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_웹툰 2.0 : 플랫폼 가속주의

김선호(만화평론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웹툰 업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에 대해 논평을 하는 일의 어려움 말이다. 먼저 한국에서 웹툰이 본격적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자면, 아무래도 스마트폰이 보급된 2010년 무렵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게 본다면 2020년을 기준으로 웹툰의 역사는 고작 10여 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 10여 년 동안 웹툰을 둘러싸고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점이 조금은 특이해 보인다. 이른바 이상함과 다행스러움 사이의 특이함이라는 모호한 감정. 어쩌면 단순히 동시대의 이야기라는 점만으로 뇌리에 남은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웹툰이라는 매체가 그만큼 동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2013년의 레진코믹스 설립, 2016년의 클로저스 성우 사태, 2017년의 원로 만화가 비판, 그리고 2020년의 웹툰 검열 사태에 이르기까지 이 굵직한 이슈들은 단순히 웹툰 업계뿐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친 파급력 있는 호소를 방출해왔다. 여기서 나는 이 특이함에 대한 두 가지 논제를 설정해보려 한다.

1) 웹툰은 동시대와 맞물려 발전해가는 매체이다.
2) 웹툰은 기존 예술의 연장선으로서 만화의 범주로 파악해야만 한다.

전자의 경우는 대부분의 웹툰이 일주일에 한 번 연재된다는 점에서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매체보다 더 빠른 흐름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영상 시대에 속한 매체 중 하나로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논하게 된다.

이처럼 이 두 가지 논제들은 우리가 ‘매체’에 갖는 문제의식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둘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기술이라는 단어의 두 가지 용법이 동시에 맞물린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우리가 알다시피 기술(Technique)은 무언가를 기술(description)하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고, 웹툰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비자들이 웹툰을 언제 어디서나 더 편하게 볼 수 있는 만큼, 생산자들도 웹툰을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업로드 할 수 있다. 과거에 잡지와 같은 특정 지면을 필요로 했던 만화 연재의 장은 루리웹이나 디시인사이드, 웃긴대학이나 네이버 블로그와 같은 곳으로 다양하게 분산되었다. 이에 따라 특정한 요구에 종속되지 않은 작품들, 작가 개인의 성향이 도드라지는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두고서 ‘플랫폼의 민주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게 되었다.

물론 플랫폼의 민주화라는 표현이 누구나 전업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응당한 고료를 받고, 특정 지면에서 정기적으로 작품을 기고한다는 의미로 범위를 좁혀본다면 플랫폼의 장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혹자는 남에게 보여주지 않을 작품이라면 처음부터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지면의 죽음, 또는 지면의 분산화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지면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 우리가 그만큼 동시대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면의 거대서사의 반대편에 성립하는 대항공론장(Counter-public sphere)이 아니라 개인의 특색과 목소리를 온전히 전달하는 발화의 통로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면이 과연 공론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에 앞서 웹툰이 유통되는 대표적인 플랫폼들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다음이나 네이버처럼 포털 사이트에 기반을 둔 것이 있고, 레진코믹스나 카카오페이지처럼 독립적인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나열한 플랫폼들이 연재되는 작품들을 통해 무언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플랫폼들이 작품을 영입하는 것에는 인터넷 지면이라는 특성상 양적 제한은 없지만,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의 작품을 영입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그 방향성에는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들의 작품 영입은 어떤 형태로든 세일즈 포인트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여기서 핵심은 플랫폼이 ‘잘 팔릴 만한’ 것들에만 치중한다는 게 아니다. 다양한 독자의 취향을 공략하려는 시도가 다양한 의견을 만들어내고, 이로 인해 통합된 의견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서브컬쳐라는 분과 자체가 주류 문화의 바깥에서 작동하는 것이기도 했다. 웹툰을 주류 문화로 볼지 서브컬쳐(하위문화로 표기할 수도 있지만 서브컬쳐라는 단어가 용어 자체로 정립된 면이 있기에 이렇게 표기한다.)로 볼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간에 개인의 의견과 취향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그 말인즉슨 플랫폼이 하나의 의견을 운용하는 것은 환경상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다양한 취향의 작품을 하나의 플랫폼에 연재하는 것을 두고 이른바 틈새 공략이 벌어진다고 볼 수 있고, 그렇게 생각하면 플랫폼 안의 작품군은 틈새와 틈새들의 모임 즉 픽셀과 픽셀로 귀결되는 거대한 점묘화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이 점묘화의 특징은 가까이서는 개별적이지만 멀리서는 하나의 통합체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플랫폼 자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역할, 혹은 성향을 띠게 될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몇몇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작가는 플랫폼에 종속된 존재인가? 작가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될 뿐 바깥의 문제에는 신경을 써서는 안 되는 건가? 다양한 취향을 표방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그림 1.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사진출처

자문자답. 작가는 개인이다. 아니 단순자(monad)라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시대에 스크린을 구성하는 작은 픽셀들이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존재였음을 고려해본다면, 플랫폼 안에서 작가라는 존재는 점묘화 같은 비유에 꼭 들어맞지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플랫폼을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통로가 아니라,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지대(landscape)’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플랫폼이란 눈에 보이지 않던 작가들을 가시적인 형태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매개물에 가깝다. 한 폭의 풍경 안에 작가들이 희미하게 펼쳐져 있고, 이곳을 관광하는 독자들은 그 풍경 안에서 다시금 자기만의 소중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웹툰 플랫폼은 그 자체의 브랜드가 아니라 작가라는 풍경(landscape)을 실체화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어떤 작가가 홀로 있을 때 이상해 보이지만, 웹툰 플랫폼 안에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측면으로 접근해보자. 영화나 소설의 작가를 논할 때 작품이 배급되는 경로보다는 작가의 이름 자체가 중요하듯이, 만화를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통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작가 개인의 몫이다. 바꾸어 말해 작가가 곧 (이야기하기) 플랫폼이며 그렇기에 (발화의 통로로 사용되는) 플랫폼을 통해 작가들의 성향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경향은 조석이나 기안84(김희민), 박태준이나 야옹이(김나영)처럼 작가 본인이 곧 브랜드인 작가 인플루언서의 등장이나, 트위터 등지에서 종종 목격되곤 하는 특정 만화 작가의 팬 그룹을 통해 확인된다. 네이버, 루리웹, 웃긴대학, 디시인사이드, 다음, 레진코믹스, 배틀코믹스, 탑툰, 만화경과 같은 다양한 공간이 그곳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풍경이라는 표현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곳은 오픈마켓처럼 무한히 경쟁하는 장소가 아니며, 전시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전시장 안에 넣는 것이 오히려 경쟁 사회의 어떤 면모를 가속화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신자유주의가 낳은 절망적 단언인 가속주의가 거대서사의 붕괴를 상정하고 있음을 떠올려보라. 가속은 미끄러짐이다. 미끄러짐이란 곧 가속이다. 이는 지면으로부터의 이탈, 혹은 아날로그로부터의 이탈 위에서 더 견고해질 수 있는 듯한데, 과거에 지면이 종이 위에 프린트된 판판한 평면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에 지면이란 네트워크 평면이 갖는 무한한 지평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과거의 지면이 투사 화법을 응용한 대각선의 심도를 만들어냈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지면은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의 투시법을 만들어내었고, 이는 바라보는 것과 체험하는 것의 감각에 본격적인 분리를 일으킨다. 즉 입체라는 것이 현실의 환영이 아니라 환상 그 자체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무언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겉으로 관측되는 평면의 안쪽을 가정하는 행위가 된다. 이 동시대라는 환상은 나란한 배열 속에서 자기만의 심도를 만들어내고 구분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낙하에는 중력의 필연성과 시점의 전능함이 한데 어울리기 마련이다.) 자기만의 취향, 감식안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동시대의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기에 십상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고 있는 웹툰들이 끝없는 추락의 경험을 가정한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자이로 드롭이나 청룡열차가 운동 에너지의 낙하를 통해 잠깐이나마 ‘내가 이곳에 있다는’ 실존의 환상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청룡열차를 직접 체험하는 게 아니라 체험이라는 평면을 보고 있다는 점일 테다: 이렇게 상상의 형태로 돌아온 체험에 대해 우리는 체험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을 사용해야만 하는 걸까? <매트릭스>의 사이퍼는 스테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음에도 스테이크를 생생하게 느꼈던 바 있다.

이전에 만화는 판형으로 된 자신의 몸체를 지면에 나열해두었지만, 지금의 우리에겐 점으로 수렴되는 것들을 거꾸로 뒤집는 것과 같은 관찰능력이 요구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연대기적 시간에서 탈피해 동시대의 다양한 분포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이것들은 인터넷의 발달을 통한 본격적인 세계화, 그리고 그에 따른 민주화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웹툰으로의 접근이 수월해졌다는 게 꼭 모두에게 평등한, 혹은 공감할 만한 콘텐츠가 양산되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겪는 평면은 체험의 균등 분배가 아니라 각기 다른 체험들의 언캐니한 공존이다. 오히려 플랫폼의 민주화를 통해 자기만의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적(혹은 자전적) 만화도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이 사적 만화를 통해 작가 개인은 자기만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의 자신을 말하며, 규정되거나 정립되지 않는 날 것의 의식은 웹툰의 평면을 타고 넓게 흐트러진다.

이렇게 흐트러진 의식은 작가와 작품의 동일시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답은 예술의 본연적인 면에서는 딱 잘라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업계 최고 방문자 수와 그만큼 유효한 접근성을 지닌 네이버 웹툰의 경우는 대중을 위한 플랫폼으로서 작가 개인의 지위를 작품과 분리해서 볼 수 없다. 이곳에서 작가의 작품들은 클릭 한번을 통해 파악되고, 예컨대, 무언가를 끌어들이는 장소에서는 대상에게 영향을 미칠 변인을 미리 제거해두어야만 안전한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보면 무언가가 계속해서 유입될 수밖에 없을 인터넷 공간에서의 실험은 온갖 변인에 대응하기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웃대, 루리웹,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독립적이면서 비공식적인 공간으로부터의 탈피는 웹툰 에이전시나 웹툰 플랫폼등을 통해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 구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 2. 네이버 웹툰 <호랑이 들어와요> 1화 댓글창
그림 3. 네이버 웹툰 <데이빗> 1화 댓글창

여러 장소에서 작품을 연재하던 작가들이 네이버로 자리를 옮겼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살펴보자. <데이빗>, <호랑이 들어와요>. 이 두 개의 작품은 기존에도 두터운 팬층이 있었고, 팬들 사이에서 입 소문이 난 상황에서 네이버로 옮겨가게 됨으로써 자신의 팬들을 기반으로 작품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견고한 팬층에도 불구하고 1화부터 댓글 테러를 당했다. 아니, 전제가 틀렸다. ‘견고한 팬층이 있었기에’ 댓글 테러를 당했다고 고쳐 써야 한다.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하나의 공간에 안착하게 될 때 이들은 오히려 무국적성을 획득한다. 누구나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배타적 경제 수역의 설정일 수도 있고, ‘우리’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다는 것과 같은 모종의 배신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누군가의 만화를 보기 위해 특정 플랫폼에 가입하는 일이 누군가의 만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 보다 우선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플랫폼이 특정 작가를 영입하고 싶어 한다면 그 이유는 작가의 팬을 이곳에 종속시키고 싶어서일 테다. 그리고 이 논리는 그들 커뮤니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러 장소에 걸쳐 작가를 알아 왔던 이들은 작가가 이곳에서 영원하기를 바란다. 자기들만의 자랑 혹은 특산물이 되기를 원하면서 자신들의 플랫폼이 곧 중앙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작가가 공식 지면으로 옮겨갈 때, 수많은 플랫폼들 사이에 존재하던 중앙의 개념이 깨어지게 됨으로써 중앙은 누구도 소유하지 못하는 중립지대가 되어 버린다. 이는 어린왕자가 지구에 방문했을 때 장미들의 군집을 보면서 느꼈던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감정으로, 그가 느꼈던 게 자기 별에 대한 소중함이라면, 커뮤니티에서 이탈한 작가의 존재는 이들 독자에게 자기 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에게 특별했던 것은 장미가 아니라 ‘풍경’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서는 ‘그’ 없이는 이곳의 풍경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비통해한다. 이윽고 이 감정은 완성되지 못한 풍경에 대한 분노로 탈바꿈하며, 그들은 이 감정을 본래 있던 것들의 자리, 즉 ‘부재’에서 찾는다.

그들에게는 단지 어떤 만화를 실체화하는 작가라는 플랫폼과 어떤 작가를 실체화하는 만화라는 플랫폼이 있을 뿐이다. 이는 흡사 플랫폼과 작가의 일체화를 꿈꾸었던 영화-스튜디오 시스템의 초기를 연상케도 하지만 (오즈의 슬하에 있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플랫폼’을 뛰쳐나간 일화를 떠올려보라.) 인터넷 시대를 빌어 등장한 웹툰은 태생부터 독자와 작가 사이에 상호소통을 전제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습작’이라는 말은 이제 더는 등단을 위한 사적인 무언가가 아니며, 아직은 플랫폼이 되지 못한 미분화 상태의 원료를 지칭하는 말로써 사용된다. 다양한 인터넷 지면에서 먼저 활동하며 얻은 유명세를 통해 플랫폼으로 데뷔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알던 사람은 이미 알음알음 알아왔던’ 누군가라는 점이다. 요컨대 완전한 신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면 신인이라는 말은 단지 플랫폼의 표면으로만 적용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바라보면 평평하기 그지 없지만 오직 그들의 곁에서 바라볼 때만이 지형의 높낮이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는 마음이 바로 부재에 대한 환상이다. 이른바 입체라는 환상, 내가 아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참된 진실이라는 성급한 결론.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웹툰 작가 지망생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먼저’ 데뷔한 후에 인기를 얻는 것보다는, 자신 자체를 플랫폼으로 만들어 웹툰 담당자의 눈에 띄는 게 더 빠른 출셋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플랫폼은 풍경 안에서 전시장을 통해 특별해지는 것, 마치 어린왕자의 장미처럼 감금과 동시에 홍보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때, 연재되는 ‘장소’는 ‘지속가능함(durability)’을 제공할 뿐 작가 개인의 작품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게 공식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각자의 장소마다 공간에 대한 정체성이 있기에 작가 개인의 작품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준다고 보는 게 옳다. 하나의 작품은 다양한 공간으로 기술복제되며, 오히려 작가야말로 자기 작품을 후속적으로 따라가야만 하는 일은 이제 흔해졌다. 그리고 이런 인기는 이 만화를 ‘누가’ 그렸는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만화 작가의 존재를 전시장 안으로 밀어 넣고, 그에 따라 독자들은 전시장 안의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

이와 같이 작가의 플랫폼화가 가중화 될수록 플랫폼의 유저들은 작가를 플랫폼에 동일시하고 그것을 단순자로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만의 작가가 어느 특정한 플랫폼에 입성하게 될 때, 그에 머무르던 유저들은 작가를 자기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픽셀로만 다루면서 이곳이 아니라면 그 그림은 완성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점묘법은 근본적으로 작가와 멀어지는 독자가 아니라 작품에 자유낙하 하는 개인의 시선을 통해 완성되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작가 주체를 플랫폼 안으로 가속화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유낙하가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간 굴에서처럼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끝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되지 않을까? “A:그들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B:어디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지금 떨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군요.” “A:언젠가 추락한다는 진실에 도달하겠지요?”. “하지만 그 결론은 항상 표면 위에서 곧바로 취소되기를 반복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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