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폐허의 연인┃허단비: 영혼의 발돋움

허단비, ⟨죽음 새로운 시작⟩, 130.3×162.2, oil on canvas, 2020

1
희망은 절망에 비해서 아름답지 않다. 차라리 나는, 연락한다는 말보다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기대했었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보다 거절이 이미 도착했으면 했었고, 그러다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북돋움 대신 남은 것은 불행뿐이라는 선고를 기다렸을 처지였다. 그저 버티지 않고 기대기만 하면, 중력이 이끄는 대로 편히 침잠할 수 있는 그런 평화와 안온이 거기 절망에 있었다. 그것을 마다했던 것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까닭은 아니었다. 도리어 아름답지 않은 것은 희망이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증오스러운 것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패배의 순간은 대부분 추함을 소복이 담고 말기에, 그것은 그 추함으로써 희망을 반드시 떠올리게 했다. 희망이 거기에 있어 기꺼이 포기하지 못했고, 울먹이며 처분을 기다릴 기회를 약탈당하고 말았다. 적은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청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못 하고 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내겐 내내 남는다. 평화와 안온이 그득한 아름다운 절망을 쥘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외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로, 강박적으로 희망에 진다.

이다지도 희망을 가진 것은 폐허에 더 가깝다. ‘가깝다’라고 한정할 수 있는 것은, 완성된 폐허라는 절망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 이룩에서 지체된 누추하고 더러운 희망을 존재가 손 쓸 수 없이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허단비의 ⟪영혼의 발돋움⟫(팔레 드 서울, 2020.09.08.-13.)에는 그렇게 늘 완성되지 못한 폐허가 있었다. 그의 작업은 ‘그저 폐허’라는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폐허 이전’이나 ‘폐허 직전’에 남아, 멀리서 절망을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립지만 아무래도 갈 수 없다. 작업의 배경을 “전쟁으로 무참히 버려진 공간”이라 소개하면서도, 그렇다고 절망에 편안히 포개지기엔 한 움큼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 한 움큼의 미약한 크기와 자리만큼의 희망이 고독히 남아있다. 무참이 버려진 것조차 여전히 삶을 보호하기 위해 벽과 지붕을 남겨두고 있으며, 노도 속에 잠기고도 다음의 식사를 준비하곤 볕이 들어올 커튼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런 탓이다. 희망이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줄 아는 이가 희망을 지키는 것은 아닐 테다. 희망이 절망보다 외롭고, 승복도 없이 패배가 힘인 줄 아는 자가 종신형 같은 희망에 오래도록 갇힌다.

허단비, ⟨암흑기 중의 희망⟩, 130.3×162.2, oil on canvas, 2020

2
매혹적인 것이 절망이라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저 반짝이고 찰랑이는 새는 도무지 절망의 방향에서 날아온 것이 아닐 수 없다. 사막의 먼지에 닿지 않고, 작열의 건조함에 물들지 않은, 그리고 폐허의 허물에도 할퀴어진 적 없는 이 새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폐허 같은 장소를 결국 ‘포기’하는 것이 되겠지만 허묾과 허무일랑 외면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폐허를 완성하지 못한 여실한 건조물 탓일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없었다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았다면, 그렇게 절망에 포개어 그것이 이끄는 곳으로 가겠다만은 지키는 것과 남아있는 것이 있어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허물어지고도 완전한 허무에 도착하지 못한, 바스락거리면서도 점성이 떠나지 않아 폐허가 완성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이 알력 때문에, ⟨암흑기 중의 희망⟩에서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우리는 도통 다 놓아버릴 수 없게 된다. 삶을 보호하던 삭막한 벽과 지붕은 외려 이 순간에 더욱 침구 같아 보인다. 여기 작은 모서리 하나조차도 곡선으로 되지 않은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다지도 솜으로 된 벽돌들은 무너진 뒤에도 오직 무너지지 않은 만큼 다시 삶을 보호하는 데 나설 수 있다고 중얼거린다. 찰랑이는 새가 잠시 머물 수 있는 것도 이 침구 때문일 것이다. 희망을 찾는 이가 만약 머무른 새를 보고 현혹된다면 돌들은, 그때 물을 것이다. 어째서 도처에 기승하는 희망을 두고, 여백보다 조그만 비애에 길을 찾으려 하냐고.

허단비, ⟨삶의 자리를 지키는 것⟩, 130.3×162.2, oil on canvas, 2020

⟨삶의 자리를 지키는 것⟩에서 방은 노도에 매달려 있다. 타락을 면하지 못한 존재가, 한 노인처럼 종말을 미리 고지받지 못 하는 일과 전나무로 된 배에 타지 못 하는 일은 섭리에 따른 것이다. 어느 면도 에두른 조수와 빈틈없는 풍우는 기꺼이 절망으로 손짓한다. 그러니 몸이 저 조수와 풍우가 될 때까지 힘을 모조리 빼고 중력에 포근히 기대기만 한다면 핑크빛 피 웅덩이 속으로 쉬이 또 편히 가라앉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절망의 웅덩이 속에선 공포도 불안도 차마 없어질 것이다. 섭리는 피치 못할 일이기에, 차라리 절망에 따스한 비애가 있다. 그러나 존재는 여직 안타까워 창막에 커튼을 칠 수 없다. 여태 부끄러워, 마주 본 의자를 치울 수 없다. 안타까운 이유는 이곳에 파란 번개가 치고도 이유 없이 햇볕이 나누어지는 까닭이고, 부끄러운 이유는 모든 단어가 날아가 버린 날에도 경전이 남아 있어 회개를 마치지 못한 까닭이다. 이것이 징벌이라면 징벌에 더 걸맞게 되기 위해서, 더 가혹하고 더 끔찍하여야 한다. 그러니 심판과 같은 일엔 따뜻한 절망으로 가지 못하도록 반드시 희망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만히 서 있지도 앉아있지도 못한 몸이 쉼 없이 들어서고 나간 의자엔 땀에 그을린 자욱이 가득하다. 죄의 부피는 벌로써 줄어들 수 있을 뿐이다. 용서와 화해가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 아픔을 준 자에게만 자유를 허락해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죄인은 희망이란 종신형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가장 확인된 종말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

허단비, ⟨나는 오늘 피었다 지는 이름 없는 꽃과 같네⟩, oil on canvas, 27.3×22.0cm, 2020

어떤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숭고함마저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을 지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시련에도 부서지지 않으며, 어떤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렇기에 믿음의 대상을 시련과 시험 속에 쉽게도 넣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에 관한 믿음은 종종 그것을 곤란에 베이게 한 후 피를 흘리도록 내버려 둔다. 외려 어떤 것이 나약하기만 하여 기어코 언젠가 사그라질 것이라는 파국과도 같은 믿음, 오직 그것이 영원을 말할 수 있다. 쉽게 부서질 대상 앞에서 존재는 그 나약함을 알기에 하염없이 지키는 데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폐허가 도리어 희망을 알리는 일은 이렇게 발생한다. ⟨나는 오늘 피었다 지는 이름 없는 꽃과 같네⟩에서, 꽃이란 내일이면 향기도 없이 져버릴 것임을 작가는 알고 있다. 그것의 숨은 차마 끝에 가닿기도 전에 쉬이 발길에, 바람에 꺾일 것이다. 이름을 붙였다면 이 짧은 시간 이후에도 그를 기억할 수 있겠지만, 그것마저도 허락치 않았기에 꽃은 기억에서마저도 위태롭다. 스스로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큼 시력은 힘을 잃어 대지의 일부만을, 창공의 일부만을 꽃은 그 곁에 두고 있다. 그런데 그런 꽃을 당신에게 준다. 영원한 사랑은 물론, 이 꽃만큼 아름다운 사랑을 약속하는 것도 아닌 채로 꽃을 바친다. 사랑하지 않게 될 거에요. 그러나 예정도 없이 없어질 그에게, 결국 기억에서마저도 녹아내릴 그에게 이 꽃을 준다. 그것을 알기에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서 그리고 단 하루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 벌罰처럼 떨리는 목소리. 그런 사랑만이 영원에 도착할 것이다.

3
허단비는 분명 “전쟁으로 무참히 버려진 공간 속 (…) 공중에 흩날리는 연은 죽음과 상실의 두려움을 한 걸음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적었지만 결국 ⟨죽음 새로운 시작⟩에 그렸던 ‘연’을 덧칠해 지우고 말았다. 그렇다면 연은 사라졌고, 위치를 잃은 흙과 돌뿐이 남았으니 “죽음과 상실의 두려움을 한 걸음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는 결국 포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연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장소는 연이 ‘띄워진’ 장소에서 —장래에— 연을 ‘띄울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한다. ⟨암흑기 중의 희망⟩이 그랬듯, 무너진 것들이 외려 침구처럼 보이는 까닭은 재해 뒤에도 연을 만들 이들과 띄울 수 있는 창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삭막함보다 사람이 남고, 공간보다 장소가 남았다는 것은 완성되지 못한 폐허가 간직한 역량을 드러낸다. 그러니 그가 폐허를 “슬프면서도 부드럽고 찬란하게 빛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무너진 곳에서 이질적이고 분리된 것으로써 희망을 발견하지 않았다. 이질적이고 분리된 것은 무너진 곳을 떠나거나, 그곳에 남은 것이 없다는 인정하고서야 찾아지는 것들이다. 떠나거나 남은 것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은 비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포기가 마련해주는 편안함이 곁들여 있다. 그 편안함을 외면하고 작가는 무너진 것이 도리어 희망이라 하려 한다.

그저 포기하고 마음껏 망가져 버릴 은총과도 같은 절망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희망은 아름답지 않다. 희망을 저버리는 일은 희망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희망을 갖는 일이 차라리 외로움과 참담함을 면치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곤 했다. 그러나 그 지난함을 한시도 모르려 하지 않기에 ⟪영혼의 발돋움⟫에는 더 무너지는 일 앞에서도, 그 추함을 보고서도, 외롭고 참담하다 하더라도 물러섬 없이 희망을 지켜내는 일이 전해진다. 이 발돋움이 몸이 아닌 영혼으로 이룩되는 까닭이란, 높아진 키만큼 보게될 기대 섞인 너머에 몸으로 느낄 쾌락도 행복도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들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미래를 믿지 않으면서도 종신형을 언도받으려 한다. 그리고 기꺼이 불행해지고자 한다. 그렇게 저버리는 일 없이 박해받으려 한다.

 


*참조
김승희, 「희망이 외롭다1」,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2012
신형철, 「희망은 종신형」,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문학동네, 2018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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