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_어둠 속의 대화 관람기 : 당신의 감각에 질문을 던지는 하루

서운

사진촬영_서운

비가 끝도 없이 내리는 하루를 50일 동안 당연하게 살았다. 비가 오는 풍경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며 흘려보냈는데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자 빗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빗물이 창을 통과해 내 얼굴에 뿌려졌으며 비릿한 냄새를 동반했다. 비는 눈을 지나쳐 느낌으로 왔으며 귀와 코에 스며들어 몸의 감각을 자극했다. 바이러스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거나 혹은 우리와 함께 가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실체는 보이지 않고 현상만 보인다. 그러다 문득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만 믿는다’라고 했지만 보이는 것이면 다 믿어도 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몸의 감각에는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닌데 일부러 다른 감각의 기능을 사용하려고 할 때 소심해지고 두려워지고 불안해진다. 비가 오는 풍경을 보는 것에만 멈춰버렸을까. 어릴 때처럼 빗줄기 사이로 뛰어다니거나 손바닥으로 비를 움켜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각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과장되고 있다. 눈의 쓸모가 더 강해졌다. 보이지 않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화의 단어들은 허공을 떠돌아다닌다. 마스크로 가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벽을 한 번 치고 되돌아오는 느낌이다. ‘대화’는 분절되고 있다. ‘어둠’의 이미지는 세계를 온통 불안한 빛으로 감싸고 있다.

날마다 내리던 비가 멈춘 어느 날, 같이 가자던 친구는 오지 않았다. 그 많던 카페는 어디에 있는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왔던 길을 내려가기도 했다. 여러 번 왔던 길이었지만 주위를 둘러본 경험이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핸드폰 지도앱을 보고 걷거나 정면만을 보고 걸었다. 눈을 감고 잠시 걸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가는 발은 눈을 가린 순간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는다. 방향을 찾기 위해 두 손을 소심하게 휘적거린다. 걸리는 것이 없지만 걸리는 것이 꼭 나올 것 같았다. 눈을 제외한 감각에 의지하기보다는 눈을 사용할 수 없는 불편함이 먼저 다가왔다. 그만큼 나는 눈에 의지했고 눈의 방향으로 살아왔다. 눈을 뜨고 전시장으로 걸어가면서 두리번거렸다. 오랜만이었던 ‘두리번두리번’의 경험이 평범한 일상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보이지 않게 아주 사소한 균열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 눈은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 사이 인공눈물을 수시로 눈에 넣으며 깜박거렸다. 따뜻한 빛에 잠시 멍했다.

<어둠 속의 대화>는 체험전시였다. ‘전시’(展示)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어둠’과 ‘전시’와 ‘대화’는 어울리지 않은 단어였다. 하필 왜 전시였을까. 보여주기 위해 빛은 어딘가에서 발현되어야 했다. 본다는 것은 눈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의 무의식 속 검열자는 그것을 무시했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앉아있다. ‘본다’는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 온몸의 감각은 곤두선다. 전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사람들만 관람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의자에 앉아 들어갈 때를 기다리는 시간은 더뎠다.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시계를 확인하다가 문밖의 빛을 한동안 쳐다보기도 했다. 나와 같은 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곁눈질해가며 낯섦을 참고 있다. 낯선 상황은 낯선 공기와 함께 온다. 그리고 긴장한다. 이 긴장이라는 감각은 몸속 장기들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가령 심장이 두근거리고 배가 꾸륵거리는 – 눈 둘 곳 없다는 말이 익숙해질 무렵 연인끼리 친구끼리 부부끼리 그리고 다른 한 사람, 여덟 명 관람자는 암막 커튼 속 어둠으로 들어갔다. 눈에 의지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눈의 사용을 차단하는 순간 서로의 감각에 의지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전시 관람을 하기 전 전시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SNS를 검색했다. 전시(사실 전시인지 공연인지 여전히 생각 중이다.)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다. 전시에 대한 후기를 읽으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읽은 어떤 글에서도 중요한 스포일러는 드러나지 않았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작용한 것일까. 나는 이것을 함께하는 작은 연대의 끈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연대에 대해 조금 흥분했고 즐거웠으며 소리 없는 대화의 결정에 대해 동의했다. 감각의 연대는 시각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린다.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축축하고 우툴두툴한 벽을 나의 왼손바닥이 따라간다. 만지거나 느낌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눈을 뜨거나 뜨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다. ‘빛은 결코 어둠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니체의 말이 생각났다. 내 손이 닿는 앞사람의 어깨가 나의 발걸음을 안내해 주는 신호기 같았다. 스치는 옷깃의 감촉이 따뜻했다. 보다, 듣다, 맛보다, 맡다, 느끼다는 어떤 형식으로든 자체로서 독립적이다. 이 독립된 감각이, 당신의 감촉과 나의 감촉이 어떤 느낌으로만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입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고 귀로 듣는 시간이 오랜 과거가 될지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냄새의 기억들이 늘어날 것이다. 나와 같은 나와 다른 당신들을 설명할 어떤 이미지가 결국 사라질 수 있다. 다만, 그 시간을 늦추고 싶다. 나와 당신의 감각을 이대로 방치하고 싶지 않다. 100분 동안 내가 느끼고 경험했던 감각의 이미지가 단지 ‘보는’ 전시가 아니었음을 기억하고 싶다. 이 경험은 로드마스터와 함께하는 모든 감각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를 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소소한 기억들과의 조용한 대화였다. 아침에 들고나왔던 우산은 여전히 내 손에 있고, 구름은 해를 가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_황인숙 시인의 시 <말의 힘> 중에서

시인은 말의 힘을 믿는다. 시각이 아닌 후각으로, 미각으로, 청각으로, 촉각으로 이야기한다. 어둠 속에서 함께 느꼈던 시각을 뺀 다른 감각과 만남은 여러 날 시간이 지나간 후 다시 기억 속에서 꺼내고 있다. 많은 시간을 눈에 할애하고 있고 끊임없이 내리던 비는 사라졌고 뜨거운 햇빛이 뿌려지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인공눈물은 내 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난 100분 동안 내게 온 많은 감각과의 대화를 잃고 싶지 않지만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둠 속의 대화>는 여전히 소수의 움직임으로 서로 연대하며 진행되고 있다. 함께 가거나 혼자 가거나 서로에게 의지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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