 팽배한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그 절박함을 안고, 이미지가 도달하지 못할 이해를 위해 문장을, 문장이 도달하지 못할 의미를 위해 이미지를 모두 동원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 시화詩畫라면, 이 앨범의 곡들은 멜로디가 도달하지 못할 의미와 이해를 위해 문장을 동원한다. 이는 곡들의 전달이 미비하다는 의미도, 의미가 미약하다는 뜻도 아니다. 그만큼 전달과 의미에 진심이면서 절박하다는 의미다. 적힌 문장을 유태영이 시로 가리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반복되는 어구 속에 운율이 존재하고—심지어 lit, bright, little, lights처럼 영문으로 옮긴 것에서도— 시각에서부터 촉각을 종횡하는 심상이 존재하는 까닭이며, 무엇보다 늘 여의치 않음이 삶을 이루더라도 연속을 감내하노라는 요망과 선언이 정확함에 이르기 위해서 “조금 더 가자, /아직 제 색을 찾지 못한 검은 나무 한 그루가/붉고 푸른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라며 필사적으로 문장을 에두르는 까닭이다.

첫 번째 트랙인 ⟨달, 빛 바다 I⟩에서 “어두운 나의 방을 밝힌 건 (…) 바다 위에 부서진 달, 아주 작은 빛의 무리였다.”고 말해질 때 빛은 소진되거나 여지없이 깨어져 가까스로 빛이라고 판명될 뿐이다. 태양에서 유출된 빛은 달에 가닿을 때 한 번 조각나고, 대기를 지나치면서 두 번 소진되며, 마지막으로 바다 위에 놓이면서 부서진다. 그러나 빛은 어두운 ‘나’의 방을 비추는 데 실수하지 않는다. 노도 치는 밤바다라면 그것은 더욱 산란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번도 빛이기를 저어하거나 주저한 적이 없다. 이 빛에게는 태양이라는 근원으로 복원될 일도, 산란에서 다시 찬란으로 옮겨질 일도 없지만 빛은 빛임을—비춤을— 연속한다. 그는 소진되고 부서진 만큼의 나약함을 지녔지만, 그 나약함 이후에도 몸을 그리고 그 몸이 나서야 하는 삶을 연속할 만큼의 역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이 빛을 눈에 들여오기 위해서는 앞서 울리는 강한 건반 소리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 그 큰 소리는 빛이 조각나는 파성이거나 폭음이다. 그것은 순간 들리고 나면 그뿐 지속되지 않는다. 외려 주목해야 할 것은 곡의 먼 곳에서 일렁임으로 파장으로 멀리서 끝끝내 지속되는 빛의 삶이다. 곡이 끝날 때까지 그것은 내내 약해지지만, 내내 끝나지 않는다.

⟨시간의 조각들⟩의 멜로디는 끈적인다. 그것이 야릇하거나 얄궂은 의미로 끈적이는 것은 아니다. 이 끈적임은 “조각난 혹은 조각된 시간”을 어떻게든 접합해 보려는 것에서 기인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질료에 적합한 접착제는 존재하지 않기에, 시도한 섣부른 접착은 그저 끈적임이란 미련만을 남긴다. 붙이고 부치어 보지만 그 지난한 순간은 심란함만을 사주한다. 이 위태만큼 현絃은 건반에 가세한다. 그리고 반대로 현이 사라진 곡의 후반부는 그 위태로움이 지나간 자리를 내보인다. 극복한 것도 이겨낸 것도 아니다. 그저 어찌할 수 없기에 그것을 통과하고 지나간 것이며 위태로움은 그 자리에 영 있다. 그러나 이긴 것도 아닌데 피아노의 음률은 처음과는 다르지만, 처음처럼 지속한다. 그것은 이기거나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끊어내고 도망치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조각들 위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하자. 우리는 시간을 조각내어 버렸다. 그리고 조각을 접합하려는 모든 시도는 수포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비장한 것을 조각냈음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것이 “조각들 위에 살고 있다.” 이를 어떻게 역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간은 가차없이 조각나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고만 만다. 이기거나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인간은 패배를 줄곧 최선을 다해 지연시키는 것으로써 그 역량을 드러낸다. 의미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한 결말로 거리에 또 골목에 내던져 나뒹군다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의미가 존재하지 않음에 죽도록 화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의미’가 승리를 통해 전리품처럼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승리할 수 없는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가리킨다. 삶이란 의미 없음에 싸우는 순간에만 의미를 갖는다. 이는 카뮈가 말한 부조리와 다투는 인간을 서투르게 줄인 것이기도 하다.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카뮈의 발걸음⟩의 음률이 심술궂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음률 속의 한 사람은 고민하는 것 같다. 오르막을 전부 오른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시 내려와야 한다. 산을 오름이 산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며, 다시 내려온다는 점에서 그는 어떤 상태나 지위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산을 오르내리며 안게 된 켜켜한 피로를 그는 지니고 다시 어딘가로 나서야만 한다. 여기엔 이 피로만큼의 조그만 의미도 없다. 음률 속에선 이 균형이 맞지 않는 진자가 진동하며 흔들린다. 그러니 걸음은 비틀릴 수밖에 없다. 유태영은 여기에 “운명은 늘 삶과 죽음, 그 사이의 담장길을 걷는다.”고 적었다. 운명이 삶과 죽음 사이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걷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이다. 운명은 그저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이유라는 의미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가혹하지만 인간은 연속을 포기하지 않는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른 체함으로써 무의미에 화해하지 않으며, 외려 운명을 선택한 체함으로써 운명을 제힘으로 만든다. “태양이 유독 뜨거웠던 탓일까. /그는 아득히 비틀거리며, /운명의 담장길을 따라 걸었다.” 작열은 걸음을 멈출 이유이지 걸음을 연속할 까닭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유태영은 “뜨거웠던 탓”에 “걸었다”고 말한다. 운명은 심술궂다. 하지만 누군가의 발걸음은 더구나 심술궂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이 시험과 시련을 겪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때의 제자리란 고향, 가족, 친구 등이 있는 자리일 것이다. 그들 중 여럿은, 지난날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만이 지금의 행복을 만들었음을, 가치있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보통의 서사는 그렇게 끝나지만, 난 그 서사 이후에 있을 염려를 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후에 때때로 그 고통의 순간들로 꾸며진 꿈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깨지 않을까, 지난날의 상처가 후유증으로 남지 않았을까, 그 순간들이 가치와 행복을 만들었다기보다 차라리 그 순간들이 없는 것이 가장 최선의 행복이 아니었을까하는 염려들이었다. 그러나 ⟨그날, 문을 열다⟩는, 시작에는 여백뿐인 흰 도화지를 기점으로 갖지 않는 ‘시작’도 있음을 알린다.

흰 도화지가 되돌리고 싶은 것들로 물들어 가득차게 된다면 그러나 그러고도 여전히 연속해야 한다면, 그것을 검은 크레용으로 채운 뒤 긁어내는 시작도 있을 것이다. “열려 있는 문을 닫고, 닫혀 있는 문을 열고”라는 문장에서 문은 사실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닫은 문을 스스로가 열 때, 그는 같은 곳을 다르게 걸을 수 있다. “걷고 또 걸”은 이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면, 살고 또 살아온 이가 다시 살아낸다면 즉 삶을 연속한다면 그 시작은 되돌리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지나온 것들을 긁어내 다르게 걷는 일일 것이다. 가련하고 가엾어 보이는 이 음률이 은밀히 확약하는 것은 이런 시작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작을 가능케 한 역능이기도 하다.

3
우산으로 막을 수 없는 비가 세차게 몰아칠 때마다 손은 분주해지고 발은 움츠러든다. 어떻게서든 발을 적시지 않고자 하지만 그런 일은 피할 수 없다. 이내 양말까지 흥건히 젖어 발은 더없이 축축해진다. 생쥐와 인간은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럴 때면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더는 빗물이 튀기거나 흙탕물에 들어가는 일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해방감이다. 비에 젖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꺾여 휘청인 이후에도, 물초한 그 길을 걷는 일은 도대체 휘청이지 않는다. 나는 이 역설적인 해방감이 유태영이 《그날, 문을 열다》에서 전하고자 했던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삶 전체의 무용無用을 완성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파산하지 않을 것이다. 무용은, 그 무의미의 깨달음은 외려 삶에 지나칠 만큼 열광하며 삶에 뛰어들게 할 것이다. 인간의 역능과 역량은 승리와 패배에 달려 있지 않다. 승리를 얻기까지의 켜켜이 쌓인 피로에도, 패배로부터의 절망에도, 그리고 승리와 패배에 모두 운명지어진 무의미에도, 단념일랑은 도무지 허비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연속해 나설 수 있음에 우리의 역능과 역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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