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영_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기까지’ -이정식 개인전 ‘이정식’ 관람기-

임현영

이정식의 세 번째 개인전 ‘이정식’. 작가의 이름을 딴 제목처럼 ‘이정식’전은 이정식이라는 사람에 관한 전시다. 2013년 HIV/AIDS 감염 사실을 공표한 이후로, 그는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 HIV 감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첫 번째 개인전 ≪nothing≫에서 작가는 감염인으로서 자기 몸이 자각하는 변화를 시각화-캔버스에 약가루 안료를 덧씌운다거나, 엽서 가득 복약 시간을 메모해둔다거나-함으로써 개인의 서사를 사회의 문제로 치환했고, 두 번째 개인전 ≪김무명≫에서는 ≪nothing≫에서 선보인 ‘자기중심적’ 작업의 연장선에서 다른 감염인들의 사적 경험을 감염인의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세 번째 개인전인 ‘이정식’전은 앞선 두 번의 전시에서 꾸준히 시도되었던 개인의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공공의 문제제기로 나아가는 경향과, 사회적 맥락만으로는 감히 규정될 수 없는 작가 개인의 정체성을 발굴하고자 하는 의도가 결합된 속성을 띤다. 작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집중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로 나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 선-개인에서 후-집단이라는 명백한 선후관계가 존재한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의 작품들은 작가 개인의 특수한 내러티브를 취하는 것 같으면서도 거대한 공동체 관계망 속 고착화된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공포를 해체하기 위한 ‘비(非)개인적’ 목적을 근본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정식’전은 작가의 ‘비개인적 자서전’이라는 모순적이면서도 정합적인 단어쌍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벽면 왼쪽 모서리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11개의 두상 군집들이다. <이정식11>(2020)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작가의 두상을 본뜬 가변설치물로 패션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의 넘버링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마르지엘라의 여러 라인 중 액세서리 라인 넘버가 11인 것에 착안하여 11개의 상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패션브랜드인 마르지엘라, 그 중에서도 성별 구분이 없이 착용 가능한 액세서리 라인을 선택했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쪼갬으로써 특정 성질의 것으로 요약되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태도를 은유한다. 고요하면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두상들은 전시 공간 어디에서나 관객을 계속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음적 시선에의 노출은 작가가 그동안 감염자로서 경험했던 차별적 시선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가 여태껏 고민해 온 ‘미술계에서 자신이 소비되는 방식’을 다시금 곱씹게 만든다. 스티로폼으로 제작되어 안이 텅 비어있는 두상들은 원치 않게 표면적으로 소비되고, 대상화되어 깊이가 사라진 작가 내면의 한 부분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정식, <이정식11>, 스티로폼, 우레탄페인트, 22×25×33cm, 2013, 사진촬영: 임현영

<오, 미키>(2020)는 가족, 친구, 사회로부터 받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과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경험을 교차시킨 2채널 영상 작품이다. 해당 작품은 동명의 짧은 소설에 기반하고 있는데, 동시대 예술, 그것도 미디어 아트에서 텍스트와 형상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작가가 작업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를 쓴 후 이를 출판, 영상, 설치 등의 각기 다른 장르로 가공해 나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텍스트적 담론은 작품의 주된 요소가 되며 이를 내재하고 있는 작품은 그 자체로 텍스트의 맥락과 사회의 맥락을 잇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작품의 주된 스토리는 101호에 거주하는 화자가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사건을 계기로 자신, 그리고 세계를 낯선 이원적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비밀번호는 계속 떠오르지 않고, 야외에서 계속 방황하던 화자는 자신이 가족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이유에 대해 고심하다 에이즈에 걸린 자신을 혐오와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부모님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또 비밀번호를 찾을 때까지 잠시 머물기로 한 친구의 집마저 영영 사라지게 되자 그가 자신을 외면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화자는 감염자로서의 자신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아니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이로 인해 다시 고뇌에 빠진 화자는 마침내 자신이 속해 있던 101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설령 존재했더라도 이제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는 자위적인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두 개의 분열된 모니터를 통해 전개된다. 분리된 화면에는 서로 분명히 다르지만 무언가 유사한 신체 퍼포먼스가 동시에 상영된다. 이는 오리지널과 그로부터 파생된 인격으로 형성된 이원화된 화자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 두 동작은 무엇이 원본일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흐릿한데, 우리는 그 둘의 관계가 대립과 갈등이 아닌 다원적 관계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화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청자이며, 내레이션의 주인공 미키이면서도 미키가 아닌 이원적 존재의 등장은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종의 게슈탈트 붕괴와 같은 그 혼란 속에서 관객은 낯설고도 친근한 날 것 그대로의 제2의 자신과 조우한다.

이정식, <오, 미키>, 2채널비디오, 16분 47초, 2020, 사진촬영: 임현영

이정식의 텍스트 기반 작업은 <김무명>(2020)에서도 이어진다. 작가는 두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출판물 『김무명』(2018)을 기반으로 또 다른 영상을 제작했다. 『김무명』은 2013년 수동 연세 요양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김무명이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편집물이다. 에이즈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의료사각지대에 놓여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김무명씨의 이야기는 동시대 감염인들 모두에게 통용되는 성소수자를 향한 부정적 인식, 사회적 낙인찍기와 의료차별과 같은 항구적인 문제를 상기시킨다. 작가는 이 모티브를 바탕으로 ‘잠재적 김무명’으로서 살아가는 감염인들의 이야기 8가지를 채집한다. 이렇게 채집된 이야기는 작가의 ‘자기중심’적 방식대로 의도적으로 편집되고 연출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원본대로 완벽히 구현되지 않을지언정 이야기의 증여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꺼이 작가에게 자신의 핵심부위를 내어준다. 영상 <김무명>은 그렇게 만들어진 여덟 편의 텍스트 중 일부를 추려 특정 공간을 배경으로 작가와 배우들이 해당 텍스트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전시장 내부 풍경. 왼쪽부터 차례로 『김무명』(2015), 『오, 미키』(2020), 『종이』(2015), 사진촬영: 임현영

관람을 마치고 전시실 한 켠에 마련된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다. 테이블 위에는 신작 <오, 미키>(2020)에 사용된 단편소설 『오, 미키』(2020)와 이전에 출판했던 『김무명』(2015)과 『종이』(2015)가 정갈하게 놓여있다. 어느 소설에서 그는 그 자신이지만 다른 작품에서 그는 타 감염인의 이야기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미디움으로 모습을 바꾼다. 이처럼 그는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정체성으로 호명되는 것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자신이 새로울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 이는 보수적인 사회인식에 저항하는 그만의 방법이며, 자신만의 언어로 감염인들의 삶에 서사를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이름으로 존재하건 간에, ‘이정식’이라는 실체는 모두 동일한 바램을 지닌다. 그를 둘러싼 견고한 틀을 부수고 사회와 융화되는 것. 더는 존재에 대한 의문없이 그저 인간 ‘이정식’이 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공존하는 수많은 ‘이정식’들은 분열의 차원이 아니라 긴밀한 결합의 대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살아질 수도, 그렇다고 사라질 수도 없는 감염인들의 삶은 작가의 삶과 연결되어 단단한 유리 파편처럼 전시장 한 켠에, 그리고 관람객들 뇌리에 날아와 박힌다. 그리고 이내 그 곳으로부터 균열은 시작된다.

 


*참고자료

유은순(2020), 「이정식 LEE JUNG SIK」 전시리플렛, d/p
남웅(2020), 「이름의 공백, 공백의 이름」(이정식 작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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