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_진격의 거인: 폐허와 테러리즘

진격의 거인 파이널 시즌 오프닝 영상 중에서, 출처

김선호(만화평론가)

먼 훗날 2020년이 어떤 해로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단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 우리에겐 있다. 2020년이 폐허에 지배되었다는 점이다. 2001년이 테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었다면, 2020년은 무너져야 할 것과 버텨내는 것들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 해였다. 2001년 테러리즘이 무너지는 것들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치환하였다면, 2020년의 폐허는 무너져야 할 것과 버텨내야 할 것을 구분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둘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라. 무너지는 것을 무너뜨리는 마음으로 바꾸는 건 복수심에 가깝다. 분명 폭력에 폭력으로 응수하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물론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이런 승화의 작업이 심리적으로 위안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이 위로받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폐허는 어떠한가. 무너져야 할 것과 버텨내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은 잔혹하다. ‘버텨낸다’라는 말에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려 든다는 거대한 압박이 담겨있다. 이를테면 인간이 자연에 대항하는 것이 자연재해요, 인간이 기술에 대항하는 것이 바로 산업화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 찰리 채플린이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노동자를 묘사했을 때(<모던 타임즈>), 그로부터 백년 전에는 러-다이트라는 기계 파괴 운동이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인간은 백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기계에 지배당했다. 인간은 기계를 이겨내지 못했고 그대로 지배당했다. 여기서 지배당했다는 표현은 우리가 그것 이외의 대안을 생각해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냉전 이후의 세계가 역사의 마지막 자리라고 주장했는데(<역사의 종언>), 마크 피셔는 이를 이어받아 ‘벽 안의 사람들’이라는 주장을 편다(<자본주의 리얼리즘>). 벽 안의 사람들이란 자본주의에 완전히 익숙해진 이들이며, 현재로서는 자본주의의 이후를 생각해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벽 안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때 마크 피셔가 후쿠야마에게 깊은 이미지로 각인된 해변을 가져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진격의 거인>을 떠올리게 한다. 왜냐하면 이 만화에는 벽 안의 인류와 바깥의 해변이 있으며, 냉전과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있고, 폐허와 복수라는 두 가지 테마도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만든 50m 높이의 성벽 속 도시 광경, 출처: 진격의 거인 공식 트위터

<진격의 거인>의 첫 번째 시즌은 벽 안의 사람들과 해변, 그리고 거인의 침입으로 시작된다. 에렌과 아르민, 미카사가 금기시되었던 문헌을 읽기 시작하자 벽 위에서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벽 바깥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금기를 어기고 나면, 벽 밖으로부터 무언가가 밀려 들어오는 것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지젝이 911테러 이후의 세상을 ‘실재’에 빗대었던 대목을 떠오르게 한다. 지젝에 따르면 911테러 이후의 세상은 911테러를 다룬 매체 자체가 되었는데, 이게 바로 우리가 새로이 눈을 뜨게 된 ‘실재의 사막’이다. 마찬가지로 에렌이 읽은 문헌에서 해변의 이미지가 떠올랐을 때, 해변의 이미지는 거인의 침입이라는 형태가 되어 그들의 세계를 둘러싼 벽을 넘어온다. 여기서 벽이라는 게 ‘바깥’을 생각해볼 수 없는 구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벽 밖의 세계는 대안이 없는 곳이라는 점도 자연스레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대안이 없는 곳에 도전하는 일은 지젝이 말하는 실재의 사막과도 같아서, 우리가 한번 그들을 들여다본 이상 그들도 우리를 들여다보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니 에렌이 해변이 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언젠가는 그들이 해변에 다다를 것임을 쉬이 예상해볼 수 있을 테다. 마찬가지로 해변으로의 여정을 가로막는 게 바로 ‘거인이 살고 있기에 넘어갈 수 없는 실재의 사막’이기에, 거인의 침입을 받은 이상 거인의 구역을 침입해야만 한다는 논리 또한 가능하다. 우리가 실재를 들여다보았기에 실재로부터 침입을 받았다면, 우리도 그런 실재에 대항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거인의 첫 번째 침입은 명백한 테러리즘이었다. 통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괜찮았던 거인들의 세계는 이제 기행종, 지성이 있는 거인 등으로 나타나 인간의 세계를 침범한다. 그렇다면 대안이 없는 세계에 테러리즘이 자행될 때, 물러날 곳 없는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거인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거인을 파괴해야만 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위에서 말한 기계 혁명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할수록 기계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바꾸어 말해, 기계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대안이 있다고 믿던 19세기이다. 이것이 바로 파라디 섬과 마레 제국의 문명의 격차라고 할 수 있다.

마레 제국이 거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은 그들이 거인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거인 이외의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거인을 선택했다. 하지만 파라디 섬에서 거인은 선택지 안에 있는 게 아니었고 그래서 그들은 거인을 파괴할 수 있었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 건 에렌에게 진격의 거인 능력이 발현될 무렵이다. 인간이 거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거인이 인간의 통제하에 놓일 수 있다는 지배의 의식이었다. 러-다이트의 시대를 지나 채플린의 세계로 접어든 것이다. 거인의 신체 안에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인간이 거인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바깥이 거인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거인 이외의 바깥을 상정해볼 수 없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초대형 거인이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따라서 파라디 섬에 혁명의 바람이 불어닥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거인을 죽일 수 있다는 건 바깥을 떠올려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진보가 아니라 멸망의 길임을 명심해야만 하는데, 그에 대한 증거는 인간의 적이 더 이상 거인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테러리즘으로 시작된 세계의 변화는 또 다른 테러리즘이 된다. 이것은 벽 밖의 세계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받아들여만 했다’는 강제의 논리에 의해 성립되었다. 만약 이들이 자기만의 투쟁을 통해 실재의 사막을 건넜다면 마지막 시즌에서 묘사되는 테러리즘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벽이 무너지고 세계가 깨어지는 일이 강제됨으로써 이들은 미완성의 상태로 세계로 내쳐져 버렸다. 산달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세상에 나온 미숙아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 미숙아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가장 처음으로 목격한 것을 어미로 여기고, 또 따르게 된다. 이제 에렌이 벽을 넘어오는 초대형 거인의 얼굴을 보았을 때를 떠올려보도록 하자. 아직 벽 안에 잠들어 있던 에렌의 세계가 처음으로 마주한 게 거인의 얼굴이라는 점은, 에렌으로 하여금 거인을 어미로 여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식이란 게 어머니와 유전적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자식은 어머니의 바깥을 생각해 볼 수 없고, 에렌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문명과 자연이 아버지(오이디푸스)와 어머니(서발턴)의 은유로 대립한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을 테다.

자본주의 문명이 세계의 멸망을 가속한다면 자연 세계의 아늑함은 우리를 안쪽으로 보호한다. 전자를 진보로 볼지 폭력으로 볼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벽 밖의 세계를 조사하는 일이 인류의 진보를 의미할지, 아니면 세계에 대한 폭력이 될지는 오로지 에렌의 선택에 달렸다. 누군가는 에렌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에렌의 능력이 ‘미래를 보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 모든 것은 운명(Amor-parti)이 된다. 예를 들어 만약 세계가 멸망한다면 그 끝에는 모든 것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결론만이 자리한다. 우리는 그런 결론 이외의 것을 생각할 수 없으며, 이를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미래이든 간에 결론이 하나로 귀결된다면 미래에 대한 생각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게 될 것이다. 선택지라는 이름의 자유는 필연으로 향하는 강제에 불과한 게 되어 버리며, 이런 세상에서는 바깥을 떠올려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리 없다.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오직 노예만이 남게 됨으로써, 실재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들만이 이곳에 남게 되는 셈이다.

니체에게 낙타란 등 위에 운명을 지고 살아가지만 평생 그것을 알 수는 없는 헤겔의 노예적인 주체이다. 그리고 지젝의 사막에서 이 낙타는 자본주의라는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문명 사회의 문명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격의 거인>에서 인류는 거인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세계의 일원이다. 거인 문명의 고도화를 겪는 세계에서 거인 이외의 대안은 없으며, 이는 곧 마크 피셔가 말하는 자유 낙하로 이어진다. 자유 낙하라는 것은, 허공에서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기에 자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중력에 대한 강한 이끌림이다. 즉, 이것은 죽음으로의 활강일 뿐 몸에 대한 자유로운 통제권한의 행사가 아니다. 어린 아이가 몸을 휘청이며 첫 걸음을 내딛는 게 몸에 대한 자유로움을 얻는 과정이라면, 에렌의 테러리즘은 오히려 유아기로의 퇴행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퇴행이라는 표현은 점으로 수렴할수록 수축하는 자아를 두고 사용한 것이다. 이를테면 태양처럼 거대한 중력을 지닌 존재도 종국에는 아주 작게 밀집된 초거대 중력의 핵이 된다.

가장 순수한 수축의 지점에 대해 말해보자. 어린 아이는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조건 입에 넣어보려고 한다. 또한 앞에 놓인 사물을 아무 이유 없이 건드려보기도 한다. 이 잔혹한 순수함은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무서우며, 그런 의미에서 유아기로의 퇴행은 가장 순수한 점으로의 수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폴 비릴리오에 따르면 가장 순수한 가속의 지점은 소멸점인데, 이는 어떠한 섬광이 찾아오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번쩍임이 바로 인간이 거인으로 변모할 때 찾아오는 섬광이라는 생각이 든다. 벤야민에게 섬광이라는 건 파국의 순간에 찾아오는 구원의 빛이기도 했는데, 이 역시도 현재의 ‘바깥 지점’은 없다는 가장자리의 사유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거인화한다는 건 늘 시간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목에서 에렌이 진격의 거인이라는 점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에렌은 미래를 보지 않던가? 정확하게는, 과거와 미래의 거인 능력자들과 거인의 유전자를 통해 좌표로 연결되어 있지 않던가? 이 좌표야말로 벤야민이 말하는 성좌에 다름없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불려 옴으로써 큰 섬광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유로 에렌의 테러리즘은 어쩌면 실재의 사막을 건너보고자 하는 시도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 만화에서 에렌은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존재이지만, 반대로 그런 행동은 죽음의 너머를 엿보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계를 폐허로 되돌린다는 생각은 그 폐허의 이후를 엿본, 미래를 아는 이기에 가능한 ‘바깥’의 사유인 셈이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이러한 에렌의 사상이 어떻게 발달해왔는지를 서술해보고자 한다. 내 생각은 명백한 테러리즘으로 보이는 에렌의 행동이 ‘폐허’를 만들어내기에 정당화될 수 없음을 전제로 둔다. 폐허라는 것은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기에 순수의 지점을 인위적으로 형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나, 대안이 없는 세계에서 이런 폐허는 세계의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폐허에서 무언가 잔존하고 그를 통해 세계가 재건된다는 등의 희망은 이 만화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벽 안의 인류가 무언가에 가두어진 이들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았을 때,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들이 전 세계의 인류라는 점을 떠올려보았을 때, 따라서 벽이 사라진 세상은 삶의 터전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만화에서 벽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모든 벽이 사라진 세상은 20세기의 <에반게리온>처럼 모든 것을 원형으로 되돌리는 폐허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 이는 가장 순수한 것이야말로 가장 잔혹한 폐허라고 말하는 점에 귀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이는 ‘순수’라는 말에 ‘잔혹’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어린아이를 예시로 들어 설명했지만, 무엇보다 보들레르라는 시인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들레르의 시가 모더니티의 예시로 언급되는 건 그가 찰나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덧없음, 무상함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이 찰나의 사유는 일찍이 동양적 사고로 이해되어 왔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찰나란 기계를 통해 가능하게 된 순간의 사유이다. 현대 사회에서 순간이란 인간의 바깥에 자리한 시간으로, 손짓 한 번으로 메일을 보내거나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의 순간을 뜻한다. 말하자면, 보들레르의 찰나가 가장 순수한 것이자 잔혹한 것이기도 한 이유는 이것이 그런 응축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로 이해되는 폐허란, 이 순수를 통해 가능하게 된 공간의 실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게 실현되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전장이다.

이 만화의 배경이 거인의 힘이 기계의 힘에 지배되어 가는 중의 시기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전까지 거인의 힘을 가졌다는 사실이 일종의 전쟁 억제력으로 사용되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냉전 시기에 핵무기의 역할과 유사하다. 물론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핵무기의 억제력은 건재하지만, 냉전 시기에는 핵무기를 통한 힘의 균형이 독보적이었다.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자국이 공격받았을 때 상대국가 또한 폐허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전쟁 억제력을 제공해주었다. 이를 통해 핵무기는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재적 현상이 되었으며, 어느샌가 우리는 핵무기라는 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게 되었다. 이게 지젝이 말하는 실재의 정체이다. 보드리야르에게서 빌려온 이 사유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스펙타클이 존재하기에 오히려 스펙터클이 실재의 것으로 취급된다는 아이러니를 양산한다. 그리고 이 실재들은 우리의 무의식으로 밀려나 실재의 사막을 형성하고, 바로 이렇게 우리는 바깥을 생각해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거인의 힘이 기술에 밀려나게 되는 시기를 다루는 이 만화를 핵무기의 이후를 사고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은 비약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공하는 구조만큼은 유효하다. 이 밀려남의 구조는 거인이 너무 일상적인 것이 되었기에 거인 이외의 힘을 생각해보지 않던 마레 제국이, 거인의 힘을 자신들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해 바깥을 타도하고자 했던 연합국들 간의 힘의 역학 관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레 제국은 바깥을 생각해볼 수 없고, 그래서 몰락을 향해 가는 중이다. 이런 상황 속에 그들은 파라디 섬을 침공하려 드는데, 이러한 시도는 파라디 섬이 마레 제국의 안쪽에 자리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들이 파라디 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파라디 섬은 그들의 바깥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바깥’을 침공하려 드는 마레 제국의 모습은 상당한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깥에 자리하는 것을 어떻게 안쪽에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마레 제국의 안쪽에 있는 파라디 섬의 유사물에서 찾을 수 있다. 레벨리오 수용구가 그것이다.

레벨리오 수용구는 파라디 섬을 구성하는 에르디아 인들을 한 곳에 몰아넣은 장소이다. 마레 제국은 에르디아 인을 악마로 규정하며 수용구의 거주민을 차별한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은 이상하게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파라디 섬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바깥에 있는 것을 안쪽에 있는 것을 통해 파악하는 셈인데, 그렇게 본다면 이는 거울의 사유이기도 할 테다. 푸코에 따르면 거울은 자신이 부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존재함을 확인하는 장소이기에 유토피아가 된다. 그러나 이는 거울이 우리의 바깥에 자리한 장소라는 점에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헤테로토피아로 작동하기도 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우리가 돌아와야 할 장소이지만 정말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인 것이다. 말하자면, 레벨리오 수용구는 기본적으로 모든 거인의 원천이 되는 에르디아 인이 사는 곳이지만, 그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기에 다시 받아들이기란 힘들고, 따라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들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러한 점에서 레벨리오 수용구는 마레 제국의 바깥에 자리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레벨리오 수용구를 닮은 파라디 섬은 실재의 사막이며, 이들 실재를 응시한 순간부터 그들이 실재로부터 공격당하는 일은 필연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들의 악연은 아주 오래전이 아니라, 비교적 최근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이 운명은 에렌의 형인 지크가 목소리를 통해 즉각적으로 거인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속도의 사유는 속도가 도달할 때까지 우리가 있을 장소를 없애 버린다. 우편이 도착하기까지 걸리던 시간은 이제 사라졌고, 전쟁이 시작되고 난 후에 대피할 찰나의 시간도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의 전쟁은 버튼을 누르는 즉각 시작되어 짧게는 서너 시간 만에 끝나버릴 수도 있고, 다르게 말하면 이는 폐허의 생성이 무척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폐허의 생성이 자유롭다는 건 자유와 방종의 세계에 사는 우리가 자유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살아가는 장소가 다름 아닌 폐허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말하자면, 후쿠야마의 지적처럼 냉전이 끝난 이후로 우리는 점점 역사의 가장자리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것은 거인의 힘이 끝나가는 것이 곧 자원의 고갈 상황과 맞아 떨어진 마레 제국의 처지를 떠오르게 한다. 역사의 종언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상황에서 마레 제국의 선택은 또 다른 폐허를 향해 가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금 에렌의 유년기로 되돌아가보도록 하자. 어느날 갑자기 열린 문에 당황하던 아이는 거인을 자신의 어머니로 받아들인다. 에렌은 자신의 경화 능력을 이용해 뚫린 성벽을 메우는데, 이는 자신의 힘으로 다시금 세계를 수복하는 행위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그의 주변에는 누가 있을까? 첫 번째로는 엘빈 단장이 있다. 두 번째로는 리바이 병장이 있다. 여기서 엘빈 단장이 에렌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를 어머니적인 인물로 지정할 수 있다. 먼저, 엘빈 단장은 해변이 보고 싶다는 모계 유전자를 에렌과 공유하고 있다. 이 공유의 지점은 근본적으로 어머니는 자식에게 50프로의 유전자를 확실하게 물려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즉, 엘빈은 50프로의 에렌이기도 한 셈이다. <진격의 거인>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즌에서 정치적으로 에렌을 보호해주던 엘빈 단장은 에렌을 감싸주는 어머니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엘빈이 죽었을 때 에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머니가 사라진 아이가 엇나가리라는 점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기서는 엘빈 단장에 대해 이야기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엘빈 단장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바깥을 들여다보려 했던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진격의 거인>에서 개인이라는 존재는 찰나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거인의 힘이라는 설정을 통해 거인을 하나의 기원점으로 설정해둔 이곳의 역사에서는, 거인의 계보가 곧 고고학이 되며, 이것은 하나의 연대기를 생성함으로써 개인이라는 존재를 하나의 점으로 수렴시킨다. 그리고 이 점이란 것은 적어도 근대까지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것으로, 왕권은 인민을 지배했으며 신은 인류를 지배했다. 하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왕권은 사회를 이루는 다중에게로 할애되었으며, 신은 살해당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바로 신처럼 여겨졌던 거인을 살해하게 된 파라디 섬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예의 위치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즉, 이제 인류는 신이 없음을 인정하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에렌이 시조 거인의 힘을 취하려는 건, 자신이 신이 되려는 게 아니라 신이 없는 ‘이후’ 혹은 ‘바깥’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건 아닐까?

조사병단장 엘빈, 출처: 진격의 거인 공식 트위터

이 생각은 아마도 엘빈 단장으로부터 기인했을 것이다. 엘빈 단장의 작은 꿈은 거인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정확하게는 거인 없는 세상을 보고 싶다는 뉴턴의 사유였다. 뉴턴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보면 더 넓은 시야를 지닐 수 있다고 말했는데, 점의 문명인 현대 사회에서 그런 사유는 적용하기에는 너무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속도 문명인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픽셀, 혹은 비트라는 점의 디지털 점(Dot)의 형태로 존재한다. 점이라는 단어는 아래로의 중력이 아니라 가속이라는 에너지의 파급력으로 이행하였고, 여기서 시간에 대한 사유도 파생되었다. 예를 들어, 광속에 근접할수록 시간은 느려지는데 이는 시간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점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느려지며, 만약 점의 ‘이후’를 엿볼 수만 있다면 미래를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에렌이 갖게 된 좌표의 능력은 이러한 시간을 평면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좌표는 3차원의 시간을 평면화하여 과거와 미래의 구분을 삭제한다. 과거와 미래 모두 현재라는 평면이 됨으로써, 모든 시간들은 하나의 점으로 수렴한다.

따라서 만약 엘빈이 죽지 않았더라면 에렌이 어떠했을지를 떠올려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에렌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던 엘빈이 살아있었을 경우, 에렌은 엘빈이 사고하는 것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은 유전적으로 어머니의 바깥을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머니의 죽음은 자연의 개발이라는 현대 사회의 본격적인 시작으로도 풀이되는데, 이는 엘빈의 죽음이 왜 이루어져야만 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엘빈의 죽음이 본격적인 기술 사회의 시작을 알렸다고 볼 수 있다. 엘빈 단장과 맞바꾼 아르민의 생명이 마레 제국으로의 침공으로 이어졌음을 떠올려보자. 바로 이 순간이 현대 사회로의 본격적인 진행점인 것은, 엘빈 단장의 죽음이 벽 안 인류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점과 본격적으로 맞물린다. 벽 안 인류가 거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바깥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바깥에서 들여온 여러 기술들이 그들을 근대 문명에서 현대 문명으로 가속화했다. 그러나 무리한 가속에는 반발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파라디 섬에는 정치 체계의 변혁이 일어났으며, 이런 상황 속에 에렌은 조국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에렌이 역사의 가장자리, 즉 최전선에 자리한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최전선에 자리했던 엘빈의 지위를 계승한 게 에렌이라는 추론은 이런 의미에서 계보가 있다. 하지만 같은 최전선에 자리하더라도 둘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간극이 있는데, 에렌에게 거인의 힘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인의 힘은 번쩍이는 섬광의 순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섬광의 순간은 잠깐이나마 기억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시간의 삭제를 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엘빈이 역사를 선형적으로 사는 이라면 에렌의 시간은 부분적이고 파편적이다. 역사의 균질한 시간에 균열을 내야 했다고 말했던 벤야민적인 사람이 엘빈 단장이라면, 이를 이어받아 수행하는 에렌에게 시간은 균질하지 않고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과거만을 계승하는 다른 거인 능력자들과는 달리 과거에 간섭하고, 더 나아가 미래의 기억을 물려받는 에렌에게는 그런 기억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시간이 왜곡되고 조작되는 것이다.

시간이 왜곡되고 조작되는 건 폐허의 특징이기도 하다. 폐허는 시간을 알려줄 단서조차 남아있지 않기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 장소, 혹은 시간을 측정할 수 없는 장소이다. 그래서 이런 폐허에서 남은 것들은 시간의 잘려나간 파편에 해당하며, 이 파편들을 그러모으는 수집가는 분열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격의 거인>에서 거인은 분열을 극복하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거인의 힘은 깊은 섬광과 함께 실현되며, 이는 시간의 찢겨나감, 혹은 신체의 주체할 수 없음을 만들어낸다. 요컨대 거인의 힘이란 분열하는 자아상을 동반하며 그래서 거인 능력자들에게는 비참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너의 불안정한 정신은 에렌의 불안정한 정신과 별반 다르지 않는데, 두 사람 간의 차이는 짊어진 것들의 여부다. 라이너가 가족이나, 전사 후보생처럼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는 반면, 에렌에게는 가족도, 국가도 모두 자신의 ‘바깥’에 자리한다. 바깥에 자리하기에 얼마든지 저버릴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엘빈이 죽고 난 후로 에렌이 엇나가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엘빈은 세계의 바깥을 보려 했던 이였으며 에렌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세계를 보고 싶다는 호승심이라는 측면 말고도, 자신의 바깥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러했다. 자신의 바깥을 보고자 하는 마음은 폐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고, 이것은 드넓은 자연을 보고자 하는 상쾌함과도 같다. 그런데 에렌이 목격한 전쟁의 풍경은 자연이 기계로 대체되어가는 사회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기술이 인간을 추월할수록 인간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대안이 없는 거인의 힘을 두고서는 거인의 힘에 적극적으로 복속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리바이의 역할은 자명하다. 에렌에게 나머지 50프로의 유전자를 물려준 리바이는 거리의 깡패 출신으로, 유전적으로 아주 잡다한 것들이 섞인 상태다. 그래서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저항력이 있지만 그런 이유로 도시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잡초는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자연에 더 어울리는 식물이다. 바꾸어 말해, 리바이는 그 누구보다 강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현대 사회의 잔인함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현대 문명을 혐오하는 것은 단순히 기술에 뒤처져서가 아니라, 잔혹한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사람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인류를 구하기 위함이라는 가장 순수한 이유로 전투에 나서는 리바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폭력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을 테다. 만인을 위한 만인을 위한 투쟁이라는 근대의 루소적 인간은 거인을 위한 거인을 위한 투쟁으로 바뀌어, 거인 능력자들로부터 거인 능력자인 에렌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함은 오히려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폐허를 만들어내어 버린다. 이곳에는 어떠한 승자도 패자도 없으며 따라서 도덕적인 가치관도 없다. 물론 이 문장에서 도덕적인 가치관이 없다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현대 과학에서의 상대성에 의존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시간이 얼마든지 상대적일 수 있음을 말해주었듯이, 뉴턴의 근대 과학에서 출발한 에렌의 파라디 섬은 이제 상대성 이론의 새국면을 맞이한다. 시간에 지배되었던 이들이 시간을 지배하게 되고, 거인에 지배되었던 이들이 거인을 지배하게 된 작중의 오늘날에서는 오직 멸망 가도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금 후쿠야마의 해변과 벽으로 돌아와 보도록 하자. 에렌의 행동이 테러리즘처럼 보인다면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거울 세계라고 우리는 말했었다. 이 거울 세계는 푸코의 사유, 그중에서도 벽을 둘러싼 감옥의 은유에 많이 기대고 있다. 17세기의 근대 사회에 광인들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감옥이나 정신병원과 같은 헤테로토피아에 감금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21세기의 폐허로 이어진다. 이 폐허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있는 장소를 보지 못한 채, 바깥에 있는 것들을 본격적으로 사유하고 그리워하려 든다. 내가 이 문장을 ‘그리워하려 든다’는 가능성의 상태로 서술한 건 이것이 잠재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태어나기 이전의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레트로라 불리는 이 현상은 시간적 의미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폐허의 순수성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의 맥락에서 폐허에 잔존해 있는 것들은 가장 순수한 시간의 수축, 즉 결정체이다. 이 알갱이들은 소진되고 남은 찌꺼기이고, 그래서 프로이트가 말하듯 더럽고 불결한 것으로서 우리 세계의 ‘바깥’에 자리했으면 좋겠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런데, 푸코는 이런 바깥이 역전되는 세상이 올 것임을 예언한다. 광기가 대탈출할 날이 온다고 말이다.

조사병단원으로서 초대형 거인과 재회한 에렌, 출처: 진격의 거인 공식 트위터

거인이 난무하는 에렌의 세상은 광기가 전형적인 질서로 작동하는 근대 사회였는데, 이런 광기의 대탈출이 이루어짐으로써 우리가 광기에 복속하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건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까. 거인이 없는 세상이 정말로 순수한 세상인지는 알 길이 없다. 거인의 힘은 이미 발명되었고 <진격의 거인>에서 이런 것은 ‘시조’라는 하나의 기원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기원이라는 것은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작용하는데, 이는 곧 역사의 시작이 기원에서부터라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거인에서 시작해 거인으로 끝나야만 하는 기원에서 기원으로의 움직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진격의 거인>이 벽 위에서 출현한 거인의 얼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거인의 얼굴을 기원 삼은 이 만화는 거인의 얼굴로 끝나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실재의 귀환을 말했던 지젝과 핼 포스터의 논의로 이어진다. 오늘날 위험한 스펙터클이 된 실재들은 상품이 되어 우리의 곁에 돌아온다. 이에 따르자면 테러로 시작해 테러로 마무리하게 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위험한 스펙터클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거인의 힘은 기술의 힘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은 기술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위험한 것이며, 어느샌가 기술이 거인의 힘을 역전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뒤늦게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기술의 힘이 거인의 힘을 역전한 오늘날, 이는 뉴턴의 중세가 현대에 역전당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상황은 정말로 많은 것을 의미한다. 신의 죽음이 있고, 냉전의 시작이 있으며, 속도 문명의 본격적인 도래가 있다. 속도 문명의 도래는 우리로 하여금 늘 항상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도록 강요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바깥을 생각해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사람들은 카카오톡과 디스코드와 같은 메신저를 통해 자기들만의 대화방을 이루고,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서 내부자들만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폐허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 되었고, 그것들은 늘 항상 바깥에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실질적으로 우리가 자리한 현실의 공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격의 거인>의 세상은 거인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거인의 힘이 사라진다 한들 그곳에서 거인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다. 이곳에서 거인의 힘은 역사와 문명을 초월해 존재하는 절대적 가치이자 신념이다. 그것은 테러리즘이자 일종의 실재이다. 이들은 기원에서 기원으로 움직이게 될 테고 따라서 그들이 향해 가는 곳 또한 거인의 얼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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