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인_무심코에 대하여

한혜인

@_arometz/2019 acryl on paper 29.7×42 cm

훗날 우리는 온 국가가 공통적으로 처하게 된 위기상황과 그에 따라 새로 성립된 생활양식을 떠올릴 것이다. 사재기, 휴지 대란, 기름값의 급락, 마스크 착용의 의무화와 그 효용에 대한 엇갈린 논의 등 전에 없던 해프닝들이 표지가 되어 후에 동세대 간의 유대를 부흥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아직도 ‘예외적’으로 여겨지는 이 상황이 종식된다면 말이다. 코로나 사태와 더불어 2020년을 휩쓴 또 하나의 화두는 차별에 대한 저항운동과 언론의 각별한 주목일 것이다. 차별적 인식과 요구에 더 이상의 함구를 거부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성범죄 발각 행위를 중심으로 울려 퍼졌고 미국에선 BLM운동(Black Lives Matter)이 근래 정권의 극단적인 포퓰리즘(populism) 플레이와 연동 작용하여 소셜 네트워크에서의 시각적 소통을 기반으로 큰 여파를 일으켰다. 사회문화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전례(傳例)구조화된 인종간 불공평은 전염병이란 인류적 재해 앞에 통계 위 죽음의 숫자로 확인되었다. 시대적 전환과 무관 하게도 인간들은 스스로를 못 박은 장소에서 편 가르기, 탓하기와 증오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국가, 민족적 타자화(othering)에 분열이 만연해지면서 보복식의 대결구도는 폭력적 갈등을 확대했다. 따라서, ’ 인류애’는 더욱 신화화되었다.

이는 환경, 계급, 인종, 젠더 등 다양한 범주 안에서 진보적 운동을 진행하던 목소리들이 묵살당하는 순간이었다. 바이러스가 발발한 곳으로 알려진 국가에 대한 폄하를 토대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감이 공식화되며 무고한 대상을 향한 언어, 신체폭력이 만연했다. 이런 맹목적인 비난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가까이에서도 실감하지 못했는데 필자는 그것이 인종에 따른 멸시와 차별이 일상이었기에 세간에 충분한 자극이 되지 않은 까닭인지, 정령 현 사회는 바이러스의 속성을 피부색에서 찾고 ‘엘로우’(yellow)에게 처벌을 하려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며 비정한 현상에 반발심을 가졌다. 아이들과 부모, 직장인과 학생, 노인들을 상대로 농담처럼 일어난 폭력사태는 피해 가능자들이 스스로를 감금하도록 압박했는데 그들의 고난은 응당한 공감을 받지 못하는 반면 바이러스 전파에 대한 영화적 음모론은 자꾸 성대해져 분노와 보복적 공격성을 전도했다. 연속되는 배제에 관하여 필자는 본인의 체험적 이해와 유회하는 간접경험을 통한 통찰을 서술한다. 거의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요새의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정치적, 사회적 규범에 역정을 내며 대중문화를 장악해 나가는 듯 보이지만 꾸준한 부당에 실상 대수롭지 않은 것은 왜인가? 그들의 운동은 과연 몇 번의 포스팅(posting)을 위한 겉치레에 준하는 것인가?

무지할 수 있는 권력

교육은 대게 잘 아는 것, 지식이야말로 판단과 인식체계를 확립하고 문명을 피워내는 영양분으로써 인류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앎이 곧 긍정적 수행이라는 요약적 정의는 위험하다. 어쩌면 당신은 무엇인가를 알고 난 뒤 변화를 주도하며 과거의 무지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신이 모르기에 더 탄력을 받고 활발히 번식하는 시련이 있고 당신의 주체적인 무지는 가해의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을. 내게는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중한 것을 망치지 않기 위해 방해되는 일련의 이벤트는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나의 민족성이나 피부색으로 인해 처음으로 멸시를 당했을 때 이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수치심과 분노를 발견했다. 납득할 수 없었으나 낙관하기로 스스로를 설득했는데 이는 ㄱ. 부정적인 사고로 인해 나의 일상과 계획이 틀어지거나 그 일에 얽매여 손해를 키우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고 ㄴ. 말썽을 부리면 이 나라에서 ‘퇴출’ 당할 수 있다는 염려 까닭이었다. 이를 주제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선호하지 않았던 것은 피해 입은 순간들이 입에서 연명하면 상대에 대한 증오가 커지고 못되고 무식한 사람들이 산다고 여겨지는 곳에 더 발붙이고 지내고 싶지 않아질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정말 이곳에 살면서 얻고자 하던 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태도로 인해 무시되는 것은 없었다. 본인이 아무리 거부한들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영향을 미치므로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는 주문은 터무니없다. 나는 그저 ‘인종차별’이라는 사회문제에 대해 알아가는 것을 포기한 셈이었다. 체류 기간이 길어지고 이 일이 일상에서 끊임없이 반복될수록 ‘피해’는 내부와 외부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부정적인 경험은 휘발되지 않고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쌓인다. 희롱과 조롱의 대상이 된 기억들이 말 그대로 당사자를 짓누른다. 어떤 기억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경험은 매번 그것이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인과관계’, 즉 ‘이렇게 해서 저렇게 되었구나’를 탐구하는 단계를 거칠 것이다. 대상이 된 당사자는 기어이 본인이 표적이된 원인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표출하는 표면적 도구, 몸에 걸친 옷, 화장, 행동 등을 전반적이고 객관적으로 검열한다. 상황 발생 가능성이 잠재된 공간을 파악해 상황 자체를 회피하려 할 것이다. 한데 그곳이 외출 그 자체(길거리, 공공장소이며 불특정 시간)이니 그는 사건의 불가피성을 인지하고 항시 주위를 경계한다. 그의 경계심은 그가 사회성을 발달시키며 체득한 기본적 요소들을 비활성화한다. 눈 맞춤, 우연, 웃음, 호기심 등 보다도 그는 대게 교류를 거부하는 듯한 무표정이나 화난 얼굴을 수반하고 있을 것이다. 반응에 무뎌지며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우울감, 정신 불안, 무기력에 압도될 수 있다. 이렇듯 자칫 가볍게 여겨지는 미미하고 일상적인 인종차별적 행위(micro-aggression), 외계 생물을 보듯 신기하게 응시하는 눈빛, 특정 국가의 인사말을 던지는 것, 특정 국가의 언어를 희화화한 단어, 성적으로 희롱하는 소리 등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고 스미어 피해자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인종차별을 한 사람은 있어도 당하는 사람은 없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이란 개념은 받는 이에 의해 실존하는 피해의식이라고 생략하여 의의한다. 본인 스스로를 약자로 위치시키는 순간 진정 약자가 된다는 논리로 상황을 무시하는 것이 곧 정신 승리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개인적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자의식의 합리화를 시도할 뿐이다. 보지 않는다고 먼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쓸어내지 않아 쌓인 먼지는 들숨과 날숨마다 폐 속으로 날아 들어올 것이다. 나는 반복되는 조롱과 멸시, 희롱을 당하면서 무엇이 내 삶에서 꺼져가는지를 보았고 일을 이렇게까지 방치한 나 자신에 분노했다. 내 안의 많은 것들이 불가해졌을 때야 이 경험들의 나열이 가진 파괴력을 마주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도 편견의 시선을 인지할 때마다 매번 대립하진 않는데 이는 사건의 수와 에너지 소비가 너무 많은데 비해 상대방의 대화 참여율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잘못을 지적할 때 제일 많이 들려오는 대답은 ‘몰랐다’이다.
대부분은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며 잘못을 부정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게 그 잘못을 돌려 묻는다. 문제는 공격적인 말을 하는 이들이 자신이 가해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 *(그저 장난일 뿐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무지한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에 있다. 자신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믿음이 상대의 안위와 상관없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방자함을 허락한다. 대게 소수자를 향한 무례한 행동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의 경우, 부모는 ‘아이’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며 잘못을 정당화시키고 나를 인정머리 없는 인간(왜냐하면 나는 성인이니까)이라 비판한다. 아이를 미개한 생명으로 정의하여 방치하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적 권력 행사이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아시안 인종차별적인 놀림을 받는 아이 엄마의 날 선 대항을 비난하는 독일 부모들이 있다. 그것이 ‘지나치다’는 입장이었다. 반대로 생각해서, 자신들의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하일 히틀러, 나치의 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어떻게 대처할까? 자국에서 메인 그룹에 속한 그들은 아시안 아이의 부모와 같은 상황에 놓일 리가 없어 그들의 심정을 이해 혹은 그에 공감하지 못하기에 결국 2차 피해를 낳는다.

베를린 호른바흐 매장 앞에서의 한국 교민 1인시위, 사진출처

0.5. 미뤄지는 무지에 대한 책임

반응을 ‘선택’이라 이해하는 사회에서는 반응하는 자가  일의 심각성을 초래한 꼴이 되어버려 사건의 시작 혹은 발단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잦다. 이는 성추행 사건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예를 들어, 늘 있던 상사의 성추행을 참아온 누군가가 어느 날은 즉각적으로 ‘만지지 마!’라고 해서 상대방이 더 흥분했고 성추행이 강간까지 갔을 때,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지, 왜 일을 키웠어?’라며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이 일이 언론에 퍼져 회사의 이미지가 손상되고 사내 모두에게 어려운 상황이 닥치게 되었을 때, 직장 동료들이 ‘고발자’인 피해자를 탓하기 쉽다. 길거리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대립하다 폭력사태가 일어나서 입원한 동양인 Rim은 ‘그냥 멈추지 않고 가던 길 갔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하며 그날따라 ‘감정적’으로 반응한 자신을 탓한다.
이 경우에 감정적인 반응이라고 칭하는 것은 생각 회로를 거치지 않은 즉각적인 반응이다. ‘앞뒤 생각 없이 감정적으로’ 한 반응은 잘못으로 취급받는다. 행동 이전 반응이 몰고 올 결과와 책임을 순식간에 계산하는 이성적 반응은 예를 들자면, 직장 상사의 농담을 듣고 웃겨서 웃지 않고 웃어야 할 것 같아 웃는 것이다. ‘즉각성’을 잃은 반응은 순간의 상황과 상대방과 자신의 위치와 그의 앞날까지 모두 고려한 그것이다. 차별의 상황에서의 피해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알려고 하면서 대응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당한 대응을 강요하며 즉각적 반응을 문제의 실마리로 간주하는 것을 멈추고 이것을 인간적 반응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이외에도 피해 당사자는 여러모로 자신을 탓하게 된다. 나는 예전, 또래의 친구들이 나를 개별적 인격과 역사를 가진 사람이 아닌 ‘외국인’으로 대할 때, 어느 순간 나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아시아에서 온 여자 하나일 뿐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 문제를 지적하여 해프닝을 일으키지 않고 쉽게 연을 끊어버렸다. 그들에게 등을 돌리며 나 본인이 그들에게 무지를 허락해 버린 것 아닌가? 그렇게 나는 스스로 잘못을 얹으며 함께 자리에 있던 그 누구에게도 ‘아무 일 없었던’ 그날을 떠올린다.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외국인 체류자로서 살아가며 체험으로 알아간 복잡하고 세세한 점, 선, 면은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한국이 독립된 영토와 언어를 가졌고 내가 국민이라는 주류 그룹에 속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곧 이는 무지할 특권인 것이다. 변두리에 공장지대가 위치해 노동비자를 받고 체류하는 이주민들이 대거 거주하는 안산에서 유년/청소년기를 보냈지만 나는 선생님이 아닌 외국인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 나는 내가 동양인, 동아시아인이고 옐로이며 유럽에서는 대게 차이니즈로 불린다는 사실에 무감각함과 동시에 외국인을 ‘들어본 바’로 알고 있었다.

0. 상식화할 권력

미국에서의 오랜 인종차별 정책과 탄압은 가히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또한 실현될 만큼 되뇌어져 퇴적되어왔다. 기술의 발전으로 교육의 장으로 자리 잡은 미디어를 통해 선전된 미국 문화는 가히 신선하고 자극적 이어 ‘문화 식민’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한 시대에 진한 물을 들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진하기가 확연하다. 지구의 동양 쪽에서 한 소년은 미디어를 통해 서양인을 처음 인지하며 미디어 속에서 묘사되는 그들의 ‘종특한’ 사고방식과 행동반경을 머릿속에 사실로 저장하니 곧 소년이 시청한 프로그램은 소년의 시선이 되기 마련이다. 미디어에 반영된 출신에 관한 고정관념이 답습되어 전이된다. 권력자 한 사람이 뱉는 단어는 되감기 되어 여러 채널에서 반복적으로 돌기 때문에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 바로 이런 이유로 트럼프가 카메라 앞에서 무턱대고 하는 말들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의 공격적인 무지는 미디어를 통해 연속적으로 불어나 파괴력을 갖는다.
누군가 한국에서의 인종차별은 백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백인 선호, 어두운 피부색에 대한 선입견, 대중에게 인증된 소비적 이미지들만 착취하여 이용하는 자본주의 시장, 그로 인해 다시 덧쓰여지는 고정관념과 스티그마(stigma)가 닮아 있지 않은가. 한국전쟁 이후로 미국이 한국문화와 이데올로기에 미친 영향은 기독교란 종교 사상을 기반으로 대단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서양에서 만들어진 차별의 기준과 방법들이 동양에서 똑같이 반복될 수는 없는 것이다. ㄱ. 백인 중심사상인 그것을 반영하기에 동양인은 주체, 당사자가 아닐뿐더러 ㄴ. 그러므로 그들은 개념화에 있어서도 주체이기 보다는 대상이며 공식을 안내받는 ‘구독자’ 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미국인은 ‘백인’이고 흑인은 래퍼, 갱스터, 스포츠 선수라는 기정 된 사고는 그들이 스스로 성립한 것이 아니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동양의 문화를 착취하고 소비하며 유럽 중심사상을 키우는 데 기여해왔다. 유럽에서 관찰된 미지의 대륙, 아시아. 그곳에 대한 편견, 신화들은 동양 문화를 엑소틱(exotic)하다 수식되어 시장에 팔린다. 이가 반복되어질수록 그곳의 사람들은 외계화 된다. 한 나라의 역사와 전통적 이미지는 퍼포먼서에 의해 기괴하거나 키치하거나 섹슈얼하거나 웃긴 것이 되고 어떤 연출자는 그것이 자신의 창작이라 우긴다. 서양인이 가진 동양인에 대한 판타지와 고정관념 그리고 그에 따른 기대와 요구는 대상자의 적극적인 맞대응으로 지속되기도 한다. 식민시대부터 지속적인 서양이 ‘선진’한다는 인식으로 그곳에서 인정받음을 성공이라 칭해 자국심을 높이는 방식의 시장조성은 한국 사업, 문화 정치판에 대표적 감상이 되었다. 유럽풍의 주거단지, 가구를 명품이라 생략하며 기호하도록 설득하며 서양식 식단과 와인은 럭셔리, 한식은 서민적이다는 인식은 팽배해 있다. K-pop, K-beuty, K-cinema 등 사이 K- 방역이 포함되며 알파벳 K는 앞서 말한 감상의 시각화라 보이기도 한다. 아이돌은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대중’이 원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들을 ‘홀리는’ 목적으로 모습을 상품화하는 과히 고객 중심 가변적 직업군이다. 환상과 기대의 충족을 사고파는 이 시장에서 기계나 인형, 마치 게임의 아바타처럼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도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서양에서의 소비자 급증은 크게 놀랍지 않다.
독일 거리를 걸으며 레스토랑 간판들을 살피면 금방 어떤 곳에서 ‘아시아스러운’(asiatisch) 음식을 파는지 알 수 있다. 모두 공통의 글씨체로 간판을 걸었기 때문이다. 상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다. ‘아시아스러운’ 오브제들은 포장지로 뻔하게 설명된다. 그것이 어느 나라의 무슨 제품을 본뜬 것인지는 상관없다. 그것의 포장지에는 용, 기둥식 건축물 혹은 대나무 등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자나 네온사인 같은 것이 프린트돼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이것은 고작 음식이 소비되는 방식이 아니라 아시아 문화가 소비되는 방식이며 곧 아시아인이 이곳 사회에 비추어지는 방식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수시 수시!”를 외쳤거나 파스타를 주문했는데 젓가락을 주거나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추천받고 싶어 하거나 더 ‘카와이’ 해지길 요구하거나 당신이 그저 침묵하고 있을 때 “수줍어하지 마”라고 한다면, 이는 사회가 당신의 피부색을 가진 그룹을 일정한 모습으로 수식하고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인종차별적이다.
모든 재현은 현존하는 사상을 각인시키는 활동이며 그것의 복제성과 기성 가능성은 이념을 ‘감각화’ 한다. 영상이라는 미디어는 공감각을 자극하여 높은 몰입도를 이끌어 내 힘이 강하다. 일어난 일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영상을 통해 보고 들은 간접체험은 시청자의 인식체계, 사고 회로 등에 남아 그들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나 영화에 영감을 받아 활동가가 되었다는 사람들, 위로받았다고 하는 소외된 사람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영상매체가 가진 영향력을 다시금 생각한다. 과거, 미디어는 소수자 차별을 옹호하도록 쓰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상이 예술분야 카테고리에 포용되었기에 관객들을 매료시킨다면 비윤리적 자극은 비판의 잣대를 피해 용납되었다. 여전히 그저 한 번의 버즈(buzz)를 위해 무자비하게 쓰인 스크립트는 많은 이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그래서 미디어 종사자들은 주의 깊게 자신이 무지함을 검토하고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한 인물과 상황을 정의내리지 않으려는 창작자의 태도는 그의 작품을 난해하게 만들 것이다. 바로 그 난해함 속에 관객이 끼어들 자리가 생겨난다. 그로 인해 피조물의 전시성은 방해되며 영상은 인물이던 상황이던 사물에 대한 주관적 이념의 주입매체가 아닌 입체적이고 연속적인 탐구물이 되는 것이다.
타자화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으로 빽빽하여 통풍의 틈이 없는 현재를 미디어는 어떤 방법으로 환기할 수 있을까? 다양성이 유동하는 이야기를 감각화하고 다름을 친밀화 하는 것, 시대착오적인 선입견을 뒤로하고 몽상적이더라도 차별 없는 시대를 함께 묘사해보는 것. 그러니까 같이 -ing 하는 것, 피부색, 젠더, 국적, 신체, 지위 등의 라벨링(labeling)을 떼어내고 보다 연대하는 인간의 본연에 초점을 맞추어 유대와 공감을 끌어내는 것이 영상이란 매체를 통해 성취하고자 할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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