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찬_이환희 그림 비평 : 그림자, 암(暗), 암흑물질, 선긋기

조영찬

이환희‧박미선 공동 전시에 출품된 이환희 작가의 그림에 대한 비평입니다. ‘이환희 작가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기쁨’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였습니다. 이기쁨 씨가 하는 말은 모두 조영찬 씨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이기쁨은 이환희 작가의 이름과 최대한 비슷하게 지었습니다.

사진 출처 : 마린아트스페이스

 

(기침 소리)

나: 이환희 씨의 그림에는 관람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말씀인데요. 이기쁨 씨도 그런 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이기쁨 씨만의 시선으로 이환희 씨의 그림을 감상하셨군요? 그렇다면 이기쁨 씨에게 그림이란 무엇이었는지, 어떠한 태도로 그림을 감상했는지 궁금합니다.

이기쁨: 그림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기억은 한 미술 선생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미술 선생님은 소묘에서 곡선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직선만으로 원을 그렸습니다. 원의 표면을 깎아가도록 가르쳤고 나는 언제 그림이 끝나는 건지 잘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아주 많이 긋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림자를 그릴 때는 새까맣게 될 때까지 선을 채워야 했습니다. 한 방향으로 선을 겹겹이 쌓았습니다. 나뭇잎을 그릴 때는 비슷한 색을 덧칠했습니다. 한 번 칠한 색이 마르면 다음 색을 칠했습니다. 어느 날은 근사한 나무가 완성되었고 어느 날은 아무도 나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내 자리에 앉아 그림에 덧칠했습니다. 원은 더 깎여나갔고 그림자는 더 검어졌습니다. 나무는 울창해졌습니다. 저녁이 다 되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나: 이기쁨 씨에게 그림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이기쁨: 어릴 적 곱하기를 백번씩 했고 같은 단어를 백번씩 적었고 같은 건반을 백번씩 쳤으며 같은 선을 천 번씩 그었습니다. 이환희 씨의 그림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때 나에게 누군가 겨드랑이나 엉덩이 사이를 색칠하라고 했다면? 나무나 상자, 우유갑이 아니라. 누가 말릴 때까지 나는 새까맣게 선을 그었을 것입니다. 나는 나를 가르치기 수월했을 것입니다. 겨드랑이나 똥구멍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대체로 제가 하는 작업이 그것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왼쪽) Tulipe perroquet I, 2020, 종이 위에 목탄, 콩테 33.4x53cm (오른쪽) Tulipe perroquet II, 2020, 종이 위에 목탄, 콩테 35x65cm

나: 이기쁨 씨의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이환희 씨 그림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몸과 몸이 만들어 내는 어둠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기쁨 씨에게 그림은 예술적 감동을 주는 작품이라기보다는 노동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맞나요?

이기쁨: 정확합니다. 저는 한 번도 그림에 감동을 받은 적이 없으며 언제나 그것은 화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노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한 번도 그림을 산 적이 없고 누군가에게 그림에 대해 칭찬해본 적도 없으며 전시회를 갈 때마다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의 직업, 일종의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직업을 가진 저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이기쁨으로서 이환희 씨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림은 스스로 끝내야 합니다. 캔버스를 찢어도 성에 차지 않는 선 긋기의 힘이 있습니다. 힘은 통제되고 재가공됩니다. 어떤 요인에 의해 그 균형은 깨져야 합니다. 서로의 중력으로부터 이탈하여 반대 방향으로, 우주의 끝으로, 제각기 날아가는 행성 중 하나가 그림입니다. 너무도 천천히 멀어지기에 우리는 전시장에 붙어있는 그림이 제자리에 고정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그림은 작가로부터 멀어지고 관객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어디에도 우리의 작업을 끝낼 근거나 원칙은 없습니다. 창작을 끝내는 힘은 우주 에너지의 27%를 차지하지만 그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암흑물질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작가가 이 부분을 더 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여기에 점 하나를 더 찍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이 떠오른다면 누구도 그것에 답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적고 있는, 말하고 있는 이곳에도 그것을 끝낼 어떤 기준도 없습니다. 누구도 나의 의자에 앉아, 대신 그림을 끝내줄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그림에 없는 어떤 것에 의해 이 자리에 모였으며 그림에 없는 어떤 것을 보기 위해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환희 씨는 연필과 목탄을 활용했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에는 그 재료들을 활용한 선 긋기가 이환희 씨 그림에서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말씀 같군요. 물론 그림을 끝내기 위해서는 일종의 타협이 필요합니다. 더는 그리지 않기로 선언하는 순간 말이지요. 이환희 씨의 그림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군요. 그렇지만 이환희 씨의 그림에서 선 긋기 이상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줄곧 질문드렸던 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고요.

 

Salix Caprea, 2020, 종이 위에 연필,목탄,콩테 29.7cm×42cm

이기쁨: 물론입니다. 그림 그리기의 노동은 선 긋기 이상입니다. 정신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참고로 저는 이환희 씨의 그림이 미술사 어느 맥락에 놓여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예술사에는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제가 열정을 쏟는 것은 오직 ……. (침묵)

엉덩이 사이의 어둠과 수풀의 어둠은 분명히 다릅니다. 뭔가 이어지는 것을 느낀다면 구도 때문입니다. 뭔가 같다고 말하거나 다르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평을 공유해야 하는데, 배치와 배열을 통해 우리는 지평을 얻고 지평으로부터 벗어나고 지평을 설정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무겁고 어떤 것은 가벼워서 액자 안으로 옮기는 일에는 섬세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러한 전략을 상상의 노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무엇에 대한 상상일까요. 제 생각에는, 빛에 대한 상상입니다.

나: 몸과 몸이 만드는 어둠에 대해 말하는 일은 곧 이환희 씨 그림의 빛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과 비슷할 수 있겠습니다. 이환희 씨의 소묘에는 당연히 광원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풀의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수풀의 아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짙게 만들죠.

이기쁨: 제가 말하고자 하는 수고를 덜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단지 광원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도는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해 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손과 꽃, 말의 엉덩이와 수풀에서 두 대상 간의 연결을 강하게 느꼈고 이것은 제가 이환희 씨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대상들 사이에는 무게의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어느 한쪽에 시선이 더 많이 머물게 됩니다. 무게추가 닿을 때 순간적으로 기울어지는 저울의 휘청임. 본래 가리켜야 하는 방향으로부터 이탈한 바늘. 나는 그런 휘청임 속에 머물고자 선택했습니다.

객관적인 시선을 버렸지만 제 눈앞에는 하나의 대상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둠이 보이지요. 말의 엉덩이 사이로 드리워진 어둠과 손가락 주름 틈 사이로 내비치는 어둠. 형태를 뭉개고 사라지면서 그 외의 것을 돋보이게 하는 것, 다른 것에 형태를 주는 것, 그것은 어둠의 본래 성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끔찍한 지옥의 형벌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천국에서 느끼는 환희에는 묘사가 필요하지 않지요. 고통에 실재하는 구체성이 천국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환희 씨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어둠이 그러한 지옥, 이성 바깥의 어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릴 적 나의 선생님은 밝은 것을 그리기 위해 어둡게 색칠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선생님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어둠이 그림 밖 어딘가 마치 창문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너무 사실적으로 느껴져서 뙤약볕 아래 있는 것처럼 줄곧 땀을 흘렸던 것입니다.

Tulipe perroquet II, 2020, 종이 위에 목탄, 콩테 35x65cm

나: 은연중에 이기쁨 씨는 미술사의 오랜 논쟁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범박하게 미메시스와 관련된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이환희 씨의 그림에서 생략된, 가정된 태양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기쁨: 광원을 사실적으로 짚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것이 실제 빛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환희 그림의 ‘빛’은 무엇일까요. 그 빛은, (웃음) 전등 불빛이자 태양빛입니다. 어떤 빛은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어떤 빛은 산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합니다. 태양이라는 전등이 조금만 각도를 틀어도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이 탄생합니다. 생명은 색에 불과합니다.

이환희 씨와 저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는 그냥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뿐입니다. 날씨나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가벼움이 있습니다. 그런 무거움이 있습니다.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너무 적다고 생각합니다. 바스러질 것 같은 생생함과 죽은 것과 같은 단조로움을 느낍니다.

나는 이환희 씨의 그림에서 체념을 느낍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체념입니다. 어떤 것이든 좋으니 있는 그대로 그리자는 체념이자, 그렇지만 어둠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사람의 체념입니다. 그리고 체념에 대한 또 다른 체념이 고개를 듭니다. 체념은 나의 체념일 뿐이며, 완전히 체념에 빠지지 않는 것이 과연 체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라는 고민 속에 저는 서 있습니다. 서 있는 사람, 걸어가는 말.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의 격렬한 노동을 그리기 위해서 그보다 더한 방법이 없다는 멈춤. 제가 느낀 것과 제가 말한 것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 이환희 씨의 대상들은 격렬한 빛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기쁨 씨는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의 격렬한 노동이라고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체념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이와 관련되어 부가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왼쪽) Vert I 12×8cm (오른쪽) Vert II 12×8cm

이기쁨: 저는 이환희 씨의 작품을 보면서 제가 실패했던 사랑에 대해서 떠올렸습니다. 그것이 저의 한계입니다. 그것이 이환희 씨 그림의 한계이고 이환희 씨의 한계이고 당신의 한계이고 그림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어느 것 이상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으며 서로의 어둠에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갈구하는 것에 비추어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며 혼자 슬퍼하고 혼자 위로합니다. 제가 실패했던 모든 것들이 한 그림 안에서 반복되고 누구도 제 반복되는 충동을 막을 수 없지요. 그러나 만약 이 반복에도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것을 스스로 끝낼 수 있을 때야 가능합니다. 바로 지금처럼. 제가 저의 이야기 대신 이환희 씨의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우리의 관점 바깥의 객관적인 이환희 씨의 그림이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런 믿음은 저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를 옥죄어 옵니다. 빛에 의존하는 어둠이라는 관념을 벗어던지고서 저는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어둠, 암흑물질 앞에서 실패감을 느낍니다. 오늘 제가 한 말들이 그림자를 드리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밝은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제가 한 말들이 빛도 어둠도 만들어 내지 않는 어둠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림처럼 말입니다.

나: 이기쁨 씨의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환희 씨에 대해 말씀하고자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기쁨 씨에 대한 인터뷰가 되었고 나아가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된 것 같습니다. 이기쁨 씨는 곧 자신의 수풀로 돌아갔고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이기쁨 씨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모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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