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랑_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

윤아랑

아래는 지난 2020년 8월 27일에  “작가이면서 인플루언서이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한편》 2호 연계 온라인 북토크를 위해 준비한 메모들을 어느 지인의 요청에 따라 하나의 글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엔 북토크 당시엔 시간 상의 문제로 생략되거나, 반대로 즉흥적으로 내뱉은 몇몇 말들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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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토크를 준비하며 《한편》 측에서 제안한 주제가 “작가이면서 인플루언서이기”인데요, 아마 여러분 중 대다수가 아시겠지만 이건 제가 《한편》 2호에 실은 글 「네임드 유저의 수기」의 마지막 장의 제목이자 마지막 문단의 중요한 문장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걸 보고 듣고 계신 분들 중 꼭 제 글을 읽은 분만 있으리란 법은 없죠. 또 제 글을 읽으셨다 해도, 같은 얘기를 다시 듣고 싶지는 않은 분들도 계실 거고요. 그렇기에 오늘은 「네임드 유저의 수기」와 똑같은 주제를, 그러나 조금은 다른 그릇 속에서 말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이름이 거론되는 모든 분들에 대한 존칭은 “~~ 씨”로 통일할 것임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오늘날 남한의 문화예술, 그게 영화가 됐든 문학이 됐든 미술이 됐든, 어떤 분야든 간에 하여튼 그것에 관련한 젊은 ‘내부자’들 사이에서 가장 힘을 얻는 담론이 뭘까요? 제가 느끼기에 그건 제도 비판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건 1970년대에 유행한 제도비판 미술이 남한에 재림했다, 이런 얘기는 당연히 아니고요, 오랫동안 관행으로 여겨져 온 악습으로서의 예술의 ‘제도’들을 깨부수자, 불공정 계약이나 등단의 기준 같은 행정의 문제부터 남근적 정동과 심급으로서의 ‘예술성’의 공모 같은 미학의 문제까지 함께 거론하고 가시화해 무너뜨리자는, 말하자면 세대교체의 추구로서의 ―여기서 “세대”라는 표현을 쓴 게 탐탁잖을 분들이 있을 텐데, 저는 세대론이란 절대 사라질 수 없는 문제고 오히려 ‘우리’가 역이용할 프레임이라고 봅니다― 일련의 시도들입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제 소수성으로 말미암아 현 제도의 ’바깥’을 자처하며 그에 걸맞은 절대적인 평등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조류를 앞에 두고 자꾸만 의문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자신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요. 오늘 토크는 바로 이 의문을 구체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런 조류가 그 자체로 틀렸다고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네임드 유저의 수기」는 그런 과도한 독해를 유도한 글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같은 방향이면 안 된다’는 내부자적 스탠스를 바탕에 두고 있거든요. 가령, 이건 《한편》의 편집자이신 신새벽 씨께서 어떤 자리에서 하신 말씀인데, 나이 지긋한 어떤 남성 지식인들은 작금의 상황을 두고 ‘계급과 젠더가 대척점에 놓이게 되었다’, ‘계급이라는 거대서사가 정체성이라는 소서사에 의해 역전됐다’라고 진단하지만 ―아마 문학 비평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어떤 이름들이 줄줄이 떠오르시겠죠?― 그건 헛소리이고, (굳이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원래부터 젠더는 거대서사였는데 계급 투쟁이 너무 오랫동안 유일한 것마냥 특권화된 거고, 그거에 젠더가 가려졌으나 이젠 폭발하게 된 거다. 이런 생각에 저는 100% 동의합니다. 그 치들이 허구한 날 반복하는 레토릭인 ‘제도라는 건 진작에 불통합적으로 어긋나 있었고, 그게 환경의 변화 속에서 마침내 가시화됐다’는 여기에도 해당되는 말인 거죠. 그렇기에 흔한 좌파 남자들, 모종의 액션을 취하는 사람들 옆에서 알짱거리면서 ‘~~가 더 중요한데… ~~가 핵심인데…’ 라고 중얼거리는 이 작자들은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봐도 무책임하고, 역겹고, 짜증나는 방관자일 뿐인 거죠. 그런데 이 자리에서 논하려는 게 그건 아닙니다.

인플루언서가 될 수밖에 없어

최근의 제도 비판의 조류는 주로 인터넷상, 정확히는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서 사람들의 말이 나오고 또 공개적으로 퍼지고, 그게 공식적 담론장으로 흘러가 영향을 끼쳐 각각의 필드를 더 세분화하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작금의 세계엔 공동체성과 정치성이 많이 죽었다는 진단에 기대는 의견들은 종종 SNS를 비-세계 혹은 탈주체성의 필드로 묘사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SNS를 자신의 필드로 만들어 떠드는 운동가나 예술가들은 대체 뭘까요? 그들의 논리나 태도에 기존의 정치성이 꽤 결여되어있다고 하면 아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실은 이들은 그런 기존의 규정에 포섭되지 않고 또 그걸 초과하려는 뭔가를 꾸준히 하고 있단 말이죠. 마치 19세기 말에 세상에 나온 신문처럼요) 이런 조류에서 중요한 건 SNS와 공식적 담론장 둘 모두에 걸쳐있는 내부자, 당사자들입니다. 그것도 그냥 당사자가 아니라 어느 정도 양자 모두에 대한 오랜 경험이 있는 당사자들이요. 자기 계정에 일상과 취향 얘기, 냉소적인 유머부터 자기가 속한 분야의 정보와 인상을 거의 무차별적으로 게재하고 그 안에서 타인과 교류하는 사람들. (그중엔 당연히 저도 포함되는데, 제 트위터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부연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들이 있고 그들이 그 안에서 활동을 하기에, 작금의 제도 비판의 조류는 소비자 운동과 내부 자정 운동이라는 두 방향 모두를 제 안에 갖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작가이면서 인플루언서’인 사람들이죠. 이들은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는 진정성의 문제인데, 작가가 자신의 자아를 의탁할 수 있는 미적 자율성이라는 심급이 설 자리가 나날이 줄어가니 아예 과도하리만큼 세속적인 행위들을 SNS 게재 대상에 포함해 그 불투명함으로 자신의 자아를 ‘투명하게’ 구성하려는, 무의식적인 제스처인 거죠. 말하자면 이는 현실 감각, 즉 ‘무엇이 현실로 인식되느냐’와 ‘현실이 어떻게 배태되느냐’의 문제이기도 한데, 제가 근 몇 년간 천착한 주제이기도 한 만큼 나중에 길게 논할 자리가 있을 터이니, 이 자리에선 딱 이 정도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방금 말한 것의 연장선에 있는 얘기인데, 발화를 위한 장소가 무한정으로 늘어난 문제죠. 많이 뻔한 얘기지만, 저널리즘 비평의 주요 장소인 잡지가 사라지고 있는 건 국내든 국외든, 어느 문화예술 분야든 간에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존의 잡지들이죠. 장소가 줄어든다는 진단들은 이런 측면, 즉 기존의 잡지들을 비평의 장소와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나오지만, 작금엔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아주 많이 비틀어서 받아들인다면, 원래 사적 영역을 목적으로 개발된 인터넷 플랫폼들이 사라지고 있는 기존의 공적 영역을 어느 정도 대신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거죠. 이러한 인터넷 플랫폼들은 기존의 지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진 게 별로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켜야 할 약속, 예컨대 권위, 발표 기한, 저작권, 게재료, 비판 대상 등에 있어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자유롭습니다. 물론 이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고, 블로그나 카페가 처음에 그런 모델을 취했다면 요즘은 전염성이 훨씬 높은 SNS까지 확장됐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요. 그래서 저처럼 프리랜서이거나, 비등단과 독립을 주장하는 작가들이 인터넷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거죠. 새로운 필드의 창출이 인플루언서를 만듭니다. 새로운 필드가 형성될 때 사람들이 거기서 낮은 문턱, 다른 표현 등 기존의 필드엔 없는 가능성을 보고 그걸 이용하려 하면서 인플루언싱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 플랫폼이 당장에 이상적인 장소는 아니잖아요? 방금 말한 걸 거꾸로 뒤집으면, 약속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그만큼 자본이나 인프라나 인정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얘기니까요. 그리고 이런 대안적 장소에 기거하고 활동한다는 건 결국 뭔가를 독점한 기존의 장소를 조금이라도 불신 내지는 불만족하고 있다는 거고요. 바로 여기서 제도 비판의 조류가 ‘이미’ 잠재적으로 시작되는 거죠.

죄악이 되는 순진함이란

여기까지는 전혀 불만을 가질 지점이 없어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이죠. 그런데 제가 불만을 갖는 건, 작금의 제도 비판이 너무 순진한 요구를 할 때입니다. 좁게, 최근의 뜨거운 주제인 등단제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등단이란 말도 모호하게 쓰이곤 하는데, 여기서는 공모전-등단을 대상으로만 이야기할게요― 제도의 불구성에 대한 얘기는 있지만 제도의 기능, 그러니까 왜 등단이란 형식이 요청되었느냐에 대한 얘기는 잘 보이질 않습니다. A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선 A 스스로보다 A를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건 기본 아니던가요. 그럼에도 왜 현상이 이럴까 고민해보면, 거기까지 가면 되게 불편한 사실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요즘 나오는 말들처럼 예술계도 노동과 자본이 돌아다니는 시장이에요. 이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죠. 근데 그 먹고사는 과정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치열한 경쟁이 있습니다. 누가 더 인정받고, 더 성공하고, 더 높은 위상이나 지속 가능한 생활을 얻을 거냐는 거요. 당사자는 거기에 조금의 관심도 없고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표현의 수준을 넘어서 소비자, 수용자라는 이들과 대면하고 관계를 맺는 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쟁의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돈과 정신과 시간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고, 그해에 나온 모든 책과 영화와 노래와 전시를 살펴보고 싶고 한 개인이 어느 정도는 거기에 성공한다 해도, 그 한 개인도 신체의 한계를 지닌 인간인지라 그다음 해엔 그중 지극히 일부만 기억하고 10년 후엔 그중에서도 지극히 일부만 기억할 거란 말이에요. 근데 그중에서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무얼 선별해서 봐야 하느냐. 그냥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공식 전문가만 아니지 자기 취향에 아주 깊숙이 들어간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도 검증되지 않은 걸 보는 건 여러모로 아까운 일이니까 웬만해선 검증된 걸 보고, 듣고 싶어한단 말이죠. 홍상수 영화라니까 보러 가게 되고, 김행숙 시집이라니까 사게 되고, 구동희나 엄유정 전시라니까 보러 가게 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믿을 만한 평론가 누구가 칭찬했다니까 보러 가게 되고. 그런데 그 믿을 만한 평론가 누구는 또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참 복잡하죠. 여기서 등단이란 제도적 형식은 이 포화상태를 꿰뚫고 소수의 작품들, 작가들에 상품다움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개입합니다. 이 사람은 그냥 예술한다고 나서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그걸 제대로 하는, 검증된 프로입니다 하고 세상에 공표하는 거죠. 나아가 돌이켜보면, 그것이 바로 ‘매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장소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잠시 등단을 제외한, 현재 문화예술의 제도 안으로 들어갈 방도들을 생각해보죠. 크게 보면 출판사에 직접 두툼한 작품을 투고하기도 하고, 비평가들의 경우엔 아카데미에서 활동을 하다가, 번역 일을 하다가 현장비평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여담이지만 후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건 역시 미술 쪽입니다. 왜냐하면 판이 굉장히 작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전자의 경우엔 별다른 후광이 없어 작품의 세일즈가 잘 안 될 수 있단 위험성을 갖고 있고, 후자의 경우엔 그런 루트 자체가 지극히 한정되어있으며 그나마도 대개 학연, 지연으로 얽혀있는, ―이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폐쇄적 환경이죠. 등단은 이런 방도들의 위험성과 폐쇄성을 감축시키는, 혹은 그런 감축에의 환상을 작동시키는 장치였던 겁니다. 말하자면, 일단 등단은 하나의 ‘자격증‘이었던 거예요. 그것의 현재적인 유효성과는 완전히 별개로 말이죠. 좀 잘난 체해서 맑시즘 경제학 식으로 얘기하자면, 경쟁을 폭넓게 야기하는 동시에 경쟁의 불확정성을 줄이기 위한 자본의 흐름의 술책인 거죠. 더 간단하게 얘기하면 가치판단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구호들인 ‘아웃소싱’과 ‘가성비’의 문제인 거고요. 이걸 먼저 인정하고서 등단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여기에 방점을 찍고 이야기를 진행할 때 중요한 건, 등단제를 없앤다고 해도 아주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수준의 잔인한 게이트키핑은 남는다는 거예요. 당연하지만 저는 지금 비관적으로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경쟁의 원인”을 곱씹어주십시오.

신춘문예로 등단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참 웃기긴 하겠지만, 저도 현행 등단제 싫어해요. 끔찍하고 지저분한 이너서클의 축제로 변모한 지 오래인 등단제는 변화해야만 합니다. 그저 좀비화된 시장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잔존하는 등단제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면 이 판을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역겨운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겠죠.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등단제 폐지를 곧장 대안으로 삼아 얘기할 때 아무래도 남는 의구심은 이겁니다; 내부자들 사이에서의 폐쇄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고 대중과 곧장 마주하면서 명예를 얻는 작업이 정말 상상하는 것처럼 광범위하게 실현 가능한 건가. 그리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이념’처럼 그걸 완료 불가능한 방향성으로 삼더라도, 그게 독자들에게 작업을 소개하는 ‘매체’의 목적일 수 있는가. 등단이 사라진다면 청탁 위주로 작품을 발표하는 작금의 관행도 싸그리 엎어져야 하겠죠. 근데 흔한 상상처럼 모조리 투고제로 바뀐다고 하면, ‘매체’에서 작업을 감별하기 위해 들어가는 인력은 대체 얼마나 될까요? 문학평론가인 노태훈 씨도 말씀하셨듯이, 작금의 문학비평가들 중 한 계절에 나온 모든 소설과 시집을 살펴볼 수 있는 이들은 정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됩니다. 문예지 편집위원으로 있다고 해도 말이죠. 영화, 미술, 음악 비평의 경우엔 곱절로 더 힘들고요. 거꾸로 말하자면, 투고제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것도 독립보다는 제도권 내부 쪽일 겁니다. 물론 다들 이걸 본능적으로 아니까, ‘비등단 독립’을 외치는 플랫폼들이 이런저런 가장자리의 필자들과 접촉하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등단제와 같은 본질의 게이트키핑을 거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특정 필자에게 컨택하는 과정부터가, 내부적인 의논이라곤 하지만 결국 약간 좁은 대상을 향해 좀 더 좁게 진행되는 게이트키핑이지 않던가요. 정말 의논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갈 정도로 형편없는 구성을 내놓는 곳이 절대다수이긴 하지만 그건 차치하도록 하죠.

그리고 보면, 지금처럼 제도의 문턱에 대대적인 비판이 가능한 것도 앞서 말했듯 제도가 예전 같은 위세를 많이 잃어서 그런 거잖아요? 미국의 영화 잡지 ‘시네아스트’에서 “인터넷과 영화 평론가의 관계”라는 주제로 토론을 연 게 벌써 10여 년 전 일입니다. 참고로 영화 연구자인 리처드 포튼은 그 자리를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시 토론에 참가한 <타임>지의 한 패널은 인터넷 평론에 대해 아주 적대적인 사람이었는데 역설적으로 그의 평론은 거의 인터넷으로 읽히고 있었다. 이 사실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남한의 경우엔 문학평론가인 이명원 씨나 조영일 씨가 10년 전에 겪었던 수난과 지금 사이의 차이, 혹은 등단 이후에도 괜찮은 지면이 주어지지 않아 밥벌이를 위해 또 다른 공모전에 작품을 내는 수많은 작가들을 떠올려도 좋을 테고요. 제가 앞에서 얘기했던 것들을 다시 끌어오자면, 미적 자율성이라는 심급과 이른바 ‘작가적’인 나르시시스트 자의식은 당대엔 거의 불가능하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고, 웬만한 영화나 웹소설은 다 토렌트로 다운받을 수 있죠. 심지어 얼마 전엔 중앙일보의 중앙신인문학상이 재정난을 이유로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진짜 재정난이 이유일까 하면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요. 또 영화제의 경우를 보면 ―이건 지역 영화제든 독립 영화제든 큰 차이가 없는데요― 프로그래머가 상이한 영화들을 상영작으로 선정함으로서 ‘당대의 영화’들을 통해 ‘영화의 당대’를 가늠할 수 있게끔 하는 비평적 역할을 수행하고 그에 따라 대외적 명성을 획득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져서, 대부분 전적인 사무직으로 치우쳐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반복컨대, “새로운 필드의 창출이 인플루언서를 만듭니다.”

이때 중요한 건, 기존의 권력, 제도 바깥의 순수한 위치 점유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새로운 필드에서의 활동은 의도하지 않아도 일종의 문화 자본을 창출하고 축적해 그 개인이 기존의 제도 안에서 갖는 위상을 바꿔놓으니, 인터넷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는 제도 비판은 아무리 해도 완전한 ‘제도 바깥’일 수 없는 거죠. 굳이 말하자면, 문화예술의 제도에 맞서는 건 작가이면서 인플루언서인 사람들이 아니라 그러한 내부자들이 인플루언서로 나타날 수 있게끔 하는 또 다른 산업의 제도겠죠. 제 경우를 보면, 같은 해에 신춘문예를 비롯한 공모전-등단 루트로, 그것도 기존의 지면이랄 게 《씨네 21》이나 부산의 영화평론지들을 제외하고선 거의 무너진 영화 평론으로 ‘공식’ 딱지를 얻은 작가들 중 적잖은 기회를 얻은 편인데, 이게 과연 제가 잘 나서 그런가, 하면 절대 아니란 말이죠. 저보다 어리고 글 잘 쓰고 똑똑한 분들은 남한 인터넷에 널려있습니다. 그냥 인터넷 플랫폼으로 지금까지 자기 의견을 열심히 게재해서 빨리 눈에 띈 것 때문이죠. “내부자들 사이에서의 폐쇄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고 대중과 곧장 마주하면서 명예를 얻는 작업”이란 건 아마, 적어도 현재 시장의 체계 안에선 이렇게만 가능할 겁니다. 등단제가 힘을 거의 잃어가는 지금 소셜 인플루언싱은 그 역할을 대신할 가능성을 갖는 거죠. 이 둘은 기실 거의 떨어져있지 않아요. 여기서 자본주의의 본성을 불안정성에서 찾은 지식인들이 궤적이 문득 떠오르네요.

제도 비판의 클리셰화

등단과 행정 얘기를 넘어서 좀 더 넓게 얘기해봅시다. 작가가 되는 제도적 방식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저 ‘지망생은 많은데 그들이 투여될 영역은 적다‘ 정도만 말하지만요, 거기서 제일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항상 빠집니다. 하나는, 관행-악습들이 전부 개선되고 사라지면, 그래서 원고료가 오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면이 가면 모든 게 해결될까요? 그런데 둘 모두를 함께 실현하는 건, 적어도 산업의 지금 같은 구조 속에선 불가능해요. 자족 가능성이라곤 바닥을 치는 남한의 많은 문예지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이나 지방정부들에서 ‘문화 진흥’이라는 명목 아래 사업을 따 지원을 받고, 그걸로 겨우겨우 원고료를 충당합니다. (여기서 “문예지”는 모종의 환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영화제, 예술영화관, 미술관/전시공간, 무용 상연…) 그런데 거기서 원고료가 더 오르면 어떻게 될까요? 그걸 감당 못하는 가난한 문예지는 없어지고, 그러면 또 원고가 일부 인기 문예지와 작가에게 편중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당장 지금도 수많은 문예지와 출판사 중 어디까지가 성공의 문턱인지가 나뉘고 그에 따른 독자 및 투고의 편중도 심한데 말이죠. 사실을 말하자면, 너무 많은 지망생들, 너무 많은 출판사들, 너무 많은 문예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도, 소비자들의 관심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문예지답게 운영되는 문예지도 적지요. “지면이 적다”는 흔한 불평은 바로 이렇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여기 남한처럼 문화에 대한 관심이 ‘하여튼’ 높은 나라는 더더욱 그렇죠. 지금 같은 경제 체제 속에서 문화예술계에’만’ 낮은 원고료를 완전히 해결하라고 요구한다면, 누군가의 삶이 나아지는 동시에, 혹은 그렇기에 양극화도 극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거예요. (여기서 ‘최저임금을 못 주는 사장들은 애초에 다 망했어야 해’ 같은 말을 내뱉는, 스스로가 진보인 줄 아는 징그러운 냉소적 리버럴리스트들이 겹쳐집니다) 그러니 만약 그냥 등단제와 그로 인한 청탁을 다 금지하고 투고제로만 하면 오히려 작가들 개개인의 생활은 훨씬 어려워지겠죠. 그럼 문학을, 나아가 예술이란 걸 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99% 정도는 없어질 테고요. 사실 저는 그러든 말든 상관없고, 오히려 양극화 없이 저런 결과가 초래된다면 아주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환영할 쪽이지만, 이걸로 먹고사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다른 하나는, 아까 경쟁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세상에 쓰레기 같은 작품들이 정말 많잖아요. 여기 계신 편집자 분들이 저보다 훨씬 더 실감하고 계시겠지만요. 누구 말마따나 비평가가 멸시의 대상이 되고… 뭐 그런 말들을 보면 사실 좀 우스운 게, 우리 모두가 다 제대로 첨예하고 좋은 작업을 이어나갔냐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도가 보수되면 작품들의 질도 올라가나요? 제도의 체계가 평등하게 개선되는 것과 작품들의 질이 올라가는 것이 과연 비례할까요?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고개를 돌려서 네이버 검색창에 뜨는 블로그를 3페이지만 찾아봐도 좋을 겁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처럼 이른바 등단 스타일 작품이란 게 있긴 합니다. 근데 그게 투고제로 한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 특정 심사위원들이 장기 독식하는 등단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져서 작품들의 주제와 형식에 다양성이 부여되긴 하겠지만, 그래서 큰 제도가 요구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야 있고, 좋은 작품들이 산출될 잠재적인 배경도 만들어지겠지만, 그 이전에 지망생들은 언제나 그랬듯 그럴듯한 경로를 탐색할 테고, 그런 다양한 각각의 플랫폼의 입맛에 맞는 글들이 더 늘어나게 되겠죠. 예술성이란 심급이 사후적으로 구성되었고 작품에 전적인 내부란 없다는, 문학평론가 오혜진 씨가 남한 소설의 맥락 안에서 증명한 사실은 이 맥락에도 적용 가능할 겁니다. ‘다양성=윤리=질’은 그 자체로 성립되기엔 무리인 도식이에요. “글을 쓰면 누구나 작가”라는 말은 듣기엔 좋지만 100% 진실은 아니죠. 그리고 비평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할 때 아주 추잡스러워지고요. 게이트키핑은 남는다는 건 바로 이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걸 아니까 사람들도 어떻게든 제도 비판을 계속하려는 게 아니던가요.

앞서 한 얘기를 다시 맑스식으로 바꿔서 정리하자면, 물신화는 하여튼 필연적이에요. 의식적으로는 크레딧과 진입과 고착을 기피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권력과 자원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누구든 피할 수 없고, 그저 경계만 할 수 있을 뿐인 상황이죠. 가령 마르셀 뒤샹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미술, ‘창조성’을 해체하고 잠깐의 담론적 제스처로 스스로를 위치짓는 현대미술의 역사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타율성에 의해 자꾸만 ‘창조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호명되거나 거기에 의지하는 딜레마에 노출된 역사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여러분께 좀 더 익숙할 문예평론의 개념 안으로 들어와서 말해볼까요? 문학평론가 프랑코 모레티의 그 유명한 ‘문학의 도살장’ 얘기도 굉장히, 심지어 모레티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많이 오독되는데요, 그는 이 개념을 공고히 한 동명의 논문의 말미에 “필연적인 것은 가계도다”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습니다. 그러니까 모레티의 주장은 그냥 정전에 등재된 0.5 퍼센트의 작품들로 이루어지는 문학사를 99.5 퍼센트의 작품들로 전복시키자고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질 나쁜 판본의 연장선인 게 아니라, 크게 두 가지인 거예요. 특정 분야의 정전만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역사는 요소들 사이의 경쟁으로 형성된다는 것. 즉 도살장은 역겹고 피비린내나는 장소이자 구원의 장소이기도 하며, 하여튼,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진다는 것. 작품에의 가치 판단을 꽤 배제하고 그것들을 산산조각난 기호, 데이터들의 더미로 다루는 비평술을 추구한, 사실 과하게 허무맹랑하고 모험적인 그의 시도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거죠.

잠시 우회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저는 젊은 ‘내부자’들의 지금 같은 시도가 왜 좌절될 수밖에 없을 터인가에 대해 논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자신이 적대시하는 세대의 전제를 자기도 모르는 새 적잖이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여하튼 제도의 톱니바퀴다. 이런 칼 슈미트적 문제 설정은 제가 「네임드 유저의 수기」에서 궁극적으로 의도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이런 시도들이 그저 기존의 제도가 가졌던 힘을 더 많이 분배받는 데서 그치게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는 거죠. 제도를 비판하지만 그게 결국 공정한 기회, 기회의 나눔에 대한 요구로 귀결된다? 그럼 안 됩니다. 제도의 필연성과 이에 내장된 폭력을 직시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차라리 말을 얹지 않는 게 낫다고까지 생각해요 저는. 그건 오히려 평등이라는 판타지를 작동시켜서 필연적인 폭력을 숨기고 악마화하는 꼴이니까요. 요컨대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 아니라 패러다임의 항을 수정하려는 데서 그치게 된달까요. 이 경우 제도 비판은 클리셰화되어, 독립의 영역의 세일즈를 위한 것에서 그치고 맙니다. 조금 거칠게 얘기하면, 독립적이기 위해 빌어먹는 게 아니라 빌어먹기 위해 독립적이어야 하는 것-제 생각엔 이게 지금 여기서 독립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이들이 처한 중요한 문제예요.

어떤 유명한 장르소설/웹소설 연구자는 이른바 ‘제도 문학’이 자신들의 폐쇄적인 언어와 규율로 인해 실제 현실의 삶을 지시하는 역할을 방기해버렸고 이젠 그 역할을 그 바깥의 장르 및 웹소설들이 대신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닙니다. 말도 안 되는 거죠. 애초에 예술의 사회적 쓸모라는 담론 자체가 최소한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 안에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제 입장에서 저런 말은, 그냥 ‘제도 문학’이 기존에 가졌던 권위를 찬탈하고 싶다는 의지에 알리바이를 대는 것일 뿐입니다. 제 동지 중 하나, 아마 지금 이 토크를 보고 계실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서브컬처를 제물로 제도에 입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혐오감을 느낀다. 서브컬처를 가져옴으로써 제도 내의 비평체계가 얼마나 빈수한지 드러내는 시도에 적극 지지한다.”

그야말로 가슴에 품을 명언이죠. 그리고 저는 이 점에서 세대교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자신할 수 있죠? 자신은 다르다고, 또 다를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냐고요? ‘모두가 그럴 이유가 있지’라는 상대주의 관점을 온전히 내재화하자고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런 거죠. 정말 당신네들이 말하는 것처럼 객관적 비판을 하고 싶다면 당신네들이 적대시하는 이들이 왜 그런 사고를 하고 행동을 하게 됐는지 더 잘 이해해봐라. 예술 장르나 산업의 분과화를 비판하려면 정말 제대로 된 비판, 그러니까 왜 역사에서 그런 흐름이 이어졌는지를 먼저 생각해야지, 그 단계를 그냥 건너뛰고서 분과화를 비판하면 그냥 비난 정도에 머무는 겁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작가나 비평가들이 마냥 순진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여성 필자들을 모아서 기획을 진행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안적 제도를 만드는 거겠죠. 제도를 보수하는 게 목적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분들도 있고요. 하지만 이런 분들의 절대 다수도 궁극적으로 평등한 제도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저는 다소 불만족스럽습니다. 이렇게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우리는 바꿀 수 있다는 레토릭은 사실 좌파든 우파든, 파시스트든 공산주의자든, 386이든 밀레니얼 세대이든 모두가 쉬이 이용할 수 있는 전형적인, 그리고 대개는 무책임한 얘기란 말이에요. 내 적을 만들고 그 적에게 최대한 모든 악의 이미지를 부여하려 하는 건 근대 대중 정치의 가장 큰 방법론이잖아요? 다시, 물신화는 필연적입니다. 이건 무의식에 대한 얘기라기보단 투쟁의 방식에 내재된 한계 내지는 실패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제도 비판이 가치를 갖는다면

그런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 아마도 여러분께서 이 토크를 보고 들으면서 가슴에 품으셨을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제도 비판과 그러면서 나오는 독립 매체들엔 순기능이 전혀 없나?’ 이 지점에선, 바로 며칠 전에 여기 민음사에서 새 소설 『더 셜리 클럽』을 발간한 소설가 박서련 씨가 대안 문학플랫폼 《던전》의 운영진, 그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던전지기”로서 마찬가지로 대안 문학플랫폼인 《SRS》에 쓴 에세이 「심한 말」의 다음의 대목이 큰 울림을 줍니다. 좀 길게 인용을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등단도 했고 장편문학상도 탔고 장편문학상 수상 이후 1년에 한권 이상 책을 내고 있는 사람이 ‘나는 늘 장외자라는 기분’이라 말하는 것도, 등단에 대한 신앙이 해체되었다 말하는 것도 기만처럼 들릴 것이다. 어떻게 말해도 기만이 된다. (…) 그런데 나는 장편문학상을 탄 이후 오히려 역시 나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 나는 상을 타고 나서 비로소 나의 실력과 내 문학의 방향 대신 제도에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상을 받기 전에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은 작가의 열등감 발사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제도를 통해 제도에 대해 발화할 용기를 얻는다는 것은 모순적인 말이지만, 그렇다. 때때로 상을 받기 전에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했다는 자책을 느낀다. 이미 일어난 일들을 무를 수는 없고 사실은 무르고 싶은 속성의 일도 전혀 아니다. 다만 내가 이전에 갖지 못했던 용기를 여기서부터는 어떤 식으로 펼쳐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내게는 독립문예지면을 꾸려가는 이들이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들로 보인다. 누군가의 인정을 구한 다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다음 자 어쩔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걸, 하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나같은 사람이 이 흐름에 보탤 수 있는 힘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박서련 씨는 제가 이런 조류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풀어주셨는데요, 여기서 중요한 건 ”자 어쩔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걸, 하고 묻는” 사람들, 즉 비등단 독립 작가들인 거죠. 앞서 잠깐 짚었던 바이지만, 우리는 특정한 등단 루트를 밟지 않고서 비평가나 작가 타이틀을 획득한 이들을 조금이나마 봐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자격을 논할 게 아니라, 그들의 위치 속에 숨어있는, 등단제를 해체할 수 있는 잠재성을 논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실, 제도의 문제는 그것이 권력이 펼쳐지는 체계를 완벽하게 구축해놓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그 체계에 구멍이 난잡하게 뚫린 걸 거의 파악하지 못해서 생깁니다) 그래서 그들의 위상이 필드의 일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지켜본 다음 그 길을, 혹은 그것과 외양은 달라도 비슷한 길을 재능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걸어갈 수 있도록 얘기를 이어가는 거죠. 제도 자체의 완전한 붕괴가 아니라 제도가 제도이게 하는 힘을 뜯어내는 겁니다. 문단 입구의 경계가 낮게 흐트러질수록 제도의 권위는 해체됩니다. 그런 순간에는 등단제가 있어도 큰 상관이 없게 되죠. 본질적으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즉 본질로서의 시장은 있지만, 단지 그 잠재성을 미약하게나마 실질적인 가능성으로 치환했다는 데서 제도 비판은 모든 규칙을 바꿀 수 있는 방안을, 곧 시장의 사악한 힘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순화할 방안은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게 제대로 직시되고 있지 않은 거죠. 작금의 제도 비판이 정말 무엇을 하고 혹은 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형식의 층위에서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한계야 당연히 있죠. ’그거 기껏해야 다시 제도로 수렴되는 꼬라지 아니냐?‘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이른바 ’메타적 접근’이 꽤 비열해지는 순간들이 있다고 보는 저로선 그 한 걸음을 그렇게 힐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독립들은, 적어도 제가 보기엔 미래를 순진하게 믿긴 해도 그 미래를 향해 꾸준히 나아갈 만큼 현재를 낙관하지는 않고 있거든요. 기존의 제도로부터의 접근에 응하는 걸 비난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누구 좋으라고? 그냥 “바깥”으로의 존속을 자처하며, 하지만 작은 자본가도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열악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도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의 단초조차 마련되지 않았는데 그 하나만 보고 작가를 비난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사실 이건 저를 변호하기 위한 말이기도 한데요, 제가 등단제의 맹점을 이용해서 지금 이 자리에 왔기 때문이죠. 2020년 올해까지 부산일보 신춘문예는 저명한 영화평론가 허문영 씨가 평론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여튼 몇 년째 그분의 전문 분야인 영화 비평이 당선되었습니다. 2019년에 처음으로 공모전에 글을 내기 시작한 저에게 부산일보 신춘문예는 기회로 보였던 거죠. 아마 저를 포함한 다른 지망생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영화 평론 부문을 담당하신 영화평론가 김시무 씨보다 허문영 씨가 「(이전)같지 않으리 – 데이빗 린치론」같은 복잡한 글을 더 포용해서 읽어주시리란 계산도 깔려있었고요. 적어도 이런 면에서 저는 기회주의자입니다. 제가 이 뒷얘기를 꺼내는 건, 우리 자신을 순수하고 투명하고 독창적인 타자로 포지셔닝하길 이제 멈추자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에, 저녁 시간에도 사람이 없던 광화문 미스터피자에서 한 지인과 피자를 씹으며 수다를 떨다가 그분이 국내 출간된 만화 이론/비평 관련 리딩 리스트를 부탁하셨고, 한참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최근에야 숨통이 트여서 얼마 전에 간략한 스케치를 해봤는데, 그나마 읽을 만한 단행본 대부분이 한참 전에 절판된 상태라 첫발을 내디딘 동시에 좌절해버린 일이 있어요. ‘박인하 씨나 김낙호 씨의 책은 그렇게 깊이 읽진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어도 ―이름을 모르실 수도 있는데, 국내의 만화 비평가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라고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그 책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절판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거죠. 돌이켜보면 국내의 만화 이론/비평 서적은 그래도 90년대 말~00년대 초엔 ‘가능한’ 독자의 수에 비하면 양에서든 시도의 다양성에서든 꽤 많이 나왔다고 보는데, 문제는 그게 좌절되고 역사적으로 망각되는 게 계속 반복된 거, 그리고 그 반복이 반복이란 사실에 대한 (독자든 작가든 간에) 무자각에 있다고 봐요. 가령 종종 과거엔 순정만화를 ‘구원’하려는 만화 비평의 시도가 없었다고들 오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이건 (지금은 전부 절판된) 만화규장각지식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된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같은 간단한 수준의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로, 90년대 말부터 그런 시도는 쭉, 계속 있었어요. 물론 그게 적확한 시도였냐는 가치판단의 측면에선 일본의 선구적인 작업들의 그림자 안에서만 노는, 그닥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들이었지만, 하여튼 그런 시도는 계속 있었단 겁니다. 그리고 또 계속,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해서 망각된 거고요. 이 반복의 서클에 균열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지금, 만화》라는 잡지의 내용물을 보면 한국에서 만화비평을 하겠다고 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로 똑똑하거나 첨예하지는 않은 것 같고, 설사 아주 똑똑한 사람이 나서서 빼어나게 정리를 한다 해도 지금까지의 역사의 흐름과 삶의 전지구적 유연화라는 작금의 흐름을 보면 불가능한 게 뻔하겠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균열을 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완전히 다르거나 새롭지 않다는 걸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최소한 그럴 작은 희망이 생기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문학평론가 강보원 씨의 표현을 빌려서, 새로움이란 수사 자체가 항상 제도적이었어요. 제도 친화적이었죠. 그걸 인정하고 그 반복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이전과 다를 수 있는 방안일 겁니다.

자신을 구조의 바깥으로, 예외로 규정하는 이를 언제나 의심하고 또 의심합시다. 당연하지만 저도 거듭 의심해보시란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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