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sie Yoon_안전한 선 안에서 선 넘기

안전한 선 안에서 선 넘기

카운터테너 최성훈에 대한 대중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이성애중심주의적 남성성의 규범

Jessie Yoon(젠더연구자)

최성훈은 카운터테너이자 JTBC 팬텀싱어 3의 우승팀인 라포엠의 멤버이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거쳐 평생 클래식을 공부했고, 카운터테너라는 생소한 성부에 대해 설명을 요청하면 그는 “가성대를 기반으로 비강과 몸의 다양한 공명을 활용해서 여성 음역대의 소리를 내는 남성 가수” 라고 설명한다. 락 발성 등을 활용해 고음역대를 내는 남성 싱어나 변성기 이전의 보이소프라노는 이전 시즌에서 등장한 바 있으나, 정통 성악을 공부한 카운터테너의 등장은 JTBC 팬텀싱어 역사상 처음이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에서는 생소한 카운터테너가 이만큼의 인기를 얻고, 또 우승팀 라포엠의 단단한 주축이 되어가는 모습을 나는 젠더 연구자이자 한 명의 팬으로서 지켜봤다.

카운터테너 최성훈, 사진출처: 씨네21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는 최성훈의 소리를 ‘선을 넘는 소리’라고 평한 바 있다.1) 이 글은 그 ‘선’에 대해 젠더연구자의 관점에서 고민하며 질문을 던지려 한다. 그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그로 하여금 선을 넘게 하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담론화되며 나는 그 과정을 비판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최성훈 스스로 정의하는 카운터테너의 의미 안에는 높은 음역대는 여성의 것, 자신은 남성이라는 차이가 함축되어있다. 따라서 선을 넘는다는 것의 첫째 의미는 그가 기호화되는 젠더가 남성임에도 여성 음역대의 소리를 낸다는 데서 온다. 여기에 더해 평소 방송과 SNS를 통해 보여준 그의 섬세한 성품은 관중으로 하여금 이 소리의 성질과 성악가의 성격을 이어 생각하게 했다. 실로 무대 위의 카리스마와 무대 아래의 조곤하고 세심한 모습의 ‘갭’은 그를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곤 하는데, 이에 대한 포스트에 달린 어떤 팬의 댓글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치만 성훈님은 섬세한 거지 여성적인 게 아니예요.”

그의 퍼포먼스가 여성적이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카운터테너에 대한 대중의 ‘오해’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팬들의 방어적 대응은 흔히 앎의 영역에서 카운터테너라는 성부를 이해하고 있는 자신들과는 달리, 흔히 ‘방금 노래한 사람이 여잔가요?’라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대중의 카운터테너에 대한 몰이해에 반하는 형식을 취한다. 카운터테너에 대한 대중의 의심은 우선적으로 그의 높은 음역대 (여자 목소리로 여겨진다) 를 통해 그를 여성/남성으로 젠더화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오고, 가창자의 젠더에 대한 물음표는 그의 남성성에 대한 의심으로 치환된다. 이때 그의 퍼포먼스가 여성적이라고 하는 일은 무례가 되며 이에 반대하는 논리로 퍼포먼스 밖의 ‘진짜’ 남성성을 제시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고음역대를 노래하는 성악가지만 말할 때는 목소리가 매우 낮다는 점, 그러니까 노래할 때의 목소리와는 반대되는 ‘남성적인’ 낮은 목소리는 오히려 매력적인 포인트로 여겨지며 반박의 수사로 사용된다.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자. 팬들의 비판을 받아 삭제된 라포엠의 데뷔 음반 Scene#1 의 소개글 겸 비평을 쓴 평론가 이용지는 글에서 카운터테너의 젠더적 불완전함을 언급했다. “남성이 여성의 음역대를 노래하는 카운터테너는 불완전함을 특징으로 한다. 부드러움을 내재한 강성, 깨어질 듯 섬세한 떨림은 동성과도 이성과도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으나, (…) 이 앨범을 통해 라포엠은 이를 해냈다.” 남성도 여성의 소리도 아니라는 견지의 ‘불완전함’이라는 표현은 가뜩이나 JTBC 팬텀싱어3을 통해 그에게 씌워진 ‘특수성부’라는 프레임에 지친 팬들을 자극했다. 단어가 날카롭게 쓰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이 불완전성, 혹은 부정의 (不定, 확정적이지 않은) 자리에 선 카운터테너가 가지는 젠더적 의미에 대해 묻고 싶다.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다’는 말은 그의 소리의 본질적 특성을 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성악에서 -넓게는 크로스오버를 포괄할지라도- 카운터테너와 다른 성부 사이 화성적 조화의 전례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엄격한 화성적 규칙이 성부에 따라 존재하는 세계에서 테너-바리톤-베이스로 구분되는 남성 음역대의 카테고리에 포함되지 않는 그는 오히려 담담하게 다른 성악가들은 그 가능성을 ‘모를 수밖에 없다’ 고 인정하지만, 나는 이 ‘불완전함’이 가지는 가능성의 영역을 젠더의 관점에서 보다 넓게 상상해보기를 제안한다.

남성성도 여성성도 아닌, 둘 모두를 오갈 수 있는 ‘특수함’은 단연 카운터테너가 가진 무기고 최성훈이 여러 무대를 통해 보여준 바 있는 특기다. 그런데 전술한 예시들에서 ‘여성성’은 그에게 실례가 되는 묘사로 받아들여졌다. 즉, 그의 퍼포먼스가 둘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 중 둘 모두일 수 있는 가능성, 혹은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은 계속해서 부정된다. 이를 통해 다시금 공고해지는 것은 본질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성별이분법의 관념이다. 요컨대 최성훈이라는 남성 성악가가 내보이는 여성성을 독해해내는 일은 그를 여성적이라고, 혹은 여성이라고까지 주장하는 것과 동일시되며 대항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퍼포머가 (아마도) 남성으로 정체화하므로 그의 퍼포먼스는 여성적일 수 없는가? 여성적이라는 말은 왜 그의 남성성을, 나아가 그의 존엄을 침해한다고 받아들여지는가? 그는 여성의 음역대를 노래하는 남자이므로 그의 남성성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시각에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음역대를 통해 추론한 여성성을 남성성의 부재와 동일시하는 시선은 카운터테너의 퍼포먼스가 가진 젠더 정치학적 지평을 좁힌다. 나는 여기서 그의 무대가 반드시 여성성의 일부를 지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주류 사회에 의해 여성에게 부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성질은 당연히 불안정하며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다.

나의 의문은 최성훈의 퍼포먼스가 수행하는 성질이 여성성이 아니어야만 하는 당위를 향한다. 그가 무대에서 설령 여성인물을 대변하는 곡을 부른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성별을 초월한’ 것으로만 담론화된다. ’성별을 초월했다’ 는 말은 여성적이라는 말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며, 이처럼 제한된 ‘초월’의 수사는 결국 다시 안전하게 그의 남성성을 지켜내는 데 그친다. 그러나 묻는다, 왜 (머무를 수는 없고) 초월해야만 하는가? 이 초월을 통해 말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또 정말 이들의 말대로 최성훈의 무대가 성별규범을 초월했다면, 규범을 초월한 수행은 언제나 전복적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그의 무대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일례로 경연 중 4중창 무대 레퀴엠Requiem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죽은 사람의 혼령으로, 씨네21 인터뷰를 통해 최성훈은 계획단계에서부터 이 캐릭터의 성별을 “정해두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이 대답이 매우 마음에 들었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팬들의 반응을 보며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정해두지 않았다는 것은 남성도 여성도 그 아님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해방적인데, 여기에 여성성의 의미를 더해 읽어내는 일은 금기시되었다. 내 이해와 대중의 반응 사이의 차이는 젠더 없음과 중성적 젠더표현에 대한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그의 퍼포먼스는 젠더가 없거나 젠더를 초월할 수는 있지만 여성성을 내포하거나 중성적(Androgyne/bigender)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이 ‘젠더를 초월한’ 퍼포먼스에서 여성성의 자리는 부재하고, 이는 초월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선으로 작동한다.

이에 더해, 그에게 씌워지는 남성성의 프레임은 이성애중심주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카운터테너의 기교는 여성성악가의 기교와는 다른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 음역을 노래하는 남자’의 젠더에 대한 의심은 성애적 의심으로 연결된다. 하나의 한자 단어 性에 내포되어있듯, 실로 성애(sexuality)와 성별정체성(gender)은 긴밀하게 얽혀있다. 성애는 성별정체성을 지탱하고, 성별정체성은 성애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교차점을 살피기 위해 한 가지 예시를 더 들겠다. “아무래도 오해 많이 받았을 테니까 수염 기른 거 아닐까요.” 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실로 현대 오페라에서 카운터테너는 특히 여성의 역할만큼이나 헨델이 카스트라토(2차 성징 이전에 고환을 제거하여 변성기 이전의 높은 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함)를 위해 작곡한 역할을 맡거나 이들의 아리아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2) 그러나 카운터테너가 일면 바로크 음악의 카스트라토를 계승한다는 이유로 이들의 남성성을 ‘의심’하는 일은 이들의 성적 지향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다. 한치 어긋난 남성성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혹은 여성 화자로 상정된 곡이나 역할을 맡는다는 이유로 카운터테너의 퍼포먼스는 자주 동성애와 연관된다. 한 연구3)는 카운터테너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벨 칸토 성악의 젠더에 대해 살피면서, 대중이 어떻게 노래하는 목소리를 받아들여 이를 젠더화하는지를 다룬다. 이에 따르면 카운터테너 남성이 부르는 높은 음역대의 소리, 특히 벨 칸토창법을 활용한 고음은 공고한 성별이분법에 따라 다음과 같은 연상작용을 일으킨다. 남성 성악가가 여성의 음역대에 해당하는 소리를 낸다-목소리는 신체적 특징과 연관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여성의 몸을 상상하게 한다4)-남성으로 패싱되는 카운터테너는 따라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 혼란을 해결하려는 관객은 손쉽게 그의 남성성을 수정하여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즉, 퍼포머의 젠더를 특정할 수 없다면 그의 젠더는 섹슈얼리티를 경유하여 최대한 안전한 방식으로 수정되며, 결론적으로 이는 동성애적인 남성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5) 이때 도출되는 결론이 동성애라는 ‘오해’를 경유한 남성성이라는 점에, 즉 여성성이 다시 한 번 이해 가능한 동성애적 남성성의 영역으로 소실되어버린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관객이 카운터테너의 퍼포먼스를 동성애적인 남성성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틈입하는 여성성은 다시 한 번 손쉬운 이해의 영역으로 추락한다. 즉, 동성애적 오해를 가정함으로써 여성성의 가능성은 남성성의 영역으로 다시 환원되고, 동시에 이 가정된 ‘오해’ 또한 무례로 단번에 부정됨으로써 다시 한번 그의 퍼포먼스가 가진 젠더-섹슈얼리티적 교란은 불가능한 가능성이 된다. 덧붙여, 이러한 구조에서 ‘수염’은 오직 남성성의 상징으로만 기능할 수 있으며, 그가 수염을 관리하는 꼼꼼한 방식이나 위치별 길이에 대한 치밀한 고민을 통해 수염이라는 기표에 기입될 수 있는 다른 의미들 또한 탈각된다. 남성성의 기호를 차용하는 수행은 모두 이성애적이거나 남성적인가? 남성성의 기호를 어떻게 차용하는지에 대한 고민 또한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팬들이 대항하여 방어해야 하는 ‘동성애적 오해’ 의 기반에는 이것이 오해여야만 하는 이성애 중심주의적 당위가 있다. 특이한 점은 이 ‘오해’ 가 팬들에 의해 상상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무례한 의심은 팬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이 의심은 오직 동성애에 한해서만 금기다. 그의 성정체성을 이성애 밖에서 상상하는 일이 무례하다면 그 반대는 왜 그렇지 않은가? 실로, 버틀러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어떻게 이성애적 남성성/여성성이 동성애를 금기시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지에 대해 말해왔다.6) 다시 말해, 사회에서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성애중심주의의 매트릭스를 통해 공고히 서려면, 그 경계 외연의 동성애에 대한 부정(negation)이 계속해서 그 경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오해’의 경우에서 역시 동성애는 금기로 존재하며 이성애적 남성성을 지탱한다. 이때 가정된 오해를 통해 옹호되는 것은 표면적 이유로 꼽히는 이 인물의 존엄성이라기보다는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애적 남성성의 원형이다. 세심함과 같은 특질을 여성성과 연관 짓는 일, 이성애적 남성성 이외의 동성애를 끌어오는 일은 팬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금기시되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수행하는 섬세하게 정돈된 취약성의 결, 성격적 예민함을 고요하고 담담하게 다스릴 줄 아는 인간의 깨질 듯한 단단함, 이를 바탕으로 그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타르시스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예쁨을 참으로 예쁘게 보여줄 줄 아는 뛰어난 퍼포머의 면모를 지녔고, 자신이 온전히 몰입하여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지는 위로와 공명의 힘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전달하기 위해 취하는 몸과 목소리의 양식적 완성도 또한 매우 훌륭하다. 하여 앞서 언급한 팬들의 애호가 나와 완전히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술한 태도들은 이 성악가의 선 넘기를 다시 안전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실로 카운터테너는 크로스오버 음악뿐만 아니라 오페라에서도 꽤나 오래 타자화되어 왔다. 이들이 인간의 외연인 신적인 것이나 악한 캐릭터를 연기해온 역사도 존재하거니와, 카운터테너는 계속해서 주류 정상성의 틀로는 포착되지 않는 중성적인 캐릭터를 몸소 체현하는 퍼포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카운터테너의 음악적 퍼포먼스는 역사적으로 꾸준히 성별이분법을 교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왔으며 남성 성악이나 중창이 반드시 이성애적 남성성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7) 또 카운터테너의 팔세토는 성별이분법이 공고한 정통 성악의 세계에서 퀴어 주체들이 살아남는 탈동일시적(disidentificatory)-동일시와 반동일시 사이에서 억압된 주체가 생존하는 방식-행위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카운터테너뿐만아니라 목소리에서 젠더를 읽어내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젠더와 성악의 규범적 연관을 해체하는 트랜스적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8)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가진 성부의 일원으로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성악가의 퍼포먼스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크로스오버 오디션을 통해 대중문화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이 만나는 크로스오버 음악을 하는 성악가로서 그가 음악적 퍼포먼스를 통해 시연해낼 수 있는 젠더 퍼포먼스의 다양성에 기대를 걸게 되는 이유다. 이에 더해 최성훈은 기술적으로, 또 정동적 측면에서도 취약성과 여성성을 미적으로 재현하는 데에 매우 탁월한 배우이기도 하다. 레퀴엠과 봄날에 물드는 것, 그리고 라포엠의 데뷔앨범 수록곡 신월, 판타지, 라템페스타 등을 통해 그가 보여준 다양한 화자의 스펙트럼은 그의 퍼포먼스가 단지 특별한 카운터테너의 안전한 초월이 아닌 때로는 중성적이고 여성적인 면모를 적절히 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일례로 레퀴엠 카덴차에서 그가 연기한 처절한 영혼의 울부짖음은 때로는 죽은 나를 그만 놓으라는 분노에 찬 영혼의 발악이었고, 때로는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 미세한 떨림과 절망이기도 했으며, 이를 연기하는 화자는 의도적으로 여성적-남성적 위치를 오고 갔다. 언젠가 그는 봄바람이 되어 노래했고, 혹은 폭풍이 몰아치는 힘 자체이기도 했으며, 신월에서는 젠더가 모호한 연인을 제 손으로 떠나보낸 퀴어한 이별의 주체이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솔로 무대 Io ti penso amore에서는 자아와 음악을 구분해낼 수 없을 만큼 깊은 음악에 대한 갈망, 그 속에 얽히고 섥힌 음악과의 동일시와 음악에 대한 욕망 사이의 흔들림을 여성 발레리나와의 퍼포먼스, 또 흉성과 가성대를 오가는 창법을 통해 화려하고 중성적으로 펼쳐냈다. 그가 미치는 넓은 영향력과 그의 탁월한 음악세계에 대한 대중의 폭넓은 애호를 고려할 때, 그의 퍼포먼스가 가진 가능성의 예각들이 무뎌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정상성 속의 특별함을 안전하게 향유하는 방식이 결국 공고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젠더화된 퍼포먼스를 자꾸만 안전한 선 넘기로 환원하는 상상력의 부재가 안타깝다. 카운터테너를 신기함으로 소비하는 단편적 시선에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성을 말할 수 없는 영역으로 몰아내지 않으면서, 그의 무대를 사랑하는 언어가 더 다양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1) 김혜리 (2020). <팬텀싱어> 시즌3 우승 사중창단 라포엠의 카운터테너 최성훈 -선을 넘는 소리. 씨네21 1266호.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5902. 
2) Giles, P. (1994). The History and Technique of the Counter-tenor: A Study of the Male High Voice Family. Scolar Press.
3) Fugate, B. K. (2016). The contemporary countertenor in context: Vocal production, gender/sexuality, and reception. ProQuest Dissertations and Theses.
4) Rugger, D. G. (2018). Seeing the Voice, Hearing the Body: Countertenors, Voice Type, and Identity. ProQuest Dissertations and Theses; Levon, E. (2007) “Sexuality in Context: Variation and the Sociolinguistic Perception of Identity,” Language in Society, 36/4. 533-554.
5) Gaudio, R. (1994) “Sounding Gay: Pitch Properties in the Speech of Gay and Straight Men,” in  American Speech 69/1. 30-57.
6) Butler, J.(1997), ‘Melancholy Gender/ Refused Identification’ in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132-159. 
7) Fugate, B. K. (2016). The contemporary countertenor in context: Vocal production, gender/ sexuality, and reception. ProQuest Dissertations and Theses. 
8) Chao, S-Y. (2018). Trans-formations of Male Falsetto. TSQ: Transgender Studies Quarterly, 5(3), 456–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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