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_미완결의 기호학: <언컷 젬스>를 중심으로

이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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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란스럽고 요란하며 포악한 사건사고의 연속은 매우 단순하게도 주인공이 제정신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보로 우리를 공격해온다. 관객은 주인공인 하워드가 정신 차라기만을 바란다. 만약 우리의 바람이 없다면 <언컷 젬스>는 성립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것은 침투해 올 병균의 위협보다는 이미 감염된 무언가에 대한 불안인 것이다. 단지 하워드가 직면한 역경을 회피했으면 하는 바람이 아닌 신체적/정신적 복구에 대한 바람. 그럼에 이 부조리극은 병리학적이며 발작적이다. 하워드는 이미 병에 걸린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는 전작인 <굿 타임>에서부터 반복되어온 샤프디 형제의 레퍼토리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시드니 루멧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샤프디 형제는 본인들이 7, 80년대 헐리웃의 창조적 격동에 대한 현대적 계승자임을 자랑스레 여기고 누구보다도 총명하게 다신 없을 그 찬란한 시절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독한다.)

먼저 확인해 볼 오프닝은 본 서사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정황이다. 주인공의 지령을 받아 오펄을 밀반출하는 에티오피아의 광부들, 그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으나 그들이 발굴한 오펄은 본 서사의 핵심적인 외장 오브제이다. 말하자면 오펄은 하워드의 신체에 기생하는 동시에 자생하는 종양인 셈인데, 시작부터 역설을 수반하는 이것을 달리 보자면 변용된 악의 손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펄은 처음 등장한 이후로 물질적으로 완벽히 자취를 감추지도 않을 뿐더러 하워드는 그 증식 과정에 대해 조금도 인지하지 못한다. 기존의 서사 기조를 장악하는 검은 오브제의 기초적 속성이 잔상과 은폐라면 <언컷 젬스>의 오펄은 물성과 인지력의 소거이고, 이에 공통된 결과는 증식/확장이다. 이윽고 오펄의 결과는 위협보다는 불안의 이름으로 전이된다. 하워드에게 닿은 악의 손길, 그 즉물성은 가시적 입지만으로 하워드를 불안케 하지는 않으나 관객은 그것의 존재만으로도 불안에 떤다. 역설적이게도 관객은 종양과도 같이 하워드를 병들이는 오펄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에 불안을 환기한다. 이처럼 종양인 동시에 백신의 역할까지 겸하며 생명과도 같은 구체성을 띠는 오펄이라는 오브제의 역설적이고 주관적인 존재 가치는 곧 어떤 흔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크로넨버그의 흔적으로 관성을 기대치 않는 기계적 세계의 신체 강탈로 이야기된다. 앞서도 말했듯 오펄은 결국 오브제이다. 말하자면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결과물로서 기능하게끔 유도한 인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크로넨버그의 흔적이라는 것은 감염체 자체, 주관보다는 감염체가 되는 과정, 객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 드롬>의 인물 해체적 서사를 기억하라.) 망설일 것 없이 명백하게 오펄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영화와 분리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독립된, 영원한 미완결의 정황, 오프닝이다. 그 자발적 몽타주와 조립되어 이어지는 하워드의 대장 내시경 장면으로 말하자면 하워드를 움직이게끔 유도하는 접속과 다름이 아니다. 가시적 주관에 시선이 몰릴 때, 은둔하는 객관은 끊임없이 주관에 에너지를 주유한다. 이에 강탈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격할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구조적 객관성은 오펄이 하워드의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으로 성립된다. 그 거부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은 크로넨버그의 의지를 이어받아 어떤 문맥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주인공은 원하는 바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사실, 혹은 지배체제의 개입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관성적인 성격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오프닝, 그것의 성격이 독립적이라는 이유는 완전성에 대해 변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프닝은 구조적 맥락에 편승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후 다시 설명될 필요가 없는, 불완전한, 미완결의, 관성이 없는 세계인 오프닝은 역설적으로 완성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로만 남게 되며 그 비가시적인 체제의 성격의 내장은 입력된 시스템대로 조종하는 기계적 농락과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관성이 거부되는 미완결의, 혹은 기계적 세계의 신체 강탈, 이에 접속을(대장내시경을) 가능케 할 하나의 구멍은 시작부터 있었던 것이고 하워드의 끔찍한 결말(총살)은 지독한 구멍의 농담에 기인하여 반동한다기보다는 교란하는 방식으로 하워드의 운명을 결코 완성되지 않을 방향으로 착취한다. 그 구멍을 통해 배출된 것은 다름 아닌 오펄이다. 숙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관성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결정을 거부한 채 끊임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오가며 종양과 백신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오펄은 관성이 제거된 미완결을 끊임없이 암시하며 하워드의 선택과 운명에 양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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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워드는 끝내 완결되지 못할 불완전한 운동성에 대해 한 겹 더 벗겨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것이 미완결을 향한 수행이라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관객의 불안을 자극한다. 그것은 이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확장된다. 옮겨갈수록 확장되는 불안의 층위는 앞서도 말한 듯 지극히 병리학적이다. 이 병리학은 간단히 후기 자본주의적 질서에서 어김없이 제외되는 감염자의 분투와 다름이 아니다. 하워드의 행위는 감염에서 오지만 그의 비극은 구조에서 온다. 관성이 제거된 그의 행위는 그것 자체로 비극이 될 수 있으나 동시에 객관적 사실과도 밀접하다. 말하자면 그의 행위는 결코 비극을 담보하지만은 않고 다만 미완결을 짐작할 뿐인 것이다. 이를테면 그가 겪는 대장암의 공포, 그 비극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것은 중첩된 기호로 가늠할 것이 아닌 유대인에게 유달리도 엄격한 확률을 보이는 생물학적 구조에 가까운 것처럼 말이다. 다만 하워드가 단 한 차례도 대장암에 대한 실질적인 예방책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완결을 거부, 초월하려는 주이상스적 오만, 혹은 관성이 거부되는 선택, 혹은 기호에서 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동이란 어떤 층위에서 작동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동은 필시 주체의 선택을 수반한다. 하워드의 주체는 결국 감염자다. 고로 그의 선택은 미완결을 암시하고 이동과 결과는 제외와 불안으로 명명되며 이에 따른 합은 무용하고 위태로운 분투를 어렵지 않게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동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무효화되는 현재’라는 전제를 확인해보자. 이것의 핵심은 회귀, 혹은 복구되지 않은 추동력에 있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욕망과 전치 사이의 과정을 제거하여 감염 전의 논리를, 인과적 관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것이 추동력이 되는 것은 어쩐지 썩 현명한 작법이 아닌 것 같지만 회귀와 복구, 즉 이동의 과정에 대해 간과한 것이 아닌 그것이 절취된 세계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썩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펄과 동등한 교환 수단인 KG의 셀틱 우승 반지와 하워드의 경제력에 기생하기 위해 호출된 후기 자본주의적 악녀(혹은 위악적으로 호출된 열녀)인 줄리아, 이 지속적으로 유효한 역사성을 제외했을 때, 하워드를 거쳐 어딘가로 옮겨간 수많은 물건들 중 단 하나라도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있는가. 아르노의 10만 달러, 마이클 잭슨 펜던트, 드마니의 모조 롤렉스와 모조 보증서, 충실한 직원인 여시에게 가야 할 구찌 티셔츠, 불현듯 사라져버린 KG의 귀걸이, 하워드의 부적과도 같은 닉스 73 반지, 오펄의 경매 가격을 올리기 위해 소모된 장인어른의 19만 달러, 수많은 물건들이 거래를 오가며 축적된 각각의 채무금. 목록화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물건의 행방불명과 고립 및 복구 불능의 상태를 면치 못한다. 그 무효화는 서사의 추동력이 되며 어떤 측면에서도 영화와 결별하지 않는 정신분석학의 레퍼토리이다. 가령 과거의 정념이 오로지 자극을 위해 시작과 동시에 외면되는 익스플로이테이션 무비의 윤리적 문제가 바로 회귀, 복구 불능의 추동력에 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무효화의 측면에서 파생되는 강렬한 허무를 생각해보자. 그 허무에 값을 매겨 획득한 영화적 이점은 후방경계가 없는 거침없는 발진에 있다. <언컷 젬스>의 그것 또한 물론 강한 추진력과 지독한 허무를 동반한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외면받은 세계만은 아닌 끊임없이 절취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언컷 젬스>의 무효화는 앞서 말했듯 의미심장하다. 이는 단순히 하워드의 이동과 결과가 구조의 재량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만으로는 합의되지 않는다. 그것이 합의되는 과정은 무효화의 과정에서 이뤄지는 퇴보와 전진의 즉효성에 대한 발견과 그 발견의 핵심을 색출하는 전복적 성격까지 포함한다.

하워드는 당장 수중에 있는 현금과 시계를 내놓고 물리적 자유를 취한다. 그 후 오펄을 내놓고 KG의 셀틱 우승 반지를 취한다. 또 다시 셀틱 우승 반지를 내놓고 현금을 취한다. 이 퇴보와 전진의 프로세스는 영화 내내 반복된다. 줄곧 내놓은 후 취하는 식의 미약한 성취를 반복하던 와중 일생일대의 운을 취하고 목숨을 내놓는 식으로 전복되는 결말을 보자. 언제나 한 발자국에 대해 집착하던 하워드의 운명은 한 발자국의 즉효성마저 무효화하며 손수 절취시킨 과거에 대한 전복적 우화로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언컷 젬스>에서 보인 절취된 세계의 정신은 루멧의 레퍼토리와 유사점을 갖는 것인데, 말하자면 그 세계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미결로 남은 소년의 살해 여부와 다름이 아니고,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서 심정적 호소가 보류된 채 결말을 맞이한 앤디와 행크의 처지와 다름이 아닌 것이다. 즉, <언컷 젬스>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억지로 합의시켜 파생된 예상조건을 빌려온 것으로 사건처럼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제 하워드의 회귀/복구 불가능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미래에서 빌려온 조건으로 과거를 절취시켜 미완결의 세계를 끊임없이 재건설하는 것이 그의 용법이라는 사실은 이처럼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정리하자면 하워드는 미래에 이미 도착했다는 가정을 통해 확신에 가깝게 결과를 짐작하고 그 확신에 힘을 쏟기 위해, 즉 현재의 문제를 위해 과거를 제거하려 들지만 그가 처한 구조적 한계를 설정한, 누구에게도 권한이 없는, 기어코 존재하는 과거는 맹렬하게 그를 추적하기 때문에 합일의 가능성이, 현재가 무효화되는 것이다.

결말부 하워드의 사망으로 그의 가동성에 브레이크가 걸린 채로 영원히 경직된 이후 즉자적 경제성은 소멸되고 대자적 부하 현상은 폭발한다. 그것은 하워드의 운명과도 같았으리라. 그 이유는 애당초 영화의 추동력이 대자적 현상을 외면하고 즉자적 경제성을 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폭발한 부하 현상이란 결국 공백으로 남아버린 하워드의 채무금과 그와 연관된 주변인들이다. 이 공백은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이렇다 할 계약서도 없이 노동을 전전하다가 다리를 절단해야 할 수준의 큰 부상을 입은 에티오피아의 광부의 처지와 다름이 아니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미래의 조건으로 과거를 절취해오다가 끝내 과거에 머문 상태에서 빙결된 하워드에게 미래는 빚으로 존재하지만 현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고로 하워드는 존재 자체로 채무 이행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유형의 상태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하워드의 업이 본인이 교란시킨 생태계를 원상복구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가능한 것도 불가능한 것도 아닌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정체된다. 이에 전진과 퇴보의 반복에 복속된 그의 죽음은 그 무엇도 종결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쩐지 합리적인 미완결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즉자적 성격을 남용한 끝 모를 지속성이 마침내 대자적 현상으로 한순간에 전복되어 하워드의 죽음이 누군가의 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증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극적으로나마 상징이 되어서야 오펄은 비로소 효력을 다한다. 그제야 하워드는 감염자가 아니게 된 것이고 끝내 과거를 포함한 구조에 입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 시점 과감하게 훑어본 하워드의 내부는 혼란 없이 선명하고 청결한 세계이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오후>의 결말에서 써니가 지은 작은 미소처럼 조금의 부채감도 없는 상징적 찰나의 기나긴 희원과도 같다. 드디어 하워드는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영화 <언컷 젬스> 포스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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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미완결에 대한 추적과 함께 지속적으로 암시되는 감금의 이미지이다. 하워드의 가게를 입장하기에 앞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방탄 부스, 딸의 연극이 상연되는 소극장, 아르노 일당의 협박에 의해 발가벗겨진 하워드가 들어간 어두운 트렁크, 의사전달의 의지가 소거당하는 소란스러운 클럽, 이것들 중 감금/구속의 개념과 다소 이질적인 로케이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샤프디 형제는 면밀한 데코파주를 통해 우리에게 명확한 감금/구속의 모티프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언컷 젬스>에서 감금이란 어떤 입지를 점하는가.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오직 방탄 부스만이 하워드를 주체로 둔 감금의 매개체이고 이외의 것들은 전부 하워드가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것과, 오직 방탄 부스만이 감금할만한 장소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워드는 언제나 갇혀서는 안 될 곳에 갇히는 것이고, 하워드에 의해 갇히는 인물들은 갇혀도 될 만한 곳에 갇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복된 세계이다. 정작 우리가 가두고 싶은 사람은, 갇혀 마땅한 인물은 하워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역설은 이 이야기는 감금해야 할 사람을 쫓는 추적극이 아니라 불현듯 공격해오는 덫을 경계하는 컨디션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방탄 부스를 통해 강조한다. 즉, 감금의 모티프에서 붕괴되어버린 스포츠의 조건이 발견되는 것이다.

서사의 진입은 언제나 경기의 시작이다. 특히나 <언컷 젬스>와 같이 여러 인물들이 포화 직전까지 첩첩산중으로 중첩된 유사 피카레스크 서사라면 그 시작은 언제나 비장하리만치 살 떨릴 것이다. 그것은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구장에 감금되는 선수들의 비극이다. 본격적으로 비통스러운 것은 이 산만한 범죄 서사의 후반부이다. 이는 가능한 어떤 것도 감추지 않는 외설적 세계임으로, 달리 말하면 규칙이 없는 세계임으로 컨디션의 난조에 따른 곤경이나 부상, 비열한 덫, 급소 공격과 같은 방탕한 술책을 허용한다. 고로 영화의 후반부는 모든 자극적 조건을 노출시키는 포르노그라피의 용법으로 말미암아 도착적 감상법을 관객에게 강제로 제공하고 그에 따라 사실상 분노에 가득 찬 수감자의 눈빛을 한 서사 속 알몸의 플레이어들의 모든 방종을 목격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이유로, 또는 플레이어들의 시선 자체가 서로를 향하기 보다는 모든 것이 공개된 무아지경의 난장 속에서 사실상 프레임 바깥을 겨냥하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시각은 진정한 쾌락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응시와 시각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영화의 후반부는 인물들을 프레임 안에 감금하고 발가벗긴다는 점에서 (하워드가 나체로 트렁크에 갇히는 곤혹을 겪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드적인 고조와 무관하지 않고 그에 따라 관객의 시각은 방종을 위해 도구화된 스포츠의 맹렬한 목적주의와 같은 한계에 직면한다. 말하자면 인물들의 심정적 맥락을 이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감금의 기호는 방탄 부스에 갇힌 몇몇의 무리를 바라보는 하워드를 통해, 즉 방탄부스의 첫 활용, 정확한 영화의 중반부에서 확인된다. 첫 번째 감금은 KG 일당을 대상으로 이뤄진다. 오펄을 가진 그들은 궁지에 몰린 하워드의 우위를 점하는 입장에서 그와 손쉬운 협상을 하러온 것이다. 고로 그들은 의미심장하게도 하워드에 대한 응시의 권한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우위를 점한 자에겐 대상의 조건을 파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당장 손에 쥔 것을 상대방이 원한다는 것 자체가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겐 공백이 없는 것이고 하워드에겐 오펄을 탈환하기 위한 조건부로 제시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자체가 공백인 것이다. 만약 규칙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상황에서 하워드가 고려할 것은 공격, 수비, 시간, 점수 차, 여러 가지가 있고 그 모든 것은 정신없이 흩어져있어 그 무엇 하나에 가중된 힘을 쏟을 수 없다. 그렇게 하워드의 전력은 분산된다. 다만 KG가 고려할 것은 승리와 수비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협력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규칙일 따름이다. 규칙을 외면하는 편법 중 가장 지독한 것은 아주 간단하게도 상대방의 손발을 묶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조건의 한계가 무효 처리되고 상호간의 공백은 사라지며 승리를 위한 행위의 의미 자체가 붕괴된다. 단지 누가 취하고 누가 내놓느냐의 문제로 전락하는 것이다. 곧 KG 일당은 감금되고 예정된 혼란의 절차를 밟게 되고 암시적으로만 존재하던 감금의 기호는 본격적으로 관객을 향한다.

여기서 KG 일당이 방탄 부스에 갇힌 까닭이 기기 불량과 같은 순전한 우연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하워드의 계략이 아니었으나 영화는 명백히 관객에게 그것은 순식간에 전복된 불규칙의 세계임을 표명한다. 이는 샤프디 형제가 의도하던 세계가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방탄 부스가 중요한 까닭은 줄곧 스포츠의 원칙으로, 즉 규칙성으로 수행되던 세계를 규칙과는 완전히 무관한 우연이나 혼란으로 뒤집어버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금되어 마땅하기에 지속적으로 감금의 이미지에 구속되던 하워드가 유일하게 주체가 되어 상대방을 감금시키는 역할의 방탄 부스의 표면이 투명한 것은 관객의 사드적 고조를 위해 기존의 규칙을 소멸시키고 방종의 원칙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공개, 전시하는 불법 복싱장과 다름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기 불량과 같은 돌발 상황, 이 컨디션의 개입이 허용되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영화의 중반부라는 사실은, 이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관객은 도착적인 수준으로 전락되기 위해 관음의 고조를 부지불식간에 제공받은 것이다. 이것은 지젝이 마이클 만의 <맨헌터>를 예로 들어 설명한 응시의 동일화라는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살인마를 잡기 위해 희생자들의 일상이 담긴 테이프를 몇 번이고 재시청하는 형사의 집착적 응시는 그 자체로 그의 살인마의 그것과 동일시된다. 말하자면 동일화는 내용보다는 응시의 차원에서 계산되는 것이다. 여기서 관음의 함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관조와 이해 간의 구분이 희미해지면 관음과 관람의 전략은 유사해질 여지가 있다. 그럼에 우수한 영화는 관람 행위를 관음의 방종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공백을 통해 추출되는 정보가 어떤 식으로 예상을 빗나가며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의식의 고양을 책임지는지 우리는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분명 우수한 영화를 분류하는 하나의 큰 기준이다. 그러나 <언컷 젬스>는 분명 훌륭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공식을 회피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바, 영화의 정확히 중반부에 관객과 사드적 관음의 동일화로 설명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언컷 젬스>의 구조적 변화와 직면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컷 젬스>의 급작스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혹은 그 방종적인 후반부를 어떻게 변호해야 할 것인가. 이는 글의 전반부에 다뤄진 미완결의 기호와 관련하여 필연적으로 어떤 상태에 당도하게 되는 하워드의 도착적인 이념의 단락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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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미완결로 돌아온 이유는 애써 영화의 기세를 도착을 유발하는 국면으로 재정비함에 하워드가 수습하지 못한 서사 속의 문제들을 관객의 눈으로 합의시키려는 샤프디 형제의 의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다. 앞서 <언컷 젬스>의 서사를 도구화된 스포츠와 비교한 바 있다. 거기에 감금된 인물들을 마주하는 청중 혹은 관객을 생각해볼 때 영화상엔 앞서 밝혔다시피 포르노그라피적 허무와 필연적으로 직면하고 이는 전체주의의 정치적 공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제 전반부를 확인해보자. 하워드는 이미 수많은 인물들에게 빚을 진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경기의 시작은 그런 애로사항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실제 스포츠와 달리 영화는 시간성/역사성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용법으로 뻗어나가는 전반부의 스포츠에서 하워드에게 승산은 없는 듯하다. 달리 말하면 이미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시작된 하워드의 역사는 그의 주변 인물들, 채권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이념적 징후로서 관객들에게 모종의 확신을 심어주는 필연성을 짐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결과적이거나 내용적인 측면이 아니라 응시의 측면에서 주체적 확신을 가진 남성적 인물들의 신비주의적 관조 습성이 관객들에게 전도되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도구화된 검투장과 같다. 사실상 하워드의 처지는 전체주의가 역사를 규정하는 방식의 전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범죄 서사에 부합하는 폭력들이 노출됨에 따라, 하워드의 성격과 결부하여 역사를 규정하는 강제성이 그다지 비윤리적이지만은 않다는 판단이 동반됨에 따라, 여기서의 주체적 확신이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빌려준 돈은 받아야 된다는 세속적의 관습에서 기인함에 따라 이 스포츠는 하워드의 예정된 패배가 전복되기를 안달하게 만들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영화적 입장에서 이것은 이념적 순응으로 마무리해서는 안 될 작가의 책임을 재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방탄 부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후반부 하워드는 드디어 자발적으로 아르노 일당을 방탄 부스에 감금시킨다. 이것은 이념의 대행자적 성격으로 울부짖는 검투사의 처절한 용맹함 대신 나약하고 치졸한 인물들 간의 가학/피학적 보석 다툼이 집중되는 순간임인 동시에 정치적 허무보다는 줄곧 암시되던 포르노그라피의 허무에 정신을 소모하게 되는 본격적인 귀결의 순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두 번째 방탄 부스의 활용은 첫 번째 방탄 부스의 현상학적 활용에서 변용된 것이 아니라 그저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물론 첫 번째 방탄 부스의 활용이 우연을 가장하여 세계의 규칙을 궤멸시킨 반면 두 번째 방탄 부스의 활용에는 자발적 파괴가 있었다는 차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우연적인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축적된 하워드의 역사에 대한 재조명 역시 두 사건과 관련하여 결코 간과할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지속적으로 갇혀선 안 될 곳에 감금되며 이념적 징후의 대상임을 위악적으로 암시해온 것에 대한 가장 합당한 추론이 정확한 중반부, 이분법적 논리의 행패를 잠재한 시간상에 벌어진다는 것은 전반부의 하워드를 궁지로 내몬 정치적 공식에 대한 복수이자 공식으로 분류된 관객의 정신에 대한 수정 건의와 다름이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방탄 부스는 이미 종결된 사건을 연장시키는 확장의 기호인 동시에 지난 시간대에 축적된 관객의 인식을 소멸시켜 역사로 상징되는 하워드와 주변인들의 인과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기호인 것이며 이는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사실인 것에 불과하고 이에 모든 활용은 단 하나의 결과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렇듯 끊임없이 서사를 지배하는 미완결의 기조는 필연성과 필요성의 틈새에서 분열적으로 지독한 아이러니를 생성한다. (이 필연성의 역설은 하워드의 선택과 운명을 경유하여 오펄이라는 오브제의 역설적인 존재론을 다시 증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하워드의 입장이란 일정 부분 타자의 이념적 확신에서 결정된다는 비극을 포함한다. 방탄 부스가 없는 <언컷 젬스>를 생각해보시라. 그것보다도 지겨운 결정론의 허무는 또 없을 것이다. 고로 순식간에 서사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기형적 결과물인 방탄 부스는 하워드의 역사와 이념의 결정론적 용법의 윤리적 충돌에서 산출된 것이고 영화적 필연성의 파국을 모면하기 위해 샤프디 형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관객을 끌어들인 것이다. 결국 미완결은 영화의 최종적 목표가 되며 이에 하워드가 과거를 삭제하는 것은 결정론의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관객이 체감하는 필연성에 대해 수비보다는 공격으로, 변화보다는 전복으로 채택된 방식에 가깝다.

결국 포르노그라피적 결과를 피할 수 없는 이유는 하워드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현상들이 암시의 술책이었다면 하워드의 술책은 암시보다는 인과가 없는 계기를 통한 정치적 전복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전복 행위라는 과거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빌려온 미래의 조건은 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조건일 따름으로 줄곧 강조했다시피 그의 현재는 무효화된다. 여기서 하워드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얼마나 기형적으로 의도되어 조립되고 있는지가 확인된다. 과거를 절취하기 위한 술책으로 처음 수행된 사건이 미래의 조건을 불식시키는 과거가 되어 그의 의도, 현재를 무효화시키고 있다는 아이러니. 사실상 <언컷 젬스>는 그 역설이 전부이기도 하다. 이제 현재적 공백은 말소되며 관객이 추적할 대상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이처럼 전반부에서는 영화가 하워드를 추적하지만 후반부에서는 끝내 무엇도 추적할 것이 남지 않게 된다. 이제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언컷 젬스>를 보는 관객은 응당 전반부에는 정치적 공식의 영향을 받고 후반부에는 포르노그라피적 도착과 직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언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인가. 그것은 절묘하게도 하워드의 발자취와 일치한다. 우연적으로 하워드가 방탄 부스의 효력을 알게 되었을 때 하워드와 관객은 전반부의 정치 공식과 결별한다. 왜냐하면 규칙으로 기능하는 과거는 하워드의 입장에서 절취될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하워드와 방탄 부스, 무효화된 현재 혹은 규칙, 그리고 지속적으로 절취 과거로 말미암아 본격적인 감금의 세계와 대면함에 따라 도착적인 시각의 강제적 이식을 허용하게 된다. 이 변화에 대해서는 하워드도 마찬가지다. 앞서도 말했듯 이동은 필시 주체의 선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결말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하여 상징적 과거가 된 하워드가 구조에 입장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현재란 생기고 만다. 이에 하워드의 주변인들에게 미칠 폭발적 부하현상과 후폭풍을 고려하여 세계에 대한 하나의 공백이 생기게 되며 도착적 단락은 마침내 소멸된다. 그것이 샤프디 형제가 선택한 미완결이다. 드디어 관객은 하워드와 함께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 참고문헌 : 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