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_뀨르와 타르_RRRRRRRRRRR..

조재연

⟪RRRRRRRRRRR..⟫ 전시포스터, out_sight, 2020. (포스터 디자인: 정윤하)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슬라보예 지젝 (11.10.08. 월가점령시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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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해안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바다는 강으로 흐르지 않기에, 그것이 영영 삶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한다—못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코르크 마개로 닫힌 구원의 글귀나 형상이 있을 것인 한, 의무는 도무지 저버리지 못한다. 마지못해 해안선에 도착하는 비지 않은 병들. 비로소 그 병들을 기다린다. 그들은 각자의 무인도에 제 발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짓고 지은 것을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었냐고는 물을 수 없다. 구원은 절망의 무릎에서 올 리가 없는 까닭이다. 병 안에는, 오직 흘겨 볼 시야와 성토할 입조차 잃은 절망의 나락에서 찾은 것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는 부재하는 목격과 증언을 갈음할 유일한 증거가 담겨있다. 그렇게 그들은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서 선택할 수 없었지만, 단지 어떻게 끝날지는 선택할 수가 있었을 뿐이다. 해안선에 도달하는지 혹은 더 나아가 삶의 근처까지 도착하는지는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도달과 도착을 가지고 실패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멈추는 순간은 실패가 된다.

세계가 곧 지구나 자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인위적으로 배치된 인위적인 사물들, 그리고 그것에 자극되는 반응이나 그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건들이 외려 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니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공동의 세계는, 내가 있는 자리로 당신이 다가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야 ‘우리’란 말이 생기듯 또 같은 무대에 올라가듯, 어떤 공동의 사물을 함께 취하는 것에서 열리게 된다(한나 아렌트,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105쪽). 따라서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란 ‘새로운’ 인공품을 기존의 인공품들의 사이로 ‘개입’시키는 것이 된다. 여기서 ‘새로운’과 ‘개입’이란 낱말이 동시에 사용되는 이유는, 그 인공품이 단순히 새롭게 출현하는 것을 넘어서 인위적인 배치(를 만드는 질서)를 거스르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 배치 또한 함께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새로운 인공품은 효용과 같은 자본제적 질서에 종사함으로써 기존의 배치를 강화시키거나 원활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인공품인 예술은 질서를 거스르거나, 그 자체에 무지함으로써 배치를 헝클어트린다.

그러나 애써 말하고도 변화는 눈동자에 부딪쳐 오지 않는다. 그렇게 그것은 생生을 완성할지, 술術을 완성할지를 고민하게 하거나, 차라리 이 둘 모두를 회의하도록 만든다. 다만, 부딪치지 않은 것은 ‘지금여기’ 우리의 눈동자뿐인 것이라고 의지해볼 수는 없을까. 해안선을 지켜보는 굽은 자세란 그런 것을 가리킬 것이다. 예술은 그 어떤 인공품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빵과 옷처럼 마모되지 않으며, 사물을 부식시키는 시간에 온전히 저항한다. 그것은 소유자가 변천을 겪는다 해도 작가와 제목이 늘 변천에서 벗어나듯, 난리 속에서 도둑맞은 것이 되든지 거래의 대상이 되든지 관계없이, 어떤 위력威力과 교환도 모른 채 이름들을 지켜낸다.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 얘기함은, 세계를 완결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과정에 놓여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고작 ‘지금여기’의 과정에서만 여직 결과를 내놓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최선은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음을 끝낼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RRRRRRRRRRR..⟫(out_sight, 20.11.13-12.10.)은 답을 끝없이 연기하고는, 물음을 더없는 미궁으로 끌고 간다. 이 전시라면 우리를 해안선에 더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다만 멈추는 순간은 실패가 될 테니.

뀨르와 타르, ⟨연태고량 (烟台古粮)⟩, 단채널 영상, 23분 27초,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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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동안 노상에서 수거한 서른 개의 작업과 그에 대한 타르 혹은 뀨르의 코멘트로 구성된 설치 작업 ⟨금의환향⟩, 그리고 이 작업에 대한 막후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 ⟨연태고량⟩으로 ⟪RRRRRRRRRRR..⟫은 구성되어 있다. 두 작업은 마땅히 언급한 순서를 따르지만, ⟨금의환향⟩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선 막후의 이야기를 먼저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연태고량⟩에서 뀨르는 가정된 관객과 함께 연태고량과 양장피를 먹는다. 연태고량에 양장피가 따르는 이유는 그에게 지연되거나 연기된 물음이 단지 남아있는 까닭이다. 그는 오래 전에 동일한 것을 먹으면서 나눠진 말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했죠. ‘나’는 예술로 세상을 바꿀 거라고.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했어요 ‘너는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없어’ 혹은 이런 거예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창작들이 십만 년 후의 인간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과 십만 년을 경유하는 감동을 전하는 것, 이 둘은 예술의 어떤 동기다—혹은 어떤 예술의 동기다—. 그러나 그가 예술을 했다는 십 년 동안 그 어떤 동기들도 성취되지 않는다.

다시 그러나, 문장은 이렇게 쓰여질 수도 있다. 그가 예술을 했다는 십 년 동안 그 어떤 동기들도 ‘아직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리고 십 년 동안 어떤 동기도 성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기꺼이’ 예술을 하려 한다. 그는 오래 전에 나눠진 말들을 한 때의 순수함이 존재했던 우발적 사고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가 여전히 이 동기들에 대해 언급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과, 이를 언급하는 음식이 묻은 입을 지워지지 않을 소매에 기꺼이 닦는 까닭은, 모두 그것에 ‘아직은’이라는 말과 ‘기꺼이’라는 부사를 문장에 덜어낼 수 없는 데 있다. ⟨금의환향⟩에서 공룡인 타르는 그의 벗인 브론토사우르스, 프테라노돈, 파키케팔로사우르스는 기억하지만, 그의 어미의 경우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한다고 토로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시작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끝날지에 대한 것이다. 뀨르는 ⟨금의환향⟩의 ‘주황’이란 제목의 영상에서 민중가요인 ‘불나비’를 잊지 않고 노래한다.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가사는 우리가 어째서 불나비인지 증명하지 않고, 선언적으로 불나비임을 규정 짓는다. 어떤 성취가 불나비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는 없다. 외려 그 성취가 불에 타버리는 것이라면, 불나비의 존재론은 불을 향해 다가가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과정 중에 있는 것이 된다. 무엇도 성취하지 않은 예술은 다만 이다지도 멈추지 않는다.

뀨르와 타르, ⟨금의환양⟩-추상, 설치, 혼합매체, 2020

⟨연태고량⟩은 ⟨금의환향⟩에 설치된 서른 개의 작업에 걸맞은 제목을 붙여줄 것을 요청하며 마무리된다. 이들 작업에 제목이 없는 것은 그들이 모두 쓰레기 더미 옆이나 전봇대 아래 등과 같이 노상에서 뀨르와 타르가 거두어 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그렇게 어디선가에서 표류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이 표류는 모두 자발적인 것이다. 주어진 세계의 주어진 배치에 종사하지 않는 작업들이란 대부분 수장고로 빨려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이러한 표류를 선택한다. 그들은 주어진 세계에 등록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다. 그중 하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의미가 싸움에서 승리한 이후에 전리품처럼 결과로서 획득되는 것처럼 전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의미는 외려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결과로 이미 가득 찬 세상이 무의미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삶이란 또 예술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에만 그 의미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 미상의 작가들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들을 무인도 밖으로 내던졌다. 작업에서 작품이란 결과물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것에 들어간 순간의 시간만을 챙기려는 것. 그것이 의미만을 가장 급직적으로 보존시킨다.

뀨르와 타르, ⟨금의환양⟩-오리, 설치, 혼합매체, 2020

따라서 그들은 함께 노상 위에 버려졌을 일상의 인공품과는 달리 마모되지 않는다. 버려지거나 얼룩진, 또 젖거나 찢기는 마모를 겪은 이후에도 마모되지 않는다. 그들이 마모에서 면제되는 것은 그들이 물리적 실체만으로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의환향⟩의 ‘오리’에서 깨진 유리, 찢겨진 종이, 그리고 부서진 액자는 결코 마모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발적 마모가 아니라 필연적인 작업(의 과정)이다. 타르는 그것에 “이 쪽에서 날아온 오리들이, 유리를 깨고… 종이를 찢고… 액자까지 부수고, 저 쪽으로 날아갔습니다.”라고 붙인다. 마모가 없었다면 갇혀 있었을 그림의 대상들이, 마모를 통해서 외려 실재로 나아간다. 오리의 방향은 정확히 예술이 추격하는 방향과 동일하다. ‘매화’에서 타르와 뀨르는 그것의 얼룩을 닦아낼지, 말지를 고민했지만 결국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매화는 그 덕에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핀 꽃으로서의 의지를 더 완고하게 지켜낸다. ‘홍시’는 호우가 예보된 날 그가 젖기 직전에 구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로소 뀨르와 타르의 작업실 침수로 인해 젖고 만다. 타르는 이에 “젖을 운명이었나봐요.”라고 말한다. 그 갈색의 자욱 때문에 감나무는 그에게 걸맞은 가을의 배경을 지니게 되었다.

마모의 기입이, 작업이 표류하는 도중에 세계와 관계하는 일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금의환향⟩은 타르에 의해서 직접 마모가 기입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타르는 ⟨금의환향⟩의 작업들과 마주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오독을 통해 작업에 생채기를 낸다. 그는 매화를 보고 “벚꽃이 진짜 예쁘네요.”라고 말하며, 진달래를 보고 무궁화라 언급하기도 한다. 또 연을 날리는 소년은 뒤집어져 낚시에 나선 소년으로 해석되고, 차를 달이는 정숙한 모습은 R&B/Soul 안무의 웨이브로 전용된다. 이러한 오독들은 모두 파도가 멈추어 정체된 코르크 병들에 물결을 더한다. 이는 전통이 동시대적인 것이 되는 일과, 고전이 모던이 되는 일, 그리고 존재를 생성으로 열어젖히는 일과 관계됨으로써 예술이 스스로에게 무한한 시간을 부여하는 일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글 역시 오독이 될 줄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나 타르의 해석이 그러하듯 예술이 오독이라는 빛에 의지해 다음 해안선까지 닿는 일이라면, 이 글 역시 그러하기를 조금은 바라보려 한다.

뀨르와 타르, ⟨금의환양⟩-다도, 설치, 혼합매체, 2020
마모 되었으나 마모되지 않은 것들은, 차라리 그 마모를 통해 작업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린다. 기존의 인공품의 경우 완결되지 않음 혹은 그것의 훼손이 인공품을 폐기시킬 연유가 되지만, 예술로서의 인공품은 작업의 미완과 훼손이 외려 작업을 강화시키킨다. 그리고 이는 가멸可滅적인 인간에게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가멸(적인 세계)과 불화하는 불멸(하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선사한다. 그러한 “예술의 현저한 영속성 때문에 에술작품은 모든 구체적인 사물들 중에서 가장 세계적인 사물에 속한다.”(『인간의 조건』, 227쪽)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눈동자에 부딫쳐 오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과 ‘기꺼이’란 부사를 덧붙이며 누군가 헌신을 지속할 수 있는 까닭은 또 십만 년의 시간을 고대할 수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시간에 의해 모든 인공품이 또 이를 넘어 산맥마저 녹아내리는 순간에, 작업은 홀로 남아 공동의 사물이 되고 지금의 배치를 헝클어트릴지도 모른다. 시간이—혹은 세계가— 그것을 내려친대도, 그 손만이 마모될 뿐이다.

그렇다면 서른 개나 되는 작품임에도 ⟨금의환향⟩이란 뭉뚱그린 집합의 제목만을 뀨르와 타르가 지은 연유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제목이 주어졌더라면 보는 이는 그 작업들의 출처와 관계없이 완결된 형태에서 그 작품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목없음’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닌, 제목의 미상—또 작가의 미상—은 예술의 완결을 가히 지연시킨다. 한편으로 ⟨연태고량⟩에서 뀨르는 관객에게 ⟨금의환향⟩에 설치된 작업들의 제목을 지어주기를 요청하고, 그 제목을 지어준 관객의 집으로 해당 작업을 송부해주기로 약속하는데, 이 경우 뀨르와 타르는 관객의 손으로 작업을 완결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요청의 목적은 완결의 지연을 무마시키는 데 있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목적을 향한다. 관객에게 제목이 요청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작업의 이름이 아닌 별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별칭은 진실한 이름으로부터 작업을 더 먼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이 별칭이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별칭에 대한 요청은 외부의 사물을 —별칭을 지은 관객에게— 공동의 사물로 변천시키는, 다시 말해서 예술이 ‘아직’이란 부사 뒤에 있을 시간에 성취할 것을 ‘지금여기’서 성취해보려는 최소한의 실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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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 의해서 떠받쳐진다. 이 질문은 어떡해서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가장 현명하고 완결된 대답으로써 종결되거나, 외려 근본적이고 자명한 것이기에 전제의 형태로 주어질 뿐 다시 물음의 형태로 발생하는 일은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다. 뀨르와 타르의 ⟪RRRRRRRRRRR..⟫은 종결되거나 전제가 됐기에 더 이상 질문의 형태로 존재할 수 없는 두 문장을 ‘아직’ 이행 중인 물음의 형태로 바꾸어낸다. 우리에겐 두 질문을 미제 사건처럼 폐기하거나, 이미 모두가 알고 —그 이후의 일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기에 물음을 멈춰야 할 하등의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RRRRRRRRRRR..⟫ 이후라면, 예술이 한동안 무엇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 그것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무엇을 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두 질문은 난생 처음 던져지는 것처럼 폭로될 것이다. 전시가, 적어도 예술이 도달해야할 장소가 있다는 것 혹은 어떤 것이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어떤 존재 증명을 이루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종결되거나 전제가 된 질문의 답을 연기하는 것을 통해서, 물음을 재생한다는 해석이 고루한 것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작업의 실패가 아니라 이 글의 실패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과장을 경계하기 위해서, 여기서 나타난 새로움과 차이들을 이미 존재했던 사건에 고스란히 귀속시키는 일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예술을 정태적인 구조로 고착시키는 일이 된다. 비평은 크게 말할 때 크게 깨진다 말한다지만, 나는 깨지고 난 뒤의 조각의 크기에 대해서 생각하려 한다. 사랑, 정의 그리고 평화 따위의 주제가 흔해져 더는 새롭지 않은 것처럼, 실천적 층위에서 예술의 의미는 흔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흔해짐 때문에 이들에 인색해질까 두렵다. ⟨금의환향⟩의 ‘다도’에서 차를 달이는 정숙한 모습은 R&B/Soul 안무의 웨이브로 전용된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제임스 브라운의 I Got You(1965). “I feel good, I knew that I wouldn’t of(기분이 좋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 가사의 ‘I knew that I wouldn’t of ‘는 좋은 기분을 유발하는 것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 이미 반복된 일이라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에겐 반복된 것이 새로운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노래가 멈추어도 흥은 가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렇다 해도, 기꺼이.

 


*참조
신형철, 「인간의 형식」, 『문학동네』, 2018.
심보선 외,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 『문학동네』, 2009.
진은영, 「시인, 별종 또는 마지막 청자(聽者)」, ⟨연린연단⟩ ‘7. 예술과 근대 사회’ 발제문, 2018.
한나 아렌트,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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