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울_미술노동자와 비엔날레

조한울

올해 4월 1일에 개막하여 치러진 제13회 광주비엔날레는 두 번의 전시 연기 등 우여곡절 속에 개최되었고, 기존에 비해 단축된 전시 기간 탓에 일찍 폐막하였다. 여느 행사와 마찬가지로, 전시 결과에 대한 평가나 전시 관련 소개는 여러 매체, 전문가, 개인 관람객을 통해 다양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광주비엔날레가 생산한 결과물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이 기회를 빌어, 비엔날레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그 과정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특히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행사를 주도적으로 치러온 광주비엔날레 재단과 구성원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전시팀의 코디네이터라는 생소한 직무로 광주비엔날레재단에 입사하여 제공받은 참고 자료에는, 지난 예술감독의 조언이 담긴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헌신적인 개개인의 노력과 별개로, 재단의 미숙한 운영과 문제해결 능력에 사례를 들어가며 뼈아픈 지적을 서슴지 않았던 전임 감독은, 아마 재단의 경영진과 미래의 구성원들에게 광주비엔날레가 지속적인 개혁과 진지한 성찰을 통해 개선되리라는 기대를 일부 가졌을 것이다. 2년이 지난 시점에, 여전히 같은 문제를 지적하게 된 입장에서 과연 재단은 그동안의 대내외적 평가와 조언에 어떤 식으로 대체하고 변화를 모색해왔는지 의문이다.

비엔날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그 규모와 기간, 대내외적 지원을 고려하여 볼 때, 비엔날레는 단순히 예술가와 큐레이터들의 전시로 보기는 어렵다. 매회 외부에서 초청되는 예술감독, 큐레이터의 주도로 참여 작가를 선정하여 전시를 구성하는 것이 중심이나, 짐작하는 것보다 많은 노동자와 노동 행위들이 존재한다.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출판, 공공프로그램, 홍보 이벤트 등에 프로듀서, 코디네이터, 에디터, 디자이너, 번역가, 프로그래머, 엔지니어, 학자, 기자와 같은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소통을 해가며, 하나의 큰 세계를 구현해 나간다. 물론 여기에는 지역사회, 예술기금과 문화재단, 갤러리, 컬렉터 등의 지원도 필수적이며, 초기 자료 조사부터, 전시공간 대여 등 전시와 작품 제작에 요구되는 많은 도전 과제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수많은 협업자와 협업기관들과의 관계도 전시의 성공 여부에 중요한 요소이다.

광주비엔날레 재단은 기본적으로 과거에는 정부, 현재는 지자체의 공공기금에 의지하여 운영되고 있으며, 수익을 목적으로 한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성격상 공공재단으로 불리고 있다. 공적 기금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다른 행사들이 그렇듯, 비엔날레재단도 고질적인 관료주의적 행정 시스템과 경직된 조직으로 인한 문제들을 떠안고 있다. 태생부터 공공기금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는 만큼, 독립적인 예산과 인사 관리가 불가능했으며, 특유의 조직문화와 행정도 공공기관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3회 동안 행사가 거듭되면서 축적되어온 문제들을 개선할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것도 사실이다. 내부 평가 시, 모든 요인에 대한 책임을 외부로 돌리거나, 그에 대한 해결책도, 외부에서만 찾으려 하는 것은 경영진과 인사관리자들의 무능함을 역설하는 것에 불과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번 전시 의도 아래 크게 달라지는 큐레토리얼팀 인력과 다양한 역할과 전문성을 가진 그들이 재단이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의 유연성이 필수적이나, 전시 기획과 실행과는 별도로 굴러가는 시대착오적인 행정 및 조직문화로 인한 갈등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13회 비엔날레의 개막과 함께, 인사위원회의 부당함을 고발하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노조, 재단, 광주시의 갈등과, 그 이해관계를 둘러싼 여러 이슈들이 하나씩 터져 나왔다.

내부적인 갈등과 여러 관계자들 사이에서 소통의 문제를 떠안고 있는 제13회 광주비엔날레는 팬데믹이라는 상황과 함께, 이중고를 겪으며 치뤄졌다. 2020년 상반기, 코비드-19가 세계적으로 심각하게 퍼지기 시작하자, 예술감독, 재단, 광주시는 논의 끝에 2020년 가을 전시를 2021년 봄으로 한 차례 연기하였다. 그리고, 올해 초 2월 26일 한 차례 연기에 따른 개막 일정에 맞추어 미리 한국에 입국한 일부 해외 작가들, 감독 및 프로듀서 등은 격리 기간 도중, 재연기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재단 내 직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기습 이사회가 열려 광주시와 일부 인사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재연기와 전시 기간 단축이 이루어진 사실은 여전히 아쉽다. 몇십억의 예산과 1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거치며 한차례 연기까지 감행한 대규모 프로젝트가, 단 몇 분 만에 일정이 바뀌게 된 결정은 그 불분명한 사유와 논리적인 반박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주요 결정들에 이해관계가 엇갈린 이유는, 그로 인해 양산될 불필요한 행정과 소모적인 논쟁, 추가 노동, 대체 프로그램에 따른 예산, 인력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업무를 해야 할 직원들은 대부분 프로젝트를 위해 단기로 투입된 인원들이 대다수였으며, 전문성이 검증된 외부인사 초청 등 전체적인 인력 관리에 소홀한 조직관리자들의 태도와 지난 20년 동안 미술과 큐레이팅이 거쳐온 변화에 무관심하고, 국제적인 미술행사를 치러왔음에도 그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경영진들과 시의 관계자들의 수동적인 업무 방식으로, 전시를 만들어간 모두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과 재단, 시 간의 소통 방식은 극히 일부를 통해서 불투명하게 이루어졌으며, 재단 운영에 결정권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이에 소극적이었다. 이 세 이해관계 간의 갈등은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공동의 목적 하에 봉합되기도 하였으나, 각각 본인의 고유 역할보다 기타 다른 문제 해결들에 소모적인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여, 비엔날레의 여러 프로그램들은 그 실행까지 매우 드라마틱하고 아슬아슬하게 전개되었다.

13회 비엔날레를 위해 재단에서는 2019년 “청년 비엔날레 프로젝트”라는 새로운 인력 충원 사업을 시행한다. 강도 높은 업무와 2년 단위 행사라는 점 때문에, 비엔날레가 종료되면 기존 인력들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이 추상적인 이름의 프로젝트는 미술계에서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에게 재단이 업무 경험과 교육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으며, 재단 내의 대부분의 인력들이 이 청년 비엔날레 사업으로 충원되었다. 임금과 그 사업 목적을 보자면, 각 부서 내 인턴이나 보조 역할을 하며, 팀 내 중심이 될 재단 내 기존 직원들과 실무를 해나가는 것이 기대되었으나, 실질적으로 비엔날레 전시 자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부서 인력들의 사업부 재배치와 고질적인 인력난 속에서, 감독 선정과 동시에 선발된 청년 인력들은 곧바로 당장 눈앞에 닥친 여러 재단의 핵심 업무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고, 청년 일자리의 원래 취지에 맞는 업무보다 과도한 업무량과 책임이 뒤따르게 되었다. 여러 목적으로 재단에 입사하였을 청년들은 그동안 누누이 제기된 치사량의 업무 시간과 밀도 높은 과업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지속적으로 교체되어온 부서 책임자나 재단의 인사관리자들은 이에 대해 모른 척 임하거나, 이를 배움의 기회로 삼으라는 언급만 되풀이하였다. “청년비엔날레” 프로젝트는 청년들을 위한 사업이라는 전제 하에 미술계에 새로이 수급된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른 어른들을 위한 합법적 구실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더욱이 이들 인력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더 큰 책임을 지어야 할 관리자 인사를 포함, 내부 인사는 변칙적이고 불안정하게 이루어진 동시에, 필수적인 전문가 초빙, 안정적 운영을 위한 정규 직원 채용에도 인색함을 드러냈고, 결국 매우 부족한 인력으로 행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매우 작은 규모의 조직을 가지다 보니, 인사권자에게 힘이 편중되고, 견제가 어려웠을 뿐더러, 각 부서 간의 소모적인 갈등도 커졌다. 예산,프로그램 구성 등 주요 이슈에 대한 결정이 매우 느리거나 자주 번복되었으며, 부서장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단기적 성과에만 집중하였다. 일관성 없는 업무 추진, 소통의 부재와 수직적인 의사 결정, 불필요한 문서 작업과 낙후된 행정 시스템은 불행히도 광주비엔날레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모든 노동자가 겪어야 하만 하는 관습이 되어버렸다.

비엔날레 재단 사무실 앞. 광주비엔날레재단 노조 제공. 2021

비엔날레의 운영 방향을 둘러싸고, 구성원들이 광주시와 재단 경영진에 변화를 촉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해외에서 초청한 예술 감독, 작가들을 소개하는 2년에 한 번 이루어지는 이벤트가 아닌, 비엔날레가 지역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와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하나, 제대로 시도된 적이 없다. 전임 감독과 큐레이터들은 이런 대규모의 전시를 만들어 가는데 그들을 현장에서 지원해야 할 인력들의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하다는 점을 매번 지적한다. 회차마다 되풀이되는 시행착오와 전시를 거치며 축적된 자료와 국내외 여러 기관, 전문가와의 신뢰관계는 프로젝트의 단발성과 담당인력의 단절로 인해 효율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비엔날레의 경쟁력도 점점 하락하고 있다. 비엔날레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한 인력들과 업무를 통해 경험을 쌓은 구성원들을 제대로 키워내지도, 대우하지도 못하는 현재 경영 시스템으로는 광주비엔날레가 과연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비엔날레가 노동자를 어떻게 대하는 가는 비엔날레의 외적 성과를 평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비엔날레가 가지는 성격과 목적에 대한 이해와 고려없이 행정편의 주의적인 평가 기준들이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초청국가 수, 참여작가 수, 방문자 수 등으로 비엔날레의 성공여부를 가늠하고 이러한 수치만을 중요시 여기는 점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공공기금으로 조성되는 행사인 만큼 그에 대한 평가와 감사도 필요하다고 하나, 외적인 규모보다도 질적인 성장이 더 많이 언급되도록 바뀌어야 한다. 재단 내부에서 이러한 평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체 방안을 언급하고 있는 만큼 조금만 더 내부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면 되는 부분이다.

광주비엔날레 노동조합의 부당한 인사와 부실한 경영에 대한 고발은 현재 미술계가 노동과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과 처한 현실을 대변한다. 미술계 안에서, 특히 미술기관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행위에 대한 여러 시선을 확인하는 한편, 그 반응과 대응방식에 따라 드러난 복잡한 이해관계와 지역주의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비엔날레 노조의 외침은 몇몇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역 언론에서만 회자되었고, 소수의 관심사라 그럴까, 그 이상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취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립하는 양측의 언어를 옮겨 놓았을 뿐, 문제 제기가 다양한 이슈와 연결되거나 근원으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비엔날레가 오랜 역사 동안 생산한 작가, 기획자, 지역의 유력 인사와 후원자 등 미술계 인사들 간의 관계는 어설픈 개입을 통해 이 사건을 해결하려 나섰다. 두 집단 간의 단순 대립, 혹은 일부 세력의 음모, 이기주의로 상황을 봉합하려 들거나, 무능함 혹은 기회주의적인 침묵을 드러내는 것이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 주변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태도는 광주비엔날레가 그동안 지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미술계는 태생적으로 끈끈하고 내밀한 관계들이 촘촘하게 얽히며 형성되었고,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극히 일부가 영향력과 자본을 독점하는 취약한 구조 안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행위들이 다수 존재한다. 또한 안에서 벌어지는 창작행위의 자유로움과 다양성에 비해 이를 드러내고 외부와 소통하는 플랫폼이 열악하기에, 의존적인 생태계 안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동을 언급하면 따라오는 정치적 문제와 경제 논리는 미술계도 자유롭지 못하다. 소수에게만 허락된 기회의 은덕과 배움의 즐거움이 청년들에게 주어졌으니, 노동의 질과 노동자가 마땅히 주장해야 할 업무 환경과 임금 개선은 외면하고, 마땅히 주어진 것에 순응하라는 일부 미술인들의 낡은 인식과 주장은, 사회정의, 평등, 인권을 외치며, 무대 밖 제3자들에 관심을 가져온 미술계의 실천과 진보에 대한 회의감을 가져온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과거 미술계가 몇몇 사람들에 의해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활기를 찾았다 하더라도, 2021년의 미술계 현장은 전혀 다르다.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미술 플랫폼은 그 안에 기여한 수많은 노동자의 참여로 이어져 왔다. 과거 예술에 대해 말할 때, 온전히 특정인의 뛰어나고 독창적인 개인기로 평가되던 작품활동도, 그 신화에서 벗어나 예술과 생산은 노동의 영역으로 왔고, 우리는 예술에 일조하는 모든 행위를 노동으로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작품 제작이 작가 개인의 행위가 아닌, 그 안에 기여한 수많은 노동자의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며, 이를 공유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예술가에게는 작품과 실천에 있어 윤리적인 태도가 요구되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와 인식의 변화는 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작품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는 예술기관에는 왜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가?

대외적으로 인권의 가치와 윤리경영을 강조하는 광주비엔날레재단은 광주정신과 518민주화운동이 비엔날레 설립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 영향력을 표방하고 있다. 2020년 518민주화운동20주년을 기념하여 얼마 전까지도 광주시와 함께 비엔날레재단은 518특별전시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차별하지 않고 공정성을 추구하며, 인권 침해에 단호히 대처하고 구성원 간 상호 존중과 투명 경영을 강조하는 선언문과 헌장은 광주시에도, 재단에도 공시되어 있다. 청년 노동 착취, 직장 내 괴롭힘, 인사 관리 부실, 구성원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 의사결정 구조, 비전문적이고 수동적인 상위기관의 감사, 현재 재단을 둘러싼 논란들은 과연 기관과 시에 책임자들이 비엔날레의 본래 취지와 비전에 맞게 조직을 운영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광주정신, 518민주화운동은 추상적 선언이나 일부 인사들이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수사적 표현에 그치는 것인지, 그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의 장이 현장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제대로 보아야 한다.

미술계 내에서 노동과 예술 활동에 관한 이슈는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었다. 예술가를 노동자로, 작업을 노동 행위로 볼 수 있는지부터 시작해, 예술기관과 예술가 사이의 논쟁으로 이어졌으며, 예술가 그룹을 둘러싼 경제 주체와 활동방식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빠르게 변화하고 앞서가는 예술계와 복잡해진 동시대 미술의 노동 환경에 기존의 사회적 문법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이에 종사하는 기관 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 예술가 그룹과 기관 사이에 끼어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보호와 이해가 필요하다. 기관에 소속되어 행하는 노동과 전시 및 제작 지원 역할에 대한 공정한 보상이 뒤따르고, 평등하고 투명한 업무 환경을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이다. 저임금, 무급 인턴, 자원 봉사 제도와 같이 관습화된 노동 착취를 버리고, 재단은 추가 업무에 대한 제대로 된 수당 지급과, 과도한 노동을 방지하기 위한 불필요한 문서 작업, 행정적 낭비를 과감하게 버리고, 사업에 따라 부서별로 제대로 세분화된 조직 개편에 나서길 기대해본다.

13회 비엔날레가 종료되고, 재단 내부 조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광주시는 새로운 대표이사 선정 방식을 공개하겠다고 하였다. 지역 및 국내에 예술전문 경영인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개인의 역량과 화려한 명성에만 기대어 기관장을 선발하려 하지는 않을지, 이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나의 개인적 망상에 그치길 기원한다. 비엔날레의 양축인 예술감독, 전시 기획자가 하는 고유 업무, 행사를 지원하는 재단 대표이사의 업무가 상충되지 않고 각자의 역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광주시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임할지 지켜볼 것이다. 노조에서는 광주시와 문체부가 더 적극적으로 내부 조사를 시행하고, 구성원들의 의견을 들어주길 원하며 여전히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양 측의 주장에 대해, 서로 엇갈린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재단이 비엔날레를 위해 해야 할 원래 역할과 지원 의무에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수년에 걸쳐 쌓인 비엔날레의 역사 속에 익명으로 남겨진 많은 이들의 노력을 단 몇몇의 과오와 바꿀 수 없다. 재단과 광주시는 비엔날레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묵인하고 이를 단순 해프닝으로 취급하지 않아야 한다. 이 문제는 간단히 노동자-경영자 간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비엔날레에 대한 몰이해, 공공기관이자 미술기관으로서의 정체성, 지역사회와의 소통 단절, 노동의 계급화와 수직적인 조직 체계의 부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으로, 특수한 영역 안에서의 노동 행위와 권리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