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ka Balsom_여성적 응시를 찾아서

글: Erika Balsom
번역: 이광호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 속 밋지(Midge), 출처

밋지(Midge)가 안경을 쓰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에서, 바바라 벨 게디스의 캐릭터는 지적이며, 그래서 남자 주인공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에게서 절대 로맨틱한 관심을 이끌 수 없는 여성이다. 그 역할은 회색 정장을 입은 스핑크스와 같은 매들린(킴 노박)에게 주어진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속 마릴린 먼로를 빌리자면, 고전 할리우드 영화 속의 남자들은 “안경 쓴 소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건 안경 렌즈가 여성의 외모에 미치는 해로운 효과와는 관련 없으며, 그들이 특정한 의미로 기능하기 위해 조직된 캐릭터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안경 쓴 여성들은 호기심 많고 성적 매력이 없다. 그녀는 시지각에 있어 활동적 주체로 향하면서, 남성적 응시의 대상이라는 전형적 장소에서 멀어진다. 안경은 그녀가 그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일종의 표식이다. 잠정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스코티를 돌보고 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밋지의 성실함은 스코티가 매들린과 관련되는 방식을 반영하며, 그에게 여성의 역할을 맡긴다. 스코티는 치료를 위해 코르셋을 착용하는데, 밋지는 그가 졸도할 때 붙잡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련하고 자애로운 밋지는 그의 관심을 끌기로 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자살한 매들린의 조상, 칼로타 발데스처럼 보이는 자화상을 그린다. <현기증>을 아무리 여러 번 보아도, 이 그림은 계속해서 내게 충격을 준다. 이건 스코티가 빼어난 매들린의 아름다움, 그리고 매들린과 죽은 여성과의 닮은 꼴을 멀리서 지켜보는 동안, 매들린이 거기 앉아 넋을 빼놓고 보고 있던 작품의 복사본이다. 그러나 잘못된 복사본이다. 그 머리는 몸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입술은 이상하게 히죽거리며 웅크려 있다. 그중 최악은 밋지가 안경을 끼고 있다는 건데, 이건 19세기의 의상과는 전혀 조화롭지 않은 모양새다.

한 여성이 갑작스레 자신의 미모를 드러내기 위해 안경을 벗는 행위란, 지루할 정도로 익숙한 일이다. 그녀는 전혀 달라 보이지 않지만, 성적 대상으로서 그녀의 지위는 즉각적이고 막대하게 변화한다. 이에 대한 고전적 예시는 <명탐정 필립 The Big Sleep>(1946)에서 서점 직원으로 나오는 도로시 말론이지만, 조금 최근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쉬즈 올 댓>(1999)에서 감상적인 “Kiss Me” 음악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레이첼 리 쿡의 사례가 있다. 이 관습적인 장면은 “당신의 적극적 응시를 포기하라, 그러면 매력적인 여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밋지의 자화상에서, 그녀의 안경은 반항하듯 시대착오적으로 놓여 있고, 응시자를 당황케 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을 둘러싼다. 이건 그림을 이용한 개그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건 스코티가 마들렌을 볼 때처럼 자신(밋지)을 보게 하기 위한 확실한 시도일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욕망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이 불안정한 캔버스는 시야의 범주에서 첫 번째 위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밋지의 불운한 노력을 증명한다. 이 그림을 보자마자 스코티는 돌연 집을 나가 버린다. 밋지는 그림을 덧칠해 망가뜨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친다. “바보, 바보, 바보!” 그러면 화면은 서서히 암전된다. 응시에 있어 주체와 대상이 동시에 되려는 여성의 노력은 역효과를 낳는 것이다. 고전 할리우드의 논리에 의하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다른 무엇보다 <현기증>은 외모의 중계(the relay of looks)를 젠더, 권력, 쾌락의 연극처럼 다루는 영화다. 달리 말하면 영화(cinema) 자신에 대한 영화(film)이며, 로라 멀비의 주목할 만한 1975년의 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에서 묘사된 대로, 이 영화는 시각의 회로를 벌거벗겨 배치한다. 잘 알려진 대로, 멀비는 고전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체계가 엄격한 가부장 논리를 따른다고 말한다. 여성 스타는 육체적 스펙터클로 “보임 당하는 것”을 함축하는 반면, 남자 주인공은 “시선의 운반자”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멀비는 이렇게 쓴다. “성적 불균형의 질서가 잡힌 세계에서, 응시의 쾌락은 능동적/남성과 수동적/여성으로 양분되었다. 지배적인 남성 응시는 여성 인물에 환상을 투사하고, 여성 인물은 그에 따라 양식화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들이 아닌 순간들은 제외된다. 멀비의 강한 비판이 지닌 힘은 그녀의 전략적인 일반화에 의지하지만, 시스템의 결함과 그에 대한 거부는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현기증>은 멀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교과서로, 그는 자신의 글에서 이 영화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밋지에 대해서는 어떤가? 밋지는 능동적/남성과 수동적/여성이라는 이분법에 훼방을 놓는다. 물론 가부장적 시각 체계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여 밋지가 거부되고 상처 받은 채 남겨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시도 자체가 무산되는 것은 아니다. 매리 앤 도앤의 말마따나, “서양의 문화는 여성이 무엇인지, 여성의 시선은 무엇인지에 대해 꽤나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이 보다(looks)’라고 할 때, 동사 ‘보다(looks)’는 자동사로 쓰인다(그녀는 아름다워 보인다).” 짧든 길든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not always)’이라는 사례는 수십년 동안 페미니스트 영화평론가와 이론가들에게 특별한 관심사였다. 영화사의 초창기부터, 눈물을 터뜨리는 40년대 멜로드라마까지, 페미니스트 아방가르드와 제 3세계 영화, 그리고 심지어 히치콕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보는 방법의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멀비가 묘사한 시스템이 “남성적 응시”라고 불린다면, 이 변종적이고 대안적인 사례들은 “여성적 응시”라고 불려야 하는 걸까?

나는 최근 들어 이 용어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종종 카메라의 앞뒤에서 여성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맞서려는 노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묻게 된다. 그러나 이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커다란 혼동이 있다. 때때로, 알리샤 말론의 책 『여성적 시선: 여성이 만든 필수 영화들』(2018)처럼 여성 감독들의 작업을 명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건 도앤의 책 『욕망에서 욕망으로: 1940년대의 여성 영화』(1987)처럼 그들이 영화에서 주체적 입장으로 상상되는지, 혹은 근작 『그녀가 영화관에서 찾은 것: 섹스, 욕망, 영화 위의 여성 작가』(2020)에서 6편 중 5편의 에세이가 1인칭 시점 표현에 기반하면서 작가 형성기의 기억에 고정된 것처럼, 여성 관객들이 실증적인 관객으로 인식되는지를 언급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된 방법이다. 솔직한 쇼 프로 진행자 질 솔로웨이는 2016년 TIFF 강연에서, 그들이 이 용어의 창시자로 알려지고 싶다고 말했다. (난 이게 농담이길 바란다.) 이 강연에서 솔로웨이는 일련의 정의를 제안했는데, 어떤 것은 직설적이었고(“여성의 응시는 여성 육체의 객관화를 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것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여성의 응시는 바닷가재의 뇌에서 찾을 수 있는 녹색 찌꺼기다”)

이 진흙탕 속에서, 올리비에에서 지난 2월 발간한 이리스 브리(Iris Brey)의 『여성적 응시: 스크린 위의 혁명』은 미디어의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마리 끌레르와 Les Inrockuptibles 같은 출판사의 비평가이자 연구자인 브리는 로만 폴란스키의 <나는 고발한다>(2019)가 세자르 영화제의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동시에 항의를 맞는 국가에서, 넓은 관객을 위해 여성적 응시를 정의하려는 열정적이고 이해가 쉬운 책을 썼다. (그래서 북미 지역과 영국에서, 이 영화는 아직까지 개봉되지 않았다.) “여성 신체의 경험을 스크린에서 느끼게 하는 응시, 다시 말해 여성적 응시가 존재한다”라고 단언하면서, 브리는 영화가 그런 범주에 속하기 위해 반드시 만족시켜야 할 여섯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다음의 여섯 조건은 에리카 발솜이 브리의 책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러티브의 측면에서 필수적인 것들.

– 주인공이 여성이라고 밝힌다.

– 이야기가 그녀의 시점에서 말해진다.

– 그녀의 이야기가 가부장 질서에 대한 질문을 불러 들인다.

형식의 측면에서 필수적인 것들.

– 관객이 느끼기에 여성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영화가 구성되어 있다.

– 육체가 성적으로 묘사될 때, 그건 반드시 의식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로라 멀비는 우리에게 남성적 응시가 가부장적 무의식의 문제임을 상기시킨다)

– 관객의 쾌락은 (관음증처럼 응시를 통해 인물을 대상화시키며 쾌락을 느끼는) 시각적 충동으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이렇게 정의되는 “여성적 응시”는 더 이상 관음증과 대상화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화적 패러다임을 묘사하고 있으며, 욕망의 주체로서 여성의 위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트랜스 여성의 경험을 포함하는) 여성의 경험을 재현하는데 전념한다. 백델 테스트처럼 영화들은 “통과”하거나 “탈락”할 수 있고, 백델 테스트와 달리 이 체크리스트는 형식을 고려한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브리는 무엇이 여성적 응시가 아닌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영리하게도 그녀는 여성 감독이 만든 모든 영화를 언급하는 방식을 피하는데, 왜냐하면 이 방식은 감독의 젠더를 영화의 지배적 시각 체계에서 분리시키는 일종의 보증서로 가정하는, 본질적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도 여성적 시선의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모든 여성들이 항상 여성적 시선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브리의 용어 사용은 여성 관객의 시선을 언급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 캐릭터의 관점과 동일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육체가 성적 매력의 대상으로 선택될지라도,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식이기 때문이다. <매직 마이크 XXL>(2015)에서 주유소의 조 맨가니엘로나 <유머레스크>(1946)에서 바이올린을 든 존 가필드를 떠올려 보자. 미안하다. 이건 남성적 응시다.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에서 멀비가 역사적으로 고전 할리우드가 대표하는 제작의 구체적 방식에 대해 서술한 것과 달리, 브리는 단호하게 규범적인 자세를 취하여, 지난 수 십 년을 배회하고 선과 악을 분리하는 양식을 훑어본다. 『여성적 응시』은 어떤 면에서는 절충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 말뭉치를 이용해 이러한 의미를 기입한다. 알리스 기-블라쉐의 <식탐 Madame a des envies>(1906)에서부터 <핸드메이드 테일> 같은 TV시리즈까지, 대부분의 사례를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에서 찾으면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다. 브리는 여성적 응시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 최근의 빈티지한 텍스트에 집중한다. 아이다 루피노, 바바라 로든, 그리고 아녜스 바르다가 예측 가능한 모양새를 보이는 반면, 샹탈 아케르망과 바바라 해머는 내러티브적 흡수가 전제되지 않은 외로운 대표자들이다. 브리는 폴 버호벤의 <엘르>(2016)의 열렬한 팬으로, 이 영화를 강간 문화에 대한 지지로 보는 사람들이 영화의 형식적인 선택을 고려하지 않다는 것을 마땅히 지적한다.

한 편의 영화가 찬사의 대상으로 계속해서 돌아온다. 비록 다른 방식으로 맺어질지라도, 이 영화는 <현기증>처럼 시선의 변동을 테마화하기 위해 그림을 사용하는 영화다.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이 레즈비언 역사극은 두 주인공을 감시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며칠간의 유토피아 안에서 설정되기 때문에, 필수적인 이성애(heterosexuality) 뿐만 아니라 계급적 차이의 무게를 들어주고 있다. 브리에게 있어, 이 영화는 동일한 것에 근거한 영화적 언어를 통해, 평등의 원칙에 기반하는 성적 관계를 묘사한다. 여기서 여성은 구체화된 몸 주체의 지위에 오른다. 카메라의 시선, 그리고 이를 연장해 관객의 시선은 통제와 지배의 흐름을 멈추고, 대신 친밀감, 상호주의, 존중감과 연관된다. 영화 속의 초상화는 브리가 추구하는 특징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의 내면적 삶에 접속하는 감정, 전통적인 형태의 성적 묘사와 조각난 신체라는 묘사를 피하는 시각적 스타일, 그리고 가부장 질서 안에서 소외되는 여성적 경험을 대변하려는 헌신. 이 영화는 브리의 지시문에 맞추어 맞춤 제작된 것만 같다.

문제는 『여성적 응시』가 곤란한 사례에 직면할 때 나타나는데, 여성이 겪는 폭력과 불평등이 복잡한 방식으로 재현되는 영화들이 그렇다. 프랑스어에서 육각틀(six-point framework)은 ‘grille de lecture’라고 불리는데, 이건 영화를 쥐어 짜내는 일련의 금속 막대들을 상상하게 하는 용어다. 구질구질함은 상처 없이 미끄러져 가지만, 브리는 킹 비더의 <스텔라 달라스>(1937)의 파괴적인 결말을 써 내려가고, 여성 영화의 모든 장르를 좇으며, 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도앤이 보여주었듯, 저명한 학자일지라도 그 남성적 응시에 검댕을 칠해버린다. <원더 우먼>(2017)의 “래디컬한 몸짓”에 동의를 표하고, 육체에 있어 불평등한 영화를 겁 없이 제공하는 끌레르 드니에게는 반대를 표한다. 드니의 영화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몇 없기 때문이다. 까트린느 브레야는 골치 아픈 사례인데, 부분적으로만 성취하기 때문이다.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결을 잃는 언니를 담은 <팻 걸>(2001)의 한 장면에서, 브리는 이렇게 쓴다. “이 영화는 복잡한 감정을 남긴다. 그 감정은 누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정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렇게 했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암시적 표현이다. 로베르 브레송의 <무쉐뜨>(1967)는 <왕좌의 게임>과 같은 더미에 던져진다. 왜냐하면 불쌍한 아이가 자신을 강간하는 남자의 등을 “동의를 표하는 듯 부드럽게” 팔로 감싸 안기 때문이다.

여성적 응시를 코드화하기로 한 브리의 결정에는 명료함의 미덕이 있다. 이 기준들은 독자가 그들 각자의 사례를 평가할 수 있는 진단에 도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브리는 이 도구들의 뭉툭함을 알고 있음에도, 하나의 맥락 안에서 언급되지 않을 것 같은 영화나 TV시리즈를 함께 끌고 오거나 설득력 있는 주장을 만들기 위해 그걸 사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페미니즘 접근을 확장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 그 전통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헌 중의 일부를 배제하고, 복잡한 사물에 대한 환원적 분석을 생성하게 된다면, 이 독자들에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못 한다. 종종 영화는 이념적인 일관성이 없고, 때로 진보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비평은 이런 내부적 모순과 애매모호함에 계속 얽매여 있어야지, 그것들을 축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여성적 응시』가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례들은 로라 멀비가 말한 “격정적 분리”의 실험적 카운터 시네마와는 거리가 멀다. 이 책에는 “양질의” 텔레비전 시리즈가 상당수 등장하고, 깐느 영화제와 박스 오피스 수치를 성공의 의미 있는 지표로 취한다. 브리는 상황이 진전된다면서 독자들을 안심시키기보다는 이렇게 질문한다. “제르만 뒬락의 <미소 짓는 마담 보데>(1923)과 마야 데렌의 <오후의 그물>(1943) 같은 초현실주의 영화를 누가 기억하는가?” 켈리 레이카트의 <어떤 여자들>(2016)과 데브라 그래닉의 <흔적 없는 삶>(2018)은 여성적 응시가 여백을 남기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아마도 가장 큰 희망을 주는 건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두 ‘슈퍼히로인superheroine’ 영화, <원더 우먼>(2017)과 <캡틴 마블>(2019)의 엄청난 상업적 성공”이다.

메인스트림 영역에서의 변화는 중요한 것이기에, 나는 이런 종류의 책에서 왜 이리도 작가들이 잘 알려진 사례에 이끌리는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단순히 취향을 넘어서는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이건 기존 소외화의 형태를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실험 영화와 다큐멘터리 시네마가 더할 나위 없이 여성들에게 친절했고, 남성적 응시와 관련된 관습에서 훨씬 더 벗어날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브리가 캐릭터와의 공감대를 강조한 것은 극영화를 표준으로 간주하는 그녀의 확고함을 보여준다. 반면, 이 책에 프랑스와 미국 바깥에서 작업하거나 유색 영화작가들의 이름은 극단적으로 부재한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반자본주의, 반인종주의, 반식민지적 약속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이 영화 문화와 페미니즘에 대해서 제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페기 아웨쉬, 리지 보든, 아시아 제바르, 발리 엑스포트, 사라 고메즈, 사피 파이, 사라 말도로르, 앨러니스 오봄사윈, 헬케 샌더, 칙 스트랜드, 트린 민하,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240페이지 안에서 많은 것을 해내지만, 브리가 인정하듯 마리-끌로드 트렐루(Marie-Claude Treilhou)의 <시몽 바베 혹은 미덕 Simone Barbès ou la vertu>(1980)이 더 잘 알려져야 한다고 쓸 때, 너무 많은 중요 작품들은 잊혀질 위험에 처한다. 비평은 그들을 옹호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이 책에 그런 게 더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그릴의 마지막 지점과 관련되는, 대중 문화에 대한 강조에서 출현한다. 여성적 응시의 영화에서 “관객의 쾌락은 (관음증처럼 응시를 통해 인물을 대상화시키며 쾌락을 느끼는) 시각적 충동으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건 크레이그 왓슨이 망원경으로 춤추고 있는 멜라니 그리피스를 바라보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침실의 표적>(1984) 속 시점 숏을, 아니면 남자의 호색한 시선처럼 바바라 스탠윅의 발에서 얼굴로 이어지는 <베이비 페이스>(1933)의 패닝 숏을 거부한다. 충분히 공평하지만, 좋든 싫든 관음증은 영화적 매력의 근거지다. 이건 브리가 해내고 있는 것보다, 카메라에 외치는 피비 월러-브리지의 “브레히트적” 주장보다, 훨씬 더 전위적이고 야생적으로 모험하지 않는다면 그리 쉽게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현상학적 방법론을 채택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이 책에서 이야기되는 대부분의 사례들이 영화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은밀한 변태들이고, 멀비가 말한대로 “‘보이지 않는 손님’의 만족, 쾌락, 특권”을 누리며 우리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적 세계를 들여다 본다. 그건 인정할만 하지만, 내가 관음증을 반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베트 고든의 <​버라이어티>(1983)가 그런 뉘앙스를 보여주듯, 이건 정신적 삶의 필수적인 영역이며, 페미니즘이 비어 있기에는 너무 중요한 투쟁의 영역이다. 포르노에 매혹되는 여성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여성적 응시』의 관음증과 대상화에 대한 노골적인 치료방법에서 몇 가지 사실이 빠졌음을 깨닫게 한다. 그것은 대상화 될지라도 거기에 매력과 쾌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응시의 장이란 항상 역동적인 비대칭의 상태이며, 여성들도 도시증(scopohiles)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적 응시』는 로라 멀비를 뒤따르는 사람들도 시도하지 않았던 여성적 응시를 체계적으로 정의하려는 최초의 저서로 주목할 만하다. 이건 이러한 노력이 진정한 위험을 드러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사초월적 패러다임으로서 여성적 응시를 정의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여성들이 특정한 근본적 특징을 공유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이 영화사를 가로지르며 어떤 형식적 기법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골치 아픈 아이디어에 달려 있을 것이다. 70년대 중반을 돌아보면서, 로라 멀비는 최근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지어 그때까지도, ‘영화의 페미니스트 언어’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브리에게 있어 근접성, 공감성, 촉각성, 대상화에 대한 혐오라는 건, 남성들에 의해서 배치될 때에도 어떻게든 여성으로 간주되는 “공통적 시각 언어”의 속성이다. 이걸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의심스러운 고정관념, 다시 말해 베트 고든과 같은 영화제작자들이 제기한 가정을 믿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솔로웨이가 TIFF 대담에서 넌센스 수준으로 다양한 정의들을 확산시키는 것의 일부인지 궁금하다. 궁극적으로, 자기가 ‘개념의 창안자’인 척 하는 이 사람은 “아직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성적 응시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대신 다른 응시에 대한 요구를 지속하는 것은 어떨까? 런던에 본사를 둔 페미니스트 영화 저널의 이름을 빌리는 응시는 어떨까? 그리고 또 다른 것, 또 다른 것은? 그것은 발명과 차이의 교차공간을 열어 놓을 것이다. 이 방법은 역사적 특수성에 민감한 채로 남을 것이며, 남성다움에 대한 이항대립에 구속되지 않는 다원성을 받아들일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자질을 여성적인 것으로 지정하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지정하는 본질주의, 규칙 기반의 접근법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성적 응시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열정의 증상이다. 이것은 점차 만들어지고 있는 개선에 대한,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관례들에 대한, 탐구되어야 할 풍부한 역사에 대한, 그리고 매듭지어질 조각들에 대한 집단적인 흥분이다. 이것은 호기심과 논쟁의 문제이며, 밋지(Midge)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다른 운명을 기원하는 일이다. 이런 감정들이 유지되고 있다. 용어 자체에 대해서라면, 나는 그다지 확신이 없다.


원문: https://cinema-scope.com/features/in-search-of-the-female-gaze/