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진_미로를 빠져나가면 죽는 쥐: 들뢰즈와 울리포(OuLiPo), 그리고 만남-기계

 

안세진

나는 미술이나 영화를 보러 가는 걸 내가 하는 투자라고 이해해, 신중하게…
나는 교양이라는 걸 믿지 않아, 하지만 만남을 믿지. 
만남은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야. 만남은 사물들 간에 발생하지. 
나는 나가고, 주의를 기울여. 만남을 위한 재료가 있을지. 영화 속에서, 회화 속에서…

들어봐, 누군가가 무엇을 한다고 치면 그건 그곳으로부터 떠나는 문제이면서 그곳에 머무는 문제이기도 해
우리는 그 안에 남아 있으면서 빠져 나와야 하네.
나는 철학에서 벗어나고 싶어. 철학을 통해서.1)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 이것만큼 프루스트가 강조한 테마는 없다.”2) 들뢰즈는 4,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테마를 ‘진리는 적극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결과이다’라는 하나의 명제로 압축해서 설명한다. 간결해서 좋긴 한데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잘 알려져 있듯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의 맛에 의해 주인공인 ‘나’의 기억이 상기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서막을 여는 이 장면은 ‘기호와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호란 우연적 만남의 대상이다. 그리고 기호는 만난 자에게 사유를 강요한다. 예컨대, 우연히 마주한 프루스트의 마들렌은 ‘나’에게 비의지적/무의식적 상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며 ‘강제’이다. 우연적 만남에 후행하는 기호의 폭력 내지 강제의 작용에 의해서 비로소 사람은 사유하기 시작하고 진리에 도달한다.3) “만남의 우연과 강제의 압력은 프루스트에 있어서 두 가지 근본적인 테마이다. 한 우연한 만남의 대상이 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되는 것의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은 만남의 우연성이다.”4)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은 사고의 발생에 대한 일반론적 질문이다. 인간이 무엇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건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들뢰즈는 그것을 ‘폭력’이나 ‘강제’와의 ‘우연적 만남’에 의해 설명한다. 들뢰즈는 인간은 결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적극적 의지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들이 실제로 좀처럼 사유하지 않고, 사유한다고 해도 의욕이 높아진다기보다 오히려 어떤 돌발적인 충격을 받아 사유한다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바이다.”5) 사람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게끔 되며, 진리는 항상 어쩔 수 없이 사유하게 됨의 결과로서 획득된다. 인간에게는 사물을 생각하려고 하는 의지 따위는 없기 때문에 인간이 사물을 생각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인간은 단지 때로 충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사물을 생각할 뿐이다.6) 절대적 수동성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들뢰즈에 의하면 프루스트의 작품은 언제나 이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탐구를 강요하고 우리로부터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7)

따라서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만나야 한다. 그렇지만 한 자리에서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사유를 강제하는 기호와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만남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공간’을 조직하는 것이다. 물론 만남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직조하고 만남을 직접적으로 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남은 오직 우연에 의해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기대한 대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만남이 아니다. 만남은 어디까지나 기대가 실망에 빠지는 것에 의해서만 발생한다.8)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기호들이 교차하는 ‘만남의 공간’을 조직하고 그 우연의 장에 직접 뛰어들어 예상치 못한 만남을 기다리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만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9)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일말의 능동성은 이 지점에서만 기능한다. 들뢰즈는 그래서 전시나 영화를 보러 집 밖을 돌아다닌다. “나는 나가고, 주의를 기울여. 만남을 위한 재료가 있을지. 영화 속에서, 회화 속에서… 나는 미술이나 영화를 보러 가는 걸 내가 하는 투자라고 이해해, 신중하게…” (C)

1960년 발기된 ‘잠재 문학 작업실(OuLiPo)’, 사진출처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1960년 프랑수아 르 리오네, 레몽 크노 등에 의해 발기된 ‘잠재 문학 작업실(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 이하 울리포OuLiPo로 통칭)’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일정한 제약과 구조 속에서 진정으로 창조할 수 있다.” 작가에게 설명할 수 없는 영감과 천부적인 재능을 요구하는 낭만주의적 관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울리포는 전통적인 문학 장르에 존재하는 ‘제약’과 ‘구조’를 직시하고 이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다. 울리포는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작품 창작에 도움이 되는 인위적인 문학적 제약을 새롭게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직접 문학 작품을 생산한다. 울리포는 작가가 보다 효율적으로 문학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제약-장치를 마련함과 동시에, 문학에 부여되어 있었던 특수한 지위를 ‘그리 나쁘지 않은 시’의 대량 생산을 통해 해체하고, 낭만주의적 관습에 가려져 있던 문학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새롭게 실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울리포는 막연하고 무한한 창조의 자유 앞에 좌절한 작가에게 그가 투입한 글쓰기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재)생산성’을 보장하는 블랙박스를 제공한다.

우리의 작업 목적은 무엇인가? 작가들에게 문학적 활동에 바치는 새로운 ‘구조’를, 수학적 본성이나 인공적 또는 기계적인 새로운 과정을 또다시 개발하자고 제안하는 것: 영감의 추종자들로부터, 이를테면, 또는 여전히, 몇몇 부분에서, 창조성에 도움을 줄. (레몽 크노)10)

울리포는 천재가 되지 못한 작가가 재기(再起)를 위해 써먹을 수 있는 몇 가지 실용적 도구를 개발하고 실험한다. 그 목록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단어나 문장, 글의 알파벳 철자를 해체한 후 새롭게 재조립하는 철자 바꾸기 제약 ‘아나그람(anagramme)’,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어도 같은 회문(回文) 제약 ‘팔랭드롬(palindrome)’, 특정한 알파벳을 지닌 단어를 제외하고 글을 쓰는 제약 ‘리포그람(lipogramme)’, 알파벳순으로 글쓰기, 쉼표와 구두점 없이 글쓰기, 정형시의 다양한 응용, 속담의 혼효, 동음이의어, 음보율, 장르 변환, 접붙이기…11) 울리포는 범부한 작가를 낭만주의의 스펙터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건설된 공장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빠져나갈 작정으로 그 스스로 미로를 만드는 한마리 쥐un rat qui construit lui-même le labyrinthe dont il se propose de sortir”라고 일컫는다.12)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기호와의 우연한 만남을 위한 기계를 개발하고 작동시킨다. 미로 속에 배치된 저마다의 기계들은 수많은 ‘강제(제약)’와 ‘폭력(구조)’를 생산하고 그것과의 만남을 촉발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의 작업을 만남-기계(machine de rencontre)의 제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효율적인 창조를 위한 만남-기계를 만드는 사이비 발명가’를 자칭하는 울리포의 겸손함 아래에는 전복적인 함의가 감추어져 있다. 울리포의 작업은 분명히 균질적인 그리고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문학의 대량 생산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느 정도) 겨냥하고 있으며 지금 그것은 정확하게 실행되고 있다. 울리포가 제시하는 ‘제약-구조’는 곧 창작의 ‘알고리즘(algorithme)’이다. 100년 전 에밀 보렐로가 케이지 안에 넣어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나올 때까지 타자기를 두드리는 멍청한 원숭이들은 이제 기계 학습이라는 제약-알고리즘과 피드백 루핑 속에서 충분히, 적어도 심심풀이로 읽을 만한 할리퀸 로맨스를 쓸 정도로는 똑똑해졌다. 저자와 문학과 예술이 수백 번 죽건 말건 그 마침표는 결국 바르트도 가라타니도 단토도 아닌 컴퓨터로 환생한 셰익스피어가 찍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울리포의 작업은 묵시론적이다.

물론 울리포의 한계는 뚜렷하다. 우선 그들의 문학은 제약을 모르고서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 울리포가 개발한 가장 유명한 제약 중 하나인 ‘N+7 기법’을 예시로 들어보자. 이 규칙은 다음과 같다.

1. 시를 하나 고른다.
2. 사전을 하나 고른다.
3. 1에서 고른 시 안에 있는 모든 명사를 2에서 고른 사전에서 찾고, 그 명사들로부터 각각 7번째 위치에 있는 명사로 시를 다시 쓴다.

이 규칙을 사용해서 유치환의 <깃발>을 다시 쓴다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깃발

이것은 소리 시늉 없는 아우프가아베
저 푸른 해장술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역장 유치의 손잡이
순청색은 물나라같이 바르토오크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동 정비반의 푸주 나기에
애진은 백복 장엄처럼 날윷을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제형을
맨 척축 공통 내접선에 달 줄을 안 그는.13)

이 시는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N+7 이라는 기법을 모른다면 이 시는 어이없는 난해시일 뿐이다. 그들의 작품은 그것을 만들어낸 제약에 종속된다. 그들은 빠져나갈 작정으로 미로를 만들었지만 막상 미로를 빠져나간다면 쥐는 죽는다. “들어봐, 누군가가 무엇을 한다고 치면 그건 그곳으로부터 떠나는 문제이면서 그곳에 머무는 문제이기도 해. 우리는 그 안에 남아 있으면서 빠져 나와야 하네.” (C) 이는 마치 기계로 찍어낸 플라스틱 공산품 뒤편에 그것을 만든 기계의 이름과 기계를 작동시킨 엔지니어의 이름과 기계의 작동 원리와 사용된 공법과 필요한 원재료를 모두를 음각의 부주(附註)로 빼곡히 새겨두어야 하는 꼴이다. 사실 제약을 알고 난 다음에도 그들의 문학은 큰 가치는 없다. 극단적인 곡예를 통과한 기형의 서커스 단원에게 보내는 안도와 연민의 박수만이 있을 뿐.

현실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들의 문학이 갖는 가치는 기껏해야 단어사전이나 표현사전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난수에서 비롯되는 우연성으로 인해 몇 개의 기발한 표현이 발생할 수 있다. 작가는 그중 몇 개를 취사선택해 자신의 작품에 활용할 수 있고 어쩌면 그 표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다른 작품을 창조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울리포의 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영감을 촉발하는 일종의 트리거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작품을 만남-기계가 아닌 단어 발생 기계, 영감 촉발 기계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천재에 의해 독점되는 문학 구조에 반발하여 문학적 보편 복지를 주장하고 나선 울리포는 아이러니하게도 영감을 재생산하고 있다. 울리포가 공산품의 형태로 쏟아내는 문학은 결국 낭만주의적 영감의 제물이 된다. 울리포는 만남의 장을 성공적으로 조직했지만, 만남 이후 촉발되는 사유와 영감의 운용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

왜 이와 같은 결말에 이르렀을까? 그것은 울리포라는 집단이 어디까지나 ‘실용’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리포의 내부에는 ‘문학적 재생산’이라는 실용적 목적에 대한 성취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울리포는 그들의 태생적인 나이브함으로 인해 스스로 어린아이 되기를 자청하며 자신들의 작업을 오락, 게임, 농담 따위로 치부한다. 그들은 자신의 작업이 어떤 문학적 운동이나 학회, 더 나아가서는 실험문학이라는 선입견으로 판단되는 것을 경계하고, 자신들은 어린아이처럼 언어와 문학을 낙관적으로 이리저리 조작해 가며 무수한 잠재성을 활용해 볼 계획을 세우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도는 존재하며, 그것은 실용이며, 겉으로는 어린아이의 유희이고, 안으로는 낙천적 순응이라고. 그들은 제약을 제작함에 있어서 패러디의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결코 문학적 전복이나 해체, 원본의 전락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체계와 질서에 순응하는 공장주가 되어 기계를 조작한다. 따라서 울리포의 작업에서 전복적인 함의를 찾는 것은 무용하다. 그들의 튜링기계는 영감의 소재가 될 무작위의 말뭉치를 찍어내고 있을 뿐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순수한 무의미성은 전복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내용과 의미가 삽입되는 순간 형식은 오브제에서 탈피해 심판대에 놓인다.
울리포의 작업은 게임과 오락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실용적인 문학 생산에 대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울리포의 작업은 이미 심판대 위에 놓여 있다. 

이번엔 김수영의 말을 빌리자.
모든 실험문학은 진보적이고.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 있는 문학은 불온하다.14)
울리포의 문학은 실험성을 거부한다. 울리포의 문학은 전위성을 거부한다. 울리포의 문학은 순응한다. 울리포의 문학은 차라리 죽어있다.
울리포의 문학은 영감을 재생산한다. 울리포의 문학은 결과적으로 낭만주의의 제물이 된다. 울리포는 관습에 복무한다.
문학적 잠재력이 관습에 의해 가려져 있던 무언가라면, 잠재 문학 작업실은 잠재를 제약하고 있다. 증명 완료. ■15)

 


1) 질 들뢰즈, <L’Abécédaire de GILLES DELEUZE: C comme Culture>, youtube, 이여로 역. 이하 (C)로 표기. https://www.youtube.com/watch?v=D9s4ub2tjLA&list=PLiR8NqajHNPbaX2rBoA2z6IPGpU0IPlS2&index=4
2)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이충민 역, 2004, pg.41. 일부 수정.
3) 고쿠분 고이치로,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동아시아, 2015, pg.97-98.
4) 질 들뢰즈, op. cit. pg.41. 일부 수정.
5)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민음사, 김상환 역, 2004, pg.298-99. 일부 수정.
6) 고쿠분 고이치로, op. cit. pg.99.
7)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이충민 역, 2004, pg.40. 일부 수정.
8) 고쿠분 고이치로, op. cit. pg.122.
9)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민음사, 김상환 역, 2004, pg.71. 일부 수정.
10) 남종신, 손예원, 정인교, <<잠재문학실험실>>, 작업실유령, 2013, pg.116.
11) ibid. 1부 마지막 장 <주(註) – 장치와 도구> 및 워크룸 프레스 제공 책 소개 (http://workroompress.kr/books/oulipo) 참고. 현재까지 울리포가 제작한 모든 제약의 목록을 보고 싶다면 공식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oulipo.net/fr/contraintes)
12) 레몽 크노가 한 말로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인 출전은 찾지 못함. 공식 홈페이지에서 해당 인용문이 사용된 링크는 다음과 같음. Marcel Bénabou & Jacques Roubaud, <Qu’est-ce que l’Oulipo?>, Oulipo.net. (https://www.oulipo.net/fr/oulipiens/o)
13) 남종신, 손예원, 정인교, op. cit. pg.48.
14) 김수영,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 문예서평, <오늘의 한국 문화를 위협하는 것>을 읽고>, <<조선일보>>, 1968.2.
15) 울리포의 제 2선언문에서 오마주.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단어란 결국, 농담적 성향을 드러내보이는 작품이라면 어떤 것이든 검토해보지도 않고 단호히 단죄해버리는, 유난히 심각한 사람들을 위한 것. 그러한 작업들이 시인의 행위라면, 오락, 장난, 속임수들 역시 시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잠재문학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것으로 남게 된다. ‘증명 완료.’” (남종신, 손예원, 정인교, op.cit. pg.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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