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환_풍선 같은 대중문화 속 쓰디쓴 비체의 탐정 게임: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언더 더 실버 레이크’

이이환

<언더 더 실버 레이크> 스틸컷, 출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The tragedy of your times, my young friends, is that you may get exactly what you want. – 밥 라펠슨, <헤드> (1968)”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2018년작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감독의 전작하고 이질적인 영화다.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에서 미첼은 미시건 주 교외의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하지만 <언더 더 실버 레이크>에서 미첼은 갑자기 장소를 LA로 옮겼고, 20대를 훌쩍 넘은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전작에서 모호하게 떠돌아 다녔던 복고 문화적 코드들을 전면화하여 관객에게 탐정 게임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 게임은 곧 대중문화를 탐식하는 청년 세대의 초라함을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대중문화가, 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을 폭로하면서 대중문화에 잠식된 비체(특히 청년 세대)의 존재론적인 공포를 보여주는 영화다.

게임이 벌어지는 장소는 실버 레이크다. 할리우드 근처 동명의 저수지가 있는 주택가로, 할리우드의 탄생과 함께 많은 스타들이 살았거나 거쳐갔던 곳이다. 주인공 샘은 이 실버 레이크에서 하릴없이 지내는 백수다.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샘은, 어느 날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여성 사라를 알게 된다. 사라를 훔쳐보던 샘은 우연히 사라와 친해져 얘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한 사라는 갑자기 사라진다. 사라의 집에서 비밀 코드를 발견한 샘은 이 코드가 사라의 실종과 관련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를 보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줄기차게 대중문화를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샘은 미국 남성 너드 문화의 총화인 캐릭터다. 아침엔 어머니한테 자넷 게이노가 출연한 고전 영화 <제7의 천국> 얘기를 듣고, 방 벽엔 194-50년대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가 붙어있으며 친구랑 같이 닌텐도 패미컴으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한다. 샘의 영웅은 1990년대를 풍미한 록 뮤지션 커트 코베인이며, R.E.M. 음악에 흥분한다. 심지어 캐스팅조차도 이런 인용의 일부로 작동한다. 샘을 맡은 앤드류 가필드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스파이더맨이며, 사라를 맡은 라일리 코프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손녀딸이다. 영화는 이렇게 과잉된 대중문화의 파편과 기호들을 내러티브 안팎으로 배치하면서 총체적인 네트워크이자 미로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런 네트워크-미로는 어느 정도는 감독의 자전적인 경향도 있는데, 미첼은 1970년대 초반 생으로, 198-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세대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문화는,이름 그대로 기존 기성 세대 문화에 대한 대안 문화로 등장했고 반항하는 청년 세대라는 다시 대중문화의 핫한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이렇게 구성된 대중문화의 파편과 기호를 관음 하는 것으로 전개를 이어간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의 방향을 설정하는 다른 축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과 <현기증>이다. 히치콕은 <이창>과 <현기증>에서 주체의 욕망이 관음을 통해 한 인물을 대상화하면서, 어떻게 영화라는 매체에서 시선 권력과 욕망이 성립되는지 보여줬다. 미첼 역시 이런 관점을 따르면서, 샘을 끊임없이 관음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샘은 영화를 보듯이, 끊임없이 사라를 훔쳐보고 어떻게 사라졌는지 상상한다. 심지어 샘은 <현기증>의 스카티가 그랬듯이 차를 운전하면서, 수상한 남녀의 차량을 뒤쫓는다.

주의해야 할 점이라면, 플루서의 용어를 빌리자면 히치콕은 컴퓨터와 디지털 코드로 이뤄진 “텔레마틱 시대”를 살아가는 감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빌렘 플루서의 이론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플루서는 저서 <코뮤니콜로기>에서 코드를 상징 체계로 설명하면서, 인류문화사와 커뮤니케이션 철학이 발전하는 과정을 서술했다. 기본적으로 플루서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현대 이전까지 이 코드는 텍스트로 이뤄져 선형적 발전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지만 1900년대부터 텍스트로 대표되는 “선형 코드가 형성시킨 ‘발전’이라는 역사의식에서 무의미함을 느끼며, 사진이나 컴퓨터, 텔레비전 같은 기구를 통해 기술적 형상을 주고받는 텔레마틱한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이 사회에서는 텍스트의 세계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기술적 형상’이라는 새로운 평면 코드 (그림)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간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선형 코드는 0차원적 점의 요소들로 붕괴된다.

하지만 새로운 평면 코드는 ‘텍스트에서 나온 프로그램”이며 기술적 형상은 점의 조합으로 재창조되었다고 보고 있다. 플루셔는 이 변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 지점에서 미디어 이용자가 기술적인 형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즉 새로운 그림을 문자 텍스트로 해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플루셔는 컴퓨터나 텔레비전 같은 기구를 통해 이런 해독이 텔레마틱 사회 전반의 소통 과정을 규정 짓고 있다고 보며, 여기서 새로운 인간 형상인 유희적인 인간이 등장한다고 보았다. 플루셔는 지금까지 “텍스트 시대 속 현상 뒤에서 ‘본질’이나 그럴 듯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류’에서 빠져나온 새로운 인식단계”에서 “그림의 홍수 가운데에서 그림을 생산하면서도 단호히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새로운 주체상이 등장할 것이라 예측한다.

그 점에서 히치콕은 텍스트 시대의 선형 코드에 가까웠던 감독이었다. 이미지와 관음 간 관계를 다룬<이창>과 <현기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음을 통해 본 이미지의 의미였다. 예를 들어 <이창>에서는 앞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이었고, <현기증>에서는 금발과 옷차림이라는 주디의 특징적인 이미지가 중심이 되었지, 다른 요소와 결합하지 않았다. 히치콕은 텔레마틱 시대의 “점으로 분해된 코드의 요소들을 ‘조합’하는 상상력”을 가진 감독은 아니었다. 다만 카메라-렌즈를 통한 평면 코드의 관찰과 욕망을 예측했다는 점에서 텔레마틱 사회를 이루는 기본 전제를 예지했을 뿐이다.

반대로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명백히 “텔레마틱 시대”를 살아가는 감독의 영화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샘은 대중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코드들을 발견하고 ‘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만화 가게와 음모론 만화가, 슈팅 스타 멤버들로 대표되는 고전적인 장소/인적 네트워크부터 시작해, 구글 검색이나 SNS 같은 첨단 기술 네트워크까지 다양한 네트워크를 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대중문화라는 담론과 그 담론이 만들어낸 점들을 조합해, 새로운 ‘코드’와 ‘대화’를 만들고 유희적으로 소비하는, 지극히 텔레마틱 사회적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파편화된 대중문화의 조각을 조합하는 샘은 기구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곡이나 가사, 영화, 암호들은 점의 요소로 흩어져 있다가 샘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재창조된다.

미첼과 플루서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 나아가 텍스트에서 나온 프로그램으로써 새로운 코드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공통적인 인식이 있다. 미첼은 <팔로우>에서 그랬듯이, 앎 너머에 있는 세계의 심연에 선 미성년들을 그려내는 데 관심이 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 미성년들이 고민했던 앎 너머는 섹스와 연애, 우정 같은 “성숙한 삶”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었다. 작중 인물 중 하나는 이 환상을 ‘성인이 된다는 신화’라는 문장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 환상은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실망으로 돌변한다. <팔로우>로 넘어오면 환상은 축소되고 실망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진화한다. 섹스는 대응할 수 없는 괴물을 불러오는 트리거이며, 주인공 제이는 섹스를 한 후 끊임없이 억압된 것이 귀환해 살해당하는 걸 두려워해야 한다. 미첼은 이 두 영화에서 시공간을 의도적으로 뒤섞는 문화적 코드를 배치해 영화 전체를 낯선 미로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공포와 두려움을 넘어서는 심연을 이해할 수 없었던 <팔로우>랑 달리,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그 심연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열쇠/코드를 제시한다. 영화 속 무수한 대중문화에 대한 인용은 그런 점에서 점의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의 요소로 파편화된 코드들을 텔레마틱적으로 해독하면서 발생하는 유희성이 어떻게 탐정 영화라는 장르로 제시되고 있는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언더 더 실버 레이크>의 내러티브 구조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분석해야 한다. 미첼이 <언더 더 실버 레이크>에서 선택한 내러티브 구조를 살펴보자. 찰스 라이레즈 베르그의 논문 <A Taxonomy of Alternative Plots in Recent Films>의 분류 틀에 참고하면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고전적 규칙들을 배반하는 플롯’ 특히 ‘주관적 플롯’에 속하는 영화다. 베르그는 이런 플롯들을 설명하면서 “고전적인 플롯들이 주로 객관적이고 전지적인 제3자의 관점에서 풀어나가는 이야기”인 고전적인 플롯과 구별된다고 정의했다. 또한 ‘분열적인 내러티브’를 설명하면서 분열적 내러티브는 꿈과 꿈이 아닌 이야기들이 섞이면서 구분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 는 명백히 ‘주관적 플롯’과 ‘분열적인 내러티브’에 기초한 영화다. 미첼은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영향을 받아 샘이라는 분열적인 인물의 심리가 보는 망상, 현실, 상징적인 체계를 종횡무진 하면서 진행한다. 영화 시퀀스를 분석해보면 샘이 등장하지 않는 시퀀스는 없는데, 그 말은 영화가 샘의 주관적인 세계에 바탕에 두고 진행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영화는 시퀀스 별로 떼어 놓고 보면 현실과 환상이 포개져 있는 구간이 등장한다. 우연히 접한 도시 전설이 갑자기 실제로 등장한다든가,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하거나 저격 살해가 일어났음에도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사건들이 ‘환상’으로 처리되어 사라지며, 샘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인물이 항상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주관적이며 분열적인 플롯에 속한다.

한편 데이비드 보드웰의 <The Way Hollywood Tells It>를 인용하면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미스터리를 추적하면서 마인드 게임을 펼친다는 점에서 퍼즐 필름이기도 하다. 샘의 앎에 대해 신빙성이 낮다는 점, 주체의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는 점, 알지 못했던 사실에서 두려움과 당혹을 끌어낸다는 점 역시<언더 더 실버 레이크>의 퍼즐 필름 성향을 더하고 있다. 대중문화를 퍼즐 조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조합하며 기이한 대상들을 만나는 모험을 떠나는 주체=샘의 모습은 토머스 핀천의 <제 49호 품목의 경매>의 에디파랑 닮아 있다. 그리고 <제 49호 품목의 경매>의 주인공 에디파가 그랬듯이, 샘은 자신의 여정에서 자신의 앎을 넘어서는 것들을 발견하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 점에서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토머스 핀천을 경유해 대중문화와 대중문화의 작동 과정이라는 지극히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테마를 내러티브의 동력으로 이끌어 들인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앎을 넘어선 발견이 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다. 이 지점에서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부정적이다. 먼저 샘은 명백한 안티히어로이며 주체가 되지 못한 미성숙한 비체다. 일단 샘이라는 캐릭터가 자극에 미쳐 있으며, 폭력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초반부 샘은 자신의 차를 긁은 소년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샘의 폭력 성향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폭력이나 살인 장면으로 구체화되는데, 정작 샘이 휘두르는 폭력이 무력한 대상 위주며 그조차도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총에 대한 묘사로 넘어가면 확실해 지는데 샘은 환상 속에서 총을 얻지만,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죽이지 못한다. 유일하게 올빼미 여자한테 쏘는 장면 역시 빗나감으로 끝나며, 마지막 컬트 집단과의 만남에서 샘을 총을 겨누지만 쏘지 못한다. 그 점에서 영화 속 샘이 총 없이 휘두르는 폭력은 잔인하지만 우스꽝스럽다. 이런 우스꽝스러움은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진실을 찾는 필름 느와르 장르 속 탐정을 패러디한 것처럼 보인다. 샘은 알파 메일이 될 수 없는 비체다.

샘이 퍼즐에 매달리는 이유는 쾌감도 있지만, 비체가 아니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다. 비체로써 샘이 겪고 있는 현실은 무수한 경고 메시지와 제스처로 등장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샘은 경고를 연달아 마주치게 된다. ‘개 살해자를 조심하라’ 낙서를 본 샘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죽어가는 청설모랑 마주치게 되고 마지막으로 집세를 내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그리고 영화 내내 개들은 샘을 향해 맹렬히 짖는데, 이는 영화의 맥거핀인 ‘개 살해자’에 대한 암시와 동시에  경고 메시지로 등장한다. 샘은 그 경고에 대해 둔감한 척하려고 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미스터리가 진행되는 동안 샘이 가지고 있던 것들은 하나 둘 씩 사라진다. 집세를 못 낸다는 언급부터 시작해, 차가 훼손되고 견인되어 버린다. 섹스 파트너도, 스컹크 냄새가 난다며 떠난 뒤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샘은 벌거벗은 상태가 되어 돌아다니곤 한다.

무엇보다도 추리와 미스터리, 퍼즐을 상대하는 탐정 샘의 심리는 유희적이며 은밀한 오르가슴으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이 영화의 미스터리가 소비 주체에게 서비스하듯이, 외설적이고 음란한 방식으로 제시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속 핵심 미스터리를 구성하는 사라의 실종을 쫓는 샘의 심리는, 명백히 성적인 감정에 기반해 있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사라가 아파트 수영장에서 나타나 누드 수영을 하다가 사라지는 환상 시퀀스는 샘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시퀀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라는 개 짖는 소리를 흉내내 샘을 당혹케 한다. 수영장 화장실에서 여자들이 개 짖는 소리로 샘을 위협하는 장면이라던가 영화 속 개들이 실종되거나 살해당한다는 점, 결말부 사라가 선택한 운명을 생각해보면 개 짖음은 욕망과 미스터리의 네트워크에 오르가슴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비루하기 그지없는 샘을 비웃음과 동시에, 할리우드에서 소모되는 재능들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스터리를 욕망의 대상으로써 인식하는 샘의 인식은 제퍼슨 세븐스의 실종 사건을 대할 때도 잘 드러난다. 영화의 다른 플롯인 제퍼슨 세븐스 실종 사건은 영화 속에서 전형적인 미국풍 가십 사건으로 그려진다. 자수성가한 하워드 휴즈 풍 쇼맨십 성향이 강한 부자, 그런 부자의 미스터리한 실종, 엉망진창인 딸, 타블로이드 신문의 자극적인 보도… 제퍼슨 세븐스의 실종은 고통스러운 사건이 아닌, 지독히도 과장된 나머지 비현실적으로 즐길 수 있는 유희로 그려진다. 노래를 역재생한 뒤, 제퍼슨 실종 기사와 누드 사진들을 올려놓고 자위를 하는 샘의 모습은 샘이 대중문화의 코드를 어떤 관점과 감정으로 탐닉하고 조합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탐닉은 상술한 섹스 파트너 캐릭터하고 연결된다. 이 섹스 파트너는 일반적인 복장이 아닌 페티시를 자극하는 디른들(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여성 전통복)이나 간호사 같은 코스프레 복장으로 등장하기에 실제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욕망의 상징물에 가깝다. 그렇기에 초반부에 등장하는 샘과 섹스 파트너의 섹스는 인간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욕망을 충족하는 쪽에 가깝다. 이처럼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대상에 대한 비체의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자위로 대표되는 충동적인 리비도-소비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샘은 이런 사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고 거기서 쾌감을 느낀다.

이런 관점은 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버 레이크 아래서>라는 음모론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는 끊임없이 스타 이미지 탐닉과 더불어 자신만의 논리로 세상의 미스터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전 세계의 화폐와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올빼미 여자”와 광고 속에 있는 서브리미널한 메시지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이에 대한 샘에 대한 질문은 ‘그럼 서브리미널하지 않은 숨겨진 메시지로 소수가 소통할 수도 있냐’다. 음모론 만화가는 그 대답을 긍정한다. 음모론 만화가의 긍정은 샘을 대중문화 코드를 통해 의미 있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끈다.

얼핏 보면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음모론의 관점과 대중문화의 코드로 세상의 심연과 소통하려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관점을 부정한다. 샘이 사라를 찾으려고 할수록, 샘은 자신이 나름대로 구축한 ‘담론’과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마주치게 된다. 의미 있는 것처럼 보였던 대중문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밝혀지고, 의미 있다고 가정하고 만든 ‘대화’인 음모론과 퍼즐 풀이는 곧 의미를 잃고 사라져버린다. 이 점에서 샘은 플루서가 구축한 이론하고 엇나가기 시작한다. 샘의 추리에 기반해 있는 텔레마틱풍 유희적 ‘대화’는 객관적인 관찰이나 코드에 대한 거리 없이, ‘자위’의 연장선상에 있는, 의미 없고 자기에 함몰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샘은 플루서가 긍정적으로 그렸던 인물상하고 반대되는 인물이다. 오히려 샘은 플루서가 비판했던, 텅 빈 기술적 형상을 선형적 코드로 재해석하려고 발버둥 치는 인물이다.

샘이 어떤 식으로 기술적 형상을 오독하는지 살펴보자. 일단 이 영화에서 샘이 유희하듯이 만들어내는 ‘대화’와 ‘기술적 형상’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곧장 말해 미스터리의 풀이 과정이 없고, 샘만의 유희로 그친다. 샘은 암호학 책을 읽지만, 미첼은 이 암호학 책 어디서 ‘Turning Teeth’ 곡에 담긴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샘은 실제로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만들지 못한다. 샘은 곡을 역재생하며 메시지를 만들려고 애쓰지만 별 결론은 얻지 못한다. 대신 ‘Turning Teeth’ 곡을 역재생하며 자위하다가 매춘 광고로 이전에 봤던 여자에게 연락하면서 실마리를 얻게 된다. 한마디로 자위하다가 정보를 획득한 셈이다. 샘은 추리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혹은 진상이 아닌 것을 진상이라고 생각하고, 진상이 아닌 것이 만든 코드에 매달리고 있다. 샘은 추리하기 위해 의미로 보일만한 것을 집착하지만, 영화는 그 집착을 통해 샘이 주체나 대상도 아닌 지극히 비루하고 위태로운 ‘비체’의 위치에 있다는 걸 폭로한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 스틸컷, 출처

이렇게 진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 첫 번째 부정이 일어난다. 첫 번째 부정은 샘이 그토록 매달리던 지저스 앤 브라이드 오브 드라큘라의 곡 ‘Turning Teeth’에 대한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뤄진다. 샘은 이 노래 속에서 숨겨둔 메시지가 있다고 믿지만, 실제 작곡자를 만났을 때 ‘Turning Teeth’에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는 것 이상으로, 그동안 즐겼던 대중문화가 실은 아무런 의미도 감정도 없는 추잡한 산업의 일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곡자는 샘이 죽고 난 뒤로도 자신의 곡이 흘러나올 거라 말하면서 히트곡 메들리를 연주한다. 일견 코믹하게 들리는 작곡가의 히트곡 메들리는 대중문화가 약속하는 의미를 부정하고,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본-산업의 일환이었다고 폭로하는 호러이기도 하다. “네 야심과 예술, 글 모두 재능 있는 자의 껍데기일 뿐”이라는 작곡자의 독설은 샘이 플루서가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새로운 주체상에 전혀 못 미치는 비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자연히 사라의 실종을 알 수 있는 단서도 사라지고, 샘은 작곡자를 잔혹하게 살해하기에 이른다. 미첼은 이 살해를 통해 천재 예술가의 창작신화를 부정하고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중문화 생산 체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허상 속에서 나마 그 체계를 커트 코베인의 기타로 잔혹하게 파괴하면서 자신이 거쳐왔던 1990년대 얼터너티브 세대의 ‘반항’ 역시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고 씁쓸하게 고백한다. 이런 비판과 고백을 통해 미첼은 대중문화에 기생할수 밖에 없는, 포스트모던한 종말적 주체성의 환락과 허무를 제시하고 있다.

1차로 부정을 당했음에도 샘은 여전히 대중문화의 ‘담론’, 나아가 코드를 통해 만든 해석과 ‘대화’에 집착한다. 밀리센트가 건네 준 팔찌와, 음모론자가 남긴 지도 같은 코드를 결합해 얻은 두 번째 ‘대화’ 시도는 그래도 의미 있는 진상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번째 부정은 훨씬 가혹하다. 샘은 컬트 종교 집단을 만나면서, 사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첫 번째 사실은 이 세상은 허무하고 의미 없으니(영화는 이를 “카니발 같은 세상에서 상을 얻길 기대한다”라고 표현한다.), 세상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자극적인 대중문화와 섹스만 즐기면서 살겠다는 자본가 남성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사실은 실종된 제퍼슨 세븐스 역시 그렇게 살기로 했고, 사라는 그런 제퍼슨에게 성적 봉사를 제공하는 역할로 여생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하에서 살게 된 사라는 샘이 항상 소비해왔던 사각 스크린 이미지로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샘은 자위하지도 즐기지도 않고, 멍하고 슬픈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첫 번째 폭로에서 대중문화의 허상성을 알게 된 샘은, 두 번째 폭로에서 여성을 착취하는 대중문화의 착취성과 현실 부정적인 모습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후회하지 않냐’는 샘의 질문에 대한 사라의 답이 가지는 뉘앙스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라가 안 팔리는 배우 지망생들을 제공하는 매춘 서비스 슈팅 스타즈의 일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사라가 자본가 남성의 성적 봉사를 선택한 계기가 순수한 자의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라의 선택은 현실에서 성공도 못 하고 착취당하느니 차라리 부자의 재력에 기생하면서 영원한 쾌락 속에 살다가 소멸하겠다는 체념 어린 좌절에 가깝다.

사라가 귀의한 컬트 집단이 등장해 사실을 밝히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미첼이 바라보는 21세기 미국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 컬트 집단은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가 추구했던 영적 구원이나 체제를 탈출하겠다는 최소한의 깨달음조차 사라져 있다. 컬트 집단의 대표 격인 해적 복장의 남자 역시 깨달음이나 체제에 대한 저항 대신 세계 그 자체에 대한 냉소를 말하며, 차라리 현대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쾌락의 폐쇄회로에 갇혀 소멸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종극이 섬뜩하게 다가온다면, 이 종극이 지금까지 줄곧 제시되어왔던 자본주의/대중문화 세계의 논리를 반복한 것에 불과한 데다 그조차도 살아남을 다른 방법이 없기에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첼은 이를 이집트 문명의 피라미드와 파라오, 순장 문화로 은유하고 있는데 화려함과 거대함을 차용하지만 속은 텅 빈 채로 무수한 인재를 포식하고 버리는 할리우드, 나아가 현대 대중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사라의 선택은 <언더 더 실버 레이크>에서 제시되는 여성 착취적인 이미지를 재검토하게 만든다. 일단 이 영화에서 여성의 누드를 비롯해 온갖 착취적인 이미지들이 전시되고 있다는 건 자명하다.  하지만 미첼은 이 이미지를 전시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이미지의 착취가 어떻게 이뤄지고 부정되는지도 같이 보여준다. 샘과 샘의 친구가 드론으로 란제리 모델을 훔쳐보다가 우는 여자만 보는 시퀀스와 플레이보이 누드 사진과 동일한 구도로 죽음을 맞이하는 밀리센트 세븐즈가 미첼이 두 번째 폭로를 위해 숨겨둔 바늘이라 할 수 있다. 전자에서는 남성 관음의 시점이 무화되고, 어색한 침묵으로 헤어진다. 미첼은 이 무화에서 고통받는 여성을 보고도 성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냐고 질문한다. 후자에서는 에로틱하게 대상화된 이미지를, 그로테스크한 죽음을 통해 아이러니컬하게 재현하면서 샘과 관객을 당혹케 한다. 포르노 잡지의 모델처럼 죽은 밀리센트의 죽음은, 샘에게 아무런 성적인 쾌감을 주지 못하고 공포에 떨게 만든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욕망의 충족이 아닌 당혹과 공포로 전환하면서 여성 착취적인 욕망 이미지를 비판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사소한 지점이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첼의 데뷔작 <아메리칸 슬립오버> 인용 역시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볼만 하다. 미첼은 이 지점에서 속임수를 쓰고 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의 배우들은 당시 미시건 주에 살던 평범한 학생이나 비전문 배우로,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아메리칸 슬립오버> 이후 별다른 배우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아메리칸 슬립오버>를 뒤틀린 방식으로 인용한다. 영화 속 슈팅 스타 멤버가 출연한 숏으로 재편집된 버전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일정 부분은 플롯 전개를 위한 개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샘이 섹스를 하기 위해 불러낸 슈팅 스타 배우의 “딱 한 편만 찍고 영화를 찍지 못했다”라는 대사를 언급하는 방식과 연계하면 흥미로워진다: 미첼은 인디 영화의 무명 캐스트로 떠서 할리우드 배우를 지망하게 된 여성들의 말로를 상상하고 있다. 자넷 게이노나 마릴린 먼로를 위시한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스타들이,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가 갑자기 스타가 된 사람들이라는 점, <언더 더 실버 레이크>가 미첼의 고향 미시간이 아닌, 할리우드에서 유명 배우들을 데려다 찍은 첫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아메리칸 슬립오버> 인용은 ‘재능을 소모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는 문제의식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공허함을 상징하는 장치로 배설물 이미지가 상당히 중요하게 등장한다. 첫 번째로는 스컹크의 악취액이 있다. 초반부에 샘은 이걸 뒤집어쓰고 구토를 하는데, 이 냄새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언급된다. 비체로써 샘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도구라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샘이 파티 입장용 과자를 먹고 구토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샘이 선정적인 대중문화를 과식하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지저스 앤 더 브라이즈 오브 드라큘라의 리더의 배변 장면이다. 샘이 리더를 추궁할 때 미첼은 악취미다 싶을 정도로 이 리더의 똥을 자세히 보여주는데, 리더가 작곡가에게서 곡을 받아 자신의 곡인 마냥 발표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위선적이고 착취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환멸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다. 이런 배설물 이미지를 마주하면서 샘은 텔레마틱 사회에서 형성된 대중문화의 담론과 대화를 통해 추리가 전혀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영화가 제시하는 배설물 이미지는 그 점에서 비체 그 자체이기도 하며 극단적으로 향락적이고 쾌락적인 포스트모던 사회/문화 네트워크에 도사리고 있는 환락과 허무를 체화한 잔여물이기도 하다. 마치 풍선 여자의 풍선처럼 크고 화려해 보이지만 바늘이나 담배로 금방 터질 수 있는 것이다.

배설물 이미지가 대중문화의 허상성과 비체로써 샘의 비루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맥거핀으로 끝나는 개 살해자 서브 플롯은 샘에 대한 좀 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우선 애니메이션을 통해 전달되는 개 살해자 도시전설은 ‘자신보다 주목받는 애견 스타에 대한 저주’와 ‘재능을 집어삼켜 먹어버리는 할리우드의 어둠’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개 살해자 정체가 밝혀지거나, 개를 살해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샘의 주관적 시점에서 전개되는 영화라지만, 이 언급 없음은 수상쩍다. 자연히 관객은 ‘개 살해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개 살해자의 정체는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 폭로 이후 등장하는 심문은 흥미롭다. 폭로가 끝나고 정신을 잃은 샘은 갑자기 묶여서 부랑자의 왕에게 심문을 받게 된다. 부랑자의 왕과 샘이 나누는 대화는 핵심 포인트 없이 어긋나있지만, 분명히 ‘개 살해자’와 연계되어 있으며 동시에 샘의 심리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샘이 설명하는 ‘오래전에 헤어졌던 여자친구’는 사라보다는 코요테에게 이끌려 갔던 파티장에서 재회한 전 샘의 여자 친구에게 어울리는 묘사다. 이어지는 ‘행복했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비스킷을 들고 다녔다’는 대사는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한 감정을 보여준다. 한편 샘은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사랑받지 못하는 할리우드의 비체로써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과 좌절감을 보여준다. ‘개 살해자’의 정체와 무관하게 샘은 명백히 ‘개 살해자’의 좌절감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다.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난 뒤, 샘은 집으로 돌아간다. 샘은 돌아가는 길에 옛 애인이 출연한 콘택트 렌즈 광고판을 다시 본다. 이 콘택트 렌즈 광고는 처음 등장했을 때 ‘이제 선명하게 볼 수 있어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데, 다시 등장했을 때 반쯤 지워진 광고 위에 ‘햄버거는 사랑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한편 내재 음악에서는 도로를 스쳐 지나가는 차량들에서 ‘Turning Teeth’를 비롯한 다양한 팝송들이 흘러 지나간다. 이미지와 사운드 모두 자극적인 과잉으로 넘쳐 있지만 주체인 샘은 자위를 하지도, 관음하지도 않고, 소비도 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과잉의 흐름을 지켜볼 따름이다. 사랑했던 여자는 노골적으로 상품 구매를 유도하는 햄버거 광고에 뒤덮이게 되고, 귓가에 들리는 음악들은 더 이상 달콤하게 들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샘은 어머니가 녹화한 자넷 게이노가 출연한 <제7의 천국>을 본다. 순수한 로맨스인 이 영화를 보는 샘의 눈빛은 즐겁지 않다. 이 두 시퀀스는 의미가 있던 것처럼 보였던 대중문화 네트워크가 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때 느끼는 감정을 잘 보여주는 시퀀스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충동적으로 소모하던 욕망이 중단된 순간, 욕망은 허무와 고독으로 변한다. 거기서 순수한 로맨스는 더 이뤄질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그런 허무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한다. <제7의 천국>을 보고 난 뒤 샘은 앞집에 살고 있는 중년 여성을 방문한다. 섹스를 하고 난 뒤, 샘은 중년 여성이 키우고 있던 앵무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샘은 묻는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요?” 중년 여성은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관심 없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이 대답에 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샘은 더 이상 앵무새가 지저귀는 소리에서 유의미한 코드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진실이라 여기는 것에 도달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이 시퀀스에서 샘은 자극적인 포르노-대중문화 이미지를 관음하거나 섹스 또는 자위를 하지 않고, 평범한 중년 여성과 섹스를 하고 거기서 만족을 얻는다. 더 이상 허무한 환상을 쫓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플루서는 “진리의 기준 역시 ‘객관성’이나 발견의 노력보다는, 세상을 보는 데 타인들과 합의를 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라고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샘은 무의미와 허무로 결론 난 모험을 마무리하고 세상의 진리에 대해 타인들과 합의를 보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 장면은, 샘이 베란다로 나와 자신의 집을 관음 하는 모습이다. 집주인과 경찰이 샘의 집에 들어오지만, 집 천장에 새겨진 호보 코드를 보고 당황한다. 이를 보고 있는 샘의 숏으로 영화는 끝난다.이 결말은 영화의 초반부하고 대치된다: 샘이 보는 건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남긴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당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첼이 코드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플루서의 이론을 경유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영화 후반부 샘이 밀리센트 세븐즈를 만났을 때, 밀리센트는 그림을 보며 감탄하고 있다. 밀리센트는 샘한테 이 그림은 <제7의 천국> 주연인 자넷 게이노가 그렸다고 말한다. 미첼은 게이노가 남긴 영화와 그림을 통해 재능 있었던 예술가의 모습을 흠모한다. 이 흠모는 씨네필적인 흠모기도하고, 현대 대중문화 사회에서 예술가 1인의 창의성과 낭만주의식 예술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탄식이기도 하다. 게이노의 그림은 대상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지, 점의 요소들을 차용해서 그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견 평면 코드적이지만, 히치콕이 그랬듯이 선형 코드의 인식에 기반해야 가능한 창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말에서 샘이 그림을 남기는 게 아니라, 이미 있던 호보 코드를 차용해 메시지를 남겼다는 점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미첼은 지금 시대가 텔레마틱 사회를 구성하는 기술적 형상으로 소통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샘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지금 이 현실에서는 게이노가 그랬던 것처럼 창의성에 기반한 낭만주의적인 창작 나아가 미스터리 만들기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그렇기에 샘은 호보 코드로 대표되는 점의 요소로 새로운 대화를 만든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플루서가 언급했던 “텍스트 시대 속 현상 뒤에서 ‘본질’이나 그럴듯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류’에서 빠져나온 새로운 인식단계”에서 “그림의 홍수 가운데에서 그림을 생산하면서도 단호히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샘은 현실을 변화하지 못했지만, 마지막에 미스터리의 주체가 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주체가 만든 미스터리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긴 채 영화는 끝난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대중문화의 허상을 폭로하면서, 그 허상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과잉 집착하는 소비 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영화다. 이런 비판에는 어느 정도 자조가 들어가 있는데, 영화가 보여주는 대중문화의 코드들은 19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영미권 대중문화는 반항이라는 정신을 ‘얼터너티브’라는 용어로 포장함과 동시에 그런 반항을 ‘선택의 주체성’을 통해 자신의 쿨함을 드러내고 즐겼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끊임없이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보였던 대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애시당초 대중문화라는 네트워크 자체가 허상이었고 선택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 순간 의미 있었던 레퍼런스는 무의미로 추락하고, 그 위에 세워졌던 그럴싸한 대중문화의 미스터리는 토사물 아래로 사라진다. 이런 과정에서 미첼은 한때 매혹되었던 ‘선택의 주체성’이 결국 산업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는 걸 씁쓸하게 인정한다.

<언더 더 실버 레이크>가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이런 허무와 고독이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대중문화 네트워크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분명 이 영화는 할리우드라는 공간의 디테일을 가지고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특수성에 머물지 않는다. 할리우드가 미국 밖 국가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밖 연예 종사자들이 할리우드를 선망하며 모여들고 다른 국가의 연예계가 할리우드 시스템을 모방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많은 나라의 영화 산업이 ~우드라는 접미사가 붙여지는 걸 상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자본과 상품이 세계로 유통되는 글로벌 시대에서만 가능한 풍경이다. 그렇기에 할리우드가 보여주는 뒤엉킨 대중문화 네트워크와 소비자/관객을 유혹하는 모습은 미국에 그치지 않고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미첼은 이런 공허한 대중문화의 네트워크를 오가며 ‘의미망’을 만들려는 비체의 시도를 비현실적인 촌극으로 격하하고 냉소한다. 이 냉소와 자조를 통해 미첼은 할리우드를 넘어서 세계적으로 도래한 미스터리의 매혹은 사라지고 공허한 대중문화 과소비로 넘쳐나는 묵시록적인 현실과 존재론적 공포 앞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질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