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_사실이 이야기를 대체한 시대의 코로나19 보도에 관한 단상

김신(sans_soleil@naver.com)

미국에 사는 사촌 형이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회사의 동료 직원들이 근래에 한국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혼돈을 겪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성공적인 방역선을 긋고 있는 한국의 국가기관과 시민들…… 너희들은 ‘K-방역’이라는 성취를 이뤄냈다. 그리고 방탄소년단이 그래미 후보에 올랐다…… 너희 나라는 지금 그야말로 글로벌한 시기의 대상으로 부상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있다는 게 요지다. 나는 방탄소년단의 음악과 영상을 접한 적이 없음으로 그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다만 사촌 형의 동료 직원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우리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코로나 대처가 상대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빚어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해외 언론들이 한국의 방역을 전범적 사례로 보도하고 있다는 소식도 익히 들어왔다. 입에 담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자부심을 고양하는 국가적 위신의 상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도 사실인 듯하다. 의아스러운 점은 이것이다. 과연 그 자부심의 대상인 공동체의 소속원은 누구인가. 국가주의의 뉘앙스를 머금고 있는 K-방역이라는 수사는 한국의 시민을 단일한 집단으로 호명할 수 있는 대표성을 띠고 있는가. 정말 그렇다면 왜 그 표현이 상정하는 우리의 공동체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동일화될 수 없을 정도로 사분오열되어 있는 것일까.

K-방역이라는 수사는 정부와 시민이 코로나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는 상황에 대한 판단을 넘어, 그 성과가 우리의 ‘상상된 공동체’ 내부의 상호적인 협력과 연대를 통해 성립했다는 가정을 수반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사정이 그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올해 초부터 현재까지의 방역에서 반복적으로 목격된 것은 집단적 결속이라기보다는 방역에 걸림돌이 된 집단을 바이러스와 동일시해 방역선을 긋는 배척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조각나 있는 우리가 K-방역이라는 울타리 안에 결속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한가?

‘덕분에 챌린지’ 참여한 중앙방역대책본부의 모습, 사진출처: 링크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지점에 대한 논의를 주류 언론의 보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시사주간지 <시사in>은 작금의 상황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이물감을 조명하고 있는 예외적인 언론의 하나일 것이다. <시사in> 689호에 수록된 전문가 집단의 공동 기고문은 이 사태에 대한 새겨들을 법한 전언을 간직하고 있다. 요점은 “지금까지 추이를 살펴보면 대규모 집단감염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와 미디어가 취한 일정한 패턴”이란 “’희생양의 설정과 낙인찍기’”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논지다.[1] 같은 호에 실린 기사에서 변진경 기자는 코로나 사태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가 확진자 숫자와 속보를 기계적으로 보도하는 관성에 젖어있다고 지적한다. 몇 번 환자가 어디에 있다는 식의 팩트 위주의 보도는 방역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는 데 일조했지만, 동시에 확진자에 대한 기피와 혐오를 조장하면서 팩트 이면에 놓인 사안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를 결락했다는 논지다.[2]

이 논의가 함축하는 사항은 명백하다. 방역 지침을 준수하지 않은 개인과 단체의 책임이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시민들의 분노가 그들에게 향하는 것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에 대한 정보들은 시민들에게 무매개적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비대면의 생활양식에서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수혈되었다. 오명훈 의사의 진단대로,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코로나의 중증도는 텔레비전의 화면으로 본 거지 직접 겪은 일은 아닌 것”[3]이다. 세계가 자연적인 접촉이 아니라 매개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지각되는 시대, 무책임한 확진자와 준법정신을 갖춘 시민들이라는 이분법에 빠지는 순간 미디어의 존재는 중립적 요소로 투명화될 것이다. 상호적인 연대가 사라진 작금의 사태를 오늘날의 미디어와 구조적으로 연관시켜볼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 바로 미디어와 시민을 사로잡고 있는 팩트 중심주의적 사고이다. 우리는 흔히 사실을 알아내는 것을 금과옥조의 계율로 여기며 산다. 그런데 이 믿음과 달리 사실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훼방할 수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아마도 백신 접종에 관한 예시를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지 모른다. 국내의 언론들은 올해 이루어진 인플루엔자 백신 국가접종 후 백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보도를 경쟁적으로 내고 있다. 이 보도는 얼마 동안 국가적 차원의 공포를 조장하며 백신을 기피하는 경향을 확산시켰다. 그런데 백신 접종자의 사망 비율이, 기실 인간의 자연적인 사망률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백신 접종”이라는 원인을 “아침을 먹었다.”거나 “운동을 했다.”는 항목으로 대체한 후에 통계를 집계한다면 “아침 먹은 후 100명 사망”, “운동한 후 100명 사망”이라는 기사를 쓰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다. 접종을 받지 않은 이들이 접종자보다 독감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는 점이 이 프레임에서 고려되지 않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중 무엇이 ‘사실’인가? 아니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인가? 사망률과 백신의 역학적 인과성이 불명확하다는 전문가 집단의 견해는 간과한 채, “백신 접종을 받은 후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행위는 사안에 관한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가.

왜 이런 오인이 발생하는 걸까. 사실은 존재하지만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지혜는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의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사실, 혹은 정보와 이야기라는 대립항을 환기하는 것이 유용할지 모른다. 발터 벤야민은 사실과 이야기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가 하는 것처럼, 일어난 사건의 순수한 내용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이야기는 사건을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보고자의 삶 속으로 침투시키는데, 그것은 그 사건을 듣는 청중에게 경험으로 남게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도자기에 도공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게 된다.”[4] 요컨대 정보와 사실이 객관적인 사태에 불과하다면, 이야기와 경험은 주체가 그 사태에 형식을 부여하면서 내면적으로 구조화하는 문학적 양식에 가깝다.

신문이 대중적인 매체로 부상하던 시기를 살았던 벤야민은 사실이 이야기를 대체하기 시작하는 현상의 유력한 증빙 자료로 신문을 거론한다. 전통적인 매체에 익숙했던 그에게는 개별적인 사실들이 무연관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신문이야말로 “경험으로 용해되지 않는 ‘정보’”[5]가 인간의 지각을 지배하기 시작한 과도기적 국면으로 보였을 테다.(신문을 읽는 문화조차 궤멸에 처한 오늘날에는 격세지감으로 느껴지지만, 플로베르와 프루스트 같은 문인들 또한 신문의 피상성이 문학에 비견될 바 아니라는 이유로 대중 언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바 있다.) 하지만 벤야민이 살던 시기의 독자가 보도와의 시공간적, 심리적 간격을 확보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면, 스마트폰을 보형물처럼 상시 부착 중인 현대인들은 더더욱 파편화된 정보로부터 분리된 순간을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백신과 코로나에 대한 보도가 사망자와 확진자 숫자를 기계적으로 고지하는 방식으로 표준화된 상황이 바로 이에 상응하는 사례다.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의 경로가 틀어막힌 상황에서, 진정으로 부재한 것은 무수한 사실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관한 형식적 차원의 질문이다.

이런 말들이 코로나19가 심각하지 않다는 식의 주장, 서구에서 폐단을 낳고 있는 무책임한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로 단순화되어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개별적인 사실과는 다른 층위에서 존재하며 작동하는 추상적인 맥락의 부재를 말하려 하고 있다. 그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이해의 가능성이 불식될 때, 시민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어떤 것일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로 두려움에 떨며 손해를 끼칠 법한 요인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는 방법이다. 사실을 구조화하는 형식적 차원이 부재할 때, 사실은 사태에 대한 중립적인 기술이기를 넘어, 세계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도 상상적인 이데올로기에 들러붙어 확산된다. 이 각도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것은 ‘K-방역’이라는 성취를 가능하게 한 상상적인 공동체의 실상을 조망하는데 유리한 시점을 제공해줄지 모른다.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 성과는 이해와 연대를 통해 구축한 공동체의 결과물이 아니다. 공동체의 규범에 어긋난 이들에게 즉각적으로 혐오의 낙인을 찍는 행각의 어디에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더 나아가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이어간 젊은 의사들, 그리고 파업한 의사들이 빠져나간 의료 현장을 부불노동으로 메꿔야했던 수많은 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들, 폭증한 배달 업무로 인해 합법적으로 살해를 당하고 있는 배달노동자들을 어떻게 같은 집단의 구성원으로 호명할 수 있단 말인가.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유의미한 합의도 구축하지 못한 채 갈라져 있었다. 그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유력한 선택지로 부상한 것은 가장 보수적인 매뉴얼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이다. 그러므로 이 떄 중요한 것은 공동체같은 게 아니라, 성가신 확진자와 스스로를 분리시키려는 개인들의 수축적 보신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K-방역의 실체인 것 같다. 방역의 유의미한 성과가 팩트중심적 보도로 가능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무조건적 순응에 어긋난 이들에 대한 낙인찍기를 뉴노멀 시대의 모럴로 정착시킨 것 또한 그 보도의 양면이라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기예보가 영토의 윤곽을 각인시키는 지정학적 기제로 작동한다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을 비틀자면, ‘K-방역’은 원자화된 개인들을 민족국가적 상상력을 통해 허위적으로 봉합한 그로테스크한 외과수술의 집도의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인간이 무언가 바꾸기 위해 행동할 뿐 아니라,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6] 주체가 그를 종속시키는 의례적이고 관료적인 대타자의 규범에 무자각적으로 순응할 때, 행동은 내면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실천이기를 멈추고 실질이 제거된 행위, 그래서 오직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알리바이만을 충족시키는 유사-능동성으로 변질된다는 논지다. 아마도 사실 보도에 대한 관행 또한 그런 종류의 규범으로 정착한 채 타성적으로 이어져 왔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리자면 “현 상태는 뉴스를 통제하기보다 오히려 흘러넘치게 할 때 오래도록 충실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7]

편향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박 아래 사실을 쏟아낸 언론이 잃어버린 것은 의제를 설정할 책임감, 사태를 납득할 수 있을 방식으로 조직할 형식적 차원의 책임감이다. 우리는 이 상실된 책임responsibility을 행정적인 ‘책무 accountability’가 대체한 풍경을 보고 있다. 김수련 신촌세브란스 병원 간호사가 기자들의 한 행태를 고발한 페이스북의 우화는 이 풍경의 끔찍한 이면을 예시한다. 그가 대구의 한 코로나19 중환자 병실로 파견된 첫날, 휴게실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휴게실 문이 열리고 기자 둘이 들어와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선생님들 몇 시 몇 분까지 상황실로 오라는 말 못 들었어요?’ ‘예, 갔는데, 아무도 없던데요?’ ‘우리가 선생님들 찍으려고 했는데 기다렸어야지! 찾아다녔잖아요!”[8]

현실의 파편을 기계적으로 절취하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했다는 관행이 만연화될수록, 객관적으로 부여된 일거리를 그저 처리했다는데 만족하는 책무성은 사태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대체해 갈 것이다. 엄기호에 의하면 “책임이 주로 도덕적이고 내재적인 것을 의미한다면 책무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고 객관적인 책임을 의미”[9]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 책임의 부재는 전문가주의의 실종과도 맞닿는다. 확진자가 이틀 만에 몇 자릿수가 되었다는 식의 단속적인 보도를 쏟아내며 대중을 일희일비하게 만드는 게 대체 사태에 대한 무슨 성찰을 요청한단 말인가. 급기야 한 언론사는 일일 확진자 수가 두 자릿수에서 세 자릿수로 증가한 날, “4일 만에 세 자릿수를 ‘회복’했다.”고 보도하는 예견된 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사실 보도라는 이데올로기가 언론사 폐단을 함축하고 있는 노른자위인 또 다른 이유다.

이 복합적인 문제를 기자들만의 책임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레거시 미디어가 궤멸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사들은 수익성 창출과 직결되는 웹페이지의 조회수를 늘릴 수 있는 자극적이고 단속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매뉴얼을 반강제적으로 정착시킬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기자인 지인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아예 연예인과 인플루언서의 사사로운 행적과 가십을 담은 기사들만 전담해서 써야하는 신입 기자들이 있다고 한다. 관료적인 구조 안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변화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기레기’라는 개인의 문제로 인격화하기보다는, 주목을 끌어모으는 것이 그 자체로 재화로 전환되는 오늘날의 “주목 경제”[10]에 대한 구조적 성찰로 연결시킬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비대면 시대의 미디어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논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닐 정도로 방대할 테다. 지금 떠오르는 한 가지 항목에 대해서만 더 얘기해보고 싶다. 끝없이 쏟아지는 사실을 의무적으로 숙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동행하는 것은, 미디어에 상시적으로 접속해 있어야 한다는 심화된 압력이다.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며, 비대면을 표준화된 라이프 스타일로 간주하며 사회적 제반 시설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유행병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이 주장은 기술이 어떤 식으로든 인류에게 협력적인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며, 끊임없이 갱신되는 기술의 교체주기에 인간의 의식이 조화롭게 조응해 나갈 것이라는 진부한 기업가적 수사학에 의존한다.

새로운 기술이 도래하는 과도기적 국면마다 데자뷰처럼 출몰했던 이 주장의 문제점이 단지 기술 중심적 사고에 경도되어있는 점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외려 이 주장의 문제는 기술 발달의 경로를 고도로 정치적이고 진보적인 청사진 안에 가두어버리면서 인간 중심적인 이해관계를 탈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정은 그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우리가 기계이다.”라는 프랑코 비포-베라르디의 표현대로, 인간이 기계를 조작하는 게 아니라 신체가 기계가 된 것 마냥 수동적으로 조립당하곤 한다.[11] 가령, 동영상 어플은 그저 가시적인 정보를 수용한다는 교육적인 목적에만 전용되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그래피와 각종 디바이스에 대한 중독, 그 디바이스의 사용이 의무화하는 관계의 고립과 신체적 습관의 재구조화를 수반한다. 미디어 이론가 조너선 크래리의 말대로 “스펙타클 중심적 문화는 단순히 주체를 보게 한다는 필요성에 의존하기보다는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각각 소외되고, 분리되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게 하는 전략들에 기대고 있는 것.”[12]이다.

각종 디스플레이의 장착을 의무화하라는 요구가 커지면 커질수록, 계속해서 갱신되는 테크놀로지의 재배치, 업데이트되는 정보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성취 불가능한 조바심 또한 비례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오늘날 SNS에서 진행 중인 소위 소통과 담론이 진보와 보수, 문화와 정치를 막론하고, 그저 사정을 알만한 내부자들, 페친들, 이웃들끼리 논쟁의 여지가 제거된 서로의 게시물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며 좋아요를 눌러주거나, 폐쇄적인 밈만 주고받으며 사회성을 잃어가는 과정으로 전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담론들은 종종 사회에서 외면된 소수자들을 향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런 강박을 놓지 못할 수록, 재배치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 소외계층은 본인들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끊임없이 위계화되는 정보의 최하층으로 내몰릴 것이다.

우리가 들여봐야할 것은 그 이면에 놓인 사안들이다. 변진경 기자는 코로나19 이후 교육 격차가 늘어났다고 말하면서 저소득층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운동 시간의 감소와 식습관의 불량, 사회적인 고립의 증가를 경험했다는 탐사보도를 덧붙인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인상깊다. “풍요롭고 안정적인 세계가 새로운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나갈수록, 취약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의 고통은 더욱 다양하고 깊어질 것”[13]이라고. 사실 보도에 맹종하는 우리, 코로나를 대전환의 계기로 숙고하기보다는, 원래부터 충분히 문제적이었던 우리의 ‘정상화된’ 라이프 스타일로 복귀하기만을 염원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현실이 여기에 있다.

 


[1] COVID-19 워킹 그룹, 우리의 ‘방역 소통’은 충분히 최선이었을까, <시사in> VOL.689, 2020.12.1
[2] 변진경, K방역은 있는데 ‘K언론’은 왜 없을까, <시사in> VOL, 689, 2020.12.1
[3] 변진경, 지속가능한 방역에 대한 어느 의사의 질문, <시사in> VOL 681-682, 2020.10.6/13
[4] 발터 벤야민,「보들레르의 모티프에 관하여」,『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 김영옥/황현산 역, 길, 2010
[5] 발터 벤야민, 앞의 글
[6] 슬라보예 지젝,『How to read 라캉』, 박정수 역, 웅진 지식하우스, 2007
[7]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최민우 역, 문학동네, 2014
[8] 김수련, <대구 코로나 간호사의 목소리 3:벙어리 간호사들>, https://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449253575254146&id=100005085514400
[9] 엄기호,『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따비, 2013
[10] 구글이 겨우 1년 남짓된 비공개 기업이었던 90년대 말, 장차 CEO가 될 에릭 슈미트는 21세기의 경제가 꾸준히 사로잡고 통제할 수 있는 “안구eyeballs”의 수를 극대화하는 것이 관건이 된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조너선 크래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역, 문학동네, 2014) 그의 주장은 현실이 되었다.
[11]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미래 이후』강서진 역, 난장, 2013
[12] Jonathan Crary,『Suspensions of Perception』, The MIT Press, 2001
[13] 변진경, ‘뉴노멀’의 어린이는 배고프고 아프고 외롭다, <시사in> VOL. 688, 20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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