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현_신유물론은 진정 유물론적인가?

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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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위에 올라와 있으면 안 돼요. 저는 대서양 건너편 나라에 있는 학교로 돌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희망을 바라며 우리 청년들에게 오셨다구요.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나요? 여러분은 헛된 말로 저의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았습니다. (…) 지금 인기를 얻고 있는, 앞으로 10년 안에 온실가스를 반으로만 줄이자는 의견은, 지구 온도 상승 폭을 1.5도씨 아래로 제한할 수 있는 가능성을 50%만 줄 뿐입니다. 이는 또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되돌릴 수 없는 연쇄 반응을 초래할 위험까지 안고 있습니다. (…) 1.5도씨 아래로 머무를 수 있는 67%의 기회를 잡으려면-IPCC가 제시한 현재로선 최상의 가능성인- 세계는 2018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420기가 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숫자는 이미 350기가 톤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감히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몇몇 기술적인 해결책만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척할 수 있습니까?”1)

1. 들어가며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학교 교실에 앉아있어야 할 시간에 한 소녀는 세계 정상들 앞에 섰다. 스웨덴 청소년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지난 2019년 9월 23일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참석한 세계 정상들에게 즉각 행동을 촉구했다. “여러분이 좋아하든 아니든 변화는 다가오고 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지에서는 그녀를 2019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회의장에 잠시 얼굴을 비췄던 도널드 트럼프는 대표적인 기후부정론자로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2017년 미국 워싱턴 포스트와 ABC 여론조사에서 59%의 사람들이 기후협정 탈퇴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탈퇴가 미칠 영향에 대해 42%의 답변자는 경제에 해가 된다는 반응이었고, 32%의 사람들은 오히려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2) 이처럼 기후변화를 둘러싼 담론의 맞은편에는 성장과 일자리라는 경제 담론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부터 자연과학자들은 전 지구적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그들은 인류라는 한 종이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 미친 영향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결과(지구온난화, 미세먼지, 미세플라스틱, 방사능 오염, 사막화 등)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인류세(Anthropocene)3)라 규정된 이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는 인류가 끼친 그 영향으로 인한 기후와 지질학적인 지구 생태계의 근본적 변동 이후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위기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기후 위기를 과학기술에 의한 공학적 접근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에코 모더니즘(Eco+Modernism)’이 있다.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대학교수, 환경운동가와 시민 등 18명의 참여로 시작한 이들은 ‘에코모더니스트 마니페스토’(An Ecomodernist Manifesto)4)를 자신들의 웹페이지에 공표한 바 있다. 이에 제기되는 비판은 에코모더니즘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2019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 그레타 툰베리가 초청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는 ‘세계화 4.0 :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글로벌 구조 형성‘이라는 주제로 일자리의 미래, 글로벌 리스크, 기후변화, 그린 뉴딜, 그린 잡, 4차 사회혁명 등이 다뤄졌다. 이들에게 생태적 ’위기‘는 기술공학적 구성변화를 통한 새로운 축적 전환의 가능성이자 ’기회‘로 나타났을 것이다. 자본은 노동력과 자연을 가치의 담지자로서만 여기기 때문에 그 둘이 가진 탄력성의 한계를 간과하고 그 토대로부터 초월하려는 운동성을 띤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19세기 노동운동의 성취로 얻어 낸 노동법과 권리는 단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만 얻은 것이 아니다. 자본은 절대적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해 노동력의 탄력성을 간과하고 무자비하게 노동시간을 연장했을 때 노동력 자체를 잃을 상황에 직면했었다. 그리하여 포드주의는 더 높은 일의 효율성 또는 더 ‘합리적인 착취’를 위하여 8시간 노동일과 여가시간에 찬성한 것이다. 즉 끊임없는 규모의 확장을 꾀해온 자본의 탄력성5)은 자연의 물질대사6)의 균형이 깨어지자 뒤늦게 그 한계를 회계장부에 포함시킴으로써 축적의 조건을 재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에코모더니즘은 자본의 지속적 운동과 ‘합리적 수탈’을 위한 기술적 합..의와 구조적 재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두 번째 접근은 좀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인간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을 문제 삼는 생태주의7)적 접근이다. 생태주의 입장에서 기후 위기는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자연관과 인간이성에 따른 과도한 과학의 발전이 파생시킨 자연 수탈의 결과이다. 이들에게 궁극적인 문제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가 낳은 이원론적 사고-주체/객체, 정신/물질, 남성/여성, 문명/자연, 서양/동양 그리고 인간/비인간(non-human)-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둘 모두를 비판하며 등장한 신유물론이다. 이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과도한 자연주의와 사회구성주의 모두를 비판하며 출현했다. 앞선 과학기술 접근법과 비인간 행위자를 결합하여 객체를 주체의 지위와 같은 선상에서 다루는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에서부터 포스트 휴먼(Post-Huaman), 객체 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등 수많은 이론들이 넓은 의미의 ’신유물론’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유물론들 중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과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중 하나인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이 자연 또는 인간 외의 존재들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다루는 방법론과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인식론 : 신유물론의 문제의식

..1970년대 등장한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SSK)은 그동안 사회학의 대상에서 제외됐던 과학지식(자연과학, 수학, 논리학)을 담론화하며 이들조차 사회적 맥락에 구속받는다고 보았다. 기존의 사회학에서 과학지식이란 인간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이라는 실재를 다루는 방법이자 그 반영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포스트 담론의 등장과 함께,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언어라는 매개물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자연에 관한 지식과 경험조차 언어, 텍스트, 담론,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려 없이는 곧바로 주어질 수 없고, 따라서 투명한 (과학)지식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 불렸으며 과학철학에서는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론, 언어철학에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 대표되었고 사회학에서는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와 과학지식사회학으로 출현했다. 사회나 자연이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는 주장은 수많은 논란과 문제점을 야기했지만, 그중에서도 인식론적 상대주의로서 물질성을 부정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SSK(과학지식사회학)와는 달리 과학지식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이 지닌 딜레마(이른바 ‘성찰성’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서 나타난 독특한 접근이 바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이하 약칭 ANT)이다(김환석, 2018). ANT의 논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언어적 전회를 부정하고 텍스트 바깥의 실재로 회귀하자거나 해체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장하는 것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물질성을 간과한 사회구성주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아가 ANT는 물질/관념의 이원론적 사고를 피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도입과 함께 그 구분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개별 인간 행위자들의 사회적 관계들을 지시할 때 ANT는 행위자나 행위소(actant)라는 용어를 개별 인간 행위자에 제한하지 않고 비인간, 비개인적 존재들로까지 확장한다(브루노 라투르, 2010). 이들이 사용하는 ‘네트워크’는 데카르트적인 물질과 영혼의 구분을 피하기 위해 디드로가 물체 등을 기술할 때 사용되었던 개념을 확장한 것이다. 라투르는 근대 사회이론이 가진 위상학적 개념들(지위, 계층, 영역, 범위, 범주, 구조, 체계)에 의탁해서는 결코 사회를 파악할 수 없으며, 사회는 섬유, 실, 철사, 끈, 밧줄, 모세관 같은 형태의 성격을 분석함으로서 기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브루노 라투르, 2010). 이는 그동안의 사회이론 속의 토대/상부구조, 거시/미시, 심층/표면, 내부/외부 등의 위상학적 층위를 비판하면서 모든 것을 나란한 평면 위에 놓는 평평한 사회적 존재론을 구성한다. 게다가 모든 행위자와 행위소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지 않고 속성과 특징들의 분배와 연결에 따라 네트워크를 순환하며 관계를 맺는다. 이를테면 도로 위의 과속위반 CCTV와 과속단속 경찰관은 교통이란 네트워크 속의 동등한 행위자이다. CCTV라는 행위소는 사진을 찍는 속성, 속도를 측정하는 속성, 플라스틱과 금속이란 속성, 전기적 속성 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과속위반 경찰관을 객체로 취급한다면 피와 살의 속성, 경찰 제복의 속성,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속성, 속도를 측정하는 속성, 사진을 찍는 속성, 잠을 자야 하는 속성 등을 지니고 있다. 두 행위소의 공통적 속성은 속도를 측정하는 속성과 제한속도를 어긴 자동차를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속성이다. 이처럼 과속방지 CCTV 행위소는 단속 경찰관 행위자의 교집합적 속성을 가짐으로써 위임받아 작동하는 동등한 객체이다.
..위와 같은 인식론에서는 더 이상 사회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것, 물질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이란 범주는 무화되고 모든 것이 그저 객체의 속성으로 파악될 뿐이다. 신유물론에게서 기후 위기는 자연과학의 대상인지 사회과학의 대상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 이산화탄소는 인간과 동등한 행위소로서 지구에 영향을 미친다. 인류를 대표하여 기후 위기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정상회담장에 만약 신유물론자가 있었다면 인간 외의 다른 행위자들이 배제된 반쪽짜리 회담이라고 힐난하지 않았을까. 기후 위기는 단지 인간 종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산화탄소라는 행위소, 자동차라는 행위소, 공장이란 행위소, 비행기라는 행위소 등의 객체들과의 연결과 대체를 통해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사물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기괴한 SF소설을 읽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묻게 된다. 사물들이 스스로 이산화탄소를 내뿜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신유물론이 표방하는 ‘관계주의’는 인간과 인간 이외 비인간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중점에 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100여 년 전 사회를 사물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기괴한 세계로 묘사한 자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에서 그 관계가 사람들 눈에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 여기에서는 인간 두뇌의 산물이, 독자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그들 간에 또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자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칼 마르크스, 2008: 135) 마르크스는 사물이 노동에 의해 반드시 ‘상품’으로 출현하게 된다는 점을 규명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일반화된 사회의 물신성을 발견했다. 그와 같은 사회의 상품은 ‘감각적이면서 초감각적인 사물’이다. 상품은 그것이 가진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속성과 그것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초감각적인 성격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매개된 실재를 표상한다. 사물은 사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상품’과 ‘화폐’라는 가치형태를 매개로 해서 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할 수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매개’는 신유물론자에게서 ‘상관주의’라는 죄목으로 비판의 대상이다. 하지만 사물들에게 덧씌워진 초감각적 성격, 다르게 말하면 객체들을 매개하는 자본은 단지 객체와 객체 또는 객체와 인간의 얽힘만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신유물론은 사물이 상품이 되어야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존재론 : 사변적 실재론과 비판적 실재론

..ANT가 기술과학에 더불어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구분하지 않는 행위자로 상정하고 선언한다면, 사변적 실재론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주객의 이분법을 무너뜨려 객체를 주체의 지위로 승격시키고 주체를 객체와 같은 평면 위에 놓은 ‘평탄한 존재론(Flat ontology)’를 주장한다. 인간은 주체라는 권좌에서 좌천되어 다른 객체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사변적 실재론에 속하는 철학자 퀭텡 메이야수는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 이래로 인간 주체의 인식에서 벗어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상관주의’란 죄목으로 힐난한다. 칸트 이후로 인간은 인식에서 벗어난 사물들을 인식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체와 객체의 위계를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과 실제 물질적 존재의 층위가 없다는 존재론적 입장은 구분해야 할 것이다.
..사변적 실재론에 속하는 또 다른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은 모든 사물을 객체로 두지만 다 같이 동등한 객체로 환원하지는 않는다. 하먼은 객체를 크게 감각객체(Sensual Object)와 실재객체(Real Object) 두 개로 구분하면서, 그 내부를 나눠 감객객체의 감각속성과 실재속성, 실재객체의 감각속성과 실재속성으로 세분화한다. 감각객체는 인간이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거나 측정 기계로 포착할 수 있는 속성이다. 반면 실재객체를 두고 하먼은 하이데거를 참조하여 주체에게 드러나지 않고 ‘물러나는 객체’로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속성은 객체가 발산하는 정보이자 특질로서 감각속성은 주체에게 인식되는 감각정보이며, 실재속성은 직접적 인식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속성이다(김연철, 이준석, 2016). 이처럼 하먼에게 객체는 동등하게 세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4개의 매트릭스를 가진 객체/속성 사이의 존재론적 균열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일면적인 평탄한 존재론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에 앞서 1970년대 후반 비판적 실재론을 주창한 과학철학자 로이 바스카는 객체를 두 개로 구분했다. 그는 인간 주체의 이론이나 경험에 의존하여 인식되는 객체를 타동적 객체로 규정하고,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활동하는 대상을 자동적 객체로 구분했다. 바스카의 타동적 객체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경험 가능하고 기술적 접근을 통해 측정가능하고 포착된 객체라는 점에서 하먼의 감각객체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자동적 객체는 그 자체를 경험적으로 직접 대면할 수 없지만, 주체의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인과로 포착되며 그것의 일부분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하먼의 실재객체의 실재속성 중 일부분을 과학을 통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감각속성으로 포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바스카에게 객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긴장은 곧 과학적 발전 속에서 특징적인 유형이나 발견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과학에 의해 밝혀진 객체의 존재론적 깊이는 과학 발전의 조건이며 역사적 층화로 표현된다. 하지만 신유물론의 입장에서 바스카의 층화적 존재론은 일종의 위상학으로 치부되기에 허용될 수 없다. 바스카가 구분한 각 층위에 속하는 속성들은 하먼에게 하나의 평면 위에 나란히 펼쳐져 객체의 속성과 성질에 따라 관계 맺는 양태에 따라 결합되고 분기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에게 위상학은 하나의 인식의 평면 위에 펼쳐진 감각객체를 둘러싼 실재속성에 대한 담론들의 지형학(김연철, 이준석, 2015)이라면, 비판적 실재론의 층화이론은 타동적 대상으로부터 과학적 실험에 의해 포착된 실재의 지형학이다.
..이 차이는 사회라는 객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두드러진다. 비판적 실재론에서 사회적인 것은 자동적 객체로 규정된다. 개인이 사회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아도 여전히 사회는 작동하고 실재하며, 설사 그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이라는 자동적 객체와 다르게 인간 행위주체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사회구조와 사회적 관계는 개인들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실천에 따라 그 구조는 변형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반면 객체지향론 입장의 사회과학은 감각객체에 대한 실재속성을 파악하는 활동이다. 이를테면 감각객체(유권자들)가 갖는 감각속성(여론조사 결과)을 분석하여, 감각객체의 감각속성에서부터 숨어있는 의미(유권자들의 실제 경향)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감각객체의 감각속성들의 합으로부터 감각객체의 실재속성을 추출하는 행위이며(김연철, 이준석, 2015), 사회과학의 양적방법론에 해당된다. 그러나 감각속성(여론조사 결과)의 총합으로부터 곧바로 실재속성을 도출하려는 입장은 사회과학을 실증주의로 치환하고 여론조사가 실재를 반영한 것이라 믿는 경험론적 실재론으로 환원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는 사회를 자동적 객체(실재적 객체)로 전제하지 않음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4. 주체와 객체

..신유물론이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부등호를 전치시키거나 전도시키려는 목적은 오늘날의 정치철학과 윤리적 실천 운동에 꽤 효과적으로 공명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극과 관계설정에 대한 그 질문이 타당한 것인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신유물론의 전제 즉 ‘상관주의’라 부르건 ‘인간중심주의’라 부르건, 그것이 오늘날 진정으로 지배적인 것인지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과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노동자 계급을 역사의 주체로서 그려내며 인간해방의 거대서사를 추구한 대표적인 인간중심적 이원론으로서 신유물론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직접 쓴 구절을 살펴보자.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칼 마르크스, 1991: 162)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물려받은 ‘환경’(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역사적 주체로 놓고 마주한 자연의 조건을 무시하고 제한 없이 수탈하는 생산력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산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는 생명 활동이자 물질대사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특수하게 ‘노동’을 매개로 하여 외부의 자연과 내부의 자연을 동시에 변형시키며 살아왔다.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력’은 단순히 인간에 의한 자연의 수탈이 아닌,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하는 물질의 변형과정이자 물질대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생산관계’는 생산을 둘러싼 규정에 의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주체인 것 못지않게 인간의 행동은 자연조건과 사회조건에 의해 제약되며 그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사회-인간은 서로를 변화시키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 놓여있다. 그는 주체/객체, 자연/문화, 정신/육체, 사회/개인의 모순 자체를 단지 인간의 사유의 탓이 아니라 그것을 낳는 물질적 토대와 정신 사이의 변증법으로 사고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인식 너머의 사물을 사유하는 것과 동시에 비인간 존재를 위시한 행위자들로 존재론의 지형을 확장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신유물론의 해답은 그 이름처럼 유물론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신유물론이라 불리는 철학 담론 내에서도 각자의 견해와 방법론에서 크고 작은 차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관통하는 사물의 인식론의 근저에는 과학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의 탐구를 자처했던 근대 과학은 포스트 담론의 등장과 함께 다종다양한 인식틀 중 특수한 방법의 하나로 좌천되었다. 모든 물질을 수량화하고 추상화하는 새로운 실증주의의 귀환을 경계해야 하지만, 물질로 쉽사리 표상되지 않는 것을 실체화하고 물질로 환원하는 교조적 유물론의 과학주의도 동시에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과학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경험/비 경험적인 실재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설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신유물론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과학은 사물을 다룰 때 수학이든 실험이든 반드시 어떤 매개를 필요로 한다. 신유물론이 지향하는 사물 자체로의 지향이 그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비판하는 ‘상관주의’ 또는 ‘매개’를 더 유물론적으로 철저히 비판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나가며

..마르크스는 사물들이 화폐와 상품으로 ‘매개’된 사회를 분석했다. 그것은 그가 ‘매개’라는 개념을 개인적으로 선호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면한 물질적 세계의 분석으로부터 도출된 필연적 관념이었다. 사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생산력의 발전이 무르익어 특이점에 이르면 기존의 생산관계가 족쇄가 되어 붕괴하고 마침내 새로운 관계로 해방되는 법칙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해방은 항상 더 높은 생산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전 지구적 위기는 인간중심주의가 야기한 것이라는 전제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사물을 상품으로 끊임없이 생산하는 주체는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본’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자연을 변형하는 생산력은 더 이상 노동하는 인간에게도 합목적적이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뒤틀려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르게 말하면 생태적 파국에 대한 근래의 반응은 생산의 주체인 자본의 위상이 더 이상 온전치 못하고 위태롭다는 징후이며, 물질대사의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 방식의 생산관계로 전환하는 것,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른 진정한 변혁이 시급하다는 경종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찾아오지 않기에 주체는 폐기되어야 할 항이 아니라 오히려 시급히 고찰해야 할 화두임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오늘날의 위기에 직면해서 필요한 변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등치시키거나 전도시키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도식 자체를 지양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유물론은 더욱 더 유물론적이어야 할 것이며, 객체들의 평등은 현실의 변혁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 그레타 툰베리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 연설 풀영상, 서울환경연합, https://www.youtube.com/watch?v=BvF8yG7G3mU
2) 연합뉴스, 「미국인 59%, 트럼프의 파리기후협정 탈퇴에 반대」, https://www.yna.co.kr/view/AKR20170606007200071
3) 인류세(Anthropocene)란 인류(anthropos)와 시대(cene)를 더한 합성어이다. 하지만 ‘인류세’라는 개념은 호모 사피엔스 종 전체를 문제의 주체로 두면서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환경학자 아드레아스 말름과 SF학자이자 페미니스트 도나 헤러웨이는 ‘자본세’(Capitalocene)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4) 원문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ecomodernism.org/manifesto-english
5) 자본의 규모는 고정적이지 않고 탄력적인데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노동력, 과학지식, 지력(地力)으로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노동의 대상이다. 한계를 가진 자연의 탄력성과 그것을 초월하려는 자본의 운동은 모순을 지닌다.

6) 독일어 “Stoffwechesl”를 번역한 단어로 ‘물질교환’의 사고를 함의하고 있다. 이는 생물학적 성장 및 쇠퇴 과정이란 함의를 지니는데 마르크스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노동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유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개념을 단초로 마르크스주의의 생태학을 개진하는 존 벨라미 포스터, 폴 버킷 등의 글을 참고하라.
7) 생태주의 내에는 심층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마르크스 생태주의, 생태여성주의 등 많은 갈래들이 있지만 본 글에서 모두를 다루기는 역부족이므로 여기서는 생태중심주의적 생태주의를 중심으로 논의하겠다.

참고 문헌

김환석 (2005).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에 대한 이해.” 『한국과학기술학회 강연/강좌자료』, 137-157.
(2018). “사회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신유물론.” 『지식의 지평』 제 25호, 81-89.
김연철, 이준석 (2016). “행위자-연결망 이론(ANT)과 사변적 실재론(SR)의 접점.” 『사회와이론󰡕 제 28호(1), 105-152.
그레이엄 하먼 (2019). 『쿼드러플 오브젝트』. 주대중 역. 서동진 해제. 현실문화.
로이 바스카 (2007).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이기홍 역. 후마니타스.
브루노 라투르(2010),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관하여: 약간의 해명, 그리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홍성욱 엮음. 김환석, 로즈메리 로빈스, 미셸 칼롱, 안형준, 이언하디 & 도널드 멕켄지, 존로, 홍성욱. 『인간·사물·동맹: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 이음.
사이토 고헤이 (202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추선영 역. 두번째테제.
서동진 (2019). “존재론적 (비)유물론의 매혹 혹은 그것은 유물론을 충분히 쇄신하고 있을까.” 『쿼드러플 오브젝트』. 현실문화.
존 벨라미 포스터 (2016). 『마르크스의 생태학』. 김민정, 황정규 역. 인간사랑.
칼 마르크스 (1991).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임지현, 이종훈 역. 소나무.
칼 마르크스 (2008). 『자본 1-1 : 정치경제학 비판』. 강신준 역. 도서출판 길.
팀 헤이워드 (1995). “정치생태학의 의미.” 조현영 역. 『창작과비평』 제 23호(4), 11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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