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로_I will have a glory about joke┃전보배, 송명진 2인전에 부쳐

이여로

1.
내가 거부하지 않은 이 물질 앞에서, 나는 상상과 기억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가 기억이라 부르는 말속에서, 나는 방향을 구분하지 못한다. 방향 감각의 상실을 선언하면서, 우리는 구분의 한 가지 방식을 포기한다.

‘못함’, ‘상실’, ‘포기’의 이어지는 선언들 다음에 나타난 것들은 덜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있다. 권리상으로만 존재하던 것들. <I had a joke about glory>가 만일 “had”에 묶여 일관된 방향성을 회복했다면, 그것은 퇴행운동일 것이다. 혹 전보배의 말처럼, 기꺼이 “기억이 된 상상”이 둘만의 심리적 경험의 애착으로, 애초에 어떤 구분도 마주침도 없이 접붙어 사적 영역의 굳은 유물로 드러났다면, 언저리에 놓인 그 시간을 향해 관객에게 권한 ‘상상’은 어색한 인사에 불과할 것이다.

<여름 한정,명진>,2020, Ceramics, wood, 39x30x5cm, 사진: 강민구

 

2.
무엇을 구분하고 있던 걸까? 기억 속에서 발굴된 어떤 날들을 전보배가 (세카이계セカイ系 라고 적어야 할 듯이) “세계”라고 부를 때, 그 말은 서문의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 “유리관” 안에 갇힌다. 송명진과 전보배가 일한다는 가구 공장의 도구가 발굴되어 있는 <여름 한정, 명진>.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 일의 세계가 들어와 있는 것은 1.에 따르면 딱히 모순된 것은 아니다.

                                       상상이 기억이 되는 때,
기억 속에서 발굴 된 어떤 날들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였다.
거울 속에서 “사실 나는 지금을 본 적이 있어”라고 말하면
“응, 차라리 알아듣지 못할 말이 편해.”라고 한다.
오늘 일어난 전생, 재현이 아닌 복원

전보배, 전시 서문에서

 

3.
기억은 완전히 변형시킬 각오를 하고 물질을 빌려온다. 물질 역시 기억을 빌어온다. 이 말은 약한 의미의 비유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질이 무엇을 빌어오고, 이미지가 무엇을 사유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해서 혹은 ‘새로운 곳’이라 불리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가짜 표상을 빌어 그저 ‘가기 위한’ 불가피한 언어사용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을 ‘진짜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 언제나 주의한 채로 따옴표를 쳐 놓아야 하는 이 언어 사용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위태롭고 흥미롭다.

<기억의 조각>,2020, Ceramic on panel,106×33.4cm, 사진: 강민구

 

4.
중국 속삭임이라고 불리는 놀이가 있다. 하나의 기억이 다른 기억의 등을 톡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그 기억은 다른 기억의 등을 찾아간다. 그 손가락의 속삭임을 어지럽게 헤매어 간다고 최초의 사물을 찾을 수는 없다. 기억 이전의 사물은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사물이라면 모든 기억은 사물이다. 이런 말장난은 1.에서 포기한 구분의 방식, 기억의 방향성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속삭임에 불과하지만 장난을 치는 까닭이 우리가 철이 덜 들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 마주치는 송명진의 <기억의 조각>은 1.에서 포기한 구분이 단지 무관심에 의한 물질로의 환원이나, 특정한 관심에 따른 심리적 재배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구분으로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작은 조각들의 집합이라는 형상의 배치가 암시하는 관념이라기보다, 그 위에 놓인 2019년의 작업과 함께 보아야 한다(6.에서 계속).

<Blue>, 2019, Acrylic, pen, charcoal and collage with ceramic on panel, 95×19.5cm, 사진: 강민구.

 

5.
전보배가 (4.에서 말한) 그 장난을 위하여, 방을 어지럽히듯 지난 6개월의 기억을 바닥에 흩트려 놓은 채로 송명진을 거듭 부르고(여름 한정, 명진), 고등학생 때에나 유행했을 인터넷 커뮤니티 ‘여시’의 기록을, 고전 건축 양식으로 절삭된 스티로폼 위에 도판화로 내보였을 때, “작업에도 글이 많아서, 전시 소개를 씨불이는 게” 싫다지만 홀로 도맡아 쓴 전시 서문에서 재현과 복원, 전생과 현세, 상상과 기억, 본 적 있다는 말과 알아듣지 못할 말의 편안함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때, 1.에서 말했던 포기를 보상받기 위한 반작용, 이항대립의 손쉬운 취향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이는 오히려 3.에서 언급한 따옴표의 안팎을 엿보고, 혹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붙여보는 놀이에 가깝다. 어떻게? 4.에서 송명진이 두 가지 구분을 하고 있다면 (즉, 포기한 구분과 시작한 구분) 전보배는 두 가지 복원을 하고 있다. 작가의 말은 또 다른 도판화 연작으로 복원될 예정이었지만, 실패하고 중단된 복원의 작업은 그 자체로 전시되고(거울 속에서), 중단된 적 없던 작업은 오히려 ‘중단된 작업’으로 소개된다(복원된 드로잉).

<거울 속에서>, 2020, Ceramics, hairpiece, mixed media, Dimension variable, 사진: 강민구

 

“파란,파랬던
기억의
여름의
조각.”

송명진,전시 서문에서.

 

6.
회화에서 시작된 화가의 작업은 그 질료에서부터 테세우스의 배처럼 변화해나간다. 세라믹을 파내고 목재 판넬 위에 붙이는 손의 감산과 가산으로 이어지는 이 변화는, 그러나 2019년의 작업인 <Blue>에서 형태적으로 유사한 근작 <기억의 조각>을 그냥 같이 걸어둬 버리는 일종의 무심함으로부터, 도자의 평면 위를 쫓아 회화를 이어 나가던 손이 도기라는 입체물 위로 곧장 넘어가는 모습은 본성상의 차이라는 알량한 불안감 없이, 1.에서 언급한 방향 감각의 상실에도 움직임은 계속된다는 것을(아니면 그런 감각이라는 것도 3.에서 언급한 언어 사용에 불과하다는 듯이. 송명진은 해마가 제거된 사람이 아닐까?) 보여준다. 전보배가 계속해서 ‘말하는 그 무엇’은 사실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바, 송명진은 이 숨겨진 괄호를 지우는 일에 과장되게 동참하기보다 기꺼이 드러내면서, 전시장의 벽면을 둘러싼 작업은 따옴표가 되어준다.

<Swim In The Red Pond>, 2020, Porcelain, 19.5×26.5cm, 사진: 강민구

송명진이 남긴 작가의 말은 얼핏 기억의 정서적 채색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나게 무서운(혹은 나만 미친 듯이 웃은 것일까?) 말이기도 하다. 5.에서 언급한 전보배의 작업이 그 내부를 둘러쌓을 때의 결말은 7.에서 이어진다.

 

7.
전보배가 말했다.

“2인전이 로맨틱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본인만의 생각인가요”
“아마도?”

뒤를 돌아 송명진에게 물어보았다.

“로맨틱했나요?”
“(곤란한 듯 웃음) 재밌기는 했는데”

그리고 내가 말했다.

“I will have a glory about joke”

 

 


참고문헌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박종원 역, 아카넷, 2005.
베르그송주의, 질 들뢰즈, 김재인 역, 문학과 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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