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형_게임 세계의 유물론적 유령들과 폐쇄성: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안 무너진대요

안준형

선택받은 아이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지켜라!

게임 <디지몬>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는 게임적 체험으로부터 모티프를 얻어 묘사되는 디지털 월드를 배경으로 한다. 작중 선택받은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주인공 일행들은 수학여행 도중 갑자기 기묘한 빛줄기의 포탈에 빨려 들어가 어느 외딴 섬에 떨어져 버린다. 거기서 그들은 디지몬이라고 하는 이상한 괴물들과 마주친다. 그 괴물들의 신체는 살과 피 대신 데이터와 코드로 이루어진 디지털 존재다. 디지몬은 자신의 존재적 조건인 데이터의 축적을 폭발시키는 행위인 ‘진화’라 불리는 것을 통해 순식간에 스스로의 존재 형태를 되바꾸기도 하며, 죽게 되면 가죽조차 남기지 않고 마치 컴퓨터 속의 파일이 삭제되듯 아무런 육신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디지몬이라 불리는 괴생명체의 생물학적 구조는 현실 속의 유기체적 동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디지몬은 전혀 다른 고유한 디지털 물리계와 차원 속의 생명체다. <디지몬 어드벤처>는 그런 외딴 세계에 떨어진 선택받은 아이들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모험과 그 안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사악한 디지몬들의 음모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선택받은 아이들은 자신들이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기묘한 현상들을 마주치며 이곳이 현실상의 어떤 미지의 장소가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 속의 이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계의 이름은 디지털 월드다. 작품 내의 디지털 월드는 작품이 만들어진 1990년대 후반 막 보급되기 시작한 컴퓨터와 휴대전화, 게임기 등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와 게임, 인터넷 등에 대한 체험을 모티프로 삼아 묘사되었다. 작중의 선택받은 아이들은 마치 게임의 ‘플레이어’처럼 현실과 디지털 세계 사이의 시점을 교차시키는 존재다. 물론 그들은 인터페이스를 통해 매개된 체험으로 밖엔 게임 세계를 경험할 수 없는 플레이어보다도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이세계에 자신들의 존재 형태를 온전히 간직한 채 진입한다.

<디지몬 어드벤처> 39화 중, 전세계의 하늘을 뒤덮은 디지털 월드의 풍경.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디지몬 어드벤처> 속 가장 압권인 장면은 단연 디지털 월드와 현실 세계의 차원이 뒤섞여버리기 시작하는 풍경이다. 그로부터 초래되는 일은 상이한 두 물리계의 충돌, 전혀 다른 존재론적 조건 사이의 예측할 수 없는 뒤섞임이다. 인간이 데이터 존재로 뒤바뀌고, 디지몬은 죽어서 가죽을 남길지 모른다. 작중 중반부에 해당하는 ‘묘티스몬 에피소드‘는 선택받은 아이들이 갖은 고생 끝에 어찌저찌 자신들의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현실 세계로 돌아왔음에도 불구 아직 그들의 책무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일인지 그들이 돌아온 현실 세계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터인 디지몬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묘티스몬이라는 사악한 디지몬의 소행으로, 그의 계략은 다름 아닌 현실 세계와 디지털 월드를 통합하고 이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두 세계는 뒤섞이지 않았다. 경계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현실은 그저 디지몬이라는 다른 차원의 존재의 침입을 허용했을 뿐이다. 그 괴물들은 마치 유령처럼 일렁이는 이계의 존재이며, 우리 세계의 법칙을 초과한 초자연적 존재일 따름이다. 반면 디지털 월드에선 선택받은 아이들이 오히려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을 것처럼 말이다.1) 어쨌거나 선택받은 아이들은 묘티스몬이 현실 세계와 디지털 월드를 완전히 통합하기 이전에 그를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진정한 흑막은 어둠의 사천왕이란 이들로 따로 있었는데, 묘티스몬이 사라진 이후 그들은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현실 세계와 디지털 월드의 통합을 실행하려 한다. 현실 세계의 하늘에선 갑자기 디지털 월드의 풍경이 실체처럼 비춰지며, 두 세계가 겹쳐지고 있음을 알린다. 선택받은 아이들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기 이전에 어둠의 사천왕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금 디지털 월드로 떠난다.

얼마 전 몇 해간 시각예술 분야에서 한참 재유행했었던 ‘포스트 디지털’이라거나 ‘포스트 인터넷’ 따위로 불리던 담론의 경향은 오늘날 현실에 대한 체험이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 가상 공간에서의 체험, 특히나 SNS나 게임적인 가상의 체험에 의해 압도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꼭 서두로 삼곤 했다. 그리고 이같은 담론은 특정한 주체를 다루었다. 그 주체는 유년 시절부터 바로 그 디지털, 인터넷 매체에 의한 경험과 땔 수 없이 성장한 이들로, 바로 그 가상 공간에서의 체험에 대한 해설 없이는 그들의 주체성은 규명될 수 없다. 그래서 이는 특정한 세대에 관한 사회학적 특징을 다루는 세대론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세대론이 지니는 독특한 점은 바로 그 세대의 당사자들로부터 주장된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이같은 담론의 지속적인 재생산은 때로는 우리 세대가 전개하는 독특한 방식의 자기변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세대론이 으레 그렇듯, 여기에는 세대 갈등이라는 현상이 뒤따른다. ‘포스트 디지털‘ 세대가 강조하는 유년 시절의 경험에는 그들이 당시에 겪었을 최초의 세대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한다.

우리가 유년 시절 과도하게 가상 세계에 몰입하면 할수록 꼭 그만큼 비례해서 들었을 이야기가 있다. “게임 자주 하면 폭력적이게 된다“거나 ”SNS에서 사람 함부로 사귀지 마라“… 운운하는 부모님의 잔소리들 말이다. 아마도 당시에는 그저 듣기 싫어서 귓등으로 흘려보냈던 저 잔소리들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오늘날 ‘포스트 디지털‘ 어쩌구하는 담론의 이해를 관통하는 깊은 통찰이 담겨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폭력적 게임을 오래 하면 폭력적 성향을 띄게 된다는 식의 흔한 게임 매체에 관한 속된 규탄의 이면에는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가상적 체험의 압도를 걱정하는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 그런데 그들의 자녀가 자란 뒤 이제서야 현실에 대한 가상적 체험의 우위를 확신하고 부모님의 마음 또한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일까. 오늘날 재생산된 ’포스트 디지털‘한 주체성과 그들의 부모님은 모두 디지털, 인터넷 매체에서의 가상적 체험의 현실에 대한 우위를 과도하게 걱정하고 강조하며 가상적 체험의 압도를 설정한다. 이제 그 둘은 가상적 체험과 현실 체험의 관계에 있어서 공통된 이해를 공유한다. 그러나 게임과 현실 사이에 얽힌 폭력성의 우위를 따지는 일에서만큼은 여전히 게임은 아직 현실 속에서 배울 부분이 많아 보인다. 게임은 소비되기 이전에 생산되는 디지털 제품이다. 제품으로서의 게임은 이것의 제작 단계에서 이른바 현실의 폭력성을 재현하는 작업을 거친다. 거기서 게임적 폭력성의 막대한 원천이 되는 실제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끔찍한 일들을 떠올려보자면, 게임적 가상에 대한 압도를 주장하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현실감 없는 소리인가 싶다.

 

게임적 세계와 실제 세계의 연관 속에서 나타나는 부재의 감각들

오늘날 현실과 게임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게임적인 현실 체험의 주된 특징을 살펴볼 때 ’게임적 체험의 진정한 차원‘은 현실에 대한 풍부한 압도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듯 싶다. 게임적 체험이 현실을 압도하기 훨씬 이전에 게임은 개발되고 생산된 디지털 제품으로써, 이른바 현실을 프로그래밍하여 모방하는 작업을 거친다. 게임 내 가상 현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게임적 체험이란 흔히 게임 내 재현된 가상 현실에 대한 체험을 가리킨다. 하지만 게임적 체험은 단순히 개별적인 체험으로 놓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매개된 체험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게임 내 재현된 가상 현실을 체험하는 일은 곧 게임의 시각적, 물리적 인터페이스를 통해 적극적으로 매개된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흔히 게임 컨트롤러로 불리는 게임 매체의 대표적인 물리적 인터페이스는 현실의 신체와 게임 속 가상의 신체를 매개한다. 이같은 작용의 과정이자 결과로서 나타나는 ’게임적 체험‘이란 현실 체험 속의 변증법적 관계 안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관계 안에서 ’게임적 체험의 진정한 차원‘을 가늠하는 일 또한 중요해졌다. 그것은 현실 체험이 언제나 매개된 체험이란 사실에서의 ’가상성’과 ’실재성‘의 구분을 가능토록 해준다. 그리고 ’게임적 체험의 진정한 차원‘이라 구분하여 불러 마땅한 것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세계 고유의 물리계, 그 고정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그것은 현실과의 매개 안에서 쉽사리 현실과 포개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이 둘 사이의 모순이나 초과, 혹은 부재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늘날 게임의 체험과 현실 체험, 이 둘의 관계는 그저 게임적 가상 체험의 현실에 대한 우위 혹은 압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리하여 현실에 대한 체험은 그저 오늘날 충만하게 넘실대는 디지털적인 가상에 대한 체험의 뒤편으로 숨겨져 버린 듯하다. 하지만 게임적 체험의 무대가 제작되는 과정을 떠올려보자면 게임과 현실이 포개어진 세계 속엔 아이러니한 인과성이 뒤섞여 있는 것만 같다. 일단 현실이 게임의 가상 현실을 구축하는 데에 있어서 막대한 원천이 된다. 그렇게 생산된 게임의 가상 현실이 다시금 현실의 원천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된다. 이같은 과정 끝에 현실과 가상은 끝내 겹쳐지고 그 둘의 체험은 동의어가 된다. 사실 무엇 하나가 압도되거나 뒤집혀지지도 않았다. 그 둘의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둘의 체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둘의 관계를 가늠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사실은 가상적 체험의 현실에 대한 우위, 혹은 그 반대를 진단할 때는 여전히 현실 체험 속의 ‘실재성’과 매개된 것으로서의 ‘가상성’의 구분을 의식하는 관점의 흔적이 남겨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나타나는 ‘게임적 체험의 진정한 차원’은 외려 그러한 디지털한 가상적 체험의 풍부한 압도를 가리키기는커녕 어떤 부재에 관한 감각에 가깝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게임이 현실을 재현하는 과정 안에서, 그 순간만큼은 여전히 ‘현실’과 ‘가상’에 대한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 그 둘은 서로를 원천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생산된 ‘게임의 진정한 차원’은 오히려 게임이 현실을 탁월한 원천으로 삼기는커녕, 외려 게임이 현실을 원천으로 삼아 재현하는 일에 있어서 그다지 수월하지 못할 때 나타난다. 미묘하게 게임이 현실과 불일치하는 순간들에서 현실과 일치될 수 없는, ‘게임적 체험의 진정한 차원’이라 부를 법한 층위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같은 순간은 흔히 게임적 체험이라는 것이 가상적이고 환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는 달리 게임이라는 매체의 물성과 기술적 구조를 상기시킨다. 게임 내 가상 현실이 실제 현실과 미묘하게 불일치할 때 그것을 포착한 플레이어는 은연중에 게임 내 세계의 독특한 물리계와 기술의 수준을 의식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순간은 우선 게임의 매체적인 한계로 파악된다. 하지만 그것의 참된 의미는 우리 현실의 물리계와 게임적 가상의 물리계가 상이하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일 것이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차원 속에 있다. 그 둘의 차원계는 온전히 일치될 수 없다.

게임 내 세계의 존재인 ‘NPC’는 마치 유령처럼 그들의 외피일 터인 스킨의 ’텍스쳐‘ 내부에 응당 있어야 할 살과 피, 뼈와 내장이 부재한다. 그곳은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들의 신체는 그 질량 없음으로 인해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통과하고 사물과 겹쳐지곤 한다. 이는 마치 심령적인 현상이다. 실체가 없으며 벽을 통과하는 기술은 유령의 특기 중의 특기일 것이다. 그들의 이 기분 나쁜 신체 내부의 질량 없는 공백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은연중에 게임 매체의 구조적 한계를 기억해낸다. 유령이란 과학적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우리 세계의 물리계를 초과하여 나타나는 초자연적 환상이다. 그러나 게임 세계의 유령적 현상은 그 자체가 매체적이며, 게임 내 차원의 유물론적인 원인으로 나타난다. 우리 플레이어는 현실에서 게임의 차원으로 침입한 외부의 존재인바, 유령을 지각하는 방식에 있어서 두 차원의 시점을 교차시킬 위치에 있다. 그것은 이상한 감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신체 내부의 공백에서 느끼는 불쾌감, 이 이상 신호와는 상관없이 게임 속 세계에서 구조물이나 NPC 모델링 내부의 빈 공간은 실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현실의 신체가 망치로 아주 세게 후려 맞으면 응당 뼈가 부서지고 피부가 짓이겨 찢겨나가며 시뻘건 피가 솟구치는 일이 당연하듯, 신체의 물리적인 내구도의 한계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존재의 기반이 된다. 우리에겐 역설적으로 보일 뿐이지만 그들 세계의 기묘한 내구성 또한 가상 존재의 완고한 기반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게임 속에서 총탄에 맞고 칼에 썰린 NPC의 신체가 시뻘건 피를 튀기고 내장을 쏟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썰린 살과 내장, 피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우리는 앞서 그들의 신체로 보이는 것 내부에 아무런 살도 피도 내장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그들의 텍스처 위에 덧붙여진 데칼과 추가된 레이어 혹은 모델링과 텍스처 자체의 변형이다. 반면 현실의 신체는 훼손된 만큼 상실된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흘려진 피만큼 우리 신체의 질량은 사라진다. 그러나 게임 속 신체는 훼손될수록 반대로 추가된 데이터와 코드를 쌓기도 한다. 이처럼 게임 세계 속 신체 내부의 공백과 기이한 출혈의 발생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기술적, 물리적 한계이자 조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이 세계에 재현될 수 없는 현실 차원의 속성인바, 거창하게 이야기한다면 바로 그러한 한계로 인하여 외려 게임의 존재론이라고도 부를 법한 층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게임적 체험이 현실에 대한 체험을 압도했다고 했을 때 적절하게 벌어지는 사태는 디지털에 의해 보충되고 넘쳐나는 가상적 충만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대한 어떤 부재와 불일치의 감각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게임 세계의 매체적 조건인 폐쇄성

흔히 맵이라고 불리우는 게임 속 세계의 공간이 언제나 특정한 범위 내로 제한되기 마련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이다. 유명한 게임 시리즈 <GTA>, <엘더스크롤>, <저스트 코즈> 등은 새로운 편 수가 제작될 때마다 항상 방대한 맵의 크기로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그러한 게임조차도 맵은 특정한 범위 내로 제한된다. 그 밖의 공간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인 셈이다. 마치 고대인들이 믿었다던 ‘지구 평면설’에 관한 이야기에서처럼, 세계의 가장자리 그 바깥의 경계에는 그저 반듯이 잘려 나간 낭떠러지뿐이거나 아무리 저 앞으로 전진해봐도 아무런 정보값 없는 공허한 공간만이 끝없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세계의 끝에는 그저 이 세계가 폐쇄되어 있다는 섬찟한 사실만이 기다린다. 하지만 그와 같은 폐쇄성은 전능한 신적 세계관의 완결성 안에서 살고 있는 고대인들에게는 납득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데, 근대인들은 배를 타고 떠난 하나의 좌표가 다른 방향으로부터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끝을 믿지 않으며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그들의 이해를 던진다.

이처럼 제한된 세계는 기분 나쁜 폐쇄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폐쇄된 세계는 정반대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감각을 불러오기도 한다. 바로 아늑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꿈속의 가상 세계를 주요한 무대로 삼는 영화 <인셉션>의 핵심적인 내러티브는 실제 삶이 갖는 비루함을 뒤로 하고 꿈속 세계로 도피한 어떤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처럼 폐쇄적인 세계는 어쩐지 아늑하여 도피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흔히 폐소 공포증으로 불리우는 불안, 공포 장애는 엘리베이터나 터널과 같은 닫힌 공간에서의 밀폐감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 라캉에게 있어서 공포증이란 단순히 두려움의 대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와 같은 것이다. 이같은 폐소 공포증의 발생 원리 극단에는 우리 사회의 히키코모리와 같은 모습이 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히키코모리는 바깥 세계와의 소통을 멀리하고 자기만의 폐쇄된 영역 안에서만 안정감을 느끼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비사회적이고 충동적인 쾌락주의자이며 또한 오늘날 게이머들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게임적 세계에서의 주요한 감각적 특징을 폐쇄감으로 묘사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 있다. 게임의 세계는 한계감 못지않게 확장성과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세계이기도 하다. 또한 게임의 세계관과 내러티브의 설정은 여타의 예술 장르와 같이 전적으로 픽션에 기반한다. 흔히 기대되는 픽션의 특징은 여기선 뭐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학 평론가 테리 이글턴은 한 책에서 문학이 갖는 픽션의 원리에 관하여 그 특유의 재치를 담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 버밍엄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동시에 앨라배마주의 버밍엄에서 뇌수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문학에 존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임 또한 이를 체험하는 감각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글턴이 이야기한 소설의 원리와도 유사하게, 다른 모든 창작되는 예술 작품들과도 유사하게 픽션이라는 성격에 기반한 무한히 열려있는 확장성일지도 모른다. 뭐든지 가능한 픽션에 기반한 예술인 게임의 주요한 감각 중 하나가 어떻게 뭐든지는 가능하지 못한 폐쇄성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라는 매체에서만큼은 작품의 창작과 수용에서 픽션적 가능성이 크게 제한되며, 역시나 게임적 세계-게임적 체험의 가장 지배적인 감각은 폐쇄성에 다름 아니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게임 속 세계를 폐쇄적인 곳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것일까? 그러한 감각을 자아내는 게임 매체 특유의 조건은 무엇일까? 우리는 앞서 언급했듯 게임이 현실을 재현하는 데에 있어서 갖는 몇 가지의 기술적 한계들에 관해 살펴봐야 한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가상 세계의 현실성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각적인 사실성의 재현 정도를 충족하는 것, 예컨대 그래픽이 뛰어나다는 것뿐 만이 아니라, 매체 특유의 여타 조건들이 필요하다. 오히려 이같은 게임 매체 특유의 조건들에 비하면 시각적 사실성의 정도는 되려 부차적이라 할 것이다. 어쨌거나, 게임이 가상 세계의 현실성을 보증하기 위한 여러 조건 중에서도 전통적으로도 중요한 매뉴얼 중 하나로 여겨졌던 것은 게임 내에 등장하는 인간들 즉, NPC들의 다양성이다. 그러나 이는 오랜 기간 게임 개발, 즉 게임 내 가상 현실을 구축하는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골칫거리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더욱 생동감 있는 도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거니는 NPC들 각자의 개별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평균 10시간을 가볍게 넘는 게임의 플레이 타임 동안에 마주치게 될 NPC들 수백 수천의 모델링을 일일이 제작하는 일은 기술적으로 또 생산적인 측면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여겨졌다. 그로 인해 과거에는 게임 속 거리를 거니는 NPC들은 몇몇의 동일한 모델링 들의 복제품들이거나 복장만 조금 다른 정도이기 마련이었다. 말 그대로 거리에 복제인간들이 돌아다니는 셈으로 이는 세계에 커다란 이물감이 되었다. 이와 같은 제한적인 기술적 조건에서 나타나는 단적인 풍경이 게임 속 세계에서 복제인간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렇듯 게임을 생산하는데 소요되는 개발력의 한계를 조건에 두고서 어떻게든 제한된 자원으로 가상의 세계를 현실만큼이나 풍부하게 채우기 위해서는 복사와 복제가 공학적으로 꽤나 효과적이다. 이는 비단 대상화된 타자로서의 NPC와 오브젝트뿐 아니라, 게임 속 세계 내에서 최대한으로 개별적인 주체일 터인 플레이어 또한 피해갈 수 없는 존재론적 조건이 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라고 불리우는 플레이어의 게임 속 아바타 또한 NPC와 같이 실체 없는 신체를 갖는다. 그것을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플레이어의 조작일 뿐이다. 이는 NPC의 제한된 행위들과 대비된 진짜 자율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흔히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조작이라는 환상과는 달리 실제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행위는 전적으로 제한된 동작의 반복에 의존한다. 이를테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조작하여 점프한다. 게임에서 특정한 동작은 대응하는 조작키만 누르면 실행된다. 게임 속 캐릭터의 움직임은 조작키를 몇 번을 누르든 그것을 완전히 동일한 동작으로 수행한다. 앞선 점프는 바로 다음의 점프와 또 그 다음의 점프와 한 치의 오차 없이 대응한다. 반면 현실에선 점프를 몇 번 반복해봐도 결코 게임에서처럼 완전히 동일한 동작으로 수행될 수가 없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같은 동작을 아무리 반복해도 무한대로 미세하게 상이한 동작들이 나타날 뿐이다. 특정한 동작들에 붙여져서 대응되는 특정한 낱말들은 관념적인 개념일 뿐이다. 현실에 사과라는 사과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점프라는 점프는 있을 수 없다. 점프란 일련의 뛰는 동작을 관념적으로 추상화한 개념일 뿐이다. 그러나 게임에는 점프라고 하는 점프가 나타난다. 여기서 점프는 그저 대응하는 특정한 조작키만 누르면 완전히 동일하게 무수히 반복될 수 있다. 이것은 실은 같은 동작의 무수한 복제이며, 반복 재생일 뿐이다. 점프뿐만이 아니라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의 행위로 조작되는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 이 세계 속에 기입되어 있는 특정한 동작들의 반복 재생일 뿐이다.

간혹 유튜브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형의 컨텐츠를 볼 수 있다. 방대한 크기의 맵을 가진 게임 속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그저 캐릭터의 이동만으로 이 거대한 공간을 일주한다. 이같은 컨텐츠는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 있다. 방대한 크기의 맵을 가진 게임이 출시되면 이같은 영상 컨텐츠 또한 만들어진다. 으레 빨리 감기로 재생되는 이 영상들 속에서 게임 속 공간을 횡단하는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내리 달려 가기만 하는데, 여기서 캐릭터가 달려 나가는 동작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특정하게 복제된 달리기 동작의 반복 된 재생에 다름 아니다. 영상은 기묘하게도 일련의 달리기 동작을 반복하는 캐릭터를 화면의 중앙에 둔 채 배경이 혼자 흘러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캐릭터는 공간의 좌표를 선형적인 시간 안에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한히 루프 되는 시간 속에 갇힌 것처럼 짧고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캐릭터가 공간 안에서 이동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이처럼 게임이라는 매체는 시간성 또한 폐쇄성과 관련된 독특하게 뒤틀려있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다. 게임 내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것은 우리들의 상식처럼 직선적이거나 혹은 많은 선택지가 있어 평행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지 않는다. 게임 안에서의 흐르는 시간은 동시에 무수히 많은 루프적 시간성에 기반한다.

Walk Across The Map Timelapse | Assassin’s Creed Odyssey (Greece)

걸어서 맵 끝까지 가보았다 ASMR [폴아웃4]

게임 안에서 NPC와 플레이어, 그리고 그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모두가 동일한 폐쇄적 시공간성 속에 있는 것을 조건으로 하더라도, 이 세계 안에서 NPC와 가장 대비되는 개체를 꼽자면 여전히 그것은 플레이어와 그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일 것이다. NPC는 살아있는 채 할 뿐인 조작된 수동성이다. 그러나 플레이어블 캐릭터만큼은 플레이어의 조작을 통해 진짜 삶을 기다린다. 하지만 동일한 폐쇄적 시공간성의 조건은 NPC 그리고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겐 매체적, 존재의 조건이지만, 플레이어에겐 그저 체험의 조건이 될 뿐이다. 또한, 플레이어가 조작하게 되는 주인공 캐릭터에는 게임 매체의 작동 안에서 부과되는 독특한 서사 속의 기술적 특징이 있다. 그 기술적 특징은 게임 내에서 오직 주인공 캐릭터만이 진정한 주체일 수 있게끔 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었다. 대체로 그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이는 흔히 플레이어가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한 일반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말 그대로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조작하는 플레이어들은 실제 인간들인바 무수히 다양한 성격 유형들이 있는데, 이러한 유형들을 전부 포괄하여 그들이 누구건 간에 해당 캐릭터에 이입하기 위해 캐릭터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의 주인공 캐릭터는 차라리 아바타에 가까운 셈이다. 아바타는 반캐릭터이다. 캐릭터는 완고한 개성으로 구축되어 있는 반면, 아바타는 플레이어의 분신인바 그것이 누구에게나 투사될 수 있도록 포괄적이며 느슨한 형상이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게임의 주인공은 대체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게임 안에서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게임 세계 바깥의 플레이어가 주도적으로 말을 하게끔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이는 미친 짓에 가깝다. 대체 누가 부끄러움도 없이 게임을 하는 동안 주도적으로 자신의 인격을 캐릭터에 투과하여 말을 주절일까? 때문에 이 장치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그저 간단하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인공 캐릭터의 과묵한 성격으로 들러붙어 버린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몇 컬트적인 인기를 누린 게임들의 캐릭터성을 구축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들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대리인 그 자체가 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신체는 두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게임패드, 스크린 등의 인터페이스에 의해 매개된다. 그리고 정신마저도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조작에 따른 게임 속 행위에도 불구 온전히 디지털 껍데기에 씌이지 않는다. 위와 같은 게임 매체의 서사적 특징 속에 있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조작할 때면 그가 나의 대리인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치 내가 그의 정해진 운명을 재생할 뿐인 주인공 캐릭터의 대리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게임 속에서 말하지 않는 캐릭터들의 모임9)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이 게임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사를 이끌어나가거나 거기에 연루되는 행위자가 된다. 그는 게임 속에서 가장 주체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말하지 않으며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그들의 신체는 3D 폴리곤 모델링으로 지탱되어 있으며, 바로 그 존재론적 한계로 인해 그들의 피부로 여겨지는 텍스쳐의 그 내부로는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어떠한 입체적인 행위에도 불구 존재론적인 공백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이 간극에선 간혹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폴리곤 존재의 내부로 텅 빈 공간은 공백이지만 동시에 어떤 통로처럼도 느껴진다. 이것은 일종의 포탈이다. 현재 우리가 거주 중인 이곳 세계의 제한과 한계를, 나아가 다른 세계로부터의 침입을 연결한다. 실제 세계는 어딘가 뒤편으로 가려진 체 가상 현실의 이면에서 기다린다. 그러나 결코 가상 현실이 실재의 이면이진 않을 것이다. 게임 세계의 폐쇄성과 그것이 초과되는 순간은 모두 양면적이다. 게임 세계의 폐쇄성은 무언가 음산하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아늑한 곳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폐쇄성이 초과되는 순간은 닫힌 세계의 바깥을 상상하는 일처럼 상쾌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거기로부터 안락함을 얻고 있었더라면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또 다시 두려운 일이다.

 

게임 세계의 악몽, 현실 세계와의 포탈

게임 속 세계, 혹은 게임적 세계는 어쩌면 현실 세계보다도 꿈속의 세계와 유사한 구석이 많다. 우선 그 둘은 모두 가상 현실을 만들어내며, 꿈속 세계가 두뇌 활동이라는 제한된 자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게임 속 세계 또한 물리적으로 제한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자원에 의해 건조된다. 둘 모두 가상 체험을 건조하는 자원을 결코 초과해서 나타날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씩 마치 여기의 가상 현실을 초과한 흔적처럼 보이는 현상-악몽, 버그와 글리치-이 나타나며 유령적인 무언가를 출현시키곤 한다. 가상 현실이 무대가 되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사악한 인공지능이 기술을 통해 만들어낸 가상 세계가 인간의 뇌 활동을 통해 생성된 꿈속의 가상 세계와 고스란히 포개진다. 이렇게 시뮬레이션 된 세계는 어딘가 섬찟한 폐쇄성, 바로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으로부터 기인하는 어떤 스산하고 꺼림칙한 감각을 뒤에 둔다. 이 폐쇄된 세계에서는 스스로의 자원을 초과하는 일이 발생할 여지가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여기는 주어진 세계 바깥의 가능성이 철저히 제한된 세상이다. 꿈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쩐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게임 속 세계가 주어진 게임의 룰에 의해 돌아가는 것처럼, 이 세계의 구조는 일말의 여지없이 통제되고 있다는 전반적으로 폐쇄적인 감각에 의해서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꿈이 일순 악몽으로 뒤바뀌는 순간을 이따금 경험하곤 한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 순간은 우리가 자신의 꿈의 지배권을 잃는 순간이다. 신경생리적으로 꿈이란 단지 내 두뇌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환영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연극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꿈속에서 나 이외의 어떤 독립적으로 자율적인 인격을 가진 듯 보이는 등장인물이 나타나는 일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안다. 꿈속 등장인물들의 인격과 자율성은 전적으로 오직 내 두뇌의 신경생리적 활동에 의한 것일 뿐 그가 결코 실제 타자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꿈의 가장 지배적인 감각 중 하나는 여기서 발생하는 모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어째서인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쩐지 당연하지 않으며, 더욱이 꿈속 등장인물들, 이를테면 원한 섞인 악귀나 뭔가를 알려주려고 하는 조상님처럼 마치 진짜 자율적인 인격을 가진 것만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악몽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흔히들 들어보았을 법한 무서운 꿈 이야기의 평균적인 내용 중 하나로는 이런 것이 있다. “그건 꿈보다 차라리 현실에 더 가까웠어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마치 진짜 인격을 가진 것 같이 느껴졌으며, 꿈속 세계 자체가 내 뇌 활동에 의한 것일 뿐이고 그에 따라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독립된 세계처럼 느껴졌다”는 식이다. 추가로 이같은 세계 속에서 나 이외의 진짜로 자율적인 인격을 지닌 것 같이 느껴지는 인물들은 나만 모르는 어떤 은밀한 사실들, 특히 이 세계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거기서 꿈은 꿈이 아닌 꿈, 달리 말해 꿈을 생성하는 자원일 터인 나 자신을 초과하는 꿈이다. 이 초자연적인 꿈의 경험은 이 꿈을 통해서 어떤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만 같은 형용하기 어려운 불길한 통로처럼 느껴지게 한다.

간혹 게임 속에서 어떤 NPC가 정말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진 적이 있을까? NPC가 마치 진짜 살아 있는 듯이 느껴졌다는 식의 이야기는 악몽과 괴담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장르처럼 어떤 전형이 있는 것 마냥 게임에 관한 공포스러운 썰들 중의 가장 전형적인 판본 중 하나다. 꿈이 악몽으로 뒤바뀌는 순간이 내가 자신의 꿈의 통제권을 잃는 순간 속에서 꿈속 등장인물들이 마치 진짜 인격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듯, 결코 진짜로 살아있을 터가 없는 게임 속 NPC들이 마치 진짜 인격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은 정말이지 소름 끼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런데 타자의 능동적인 주체성이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조금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타자의 자율적인 주체성과 인격을 존중하는 태도는 이 땅의 모범적인 시민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게임이 흔히 폭력적이라고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안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간들이 마땅히 갖추었어야 할 풍부한 인간성을 NPC가 되는 것으로서의 기술적인 대상화, 플레이어 자신 이외의 인격체(설령 그것이 모방되어 나타나는 환상일지라도)에 대한 원천적인 주체성의 갈취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게임에서의 과도한 폭력성은 바로 그러한 원천적인 주체성의 갈취 덕택에 오히려 허용되는 것이 아닐까? 가상의 데이터 세계 속에서 이미 허용되어 있는 게임 안의 폭력 따위 보다 정말로 소름 끼치는 일은 따로 있다. 갈취된 NPC의 주체성과 인격의 회귀라 부를 법한 일이 그것이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순간 우리는 허용받았던 게임의 놀이를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놀이의 역할은 역전되어 버린다.

<마인크래프트>에 관련된 괴담 속 유령인 ‘히로빈’의 재현된 모습10)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게임 중 하나인 <마인크래프트>에도 이와 같은 종류의 괴담이 있다. 일명 ‘히로빈 괴담’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마인크래프트> 유저들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한 괴담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히로빈 괴담에 얽힌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는 다음과 같다. 게임 전문 스트리머인 코프랜드는 여느 때와 같이 <마인크래프트>를 플레이하며 자신의 어두운 광산 동굴 속에서 자원을 채굴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확인하며 시선을 돌리는 와중에 있어선 안 되는 형체가 여기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것은 ‘스티브’라고 이름 붙여진 마인크래프트의 기본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소름 끼치게도 오직 눈만은 온통 흰자위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플레이 중인 있는 싱글 서버가 오직 나 외의 플레이어는 접속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임을 재차 상기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어떤 심술 궂은 플레이어가 일부러 무섭게 생긴 캐릭터의 스킨을 쓰고서 그의 서버에 침입하여 벌이는 장난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세계 속의 유령이다. 이후 커뮤니티에는 이 ‘히로빈’이라고 이름 붙여진 유령에 대한 목격담이 무수히 등록된다.

 

00.

나는 종종 여기가 어디든 게임 속 세계와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른바 현실 속에서의 게임적 체험이다. 이 게임의 장르는 <심즈>나 <시티즈:스카이라인>으로 잘 알려져있는 시뮬레이션이다. 길거리에서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게임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인 NPC나 다름없이 느껴진다. 그들에게서 인격의 자율성은 전혀 감지되질 않는다. 대신 그 자율적인 인격의 자리는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으로 대체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의 행위는 조작되고 재현된, 그러므로 타율적으로 제한된 동작만을 가장하고 있다고 느껴질 뿐이다. 주변의 장소 역시나 전체가 모두 오늘날 디지털 월드의 주된 구성 원리가 된 3D 모델링으로 건조된 허상으로, 그 표면의 텍스쳐 내부로는 그저 텅 비어 있기만 할 뿐이다. 이 세계에는 질량이 없다. 아마도 질량을 갖는 실제 세계는 어느새 다른 차원으로 숨겨져 버린듯하다. 하지만 실제 세계는 그렇게 멀지도 않은 곳, 이 게임스러운 세계와 슬며시 포개져 있는 것만 같다. 차라리 아예 느껴질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으로 사라져버렸더라면? 실제 세계는 단 한 겹을 사이로 지금 이곳의 게임적 세계에 씌여져 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버린 ’언캐니 밸리‘라 불리우는 유명한 개념은 인간적인 것이 불러오는 불쾌함에 관해 이야기한다. ’언캐니 밸리’란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는 기계의 사실 정도에 따라서 느껴지는 어떤 감정의 곡선을 보여주며, 완전히 사람 같을 정도이지만 미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을 갖는 특정한 정도의 인간스러운 사실성에 다다랐을 때에 더불어 최고조에 도달하는 불쾌감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인간이 기계를 따라 해본다면 어떨가? 우리들에겐 어떤 감정의 곡선이 출몰하게 될까? 2011년부터 방영중인 유명한 코미디 프로그램 <SNL 코리아>에서는 널리 알려진 ‘SNL 게임즈’라는 코너가 하나 있다. 주로 유명한 게임 프랜차이즈인 <GTA> 및 각종 게임에 관련된 요소들을 패러디하는 이 코너에선, 코미디언이 게임 속 등장인물을 연기하며 각종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른바 게임적인 동작들로 파악되는 NPC들의 행동 양식, 어딘가 어색하고 절제되어 있는 동작들 또한 세심하게 연기한다. 코미디언은 게임 속 NPC의 모습처럼 어딘가 어색하며 인위적이다. 그러나 NPC의 인위성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도중 어슴푸레 현실을 환기시키며 이따금씩 느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 현실 속에서 바로 그 인위성을 연기하는 코미디언은 어쩐지 과장되게 우스꽝스럽다. 유쾌한 골짜기라고도 불러주고 싶은 이같은 코미디의 출현은 인간과 기계 사이에 그어져 있는 어떤 존재론적인 경계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것은 무한한 루프적 시간성 안에 갇힌 채 특정하게 제한되어 있는 몇 가지의 동작으로 밖엔 움직일 수 없는 게임 세계 속 존재들의 운명, 그리고 그와 같은 세계와 우리 현실 사이에 그어진 경계이다.

 


1) <디지몬 어드벤처>의 결말부에선 정말로 그들 선택받은 아이들이 디지털 월드의 물리계에선 버그이자 예외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을 모두 마친 이후 더이상 이 세계 속에서 거주할 수 없으며, 그간 함께 모험을 겪으며 정들었던 파트너 디지몬들과 헤어지게 된다.
2) 이미지 출처: https://www.pcgamer.com/the-weirdest-glitches-and-bugs-weve-seen-in-kingdom-come-deliverance/
3) 이미지 출처: https://bgr.com/general/fallout-4-bugs-glitches-videos-4749572/
4) 이미지 출처: https://minecraft.fandom.com/ko/wiki/%EB%A8%B8%EB%82%98%EB%A8%BC_%EB%95%85
5) 이미지 출처: http://www.inven.co.kr/board/lostark/5353/2425
6)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bvygNJK-x64
7) 이미지 출처: https://www.zonared.com/juegos/the-elder-scrolls-2-daggerfall/
8) 그나마 최근에는 발전한 게임 개발 기술들 덕택에 최대한 다양한 NPC들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템플릿 등을 이용한 자동 제작 기술들이 이용된다. 하지만 이같은 기술로도 게임은 기이한 괴물들을 출현시키곤 한다. 최근 발매된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는 작중 등장하는 어린아이 NPC들의 모델링이 전부 어색하다 못해 괴이할 정도였다. 일일이 손수 제작되고 감수되지 않다 보니 재현의 사실 정도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9) 이미지 출처: https://imgur.com/gallery/f6br8vK
10) 이미지 출처:https://minecraft.fandom.com/wiki/Herobrine#/media/File%3A1286120683579-REMASTERED.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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