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상_이미지에 가미된 깔짝거림에 관하여: 전적으로 이미지를 다루는 회화의 소환, 안지산 작가를 기점으로

홍용상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회화라는 장르가 다소 난처한 처지에 놓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회화의 입장에서 모더니즘의 공세는 분명 치명적 상흔을 남겼다.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회화에 대해 환원적 단언을 내리고 말았으니 회화는 공간을 암시하는 건축성, 서사를 드러내는 문학성 등 모든 환영적 재현요소를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남은 것이라곤 2차원이라는 평면성뿐인데, 이마저도 여러 작가들에게-특히 그린버그의 이론에 편입되기에 거리낌을 드러내는 작가들에게-동의하기에 어려운 결론이었다.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b.1899)는 칼로 캔버스에 날카로운 상처를 냄으로써 회화의 평면성에 대적하는 물리적 현존성을 드러냈다. 한편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b.1936)는 성형 캔버스(Shaped Canvas)를 고안해 냄으로써 객체 또는 대상(Objecthood)으로 간주되는 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들에게 회화는 평면성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성립될 수 있는 독자적 사물이었다. 급기야 도날드 저드(Donald Judd, b.1928)에 의해 3차원의 밋밋한 입방체들로 배열된 구조물이 벽에 걸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전략들은 무척이나 영민했다. 그린버그가 부정했던 재현적 속성을 전혀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평면성에 대한 이론을 반박하는 실천들을 선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반작용은 회화를 점차 어중간한 위치로 옮겨 놓기도 했다.

예술은 그린버그식 형식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벽한 자율성을 획득한 것인가? 참으로 단언하기 어려운 문제다. 극단적으로 가속화된 거부반응들이 있고 나서, 이 관성으로부터 이탈하지 못한 동시대미술의 창작가와 감상자들은 여전히 회화가 회화답지 않을 때 호감을 느낀다. 총괄적으로 ‘예술이 예술답지 않을 때 호감을 느낀다.’는 표현도 거북스럽지는 않다. 이 현상은 각종 미디어는 물론 (전통적 의미에서) 비미술적 재료를 동반한 실험예술의 출몰에 정당성을 부여해 왔다. 회화로부터 비롯된, 또는 회화와 무관하게 파생된 여타 미술의 장르는 점차 미술계를 잠식해 나갔다. 설치미술,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더니 회화로서는 도무지 끼어들기 난감한 조형문법으로 범상치 않은 패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류 시각예술의 범주에서 회화는 버거운 시간을 버티고 있음이 자명하다. 화가의 그림이 한발 앞선 당대성을 겸비하여 참신한 충격을 주는 경우는 도통 눈에 띄지 않았다. 한때는시뮬라시옹이라는 돌풍에 힘입어 복제/재생산된 이미지들이 실체와 원본성에 대한 위계의 경쟁을 벌이면서 각광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그 혜택을 누렸던 이들은 포토리얼리즘에 속한 작가들이었다. 그 이후로 얼마나 지난한 세월이 흘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이미지만을 다루며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제시할 수 있는 회화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 유쾌함을 동반한다. 왕년에 회화가 누렸던 영광 때문일까? 한때는 시각예술의 제왕의 자리를 차지했더랬다. 그림을 제외하면 마땅히 예술이라 부를 만한 것을 꼽아내기도 곤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교차하면서 애처로움을 가중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 활로가 열릴 기미라도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어떻게든 연명에 보탬이 되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그 활로라는 것이 지금에 이르러 미비하게 남아 포착되었다. 사망자 명단에 회화라는 이름은 아직 오르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회화를 구명하려면, 그의 타고난 속성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전적으로 이미지를 다루는 회화를 소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화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앞서 여기에 연루된 이미지의 계통적 변화과정을 살펴보자. 이미지에 거는 기대감은 늘 매체의 출현과 함께 변모해 왔다. 우선 카메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카메라는 실재의 상(像)을 종이의 표면 위에 맺히게 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다. 이때부터 매체는 시각적 구현력을 향상시키는데 치중하였다. 흑백에서 컬러로, 그리고 더 높은 해상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이후에 등장한 컴퓨터는 형상의 구현력에 있어서 한참을 뒤처진 채로 출발한다. 사각의 픽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초기의 그래픽은 아무런 현실감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픽 기술은 놀라운 추진력을 발휘했다. 새롭게 출시되는 게임이나 영화에 삽입된 CG는 매번 놀라움을 자아냈다. 순식간에 현실적 비주얼에 근접하여 실존하는 피사체가 없이도 그래픽적 스펙타클을 구현해 내기에 이르렀다. 2019년에 개봉한 ‘라이온킹(디즈니)’이 1994년도의 애니메이션 버전의 ‘실사화’라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놀랍게도 CG로 범벅이 되어 있음은 별반 차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작금의 우리는 매체에 의한 이미지의 사실적 묘사력이 거의 정점에 다다랐음을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치중하였던 목표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다. 이미지를 향한 기대는 엉뚱한 방향으로 우회한다.

가상현실의 실용화로 인해 이미지는 또 다른 과제를 떠안았다. 오늘날의 VR체험이라고 하면 시각을 주도로 모든 신체 감각들의 오작동을 종용한다. 현혹을 기반으로 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소가 일종의 ‘깔짝거림’이라 하겠다. 일단 깔짝거림이라는 용어 선택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호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미 예전에 4D 영화는 대수롭지 않은 자극으로 관중의 몰입감을 증폭시키는 발상을 실현해 냈다. 의자의 진동이나 공기/물의 분사 등 영상에 들어맞는 자극이 물리적으로 가해졌을 때, 현실과 동떨어진 허상이라는 자각은 순간적으로 불분명해진다. 이러한 방식의 외부적 간섭을 방편적으로 남아 깔짝거림이라 호명키로 한 것이다. 이 깔짝거림은 VR기기에 그대로 도입된다. 예컨대 VR을 통해 롤러코스터를 체험하는 사람은 그저 조금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다. 아직은 생소한 기계장치를 눈에 덮어쓰고 말이다. 그밖에 뭐가 되었든 VR체험자는 반경 10m도 이동하지 않은 채, 온갖 별스러운 유난을 떤다. 시청각적 개입이 만연한 상태에서 다른 물리적 자극은 황당하리만치 하찮고 별 볼일 없음에도 불구하고 체감하는 수준은 실재와 거의 유사하다. 당대의 양상으로 보자면, 이미지를 기반으로 오감을 조작하는 모든 요인을 아우르는 용어의 마련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므로 깔짝거림은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노골적으로 팽창하고 있음을 반영한 결과다. 그리고 이 깔짝거림은 외부적 개입으로 성립할 수도 있지만, 이미지 자체에 내제되어 있을 수도 있다.

언젠가부터 게임을 두고 ‘타격감’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 키보드나 마우스를 타고 손끝으로 전달되는 촉각적 느낌은 아닐 게다. 오로지 시청각에 의존해 유발되는 환각에 불과하다. 게임이 스크린을 통해 선사하는 영상이 아무리 휘황찬란하다 해도, 촉각적 자극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타격감’이란 용어는 적절치 못했다. 이는 곧 이미지에 대한 언어적 남용이었다. 그렇다고 플레이어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이 미지의 감각적 동요를 덮어놓고 무시했다가는 고지식하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시각과 여타 감각들 사이의 유착관계를 순순히 인정하고, 이미지에 잠재되어 있는 깔짝거림에 몸을 맡겨 보자. 이런 식의 이미지가 부리는 수작과 희롱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 감각적 헛짓을 하는 것이 오늘날의 이미지 취향이라면 애써 외면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옳고 그름과 사실관계는 아무래도 좋다. 이 깔짝거림은 현대적 이미지에 첨부된 근거 없는 주술이리라. 과학적 사고는 만사를 명명백백하게 규명해 왔다. 이러한 추세로 모든 신화와 미신을 파기하려는 시도는 꾀 오래 전부터 지속되었다. 이들의 부재로 인한 공허는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TV브라운관으로 인간이 달에 착륙하는 모습이 생중계된 순간은, 다른 한편으로 달에는 떡방아를 찧는 토끼가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이기도 했다. 이를 목격한 이들이 느낀 상실감은 어떤 낭만으로 채워야 하는가? 여전히 고대의 신화적 세계와 중세의 종교적 세계를 회고하는 인류다. 그들은 신전과 예배당에서 전율과 환희의 경험을 했더랬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해롭지 않은 선에서 가상의 이미지가 그에 버금가는 자극을 주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어찌 보면 정당한 요구라 하겠다. 우리는 민숭민숭한 현실과 대비되는 무언가 흥미롭고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는 바람을 차마 꺾지 못했다. 과학적 근거와 합리성으로부터 이탈하여 명백한 허구를 즐기기 위해 충분히 놀아날 만반의 태세를 갖춘 우리다.

예술은 종종 앞으로 전개될 예정된 수순을 발설하는 스포일러가 되기도 한다. 전적으로 이미지를 다루는 회화는 깔짝거림을 장착하고 사회적 기대감에 부응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작품을 마주한 관람자에게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동요를 부추기는 것이다. 다분히 징후적인 포착에 불과하지만 안지산 작가의 회화는 이미지 자체가 수행하는 깔짝거림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만한 실마리를 던진다. 작품에 가미된 깔짝거림은 그림자체에 스며들어 있다. 유화가 지닌 물성을 여과 없이 담아내는 안지산 작가의 그림에는 내내 눅눅함과 끈적임이 묻어난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클로즈업해서 포착한 신체의 일부는 상황이나 감정의 전달에 앞서 신체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느낌을 전이시킨다. 그 장면들에는 인과적 해명이나 서사적 구조가 빠져있다. VR장치를 뒤집어쓰면 화면이 제공하는 감각적 상황으로 순식간에 빠져들 듯이 작가의 작품도 순간적 접속을 전제로 한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의 말마따나 형상의 ‘투명성’으로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되어 지기 위한 일말의 내용들을 제쳐두고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화단은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그리고 거기에서 유추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1]

촉각적 느낌은 예민한 관람자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이는 결코 대상이 지닌 질감의 완벽한 묘사만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 이후 거의 모든 종류의 질감표현은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재능 있는 화가들에 의해 그림에 손을 대면 마치 그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재현력은 여러 차례 구현되어 왔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하지만 질감의 표현만으로는 감각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깔짝거림을 논하기 어렵다. 촉감이 캔버스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촉감이 캔버스로부터 분출되어 마주 선 구경꾼의 오감을 점령해야 한다.

안지산, Hunting The Rabbit, 2014, oil on cavas, 50x60cm, 사진출처

작가 안지산의 작품은 느낌을 유발시킨다. 그런 면에서 차별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안지산 작가가 본인의 작품 <토끼사냥(Hunting The Rabbit)>을 설명하면서 요셉 보이스의 그 유명한 퍼포먼스, <How to Explain Pictures to a Dead Hare>를 언급한 것은 무척이나 적합해 보인다.[2] 보이스의 퍼포먼스를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없는 많은 이들은 사진으로 기록된 도상을 통해 상황을 감지할 뿐이다. 가장 유명한 버전은 얼굴에 꿀과 금박을 바른 채 죽은 토끼를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으로 작가가 토끼에게 어떤 설명을 했는지(그 설명은 당시의 현장에서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고 전해진다.), 또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이 연출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대신 사진은 작가의 얼굴에 바른 끈적한 꿀이 점차 굳어가면서 느껴지는 안면의 감촉을 짐작케 한다. 이는 죽은 토끼가 축 늘어져 있으면서도 점차 경직되어 가는 신체적 변화와 절묘한 대입을 이룬다. 그 사진은 의도치 않게 시체에 대한 감각적 자극을 연상시킨다.

안지산, Left Foot, 2015, oil on cavas, 46x63cm, 사진출처
좌) 안지산, <27sec. 67>, 2015, oil on cavas, 53×45.5cm 우) 안지산, <43sec. 90>, 2015, oil on cavas, 53×45.5cm, 사진출처

이러한 맥락에서 안지산 작가의 작품 몇 점을 집고 넘어가자. 2015의 작품 <왼발(Left Foot)>을 보면 발에 묻은 물감을 씻다 말았다. 오른쪽 발에 묻은 물감은 아직 끈적이고 미끌거리는 느낌이 남아 있다. 반면 왼쪽 발에 묻은 물감은 꽤 시간이 흘렀는지 굳어서 꾸덕해진 느낌이다. 이번에는 같은 해에 제작된 <27sec. 67>과 <43sec. 90>을 병치시켜 두고 보자. 바스 얀 아델(Bas Jan Ader)의 영상 작품에서 일부 장면을 추출해 오열하는 남성을 그렸다. 모노톤의 이 그림은 슬픔에 대한 정서적 전달력 보다 남성의 호흡이 더욱 강조되었다. <27sec. 67>에서 남성의 얼굴 방향과 어깨 높이는 주최할 수 없는 흥분 상태로 인한 불규칙한 호흡과 헐떡거리는 상태를 확인시켜 준다. 그런가 하면 <43sec. 90>에서는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르고 나름의 차분함을 유지한 채 부족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인물을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이듬해 제작한 <발끝으로 서다(Stand on Tiptoe)>에서는 힘겹게 버티고 서있느라 팽팽해진 근육의 뻐근함이 발끝부터 종아리까지 이어져 전달된다. 이상의 작품들은 관람자와 육체적 반응을 공유하는 신체들이다. 즉 회화의 이미지는 관객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타자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캔버스에 등장하는 신체와 관람자의 신체가 일치된 감각적 자극의 지대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때 관람자는 모호해진 주체로서 눈에 보이는 대상과 병합한다. 이러한 연결은 아마도 캐릭터나 아바타를 운용하는 게임, 또는 가상현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점일 것이다. 이것이 다분히 전통적 화법을 기반으로 한 안지산 작가의 작품을 두고 엉뚱하게 첨단의 기계장치를 떠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안지산, Stand on Tiptoe, 2016, oil on cavas, 90.9×60.6cm, 사진출처

앞서 밝혀둔 바이지만 아직은 비천한 징후에 불과하다. 어쨌든 VR의 출현으로 인해 그래픽 영상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이전보다 더 까다로워졌음은 분명해 보인다. 단순히 사실적 재현력의 향상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기대해 마지않는 실감난 경험을 보장하지 못한다. 가상현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사실적 형상의 구현이라기보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반응과 오감의 자극이다. 엄습하는 느낌들이야 말로 이미지가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이 되리라는 예상은 그리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4D 영화관에서 분사하는 바람이나 VR 체험의 덜컹거리는 의자와 유사한 효력을 발휘하는 깔짝거림은 마치 운명처럼 이미지 앞에 당도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전통적인 부류에 속하는 회화와 첨단에 속하는 기계장치의 그래픽을 가리지 않고 공히 적용될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공조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척될 가능성이 높다. 기왕 깔짝거림에 부합하는 작가적 실천을 목격하였으니 그 선봉을 예술에 맡겨도 좋을 게다. 예술은, 특히 회화는 이를 앞서 예견하고 실체로서 제시할 만한 능력과 자질이 있지 않겠는가?

 


[1] S, Sontag (1961).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 (이민아 옮김) 서울 : 도서출판 이후
[2]네이버, 지식백과-헬로, 아티스트의 안지산 작가의 인터뷰 내용 참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80660&cid=59154&categoryId=5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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