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로_장르로서의 에세이

이여로

도판 디자인: 오은석(@twinkle_middle_finger)

들어가며

이 글은 「독립출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서 언급한 한 대목, 독립출판이라는 유통 방식에서1) 삭제될 수 있는 한 요소인 ‘검열’에서 시작할 수 있다. ‘검열’은 우선 중립적인 단어로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는 검열에서 분명히 힘의 장이 펼쳐지는 것을 본다. 문제는 장의 형태이며, 그 장을 거쳐 나온 것들의 값, 혹은 그 장이 담을 수 없는(저질스런 것들, 탈락한 것들로 취급되는 것들의 존재는 그것을 명명한 장의 한계를 동시에 증명한다) 것들의 존재, 그러나 아무도 모르고 있는 이 존재들에서 온다. 그렇다면 에세이를 장르라고 말하면서, 힘의 장이라 명명하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혹은 “출판에 관심이 없는 아마추어 시인이 그 정도로 좋은 시를 쓸 확률은 매우 낮다. 음식을 먹을 생각이 없고 대접할 생각도 없는 요리사가 좋은 요리를 할 확률과 비슷한 정도로 그렇다”2)는 강보원의 말과 이 문장이 포함된 일련의 에세이 연작이 발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전개하려는 관념의 질서와 강보원의 글에 투사한 사물의 질서가 어떻게 상호작용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첫 문단에서 드러난 관심은 이 글이 무엇에 관한 것이 되리라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1.
강보원의 미발표 시집의 감상을 물어오는 강보원에게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시나 소설에 관심이 없는 내게 그 말은 야구에 관심이 없는 내가 어느 날 야구 규칙 입문서를 손에 든 채 3시간 넘게 TV 앞이나 야구장 객석에 앉아 있는 상황과 마찬가지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나는 사회적 인간이므로……) 평론가 강보원의 에세이를 좋아한다고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김유림 시인의 시집 『양방향』보다 오히려 행사에서 공개한 미발표 작업일지3), 그리고 근작인 『셋 이상이 모여』의 제작기4)에서 느낀 매혹, 블로그 이웃들의 글, 혹은 나의 글쓰기가 파고들어 갈 형태를 만들어 내려는 욕구, 그것에 이름을 마련함으로써 끝없이 ‘혹은’이라 이어가기 위해서 나는 에세이에 관심을 가졌다. 여하간 나는 수필이라는 형식 속에서 무언가 ‘느슨해지는’ 바로 그것에 흥미를 느꼈으며, 그것은 문학의 비-전문가인 내게도 어떤 종류의 접속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내가 선택한 글은 ‘우수한 에세이’의 예시가 아니며 이 글은 에세이를 정의내리겠다고 말하면서 그 우수함을 선취하는 것도, 어떤 당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있다고 가정하고 시작하는 행위를 이 글은 싫어한다. gkd가 작고한 문화 평론가 마크 피셔에게 바치는 글에서, “마크 피셔 전문가는 없다. 각자가 피셔-기능을 수행하면 될 뿐”5)이라고 말한 것처럼, 또 그를 “지적 자산으로 취하려는 흐름에 반대”한다고 말한 것처럼, 에세이에 대한 전문가는 필요하지 않으며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도덕적 기표가 아니라 이론적 귀결이 되게 만드는 것을 이 글은 또 하나의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강보원과 김유림의 글은 이여로가 출판을 위해 약 한 달여 편집을 겸해 읽어야 했던 글에 불과하다.6) 내 생각에 ‘어떤 글’도 분석의 가치가 없다. 어떤 글이 선택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논점 선취의 주장에 있지 않고(어떤 책들에 리뷰가 쓰이고 있고 어떤 책들이 비평의 대상이 되는가? 여전히 사람들은 “작품” 개념에 의지하여 계속 개별 작품을 해설하려고 드는데?), 반면 독서 대상의 가치가 독자의 관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도 있지 않다. 환멸을 느끼게 하는 이런 상대주의는 적어도 독자와 그 대상 사이의 선택된 만남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게 만들고, 작품과 협작하는 미학적 위장7)으로 더해진 불투명성은 그 자체가 인지적 구속으로 작동하여 불필요한 질문과 준비된 답변으로 읽는 사람들을 내몬다. 나는 어떤 것의 산출물이 아니라, 그것의 고유권한(그런 것이 있다면)에 관심이 있다. 루카치의 말처럼, 우리는 “에세이를 논하면서…… ‘잘 쓰여진 글의 상태’를 너무 일방적으로 강조”한다.

2.
영문에서 에세이(essay)가 뜻하는 바와 한국어 수필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게 다르다. 나는 이 글에서 둘을 구분 없이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단어의 용례를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다.8)

들어옴

우리는 에세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문예지의 한 호 전체가 에세이 특집으로 꾸려질 수 있을까?(민음사에서 발간한 릿터 26호) 나는 에세이가 장르임을 명확히 하면서도 에세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어떤 글이 에세이이고 에세이가 아닌지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거나(인지적 주장), 존재하도록 한다는(존재론적 주장)을 자제하고, 그저 우리가 언어로 쓰인 어떤 텍스트를 대면하였을 때, 그것이 에세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동어반복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동어반복에 적극적으로 만족할 방도를 여기에서 찾고 싶다.

영국의 분석 철학자 조지 무어는 ‘좋음’에 관한 정의를 탐구하면서, “한 단어를 다른 단어 속에서 표현한 것을 정의(definition)라 일컫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내가 탐사하고 있는 ‘정의’의 유형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정의’는 사전 편찬학을 제외한 어느 연구에서도 궁극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9) 그렇기에 나는 에세이의 역사적 맥락도, 사람들이 그 단어를 보편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 사용에 관한 문제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넘어갈 것이다.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일까? 스피노자는 정의를 생성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만 정의는 (더 효율적인 표기법이 아니라) 이해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동일시의 동어반복이 아니라 비-동일시의 순간들에서 유래하며, 동시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동어반복일 것이다.

탈-장르 같은 것은 없다. 그러면?

“나쁜 작품은 없고 작품만이 있다”, “작품이거나 작품이 아니다”는 말을 어느 글에선가 읽은 적 있다(작품의 자리에 원하는 말을 놓아보자). 이 말은 얼핏 어떤 단어를 평가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것처럼 들리지만, 평가적 의미와 분류적 의미를 동일한 형태로(혹은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 놓았기에 가능한 말이고, 다수의 대상이 존재하던 방식을 분리하여 각자 다른 실체처럼 다루는 바로 그만큼 위험하고 그만큼 용이할 수 있다. 누군가 어떤 넓은 집합의 하부 집합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론화/개념화하는 것은 무방하며 특수화와 전체화는 원리상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기에 권장해야겠지만, 그것이 집합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은 그것이 대상화하는 하부 집합(혹은 집합화하는 행동)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우리는 대체로 이런 위험성을 어떤 정치적 필요성이라 부르며 승인하거나, 이에 관한 논의 전체를 애매하고 모호한 언어사용에 기대어, 분리되는 것을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분리되지 않는 것을 분리된 어떤 것이라고 말하며 관념적으로 조작한다.10) 즉 정의와 규정의 문제는 곧 검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다루는 주제와의 형태적 유사성(에세이에 대한 에세이?)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그러나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서, 내가 느낀 ‘느슨함’이나 ‘매혹’을 충실히 기술하기보다, 그것이 가장 큰 이론적 차이로부터 기인한다고 선언하고 에세이를 장르로 특정하려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상에 부과하고 싶은 엄격한 통제와 검열이 그것의 본성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통제와 검열? 그것은 이제 “어디서나 우연히 사랑하는 것을 발견해내는” 가장 뛰어난 전략으로 탈바꿈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이론들은 x의 개념에 ‘그 자체로’ 가치를 내재화시킨다. 물론 x라는 말을 평가적인 방식으로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이론적 논의는 아니다. 비-이론적 논의에는 다른 가치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어떻게 가치화될 지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선택할 권리는 전적으로 외부에 있다는 것을 이 글은 또 다른 규칙으로 삼는다. 이것이 ‘동어반복의 적극성’이라는 말로 지향하는 바이다.

따라서 우리가 장르로서의 무엇을 말할 때, 그것이 작품과 작품 아닌 것을 구분한다고 말하기보다 장르에 대한 합당한 논의와 합당하지 않은 논의를 구분한다고 말하는 편이 조금 더 정확하다. 그러나 에세이 장르는 세부 작품에 대하여 그 합당성을 ‘질적으로’ 논의할 수가 없다. 에세이 장르의 결함이라 평가받는 것들이 사실상 장르 자체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에, 적합한 에세이를 찾는다는 분류적(동시에 평가적) 행위는 에세이의 실정성을 무너뜨린다(그리고 이 실정성이 장르로서의 에세이의 필요조건이다). 이것은 도덕적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주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가령 특정한 주제나 관념, 혹은 이에 대한 찬반으로부터 타자성, 개방성, 윤리, 아름다움 따위의 이름을 곧장 말하는 것은, 언어를 수행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성을 진술하는 주장이다. “여기에 이름을 쓰세요”라고 적혀있는 곳 위에,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고 “여기에 이름을 쓰세요”라고 반복한다. 가짜 입장권들. 이것이 ‘동일성에 의한 동어반복’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규칙과 장르

개별 장르는 고유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오규원은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으며 줄글이 아닌 마디 글의 형태로 쓰인 모든 글이 시라고 말하며,11)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안무가 김보람은 움직이는 모든 것(가령 일상적인 걷기)이 춤이라고 말한다.12) 이런 식의 말들이 형식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신파적 감탄사로 쓰이기도, 모든 제약을 벗어난 어떤 메타적 층위가 있는 듯한 위장된 제스쳐로 쓰이기도 하지만, 규칙의 최소 단위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다면 오규원의 말을 빌어, 줄글로 된 모든 글은 에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규원은 바로 다음 문단에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과 좋은 시를 쓰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덧붙인다.

김보람은 공개 강연에서 말하길, 누군가(비-전문가)가 지금 무대에 나와 춤을 추면, 자신은 너무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종종 원숙한 창작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탈-장르적 발언들을 들을 수 있고, 혹은 예술과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작품화하는 현대 예술의 한 경향 속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복잡한 논의가 있겠지만 이 글의 방식대로 요약하면, 그것이 어떤 규칙의 체계(담론적 뒷받침, 화용론적 맥락 등 어떻게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와 관련 맺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규칙에 숙달된 대상자의 관점은 그 규칙에 따른 변환 과정을 수반하고 있다. 가령 시인이 쓰는 것이 시라는 식의 발언도 이와 같으며, 훈련된 대상자의 관점을 상상하지 않고 어떤 순수한 관점을 그 자리에 상정할 때 이런 발언은 왜곡된다. 즉, 대상을 규칙에 따라 객체화(작품화)할 수 있는, 특정한 대상자의 관점(의식) 안에서만 잠재적으로 성립되어 있는 결과물이, 아직 결과물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에 그 관점 바깥에서는 마치 탈-장르적 영역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근대예술의 아방가르드는, 분열의 범주를 이론적으로(즉 관념적 객체를 통해) 강하게 기용하거나 당대의 경험적 조건을 마치 그것의 본성인 양 끌어 붙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사물, 단순한 조립,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미친 사람의 호소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 같은 것은 거의 없다. 탈-장르, 직접성이라는 말이 주는 신비함의 느낌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것이 없음을, 혹은 인식 주체들에게 인식되지 않은 매개의 존재만을 증명하는 쪽에 가깝다.

나아가 장르에는 무수한 세부 규칙이 있으며, 규칙은 단순히 장르 내부의 물리적 요소로만 환원되지 않고 특정 단위의 공동체가 받아들인 형태를 대변한다. 규칙은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다른 공동체(외부)와도 상호작용한다.13) 따라서 우리가 좋은 시, 좋은 춤, 좋은 x를 말할 때, 그것은 삶이라는 보편 범주에서의 좋음이라기보다 우선은 그 세부적인 규칙에 들어맞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14) 즉 여기서 좋음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 값이 참이라는 사실판단에 우선적으로 가깝다.

우리는 다시 사실과 가치가 동일시되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에세이는 그 포용성, 혼종성을 증거 삼아 규칙이 없는 곳이라고 주장될 수 있을까? 혹은 과거의 사상가들이 남겼던 짤막한 규정들, “무형식의 형식”이라거나(*루카치) “비체계적 체계”(*아도르노)를 되뇌이며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만일까? 더 많은 사례와 정의를 나열하고, 뛰어난 개별 작품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도, 거듭 찾아오는 이 불안은 왜일까. 루카치가 언급하였듯, 삶이라는 보편화된(객체화된) 현실이 있고, 그것을 살아가는 특정화되고 체계화된 현실이 있다. 그리고 ‘살아감’의 여러 장르들은, 물론 보편화된 삶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때 매우 추상화된 수준에서만 교류할 뿐이다. 여기에 더 분석해야 할 것이 있다.

인스타그램 글쓰기, 연예인들의 수필, 독립출판의 출판물들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글쓰기와 출판이 보편화 된 오늘날의 것만이 아니다. 이미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아무 데나 솟아나는 버섯처럼 쓰레기 같은 책들이 넘쳐난다”는 불평이 기록되어 있고,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를 시작하면서 자신은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탐험가들도 싫어하고 여행기는 더더욱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보잘것없는 추억들을 적어 놓기 위해서 펜을 들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이런 종류의 책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여행기, 탐험 보고서, 또는 사진첩의 형태로 된 아마존, 티베트, 아프리카 이야기들이 서점을 뒤덮고” 있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에세이는 규칙의 권외 지역, 그저 일시적인 소규모 규칙들이 산발적으로 꿈틀대다 더 큰 규칙 집단에 흡수되는 곳, 혹은 문화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산업화된 문화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활용되기 적합한 소재들이 상업적 승리를 거두는 곳일 뿐일까?(위로와 자족으로 대표되었던 카피라이팅들, 혹은 조금 더 전문화된 문학 시장에서 강조되는 낭만성들). 우리가 긍정한 바로 그 특성을, 이제는 역으로 부정하면 될까?

그러나 상황에 가지는 불편함도, 하나의 가치를 놓고 나머지를 반정립하는 식의 사고방식도, 현재의 관습 속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우리는 흔히 다시금 제도와 검열16)의(분류 그 자체를 평가적 기능으로 동시에 사용하는 방식의) 순기능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돌아감’이라는 추상적인 방향 설정은 언제나 현전하는 제도의 구체적 안전함으로 귀착하고, ‘어쩔 수 없다’거나 ‘이거 보단 낫다’는 정당성 아래에서 발생하는 회귀는 순진한 반대만큼이나 당혹스럽다. 따라서 특정 부류의 에세이에 지워진 비난은 그것이 비난하는 통속적인 에세이보다 더 통속적이며, 제거할 수 없는 것, 필연적인 것에 대한 볼멘소리에 불과하다. 차라리 우리는 그것이 에세이 장르를 성립시키는, 그 장르의 힘을 여는 필요조건이라고 여기고 넘어갈 것이다. 넘어가지 않고 멈춰선 채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는 차후의 문제로 남겨두는 게 좋겠다.

그렇다면 에세이의 규칙은 ‘어디에’ 있는가?(우리는 이 공간적 표현을 ‘언제’라고 바꿔야 할까?) 고유한 것에 대한 직접적 언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에세이는 그 직접성의 영역일까? 그러나 지금 말하고 있는 에세이가 언어로 적힌 글이라면, 약한 의미에서 단어나 문장, 강한 의미에서 개념이라고 할 법한 것들이 규칙의 최소 단위가 된다. 이미 그것들은 특정한 의미 체계, 특정하게 편찬된 거대한 사전에 종속되어 있다(이 말을 관습이나 전통으로 바꿔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개념에 종속되지 않고 언술 되기를 목적으로 할 수 있을까? 혹은 실증주의자가되어 객관적 전통에 합류해야 할까? 그곳에서만 개체는 자신의 독창성을 인준받을 수 있을까? 의혹의 물음을 이어가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기대감, 목적으로부터만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도의 한 가지 방법

우리를 사고케 하는 강력한 충동 중 하나가 부등호에 있다. “하나의 형식이 보이자마자 그것은 다른 형식과 ‘닮아 있어야’ 한다”는 바르트의 말처럼, 그것은 사고의 본능적인 유형 중 하나다. 그러니 가늠하기에, 언어를 둘러싼 테크닉과 이론의 거의 모든 것이 이 부등호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 이름이 은유, 환유, 해체, 상징, 해석, 비판 어떤 것으로 불리든, 우리는 같음의 관계를 비례로 전환해 대수로 만들기도 하고, 크기로 바꿔 관찰해보기도 하고, 비슷한 것들을 같다고 하거나 완전히 달라 보이는 것들을 같다고 해보기도 한다. 혹은 부등호의 양변이 아니라 부등호 자체를 변수화해보기도 하며, 이것들 전체를 속도로 바꿔 움직여보기도 한다.

에세이는 이런 등호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형식화 중에서, 매우 흥미로운 형식이다. 아도르노는 에세이가 비-동일성의 의식을 허용한다고 말하면서, 바로 앞에 “직접 표현하지 않고”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이것을 조건절로 읽어야 한다. 에세이라는 장르를(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립시키는 것은, 그것의 1.순수형식(1인칭)도 아니며 2.그 형식의 순수성을 의인화해서 만들어지는 직접성의 표상들(감정, 저자성, 등등)도 아니며, 바로 이 조건절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에세이라는 형식은 객체화하기에 앞서 대상자의 문제를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요구의 함정은 그래서 대상자 자체를 특정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나’와 ‘경험’, 두 항은 마치 “운과 놀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직접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규칙은 에세이가 단순히 기교의 장임을 나타낼까? 에세이의 방법은 분열이나 무책임을 그 자체로 미학적 범주로 만들려는 관념론적 시도와는 다르다. 아도르노는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을 지적 경험의 장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앞서 말한 경험의 앞에 “지적”이라는 말이 다가온 것을 본다. 우리는 이 말을 정의할 다른 체계를 불러올 필요가 없다. 그것은 경험의 동의어이다. 사태와 관계 맺지 않는 순수한 개념을 생각하기가 불가능한 바로 그만큼, 사태에 불과한 것이 개념 없이는 우리의 경험으로 착상될 수가 없다면, 모든 에세이는 지적이다.

우리는 다시 에세이와 개념의 문제가 불가분하다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인지적 순환에 빠진 걸까? 에세이는 개념화 이전을 탐구한다. 그러나 개념화는 인지 자체의 조건이다. 따라서 개념화 이전이란 없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전”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전제하게 되는 직선의 형태는 비가역성을 상정한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시간이나 앞으로 지나갈 시간을 다룰 때조차 그 시간을 마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처럼” 다루면서, 대상자의 문제, 의식의 문제는 삭제되어 있다. 어떤 에세이가 사후적으로 해석된 내용, 그 내용을 형성하는 규칙이 기성의 어떤 규칙과 일치하느냐 하지 않느냐, 새로우냐 새롭지 않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 문제다. 경험적 사실과의 비교, 사실들과의 비교는 실은 관념의 문제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관여하는 장은 관념의 장은 아니다.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을 ‘꿈’으로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꿈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술어 쌍들은 이미 특정한 이론의 전통에 묶여 있다. 그것에 무지한 것은 벗어남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 환경으로서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혼동과 망각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지 여부가 에세이를 장르화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것은 혼동하고 망각한다. 혼동되고 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짜로’ 속아야 하며, ‘진짜로’ 무지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 따옴표 속에서만. 그때, 무지는 막힌 벽이나 기만의 도착지가 아니가 아니라 입구가 된다.18) 우리는 에세이가 진리주장조차 허용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에세이가 ‘나’를 지적 경험의 장으로 펼친다고 할 때, 이 말은 기만적인 응원 구호가 아니다. ‘장’이라는 표현에 깃든 공간적 비유를 더 제거해보면, 그것은 언술의 맥락을 결과물로서의 규칙에 두기보다 규칙을 만드는 그 절차에 두는 것이다. 에세이는 결코 새로운 규칙이 아니다. 기성-환경과의 단절을 강조하며 무언가를 ‘새롭다’고 부르는 것이, 그 ‘새로움’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것이 대체로 과장법과 인정투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에세이는 새롭지 않으며 새로움에 대한 조급함도 이 곳에서 불필요하다. 따라서, ‘새로움’이라는 객체적 규준이 아니라 규칙 ‘만들기’라는 일종의 행위 모델로서 에세이의 장르성을 말하는 까닭은, 사적 규칙이 불가능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같은 바, 에세이는 에세이스트 자신의 규칙을 전제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규칙을 제정하는 과정 자체에 읽는 자(에세이스트 자신을 포함하여)를 참여시켜야만 성립 가능한 장르이며, 우리가 에세이에서 느끼는 ‘좋음’의 종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아도르노가 에세이의 빛은 시작의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잠재된 도착지에서 온다고 말한 것도 이런 뜻이다. 그 잠재된 것을 사후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라는’ 말로써 객체화시키는 것을 에세이는 거부한다. 그때 에세이라는 장르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글의 전반부에 가짜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문제의 가상성과 어떤 문제가 가짜라는 것은 완전히 정반대의 사태다. 문제란 무엇일까? 사실 전부 해결되어 있는 것에 물음표라는 부호를 붙임으로써, ‘무엇’이라는 빈 기표를 비워둔다고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문제’라는 단어의 동어반복이다. 혹은 축적된 역사-규칙의 끝자락에 기어가, 그 정점에서 문제가 자동적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할 때, 반대로 규칙 만들기의 절차성은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간다(그렇기에 들뢰즈의 말처럼, “문제의 해결은 이미 달성되었거나 결코 달성되지 않”고, “언제나 생각하는 사람의 등 뒤에서”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체계라는 말을 빌어 목을 꺾어 등 뒤를 돌아보려고 한다). 달리 말해, 에세이는 자기 앞에 주어진 것을 무엇의 무엇이라고 바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물로, 사물이라는 말의 진정한 객체적 지위를 존중하며 그렇게 여긴다.

우리가 그것을 사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차원을 연다. 그러나 ‘단순한’ 사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또다시 동일성의 함정으로 빠진다. 사태를 즉각적으로 ‘작품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지적이어야 한다. 체계라는 말이 움켜쥐고 있는 지식의 문제, 지식에 대한 평가의 문제를 에세이가 다시 가져오지 못하고 개성과 주체성을 표현한다는 기만적 표현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이 표현하는 것보다 거기에 더 많은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에세이의 전략 중 하나인 의사소통적 요소만을 전면화한다면, 에세이는 다시금 “대상과의 관계를 선천적으로 포기하고 어떤 지식도 포기한 속물주의”라는 힐난에 처할 것이다.

그렇기에 에세이는 복합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 복합성을 단순히 풀어내지 않는다. 가령 ‘느슨함’을 개념화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할까? 우리가 당면한 ‘사태를 개념으로 인식한다’는 것 말이다. 한 가지 용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부등호가 강력한 충동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부등호의 한 쪽 항에 우리의 직관을 놓고, 곧장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찾아 불안하게 헤맨다. 체계는 부등호를 자처하며 그 불안과 충동을 흡수하는 장치다(그리고 동시에 그 불안을 재생산한다). 반면 무언가를 ‘개념화’한다는 것은 부등호의 자리에(그 양옆이 아니라) 개념으로 만들고자 하는 직관을 놓는다. 그때 우리는 바로 그 직관으로부터 사유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루카치가 에세이가 아니라 문학에 부여한 과정을, 다시 에세이에 부여해야 한다. 에세이는 “상관관계를[이것이 저것과 어떤 관계이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태도로부터 (그것의 근원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생겨나”는 것이다. 바로 이 글이 에세이로서(써) 쓰였고, 방금까지 태도의 한 가지 방법을 보이려고 했다. 그 결함까지 포함하여.

나가며

앞서 에세이가 물질을 탐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에세이라는 장르 자체 또한 어떤 물질적 조건의 표현이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 무조건 한 페이지 쓰기 등등의 구체적인 테크닉들이 심리 치료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최초의 자유와 필요는 글쓰기 체계에 들러 붙어 있는 여러 이름들을 마주치면 필연적으로 변형된다. 그렇기에 앞서 탈-장르가 없다고 말한 바, 우리는 그 이름들을 분명히 해야 하며, 이름의 이름들이 유발하는 폐쇄회로적 현상들을 기술해야 한다.

아도르노는 에세이에 대하여 쓰면서, “또한 오늘날 형식적인 자유가 보장된 여건 아래에서도 지적 자유란 전혀 계발되지 않았으며, [독일 계몽주의의 전통 아래에서] 오히려 외부 권위에 대한 종속을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로 고백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에세이가 아니라 에세이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적 해방에 반대하는 아카데믹의 욕망, 산업 종사자들의 욕망에 대하여 말한 것이지만, 동시에 에세이가 가진 특성인 “결핍에 의해 열린 지적 경험”에 대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20) 언어는 투명한 매개가 아니라 「아주 조금 있는 문학」에서 강보원이 말하였듯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도구이며 그 생각은 매우 강력하다. 문학(이든 뭐든)은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으로도, 아닌 것으로도 절대화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텍스트는 상품 영수증에 가깝다. 그것을 경험화하기 위해 무엇을 샀는지, 그 값으로 무엇을 지불했는지, 장소와 시간까지 가늠할 수 있다. 왜곡된 주체성의 자리를 교정하기 위해, 현대 사상은 그것의 기계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한다. 영수증 기계와 주고받는 자동응답의 과정에는 분명 어떠한 비약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분명 자동적이지만, 나의 인풋에 맞춰 변화하기에 그 자동성을 결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기계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때 인간을 “기계의 생식기”(*베케트)로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에세이라는 장르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떻게든 ‘장르화된 것’ 내부에서라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글은 탈-장르를 암시하는 모든 언술들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에세이라는 장르가 규칙 만들기라면, 동시에 장르 개념 그 자체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를 사유하기에 더 용이하다. 더구나 그 이름은 결함, 무지, 혼동에 의해서만 열리며, 그 실정성 때문에 누구도 문지기를 자처하지 않는다. 근대 초기 문학을 비롯 여러 이름에 이런 것들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여전히 옛 이름을, 이미 분화되었고 분화를 요구하는 것들 앞에서 통합적 이름을 (동시에 평가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욕망에 불과하며 가짜 문제들을 낳는다. 분업(특정화)과 통합(보편화) 중에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중요한 길은 동시에, 김유림 시인이 『양방향』에서 보여준 것처럼 ‘동시에’ 가야 한다.21)

 


■ 참고문헌

T. W. Adorno, Trans by Bob Hullot-Kentor, 「The Essay as Form」, 『New German Critique, No. 32.』, 1984.
T. W. Adorno, Trans by Shierry Weber Nicholsen, 「The Essay as Form」, 『Notes to Literature』,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1.
gxmodern, 「힙스터리즘, 우리의 취향이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콜리그, https://colleague101.tistory.com/m/30, 2020,
강보원, 「아주 조금 있는 문학」, 크리틱-칼, 2020.
강보원, 『셋 이상이 모여』,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 기획:1, 2020.
게오르그 루카치, 반성완 역, 『영혼과 형식』, 심설당, 1988.
김유림, 「꿈꾸고 사라진 사람들」, 『셋 이상이 모여』 웹 페이지,  https://www.notion.so/0ef0acd429db476085ffc3885b5b4725, 2020.
김유림, 『양방향』, 민음사, 2019.
롤랑 바르트, 이상빈 역,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동녘, 2013.
아도르노, 이여로 역, 「형식으로서의 에세이」, 『셋 이상이 모여』 웹 페이지,https://www.notion.so/0ef0acd429db476085ffc3885b5b47252020, 2020.
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1991.
조지 디키, 김혜련 역, 『예술사회』, 문학과지성사, 1998.
조지 무어, 이여로 역, 『윤리학의 원리』, 기획:1, 근간.
페터 뷔르거, 김윤상 역, 『지배자의 사유』, 인간사랑, 1996.
피에르 부르디외, 주형일 역, 『중간 예술』, 현실문화연구, 2004.
히토 슈타이얼, 안규철 역, 『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워크룸프레스, 2019.

이 글에는 위 참고문헌에서 간접인용 표시 없이 변형해서 이용한 문장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각주

1) 검열은 주체들의 도덕심에서 사라진 게 아니라 유통 방식에서 사라졌다.
2) 강보원·김유림·나일선 저, 이여로 편, 『셋 이상이 모여』, 기획:1. 2020.
강보원, 문학 플랫폼 던전, https://www.d5nz5n.com/work/30, 2020.
3) 김유림 시인의 개인 블로그에 비공개처리 되어 있다.
4) https://www.notion.so/0ef0acd429db476085ffc3885b5b4725?p=b1b3b20555d74a0b8d2f9c0ef9ce4780
5) https://colleague101.tistory.com/28
6) 이 글이 염두에 두고 있는 강보원과 김유림의 에세이는 내가 편집 및 출판업자로, 강보원, 김유림, 나일선이 작가로 참여한 앤솔로지에 포함되어 있다. 즉, 이 글은 일종의 홍보로도 기능한다. ‘대하여 쓴다’는 행위에서 누가 순수함을 찬미할까? 오히려 ‘무엇은 가치 있다’는 전제하에 접근하지 않는 한에서만 탐구는 수행적이 될 것이다. 출판 행위 또한 이 절차에 포함될 수 있다.
7) 문학 출판의 카피로 급증하는 형용사들은 어떤가? 아름다운, 총명한, 윤리적인, 섬세한, 애정어린…… 바르트는 형용사로 유지되는 관계란 이미지의 영역이며 곧 죽음과 지배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왜 이런 언어사용에 자신을 기꺼이 위탁할까?
8) 강보원은 자신의 글을 수필이라 부르지 말고 에세이라 부르라 했지만 여하간 강보원‘의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다…….
9) 무어는 또 다른 곳에서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용례(verbal) 상의 문제는 사전 편찬자나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남겨두는 편이 적절할 터, 모두가 알겠다만 철학자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나는 문학에 별로 관심이 없다. 사전에는 조금 관심이 있지만…… 나는 혹시 철학자일까?
10) 이에 관한 다소 상세한 논의를 강보원의 「아주 조금 있는 문학」, 문학잡지 비릿 4호에 발표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때 해야만 하는 것」에서 읽을 수 있다.
11) 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2017.
12) 김보람, “[춤추는 강의실]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 안무가 김보람 & 뇌과학자 김대식 ‘현대무용 창작자 특강’”, 유튜브, Korea National Contemphorary Dance Company 채널, https://youtu.be/Qu2qpGsRyf0, 2020년 9월 16일.
13) 그렇기에 규칙이 요구하는 것은 문장의 성격이라기보다 행위자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지위인 경우도 허다하며, 후자에 대한 압력, 그리고 관점의 부재를 무시한 채 마치 손이 있는데 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하는 것은 역겨운 위선이며 “우선 ~가 되라는 식”의 상냥한 충고는 그보단 참을만하지만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14) 이러한 특수한 정합성으로부터 다시 보편적 범주로 확장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문제라 말하며 탈-장르적인 삶 일반의 미학적 성취, 아름다움 따위를 말하는 행위는, 듣는 자의 판단권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범죄시해야한다. 그것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좋아하게 만드는 우상숭배다.
15) 레비스트로스, 박옥줄 역, 『슬픈 열대』, 삼성출판사, 1990.
16) 여기서 제도와 검열을 말할 때, 그것은 이러저러한 사업체 대표, 학계의 동업자 모임, 위원회의 위원들, 교수, 평론가, 작가 등으로 이루어져 발언하는 실체적/인격적 집단이 아니며 그런 집단으로부터의 인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조지 디키가 제도론을 말하면서 주의한 것이기도 하며, 이 글이 뜻하는 바는 본 문단의 괄호 속 의미와 더 관련 있다. 지금 이 글은 에세이라는 특정한 장르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범위를 넓혀 그러한 담론 자체에 이 주장을 적용할 수도 있다.
17) 고전 철학이 형식 논리학의 원칙들로 내세운 것, 근대 철학이 지성의 순수한 범주들 따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산출한 원칙들 또한 이 부등호를 명시하고 있다.
18) 동시대 예술의 한 담론에서는 적극적인 허구, 비약, 왜곡, 개념의 밀반입, 갑작스러운 기능정지, 천재지변 등을 강조하기도 한다. 게임과 프로그래밍이라는 맥락을 차용해 버그(bug)나 글리치(glitch)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담론의 맥락에서 주관성이 그저 발견의 계기로 그친다면, 마치 이 환경을 벗어난 다른 환경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진술적 동어반복이 될 것이다(유토피아적 희망이라는 말은 왜 당연한 당위가 되었을까?). 소재의 새로움은 중요한 변수지만 이러한 중단은 본래가 근대적 사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촛불을 켜 놓고 흔들의자에서 몽상에 빠진다는 것을 안다…….
19) §202. 그러므로 ‘규칙 따르기’는 하나의 실천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역, 『철학적 탐구』, 아카넷, 2020)
20) 히토 슈타이얼은 아도르노가 에세이의 형식성을 강조한 의도를 “동일성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라고 요약하며, 부분화, 중단 따위를 그 형식 자체에 통합하는 것이 과거에는 저항의 형태였다면 오늘날에는 반드시 저항의 징후가 아니라 점차 창조적 활동의 특징이 되고 있는 “분업의 붕괴” 혹은 “내키지 않는 이동성, 극단적인 유연화에 대한 후기 산업사회의 강요 또한 표현”한다고 언급한다. 이것이 글에서 동어반복 이상을 말하지 않으면서 그 동어반복만으로 적극적 행위가 될 영역을 찾으려던 까닭이기도 하다.
에세이라는 형식 혹은 장르 그 자체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 자체’라는 말은 어떤 엄격함, 정확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은 그것에 투사된 낭만성을 더 크게 드러낸다. 우리는 그 개념이 잠시 몸을 빌어 나타난 모습을 그 자체라고 거듭 다시 정의내리지만, 그것의 실체는 (18번 각주에서 언급한 것처럼) 체계 바깥의 체계를 꿈꾸는 무의식이 거듭해서 돌아가는 표면에 불과하다.
바로 직후에 슈타이얼은 다시, 그러나 그 형태가 P2P 네트워크에서 떠도는 자료들의 전유, 공인된 지식과 이미지 소유권 독점을 무시하는 불법적 방식으로 경제에 침입한다고 말하고, 곧바로 다시 실제로는 대부분 포르노나 혐오 선동, 오만 가지 음모론의 공짜 거래소라고 말하는 바, 이러한 반복되는 전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히토 슈타이얼의 마지막 정리만을 남기고 싶다. 에세이는 이 모든 관계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21) 이성민이 쓴 <양방향 길, 가지 않은 길>을 참조해도 좋겠다. http://www.critic-al.or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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