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내_비엔날레에 대한 짧은 에세이 : 타이베이 비엔날레를 바라보는 여행자의 관점

박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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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에 한 비엔날레 사무실에서 일했다. 비엔날레는 코로나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고, 일찌감치 모든 행사를 1년 뒤로 미루었다.(그러면 그것을 정말로 “비엔날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록 다운된 영국에서 일하는 감독을 단 한 차례도 대면으로 만나지 못했다. 그의 한국 항공편은 여러 번 취소되고 다시 예약되었으나 그는 결국 입국하지 못했다. 스크린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감독을 두고, 사무실의 미술 노동자들은 우리가 실제 사람과 전시를 하고 있는지, 사실 이 모든 것이 ai의 거대한 음모가 아닌지 자조적인 농을 치곤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가까운 예로는 도쿄 올림픽이 대체 언제 열릴 수 있을 지 모르고 베니스 비엔날레가 지속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연도 단위의 행사들이 앞으로도 의미가 있을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없던 일 마냥 모두 사라져 버릴지 알 수 없다. 이미 국내 최대 규모의 모 국제 비엔날레는 오픈을 미루고 미루다가 전체 일정을 반토막 내 버렸고, 지역 특정성과 여행 산업에 의존하여 명맥을 유지하던 모 비엔날레는 무성한 소문만을 남긴 채 예고 없이 공중 분해되어 버렸다. 10년에 한 번씩 열리는 미술의 그랜드 투어(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라는 유럽의 거대한 미술 행사가 각각 연차의 최소 공배수인 10주기로 일치하는 해)가 존속될 수 있을지, 그 해가 의미 있는 주제와 함께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작년 한 해는 그 숫자와 관계들이 실제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해였다. 그건 시간의 무화이면서 각각의 네트워크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수많은 온라인 전시와 줌이라는 플랫폼을 끼고 진행되는 여러 토크들. 그 행사들은 과연 “열린”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온라인이 무한한 민주의 장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을 이렇게 얼렁뚱땅 마무리할 것인가? 

삶을 계획하며 사는 것에 대해 무용함을 느끼고 원래 인간은 단독자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삶에 있어 나 자신은 주인공도 아니고 조연도 아니다. 세트장 밖에서 서사를 관찰하는 ‘무대에 어쩌다 잘못 들어온 사람’이다. 취소된 비엔날레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경험은 그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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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을 타이베이에서 보내게 됐다 하면 다들 “코로나 청정국으로 가시네요” 하고 말을 얹곤 했다. 타이베이 비엔날레는 모든 게 아수라장인 와중 청정하게 열렸다. 세계가 막장으로 흘러갈 때 홀로 정상적으로 열린 비엔날레는 그래서 더 기이해 보였다. 혼란한 시대, 스타 큐레이터와 인류세라는 최신 유행 담론을 업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중압감 속에서 너무도 ‘비엔날레스러운’ 말을 고고히 하고 있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타이베이 비엔날레의 제목은 《You and I don’t live on the same planet》 번역하면 “당신과 나는 같은 행성에 살고 있지 않다”라는 문장이다. 이는 트럼프와 툰베리가 같은 행성에 살지만, 동일한 인식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다는 서술이기도 하면서, 우리가 지금 발딛고 있는 세계는 인류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론에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의 정점에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있을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각각의 객체는 각각의 행위자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체란, 인간을 넘어서 생물, 바이러스, 병균, 그래프, 데이터와 같은 범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며, 이러한 사물까지 주체적 행위 능력(agency)이 있다고 선언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게다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인류세의 도래와 함께 여러 개념과 조밀하게 얽혀져, 근래의 생태주의에 대한 어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라투르가 일컫는 “생태화”는 단순히 “자연 보호”에 대한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 “생태화”는 인간 중심의 “근대화” 개념의 대척점으로서의 “비근대”에 대한 개념이며, 우리의 삶이 단 한 번도 면밀한 결과 도출의 장이 아니었으며, 끝없이 정치적으로 분화되며 융합되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하는 하나의 말하기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말하기는 온점으로 끝나버리는 말하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면서도 의심으로 되묻는 물음표로 끝나는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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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k Leibovici & Julien Seroussi, muzungu (those who go round and round in circles), 2016, Magnetic paint, magnets, magnetic racks, laser prints on paper, felt-pens, varnish, mediators ©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ipei Fine Arts Museum

프랭크 레보비치(Franck Leibovici)와 줄리안 세로시(Julien Seroussi)의 작업은 콩고 보고로의 내전에서 발생한 전쟁 범죄 재판에 대한 것이다. 해당 재판은 국제 형사 재판소(ICC)에서 다루어졌는데, 법적 관행에 대한 해석 기준이 서명국들마다 다르고 모호하다는 데에서 계속 마찰이 발생했다. 이는 언어의 문제를 넘어서, 민족 내전의 특수성과 난민 문제, 반인륜적 행위의 기준과 현실 정치적 문제들이 뒤섞여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여겼던 사회적, 윤리적 관행들을 쉽게 무화시켰다. 

두 작가는 해당 사건과 재판 진행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모아 미술관에 쌓아 두었다. (엄밀히 말하면 줄리안 세로시는 ICC의 분석가이다. 그가 있었기에 이러한 자료 수집이 가능했다.) 여러 사진 자료와 신문 기사들은 마그넷이나 클립 등으로 벽면에 임시적으로 고정되어, 관객들이 스스로 그 위치를 조정하고 재구성하면서 진실을 추적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보드에 다가서서 실제로 그 자료들을 뒤적거리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관객들이 그것을 만지지 않는 이유는 거대한 진실을 다루기 두렵다는 공포 때문이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권위 아래서 이런 물질을 건드려도 되는 상황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이미지를 펼쳐놓은 것은 무용한 시도가 되는 것이다. 

Jonas Staal, Steve Bannon: A Propaganda Retrospective, 2018-2019
Installation ©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ipei Fine Arts Museum

네덜란드 작가이자 큐레이터인 조나스 스털(Jonas staal)은 미국의 전 대통령인 트럼프의 캠페인 매니저였던, 스티브 배넌이 연출한 홍보 영상 모음을 아카이브 룸의 형태로 전시장에 불러왔다. 이 작업은 글자 그대로 배넌의 프로파간다 필름을 작은 방에 꽉꽉 몰아 넣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배넌은 우습게도 아이젠슈타인이나 레니 리펜슈탈 등의 감독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신의 영화가 이들에서 영감을 받았고 영화의 씬을 직조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고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대신 그가 취하는 이미지의 원본이 프로파간다가 되기 쉬운 미디어일 뿐이다. 

우리에게 그 프로파간다 미디어를 바라보도록 종용하는 것이 정말 그 서사를 해체하는 방식일 수 있는가? 반서사를 위해 취할 수 있는 미술의 방식이 새삼스럽게 문제적 이미지를 다시 퍼뜨리는 것이라는 아이러니한 진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맞닥뜨린다. 잠자코 모른 척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눈뜨고 보기 힘든 추악과, 재난 직전의 혼란스런 상황을 눈을 뜨고 보아야 한다는 당위는, 사건을 파헤치는 추동을 제공한다기보다는 그저 우릴 곤혹스럽게 만들 뿐이다. 

화이트큐브에 고고히 서있는 조각에 대한 반동으로서 출현한 대상이, 신문기사와 필름 조각의 나열이라는 사실은 항상 여러모로 실망스럽긴 하다.(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아카이벌 충동은 너무나 헐겁고, 이 시간에도 빙하는 녹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무력의 재현에 대한 라투르의 메세지는 꽤 간결하다.

“너무나 거대한 문제에 달려들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정이 아니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해결책들 중 하나는 규모를 산출하는 ‘기술들’과 통약성을 가능케 하는 장비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 간극을 연결하고 새로운 단절을 가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측정 장비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바로 이 시대의 정치이다. 생태학적으로 고무된 활동가가, 일반 시민들에게 그들이 충분히 전지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지구 자체에 대해 느끼지 않는다고 면박을 주는 것은 쓸모가 없다. […] 자연은, 사물들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 이상적으로 도약하는 관찰자 관점으로 더이상 설명될 수 없다. 그보다 자연은, 함께 합성되어야 하는 모순적인 존재자들의 아상블라주이다.”

–  브뤼노 라투르, 「가이아를 기다리며」 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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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지정을 위한 과학자들의 논의 과정만 잠깐 살펴보아도, 장비와 연결망의 역할은 자명하다. 인류세의 지정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은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 시대의 도입이 인간에 의한 지구의 파괴를 강조하려는 환경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과학자들은 인간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기간을 먼 미래에서 보면 매우 짧은 기간일뿐더러 결과 또한 미미할 것이니 아무런 의미 없는 의제라고 주장한다.(인류세를 산업혁명 이후부터라고 설정한다면, 홀로세는 만 년밖에 되지 않게 된다.) 인류세 지정을 추진하는 AWG 위원장의 입장은 ‘우리는 오늘날의 지층 구분을 위한 기준을 찾는 것이지 100만 년 후의 지질학자들을 고려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지질 시대는 자연이 만들어낸 결과로 도출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를 차지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말싸움과 촌극 끝에 만들어졌다. 

이렇듯 정치는 비과학적이며 비근대적이다. 어떤 결론도 효과도 도출할 수 없는 모순적 운동 상태를 지속시키고 있기 때문에 또한 생태적이다. 기후변화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데이터는 데이터일 뿐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자들이 기후변화 위기론을 불러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자들이 짜낸 태피스트리에는 구멍이 너무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구멍이 아니라 태피스트리를 짜는 방식과 그 연결망이다. 타이베이 비엔날레는 글로벌 시대에 ‘백과사전식 궁전’을 짓는 방법론이 무용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태피스트리는 그 특별한 매듭의 연결 방식 때문에 단단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빈 판넬을 제시하는 것과, 쓸데없는 필름 조각들을 전시하는 것은 구멍에도 불구하고 그 연결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무용할 지라도, 아니 무용하기 때문에 생태적이다. 

본디 비엔날레라는 형식은 전지구화 시대에 발맞춰 등장한, 순간적이며 가변적인 현대 정치 의제의 각축장이었다. 이들은 문화가 다른 학제와 쉽게 연동되는 속성에 기반하여, 너무도 당연히 사회 정치 문제와 씨름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해왔다. 당대의 가장 인기있는 사상가들은 너무 당연하게 플랫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적절히 시의성 있는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선정되어 그 시기에만 존재하는 작업을 만든다.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내용을 알 수 없는 비디오 클립의 파편,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웅얼거림, 눈뜨고 보기 힘든 참혹함 뿐이다. 

그러나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구태의 반복에서 나름의 안도감을 느꼈다. 미술만이 할 수 있는 반복으로서 이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공간 속으로 불러 모았다는, 가장 미술적인 당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 존재함으로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들과, 누군가의 참석으로서만 의미를 인정받는 예외적 공간인 “전시”는 오랜 시간동안 우리를 옭아매고 지배하고 있었던 비근대적인 예술의 관념이다. 이 관념은 매우 고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가변적인데, 우연한 만남에 기반하여 개인의 조건없는 환대로서만 그 실존을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보수적이며 남는 것은 허례허식일 뿐이라고 빈정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비정상인 상태에서 예외적인 정상은 상대적으로 가장 급진적이다. 모두가 참석과 만남의 대체 공간을 찾는 와중(클럽하우스나 줌이나 일 년이면 사라져 버릴 수많은 온라인 전시 페이지,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나 전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으니 내가 태피스트리를 짜는 것을 구경하러 오라”는 것은 보수적이라기보다는 무모한 태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무효하게 되어버린 시점, 코로나 19의 출현은 다시 그 형태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던져놓는다. 무언가 너무 복잡하여 전체를 구성해낼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백과사전을 펼쳐 글자의 어원부터 읽어 내려가며 단어의 형성에 얽힌 여러 파편을 스스로 조립한 뒤 해체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시적인 이야기로부터 거대 서사를 끌어내려 함이 아니라, 베를 짜는 도구 자체와 태피스트리의 연결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라투르의 주제는 이 무력의 시대에, 다시 장비와 네트워크로 돌아가자고 말한다는 점에서 서투르고, 비과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며, 예술적이고 비엔날레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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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하게 비엔날레가 예술계에서 하나의 생태계로서 존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의 역할인 동시에 비엔날레를 구성하는 모든 협업자들의 역할이다. 비엔날레는 일반 전시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다른 지역 출신의 감독과 큐레이터들이 잘 알지 못하는 국가적 이슈를 다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미술과 전혀 연이 없는 기관과의 몰이해에 맞닥뜨리는, 타인과의 신뢰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장이다. 매일의 위험 상황을 그 전날까지 예측할 수 없고, 이를 봉합하는 데 초인적 힘을 발휘해야 한다.(또 희한하게 어찌어찌 굴러간다) 더 넓은 분야의 사람들과의 협업과 다툼과 갈등을 겪어내면서, 완벽한 합일체를 꿈꾸기보다는 끝없이 진동하면서 퍼져 있는 상태를 고수하는 플랫폼이며 과학과 비과학을 합성하는 네트워크이다. 

우리는 뒤로 물러설 곳 없이 눈앞에 닥친 파편들만을 마주한다. 전체를 구성해낼 수 없다고 절망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이 파편들을 엮어내는 합성의 도구를 발견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어떤 것들은 우리가 무력하기에 선명해진다. 지금껏 모두 단독자였던 존재들이 내부에서 그 연결성을 찾고 하나의 지도 위에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2년에 한 번 열리는 그 장은 비로소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행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아둔한 질문에는 간단히 대답한다. 비엔날레는 열려야 한다. 노동자는 계속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관객은 참석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바다를 건너 계속해서 탐험해야 한다. 


1) http://www.bruno-latour.fr/sites/default/files/124-GAIA-LONDON-SPEAP_0.pdf 전문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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